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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역사
수키 김 지음, 이은선 옮김 / 황금가지 / 2005년 9월
평점 :
품절
종종 뛰어난 문학작품들은 선택과 경계의 기로에서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는 인물들을 창조해 냅니다. 《삼국지》의 그 많은 배신자들에서부터 《레 미제라블》의 자베르 경감을 지나 수없이 많은 작품 속에서 경계를 아슬아슬하게 지나치고, 때론 강렬하게 대비하기도 합니다. 주인공 내면의 모습이 될 수도 있고, 외면의 상황이 그런 경계를 만들어 내고, 그것을 우리들은 '갈등'이라는 이름으로 부르게 되지요.
이 작품 《통역사》도 그 경계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한국인과 미국인이라는 정체성의 경계, 가족과 개인이라는 경계, 백인과 유색인이라는 경계, 법정에서 피고와 원고의 경계... 이 모든 것을 조금은 차가운 시선으로 바라봅니다.
주인공의 차갑고 냉정한 시선은 굉장히 효과적인 느낌이 듭니다. 우리는 가끔씩 친숙한 말을 하다가도 그 친숙한 말들이 어느 순간 어색해서 그 말을 입에서 되새기는 순간이 있습니다. 이 책을 읽으면서 화자가 한국과 미국, 그리고 미국 속에 사는 한국인들의 이야기를 하는 모습을 신선하게 느낀 건 이런 '어색한 순간'을 잘 표현했기 때문일 거에요. 마치 평면도로만 집의 도면을 보다가, 다 지어진 집을 밖에서 보는 그런 느낌이죠.
주인공 수지는 경계 속에서 방관자일 수 밖에 없습니다. (작품을 읽다보면 수지의 언니인 그레이스가 인물이나 이야기에서 더 강한 느낌을 줍니다.)이 작품은 여성의 내면을 섬세하게 따라가는 90년대 한국 여성작가들의 작품들같고, 인종과 사회의 모습을 이야기하는 고발소설같기도 하고, 어찌보면 쓸쓸한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이 하루끼의 소설같기도 합니다. 게다가 여러 이야기들이 얽혀있고, 뒤로 갈수록 추리소설 특유의 서스펜스도 강해집니다. 한없이 인간의 내면을 파고드는 모습과 법정의 이야기를 제대로 엮어내는 것을 보면서 '이 작품이 정말 데뷔작일까?'라는 의문이 들 정도였으니까요.
한마디로 풍성한 작품입니다. 미국 평단의 찬사를 떠올리지 않는다 하더라도, 이 정도 작품을 만난 것은 행운이란 생각이 듭니다. 보통의 작품은 원서를 이해하실 정도의 수준이라면 원서가 낫다는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이 작품은 그럴 필요가 없을 것 같습니다. 개인적으로 번역의 질 또한 정말 훌륭하다고 생각한 얼마 안 되는 작품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