밝은 밤
최은영 지음 / 문학동네 / 2021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비로소 연대를 통해 밝아지는 밤.”

소설의 제목인 ‘밝은 밤’이 참 아이러니하다고 생각했다. 엄밀히 분류하자면 인물들의 이야기는 밝음과 거리가 멀다. 파란만장한 시대의 흐름 속에서 교차하는 개인의 기쁨과 슬픔, 희망과 절망은 마냥 환하게 추억하기엔 너무나도 그 농도가 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기꺼이 나눔으로써 서로의 위로가 된다. (바로 이 점에서 대화의 형식으로 흘러간 이야기가 더욱이나 즐거웠다.) 인물들은 서로 소통한다. 그리고 소통을 통해 마침내 연대한다. 그 힘은 이야기 속에서만 끝나는 것이 아닌 소설 밖의 독자들에게 까지 자연히 이어진다. 우리 역시 그들의 이야기를 함께 공유했으니까. 속수무책으로 눈물을 흘리며 읽어 나간 후 책을 덮었을 때, 나도 모르는 새에 큰 위로와 환기를 지나왔음을 알게 되었다. 충분히 슬픔을 만끽한 뒤 기꺼이 흘려보낸 사람만이 마주할 수 있는 ‘밝은 밤’을 덕분에 경험할 수 있어 기쁘다.

그녀의 어머니는 그녀에게 어떤 일이 일어나든 빠르게 포기하고 체념하는 게 사는 법이라고 가르쳤다. 삶에 무언가를 기대한다고?

그건 사치이기 전에 위험한 일이었다. 어떻게 내게 이럴 수 있어?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나는 거지? 같은 의문의 싹을 다 뽑아버리라는 말이었다. 아무 잘못도 없는 나를 왜 떄리는 거지? 왜 남편은 치료도 받아보기 전에 그렇게 빨리 떠난 거지? 어떻게 나와 함께 울어줄 사람이 하나도 없는 거지? 그런 질문을 하는 대신에 이렇게 생각하라고 했다.

오늘 지나가는 길에 맞았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다.

내 남편이 이유도 모르는 병으로 죽었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다.

나는 혼자 슬퍼했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다.

사람들은 나를 부동 탄 사람이라고 한다. 그래, 사람들은 그렇게 말한다.

그런 식으로, 일어난 일을 평가하지 말고 저항하지 말고 그대로 받아들이라고 했다. 그게 사는 법이라고.

밝은 밤,최은영 (55p.)

지연의 어머니가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마음을 깊이 공감한다. 그리고 나 역시 어느 정도 이상의 체념 혹은 받아들임은 필수란 것을 체감한다. 그렇다고 포기로 이어지는 냉소와는 다르다. 나를 무력하게 만드는 것들로부터 자유로워지기 위함이기 때문에. 잘 살아 보려고, 더 나은 마음으로 내일을 마주하려는 노력의 발버둥이다. 따라서 일어난 ‘사실’과 ‘감정’을 분리하는 것에 집중한다. 어떤 사건이, 상황이 불가항력으로 일어난 것에 대해서 감정으로까지 끌고 들어가지 않으려 노력하는 중이다. 그렇게라도 부단히 살아낼 것이다. 앞으로의 노력은 지연의 어머니 말을 빌려 조금이나마 쉬워질 것 같다.

그래, 그런 일이 있었다고.


🔖 #책속의한줄

(220p.) 사랑은 할머니를 울게 했다. 모욕이나 상처조차도 건드리지 못하는 마음을 건드렸다.

(259p.) 사진관에서 나온 그들은 거북이 해변으로 걸어갔다. 더운 날이었지만 바다에는 시원한 바람이 불었다. 새비 아주머니는 모래사장에 풀썩 주저앉아서 바다를 바라보다가 고무신과 버선을 벗고 치맛자락을 무릎까지 올린 뒤에 바다를 향해 걸어갔다. 큰 파도가 밀려와 종아리까지 물이 닿자 새비 아주머니가 새된 소리를 지르며 큰소리로 웃었다. 새비 아주머니는 조금 더 깊은 곳까지 걸어갔다 파도가 들이치면 아이처럼 소리를 지르면서 모래사장으로 달려나왔다. 그 모습을 지켜보는 할머니와 증조모와 엄마에게 손을 흔들면서 오래도록 바다에서 놀았다.

'새비아주머니는 그날 바다에서 놀았다.' 할머니는 그날의 일을 한 문장으로 기억했다. 새비 아주머니도 바다도, 놀다, 라는 말도 그날에 다 들어 있었다. 모두 할머니가 좋아하는 말이었다. 그래서 할머니는 그 날을 잊을 수 없다.

(299p.) 내 어깨에 기댄 여자는 편안한 얼굴로 잠을 자고 있었다. 청명한 오후였다. 어깨에 느껴지는 무게감이 좋았다. 나는 내게 어깨를 빌려준 이름 모를 여자들을 떠올렸다. 그녀들에게도 어깨를 빌려준 여자들이 있었을 거라고 생각했다. 얼마나 피곤했으면 이렇게 정신을 놓고 자나, 조금이라도 편하게 자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마음. 별것 아닌 듯한 그 마음이 떄로는 사람을 살게 한다는 생각을 했다. 어깨에 기대는 사람도, 어깨를 빌려주는 사람도. 구름 사이로 햇빛이 한 자락 내려오듯이 내게도 다시 그런 마음이 내려왔다는 생각을 했고 안도했다.

(335p.) 김희자 박사에게 갈 수 있는 한 가장 멀리 가라고 했던 새비 아주머니의 말을 나는 종종 생각했다. 그 말은 단순히 물리적 거리만을 뜻하지 않았을 것이다. 자신의 딸이 다른 차원으로 가기를 바랐던 마음이 있겠지. 본인이 느꼈던 현실의 중력이 더는 작용하지 않는 곳에서 자신의 딸이 더 가벼워지고 더 자유로워지기를 바랐던 새비 아주머니의 마음을 나는 오래 생각했다.


나를 울리는 단 한가지

타인의 즐거움을 진심으로 응원하는 마음

기꺼이 내어주는 어깨

온전히 가볍고 자유롭기 위해 다른 차원으로 가기를 바라는 마음까지

결국 모두 사랑으로 귀결된다. 무수한 사랑의 정의가 소설 속에 가득하다. 특히나 함께 2022를 살아내고 있는 여자들을 향한 그 애틋함은 뭐라 말로 표현하기 어렵다. 나뿐만이 아니라 많은 여자들이 비슷한 감상을 가지고 있을 것이라 추측한다.

우리가 서로의 안전을 걱정한다는 것을, 진심을 다해 안녕을 기원하고 있음을, 더 나아가 누구보다 용감하게 가장 높은 것을 쟁취해내기를 소망함을.

당신이 곧 내가 되고 내가 당신이 되는 세상을 살고 있다는 마음으로 모든 ‘우리’들을 응원한다.

더불어 이 마음이 방구석에서 외치는 작은 응원의 소리로만 그치지 않기를,

서로를 향한 애틋한 마음을 기반으로 우리는 얼마나 더 멀리 갈 수 있을까? 기대가 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