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마 - 개정증보판
안정효 지음 / 나남출판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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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역가 안정효의 소설 중 영화로 만들어진 소설은 <하얀전쟁 White Badge>, <헐리우드 키드의 생애>, 그리고 이 작품 <은마는 오지 않는다 Silver Stallion>입니다. 세 작품 모두 작가의 자전적인 소설이라 할 수 있습니다. 작가 안정효는 미군들이 트럭에서 던져주는 초콜릿을 받아먹으면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헐리우드(Hollywood)를 성림(聖林, Holy wood)라고 생각하면서 영화관에서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고, 한기주처럼 월남전에 참전하고 출판사 직원으로 지냈던 사람입니다. 자연히 이 작품 <은마는 오지 않는다> 속에도 작가의 경험이 묻어날 수 밖에 없을 것입니다. 


1950년 인천 상륙작전으로 서울이 '해방'되고 유엔군과 국군이 북진을 하는 동안 강원도 금산의 만식이네 동네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생각하게 됩니다. 그들은 옛날 전설처럼 백마를 타고 마을을 지켜줄 장군이 '매가도(맥아더)' 장군이고, 장군이 이끄는 병사들은 마을에 평화를 가져다 줄 것이라고 말이죠. 하지만 그들의 순진한 믿음은 마을 사람들을 비웃던 미군들의 웃음 속에서 조금씩 깨져나가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만식의 어머니인 언례가 두 명의 미군에게 강간을 당하고, 마을 옆에 텍사스 촌을 만들고 마을을 타락시키면서 완전히 그 믿음들을 부숴버립니다. 


이 작품은 세 개의 이야기가 얽혀 있습니다. 첫번째는 언례가 미군에게 강간을 당한 이후 마을 사람들의 조롱과 편견때문에 '양공주'가 되어 가는 과정과, 그런 어머니의 모습을 보면서 안타까워하고 아이들 사이에서 따돌림과 이용당하는 모습을 다룬 만식의 이야기와, 마을 사람들을 대신하고 언례를 위해 무언가를 해야하지만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황노인의 이야기가 그것입니다. 이 모든 이야기들은 지극히 사실적입니다. 전쟁의 참혹함이라는 주제를 상당히 미시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등장인물들의 내면 속을 파고들어 이야기를 전개시켜나갑니다. 레마르크의 <서부전선 이상없다>에서처럼 전쟁의 상처에 슬퍼하고 괴로워하는 모습만을 집중적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전쟁으로 인해 촉발되는 만식이네 마을 사람들의 집단적인 악한 행동과 사고에 촛점을 맞추었습니다. 


작가는 만식(Mansik)이라는 주인공의 이름을 Sick + Man...= Mansik 괴로워하는 인간을 연상시키도록 만들었다고 합니다. 어린 아이의 집단이 어른의 그것보다 훨씬 잔인하고 악할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그 속에서 괴로워하는 만식의 모습을 더욱 더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했습니다. 이는 윌리엄 골딩의 <파리대왕>과 상당히 비슷한 설정입니다. 하지만 가상의 상황을 설정한 <파리대왕>과 다르게 이 작품은 역사적 상황을 바탕으로 훨씬 개연성이 높은 이야기이기 때문에 더욱 잔혹하게 느껴집니다. 


이야기가 전개되는 동안 보고 싶지 않다고 느껴질 만큼 잔혹한 상황이 펼쳐집니다. 그리고 여기엔 감동적인 '타협'이나 '화해' 또한 존재하지 않습니다. 이 나라의 역사가 그래왔듯이 말이죠. 몇년 전에 읽었을 때는 이런 결말이 조금 아쉽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요즘은 이런 이야기가 더욱 더 진실을 포함하고 있다는 생각을 합니다. 인간이란 전적으로 선하지도, 전적으로 악하지도 않고 자기보다 약한 상대 앞에서 쉽게 악해질 수 있는 존재이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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