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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영의 알제리 기행 - '바람 구두'를 신은 당신, 카뮈와 지드의 나라로 가자!
김화영 지음 / 마음산책 / 2006년 5월
평점 :
품절
삶에 끊임없이 낯설음을 느끼는 사람들은 여행자가 되거나, 아니면 예술가가 된다. 하지만 인생은 불공평한 것인지도 모른다. 때로 예술가의 감수성을 지닌 여행자도 있으니까. 아니 여행자의 감수성을 지닌 예술가라고 해야 하나. 어느 쪽이건, 이런 사람들은 나의 영원한 질투대상이다. 어쩌면 모든 예술가는 여행자로 타고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불행히도 그 역은 성립되지 않지만)
<김화영의 알제리 기행>에 나오는 앙드레 지드와 알베르 까뮈도 그런 사람들이다. 노르망디의 부잣집 아들이었다는 지드에 비해(지드가 북아프리카를 좋아했다는 것도 이번에 첨 알았다) 까뮈는 알제리에서 태어나서 자랐기 때문에 단순히 여행자 입장이라고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하여간 이 책에서 내가 얻은 예기치 않았던 최대의 수확은 지드와 까뮈의 글이었다. (김화영 교수님, 이분이 뛰어난 번역가라고 생각하는데, 번역문체 자체가 좋았다) 이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 글을 쓸 수 있는 걸까. 난 지드는 잘 모르지만 까뮈의 <페스트>를 상당히 좋아했었기 때문에 감회도 새로웠다.
이 책 자체로 말하자면 너무 기대를 해서인지 2프로 부족한 느낌이었다. 우아하고 단정한 느낌이 책 장정 자체의 세련된 느낌과 맞물려 기분좋게 독파한 책이지만, 약간은 감질이 났다. 저자가 분문에서 "다음번에는 글을 쓰는 숙제를 안고오지 말아야겠다"라고 쓰고 있듯이, 신문에 연재했던 글이라서인가..좀 너무 단정하게만 쓰려고 한 느낌이다. 어쩌면 김화영 교수님도 밝히고 있듯이 알제리 여행의 동기가 된 까뮈와 지드의 문학이라는 필터로만 너무 이곳을 보려고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다해도, 까뮈가 쓴 것과 실제의 알제리는 어떻게 달랐는지, 아니면 어떻게 같았는지, 그런 생생한 느낌을 좀더 많이 써주셨으면 좋았을걸 싶었다.
하지만 책의 절반 정도를 넘어가자 앞부분보다는 재미있어졌다. 여행이 진행될수록 이분이 좀 더 자유로운 글쓰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 도시를 떠나 사하라 쪽으로 내려갈수록 흥미로와졌다. 까뮈의 <페스트>의 배경이 되었던 오랑에 대한 묘사도 상당히 관심을 끌었고. 어느날 호텔에 돌아와 화가 나서 쓴 메모, 부분에서는 큭큭 웃었다. (쓰레기나 먼저 치우라고 했던 부분) 이런 생생한 묘사가 오히려 조금은 더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도 초점이 확실하고 공연한 감상이나 뜬금없는 인생철학 같은 게 없는 여행기라서 좋았다.(나는 자기가 본 걸 묘사하는 것보다 인생을 여행에 비유하면서 인생철학을 설파하는데 더 집중하는 그런 류의 여행기를 너무 싫어한다) 무엇보다 요즘 많이 나오는 그저그런 여행기에 비하면 훨씬 고급스러운 책이다. 번역하신 글의 문체처럼 우아하고 차분한 문체도 좋았다.
이 책만으로 판단하기는 많이 부족하겠지만, 글과 사진으로 미루어볼 때 알제리는 (내가 가본 유일한 북아프리카 나라인 모로코에 비하면) 뭐든지 큼지막한 나라인 것 같다. 수도 알제의 풍경은 별로 정이 안가고 내가 로마에 큰 관심이 없어서인지 북부의 로마유적지가 나올 때는 그저 그랬는데, 오히려 사하라 근처의 마을들, 오아시스의 풍경들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비스크라, 엘 칸타라, 셰트마, 드로, 우마크, 셰가.. 이런 이름들을 기억해야겠다.
아트망이여 나는 너를 생각한다. 비스크라여, 나는 너의 종려나무들을 생각한다. - 투구르트여, 너의 모래를..오아시스여, 거기에는 아직도 사막의 메마른 바람이 너의 수선스러운 종려나무 가지들을 흔들고 있는가? 더위에 익어서 터진 석류들이여, 너희들은 새콤한 씨를 땅 위에 떨어뜨리고 있는가? 셰트마여, 너의 시원하게 흐르는 물과 곁에 가 서면 땀이 나던 너의 더운 샘물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 황금의 다리, 엘 칸타라여, 나는 기억한다. 너의 낭랑한 아침들이며 황홀한 저녁들을. 우마크여, 나는 너의 황량한 모습을 꿈에 그린다.
- 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
사무실들과 집들에서 아직 어둑어둑한 거리거리로 떠들썩한 군중들이 쏟아져 나와 바다 앞의 대로들에까지 흘러가고 그곳에서 밤이 다가옴에 따라 하늘의 빛과 해안의 등대들과 도시의 불빛들이 차츰차츰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다 같은 박동 속에 한 덩어리가 되어감에 따라, 마침내 입을 다물고 잠잠해지는 이런 저녁시간이면 나는 그 고장에 가 있고 싶어지는 것이다. 모두가 다 같이 이처럼 물가에서 마음을 가다듬고 숙연해지고 수천 가지의 고독이 군중들로부터 분출한다. 그때에 바로 아프리카의 저 거대한 밤들이, 당당한 유적이, 고독한 여행자를 기다리는 절망적 열광이..시작되는 것이다.
- 알베르 까뮈, <결혼, 여름>
p.s. 다른 것을 다 떠나서 무엇보다 이 책은 국내에서 찾아보기 힘든 알제리 여행기이다! 사실 그래서 너무나 반가왔다. 북아프리카는 나에게도 로망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모로코에 여행갈 때 우리말로 된 모로코에 대한 책을 구하기 어려워서 결국 론리 플래닛과 <큐리어스> 한 권만 들고갔었다. 다음에는 튀니지에도 가려고 한다. 알제리에도 가보고 싶지만 지금은 우선순위에서는 밀리고 있는 상황이다. 무엇보다 오랑과 같은 도시에 직접 가보면 예술가의 상상력에 훨씬 못미치는 현실에 실망하지 않을까. 길가의 무뚝뚝한 청동 조각상 하나에도 놀라운 통찰력을 보이는 카뮈 같은 작가의 가이드(그리고 그 구절을 뽑아서 소개해준 감화영 교수님의 안목)이 아니라면 실제로는 눈이 있어도 아무 것도 못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하라엔 꼭 가보고 싶다. <알제리 기행>에 실린 사막의 풍경이 아른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