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명을 찾아서 - 상 - 京城, 쇼우와 62년 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13
복거일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8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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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복거일이라는 이름은 21세기를 살아가는 대중들에게 그닥 친근한 이름은 아닙니다. 사람들의 이름에 오르내릴만큼의 엄청난 거장도 아니고, 기억하는 사람들에게도 그저 '영어공용화론'을 외치는 우파 논객으로 대중들의 머릿속에 각인이 되어있는 경우가 많습니다. 그 외의 '소설가'로서 그의 면모를 기억하는 사람(저같은 사람들이죠)은 데뷔작인 이 작품 [비명을 찾아서 - 경성 쇼우와 62년]이 작가에 대한 호불호와는 상관없이 뛰어난 작품이라는 점을 이야기하고 싶을 겁니다. 


2. 이 작품은 역사가 현재와 다르게 흘러간다는 상상에 기반하여 1980년대 현재까지도 조선이 일제의 식민지로 남아있다는 가정에서 시작하는 소설입니다. 흔히들 '대체역사소설'이라고도 합니다.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 의사에게 저격되지 않고 그의 의도대로 조선을 식민지화한 후의 조선의 모습을 보여줍니다. 그 속에서 일본의 식민지에 사는 지배당한 민족인 기노시다 히데요라는 주인공이 겪게되는 사상적/역사적 관점의 현실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3. 우선 이 책의 단점을 이야기하자면 '낡았습니다' 1980년대 초반까지 직장생활을 하던 작가가 그리는 사회의 모습이나 인물들 간의 태도, 역학관계, 대화의 수준, 기타등등의 많은 부분들에서 30년이라는 세월이 느껴집니다. 사무실에서 '줄담배'를 피우고 재떨이를 치우는 여직원의 모습부터, 여직원에게 거는 농담의 수준이나, 위계질서가 훨씬 견고한 관료적인 사무실의 분위기까지... 현재를 사는 우리 독자들의 눈에는 좀 거슬릴 만한 내용들이 많습니다. 내용에서도 치정관계와 같은 부분들에서는 '내가 하면 로맨스, 남이 하면 불륜'의 태도가 보이기도 하고요. 문체나 외래어를 표시하는 방식에서도 낡은 느낌이 듭니다.


4. 하지만, 제가 지적한 단점들은 모두 본질이 아닌 지엽적인 부분들입니다. 이런 작가의 낡은 태도들이 이 작품이 진정으로 이야기하고자 하는 본질을 가리진 못합니다. 이 작품은 자기 정신의 뿌리에 대한 여정을 통해 기노시다 히데요에서 박영세라는 이름을 찾아가는 이야기입니다. 이 작품의 기본 골격은 일제시대가 연장된다는 역사적 사실이지만, 세세한 부분으로 들어가보면 주인공을 감싸고 있는 현실이 굉장히 정확하게 표현되어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글을 좋아하고 시를 좋아하는 주인공이 '반도인'이기 때문에 사회생활에서 느껴지는 차별받고, 실제 회사에서 업무처리되는 과정들과 대화의 논리성은 미생보다 훨씬 그럴듯 합니다. 작가가 서울대 상학과를 졸업하고 실제 회사생활을 한 사람인 것이 이 정밀한 묘사에 도움이 되었을 겁니다. 


5. 이런 방식의 이야기는 낭만주의 시대의 소설들처럼 무언가 대단한 계기가 사건때문에 인간이 변화하는 것이 아닌...(마치 부모나 연인의 원수를 갚기 위해 각성하는 주인공같은...) 생활 속에서 커다란 변화가 될 만한 사건의 단초가 제공된다는 것이죠. 10대나 20대에 보았다면 너무 밋밋하드는 생각이 들 수도 있겠지만, 40대 독자로서 제가 느끼는 점은, 이 작품이 훨씬 더 개연성이 있기에 공감이 갔습니다. 


6. 작품 중후반에 경찰에 잡혀 고문과 심문을 받으면서 주인공이 조선인 출신 일제 전향자와 1대1로 대화하는 장면은 이 작품의 백미입니다. 자신이 지니고 있던 신념이 짓밟히고 정신적으로 항복하게 되는 모습을 그려가면서("불행한 뿌로메떼우스"로 표현됩니다), 일본 제국주의가 어떻게 지식인들을 짓밟았는가에 대한 작가의 신념이 담긴 답을 보여줍니다.


7. 이 작품은 한 장(Chapter)를 소위 '경구'들로 시작하고 그 '경구'이 함축하고 있던 내용들이 그 장에서 표현하고자 하는 내용과 절묘하게 맞아들어갑니다. 보통은 이런 경구들이 사족이 될 수 있는데 이 책을 읽어나갈 때에는 결코 사족으로 느껴지지 않습니다. 작품의 완성도와 연결이 될 만한 사항입니다.


8. 저는 복거일이라는 작가를 [쓸모없는 지식들], [소수를 위한 변명]같은 에세이로 먼저 접했습니다. 신문에도 기고를 많이 했던 작가이기 때문에 에세이또한 나쁘지 않게 읽었습니다. 특이할 만한 사항은 작가가 SF에 대해 굉장한 애정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었어요. 정식 문학 전공을 통해 등단한 작가가 아니기에 현재 문단에서도 좀 아웃사이더의 느낌이 들긴 하지만, 저같은 일반 독자들에게는 꽤 신선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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