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량의 상자 - 상 백귀야행(교고쿠도) 시리즈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 손안의책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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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약간의 스포일러 있음)

'우부메의 여름'에 감명받고 곧바로 주문했다!
제목부터 멋지다. '망량의 상자'...

전반에는 '상자'라는 은유가 너무 번번히 등장해서, 조금 재미가 없었고,
후반부에는 출생의 비밀이라던가..하는 살짝 신파조의 이야기가 나오는게 좀 그랬지만,
전체적으로는 우부메의 여름보다 오히려 더 매력적이고 탄탄했다.
특히 하권에 접어들어서는 정신없이 읽어치웠다. 
우부메..에서도 보여줬던, 으스스한 아우라를 깔아놓는 솜씨는 역시 최고였고, 
복잡하게 얽힌 여러 사건들의 가닥들을 결국 깔끔하게 정리하는 능력도 보통이 아니다. 
우부메..가 작은 장소에 집중된 스토리였고 전체적으로 정적인 느낌을 주었다면
망량..은 좀더 스케일이 크고 활동적이다.

우부메에도 나왔던 그 주인공들이 또 나오는데, 이들의 활약상은 다소 귀엽기도 하고,
으스스한 사건의 암울함을 조금 누그러뜨리는 효과를 가져오고 있지만
그래도 뭐니뭐니해도 이 작가의 가장 뛰어난 점은
시대와 인간의 광기를 포착하는 그 예민한 감수성이다.
굉장히 냉철하고 논리적으로 느껴지지도 하지만
머리로만 세상을 보는 사람이 결코 포착하지 못하는
'어둠에 대한 감수성'을 이 사람은 갖고 있다.

환상소설, 사이비종교, 연쇄토막살인사건..이런 소재 자체가 주는 아우라를 바탕에 깔고
익숙한 고전적 추리소설의 포맷을 빌리면서도, 그 속에서 언뜻언뜻 상식을 깨는 시각을 제시한다.
특히나 내가 맘에 들었던 것은, 이 작가 흔히 우리가 추리소설의 정석으로 알고 있는
상식들에 미세한 균열을 내는 그 방식이었다.
우부메..에서도 그랬지만, 추리소설팬이라면  눈치챌 수 있을 이런 전복적인
즐거움이 특히 좋았다. 

예를 들어, 보통 모든 사건은, 서로 무관한 채로 흩어져 있는 조각들이 퍼즐처럼 제자리를 찾아서
서로 연결될 때 해결된다.
하지만, 반대로,서로 관련되어 있는 것처럼 보이는 조각들이 실은 서로 무관한 것들이라면
어쩔 것인가?
토막살인사건이 났다. 보통이라면, 시체를 토막내는 이유는 들키지 않고 시체를 처리하기 위함이다.
하지만, 그것이 아니라면 어쩔 것인가?
토막내기가 살인에 따라온 것이 아니라, 살인이 토막내기에 따라온 것이라면 어쩔 것인가?
환상적인 이야기를 쓰는 소설가가 있다.
현실에 결코 있을 수 없는 이야기인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그가 쓰는 이야기가 정말로 현실에서 목격한 이야기라면 어쩔 것인가?
눈에 명백히 보이는 것이 있음에도,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젖혀놓는다면, 
상상력의 빈곤이 아니라 오히려 너무나 풍부한 상상력이 공격당해야하는 것이 아닐까?

이 소설을 꼭 영화로 만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캐스팅도 생각해봤다.
교고쿠도도역에는 설경구, 에노키즈는 차승원.
그리고 구보 역에는 원빈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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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화영의 알제리 기행 - '바람 구두'를 신은 당신, 카뮈와 지드의 나라로 가자!
김화영 지음 / 마음산책 / 2006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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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삶에 끊임없이 낯설음을 느끼는 사람들은 여행자가 되거나, 아니면 예술가가 된다. 하지만 인생은 불공평한 것인지도 모른다. 때로 예술가의 감수성을 지닌 여행자도 있으니까.  아니 여행자의 감수성을 지닌 예술가라고 해야 하나. 어느 쪽이건, 이런 사람들은 나의 영원한 질투대상이다. 어쩌면 모든 예술가는 여행자로 타고나는 것이 아닌가 싶다. (불행히도 그 역은 성립되지 않지만) 

<김화영의 알제리 기행>에 나오는 앙드레 지드와 알베르 까뮈도 그런 사람들이다. 노르망디의 부잣집 아들이었다는 지드에 비해(지드가 북아프리카를 좋아했다는 것도 이번에 첨 알았다) 까뮈는 알제리에서 태어나서 자랐기 때문에 단순히 여행자 입장이라고 말하기는 어렵겠지만. 하여간 이 책에서 내가 얻은 예기치 않았던 최대의 수확은 지드와 까뮈의 글이었다. (김화영 교수님, 이분이 뛰어난 번역가라고 생각하는데, 번역문체 자체가 좋았다) 이 사람들은 도대체 어떻게 이렇게 아름다운 글을 쓸 수 있는 걸까. 난 지드는 잘 모르지만 까뮈의 <페스트>를 상당히 좋아했었기 때문에 감회도 새로웠다.

이 책 자체로 말하자면 너무 기대를 해서인지 2프로 부족한 느낌이었다. 우아하고 단정한 느낌이 책 장정 자체의 세련된 느낌과 맞물려 기분좋게 독파한 책이지만, 약간은 감질이 났다. 저자가 분문에서 "다음번에는 글을 쓰는 숙제를 안고오지 말아야겠다"라고 쓰고 있듯이, 신문에 연재했던 글이라서인가..좀 너무 단정하게만 쓰려고 한 느낌이다. 어쩌면 김화영 교수님도 밝히고 있듯이 알제리 여행의 동기가 된 까뮈와 지드의 문학이라는 필터로만 너무 이곳을 보려고 했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그렇다해도, 까뮈가 쓴 것과 실제의 알제리는 어떻게 달랐는지, 아니면 어떻게 같았는지, 그런 생생한 느낌을 좀더 많이 써주셨으면 좋았을걸 싶었다.

하지만 책의 절반 정도를 넘어가자 앞부분보다는 재미있어졌다. 여행이 진행될수록 이분이 좀 더 자유로운 글쓰기를 하고 있다는 느낌. 도시를 떠나 사하라 쪽으로 내려갈수록 흥미로와졌다. 까뮈의 <페스트>의 배경이 되었던 오랑에 대한 묘사도 상당히 관심을 끌었고. 어느날 호텔에 돌아와 화가 나서 쓴 메모, 부분에서는  큭큭 웃었다. (쓰레기나 먼저 치우라고 했던 부분) 이런 생생한 묘사가 오히려 조금은 더 필요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래도 초점이 확실하고 공연한 감상이나 뜬금없는 인생철학 같은 게 없는 여행기라서 좋았다.(나는 자기가 본 걸 묘사하는 것보다 인생을 여행에 비유하면서 인생철학을 설파하는데 더 집중하는 그런 류의 여행기를 너무 싫어한다) 무엇보다 요즘 많이 나오는 그저그런 여행기에 비하면 훨씬 고급스러운 책이다. 번역하신 글의 문체처럼 우아하고 차분한 문체도 좋았다.

이 책만으로 판단하기는 많이 부족하겠지만, 글과 사진으로 미루어볼 때 알제리는 (내가 가본 유일한 북아프리카 나라인 모로코에 비하면) 뭐든지 큼지막한 나라인 것 같다. 수도 알제의 풍경은 별로 정이 안가고 내가 로마에 큰 관심이 없어서인지 북부의 로마유적지가 나올 때는 그저 그랬는데, 오히려 사하라 근처의 마을들, 오아시스의 풍경들이 매력적으로 느껴졌다. 비스크라, 엘 칸타라, 셰트마, 드로, 우마크, 셰가.. 이런 이름들을 기억해야겠다.

아트망이여 나는 너를 생각한다. 비스크라여, 나는 너의 종려나무들을 생각한다. - 투구르트여, 너의 모래를..오아시스여, 거기에는 아직도 사막의 메마른 바람이 너의 수선스러운 종려나무 가지들을 흔들고 있는가? 더위에 익어서 터진 석류들이여, 너희들은 새콤한 씨를 땅 위에 떨어뜨리고 있는가? 셰트마여, 너의 시원하게 흐르는 물과 곁에 가 서면 땀이 나던 너의 더운 샘물을 나는 기억하고 있다. - 황금의 다리, 엘 칸타라여, 나는 기억한다. 너의 낭랑한 아침들이며 황홀한 저녁들을. 우마크여, 나는 너의 황량한 모습을 꿈에 그린다.

- 앙드레 지드 <지상의 양식>


사무실들과 집들에서 아직 어둑어둑한 거리거리로 떠들썩한 군중들이 쏟아져 나와 바다 앞의 대로들에까지 흘러가고 그곳에서 밤이 다가옴에 따라 하늘의 빛과 해안의 등대들과 도시의 불빛들이 차츰차츰 분간할 수 없을 만큼 다 같은 박동 속에 한 덩어리가 되어감에 따라, 마침내 입을 다물고 잠잠해지는 이런 저녁시간이면 나는 그 고장에 가 있고 싶어지는 것이다. 모두가 다 같이 이처럼 물가에서 마음을 가다듬고 숙연해지고 수천 가지의 고독이 군중들로부터 분출한다. 그때에 바로 아프리카의 저 거대한 밤들이, 당당한 유적이, 고독한 여행자를 기다리는 절망적 열광이..시작되는 것이다.

- 알베르 까뮈, <결혼, 여름>

p.s. 다른 것을 다 떠나서 무엇보다 이 책은 국내에서 찾아보기 힘든 알제리 여행기이다! 사실 그래서 너무나 반가왔다. 북아프리카는 나에게도 로망의 장소이기 때문이다. 모로코에 여행갈 때 우리말로 된 모로코에 대한 책을 구하기 어려워서 결국 론리 플래닛과 <큐리어스> 한 권만 들고갔었다. 다음에는 튀니지에도 가려고 한다. 알제리에도 가보고 싶지만 지금은 우선순위에서는 밀리고 있는 상황이다. 무엇보다 오랑과 같은 도시에 직접 가보면 예술가의 상상력에 훨씬 못미치는 현실에 실망하지 않을까. 길가의 무뚝뚝한 청동 조각상 하나에도 놀라운 통찰력을 보이는 카뮈 같은 작가의 가이드(그리고 그 구절을 뽑아서 소개해준 감화영 교수님의 안목)이 아니라면 실제로는 눈이 있어도 아무 것도 못볼지도 모른다. 하지만, 사하라엔 꼭 가보고 싶다. <알제리 기행>에 실린 사막의 풍경이 아른거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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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소와 장소상실 논형학술총서 14
에드워드 렐프 지음, 김덕현.김현주.심승희 옮김 / 논형 / 200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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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지리학자 에드워드 렐프가 1976년에 쓴 책이다. 번역이 진짜 늦게 나온 거다. 난 지리학에 대해선 아는 바가 없지만, 지리학을 몰라도 읽는데는 별 지장이 없다. 전문용어가 별로 없어서 읽기 어렵지 않다. 현상학적 방법론을 적용했다고 서문에서 밝히고 있는데 현상학이란 어차피 모든 학문 분야에 있어서 방법론적 반성에서 나온 것이 아닌가. 맥락이 이해가 갔다. 그러니까, 이론적 도구를 정련시켜서 거기서부터 논의를 전개해나가는 게 아니라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직접적인 세계, 그러니까 '생활세계'에 대한 기술(description)로부터 출발하려는거다.  

1장부터 5장까지는 이런 '세계에 대한 기술'이 담겨있다. 그러니까 인간에게 있어서 장소란 무엇인가, 라는 질문을 던지고 나름의 분류를 하는데, 솔직히 이 부분은 살짝 지루하다. 너무 '나열'에 그치는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현상학적 방법=나열은 아닐텐데 말이다. 암튼 그래도 거기 담긴 문제의식은 잘 느껴졌고, 몇몇 범주들은 고개를 끄덕이게 만들었다. 6장부터는 앞보다 훨 재미있다. 저자가 모던 사회의 특징으로 본 '무장소성(Placelessness. 제목의 '장소상실'과 같은 단어인데 책 안에는 '무장소성'이라고 되어있다)'에 대한 본격적인 분석이다. 서브토피아(subtopia), 박물관화, 디즈니화, 산업에 의한 경관의 파괴 등등, 중요한 카테고리들이 잇따라 등장한다. 화질이 안좋긴 하지만 사진도 많다. 저자가 분석하고 있는 것은 주로 유럽과 미국의 경관인데, 특히나 미국에 잘 들어맞는 부분이 많다. 미국 서부여행에서 약간이나마 이런 '무장소성의 극치'라고 해야 할 경관들을 봤기 때문에 '삘'이 왔다. 하긴 요즘 우리나라에도 무장소성의 경관은 넘친다. 각종 국적의 간판이 붙은 모텔촌, 새로지은 고층 아파트촌...그러나 이런 무장소성의 경관도 동네마다 특색이 있다. 렐프가 못본 것이 있는 건지도.

이 책은 '무장소성'이라는 개념을 처음 유행시킨 고전이다. 포스트모더니즘이 본격적으로 논의되기 훨씬 전에 굉장히 포스트모던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해서 유명한 책인데, 지금 봐도 통찰력이 날카롭다. 물론 지금의 시각으로 보면 크게 날카로울 것도 없지만, 1976년에 썼다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책 끝부분에서 결론을 유보하고 있긴 하지만, 이 책은 '무장소성의 경관'에 대한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시각을 담고있다. 때문에 복고적 향수취향으로 느껴지기도 한다(특히, 이 문제에 관한 한 꽤나 보수적인 이론가인 하이데거에 의존하고 있는 부분에서 그렇다). 하지만 저자가 '유보'했던 부분이 오히려 우리가 생각해보아야 할 부분이 아닌가 싶다. 렐프는 무장소성에 대한 '불편한' 느낌은, 그것이 '새로운 것'이기 때문일 수 있으며, 그래서 본인이 처해있는 문화 속에서는 어떤 섣부른 결론을 낼 수 없다고 말한다. 실제로 오늘날 우리는 '무장소성의 경관' 속에서 렐프 시절보다 훨씬 덜 불편함을 느끼지 않는가. 그렇긴 한데 무장소성 그 자체도 날로 업그레이드된다. 똑같이 늘어선 신도시 고층아파드들의 경관은 굉장히 삭막해보이고 싫다. 왜일까? 렐프의 주장처럼 인간에게는 '진정한 장소성의 감각'을 가지려는 욕구가 기본적으로 있기 때문일까? 아니면 단지 아직 그것이 우리에게도 여전히 '새로운 것'이기 때문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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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부메의 여름 백귀야행(교고쿠도) 시리즈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 손안의책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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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추강추! 정말 간만에 정신없이 한 권을 다 읽었다. 
일본 요괴물을 고전적 추리소설이랑 접목시켰달까 -
어쨌든 추리소설이다. 요괴스러운 걸로 세상에 일본 따라갈 나라가 있을까.
이 나라엔 왠 요괴가 이리도 많은지. 암튼 '요괴스러운 일본 추리소설'이라면
벌써 먹고 들어간다. 거기다 이 작가, 글을 매우 잘쓴다!
누구 말대로 '뇌가 없어도 읽을 수 있는' 것 같은 류의 헐렁한 요즘 소설에 비해서
문장이 상당히 치밀하다.  
이야기를 엮어가는 솜씨나 복선을 군데군데 배치하는 능력도 대단하다.
무엇보다 으스스한 아우라가 장난 아니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내가 왜 추리소설, 그것도 수수께끼풀이에 중점을 두는
고전적 추리소설을 좋아했었는지 새삼 깨달았다.
도입부는 최대한 괴기스러워야한다. 뭔가 강력한 어둠의 포스를 발산하는 초자연스러운
세팅. 그리고 결말은 최대한 논리적이어야 한다.
한마디로 차가운 이성과 어두운 광기의 충돌이라는 부분이 언제나 추리소설에서
나의 흥미를 끌었던 것이다. 설정이 괴기스러울수록, 결말의 논리성이 더욱 빛나기 때문에,
기괴한 설정은 사실 이야기의 필수적인 요소이다.
추리소설은 '불가능'의 영역을 다루는 장르인 것이다.
어떻게 '불가능한 것'을 '가능한 것'으로 바꿀 수 있는가?
이성과 광기, 한 가지만으로는 의미가 없다. 
물론 고전적 추리소설은 결국 이성의 승리로 끝나지만
광기는 단순히 정복당해야 할 대상이 아니라 이성의 도플갱어 같은 거다.
그래서 탐정이 시원스럽게 전모를 밝힌 뒤에도 머리 속에 남는 것은
이성의 명쾌함보다 오히려 광기의 어두움이다. 적어도 추리소설의 팬이던 소녀시절의
나에게는 그랬다.

요즘 시대에 어떻게 이런 고전적인..이라는 느낌이 들정도로
(하기야 시대배경은 1950년대이긴 하다)
'불가능'을 정통으로 다루는 아우라 만땅 추리소설을 정말 오랫만에 만나서 즐거웠다.
일본 요괴물에 대한 전문지식까지 버무려진 아주 맛깔스러운 만찬이었다.
정통 세팅이라고 하기엔 소설 전반에 너무나
강력하게 호러스러운 분위기가 흐르긴 하지만,
어디까지나 이건 '정통이다!'라는 걸 느낄 수 있었다.
약간의 단점이라면, 추리소설이라기엔 '추리' 자체의 엄밀함은 모자란다는 것.
(하지만 이 점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생각한다.
추리의 엄밀함이란 무엇인가? 이 소설도 주장하듯이
우리의 지각과 사고에는 무수한 맹점이 있다.  
인간은 톱니바퀴처럼 움직이는 기계가 아니다. 추리란 맹점을 둘러싼
탐정과 범인의 한판 싸움이 아닐까?
거왜 - 사기란 테크닉이 아니라 심리전이라고 <범죄의 재구성>도 그랬잖수)
그리고 도입부와 중간부의 괴기스러움이 그야말로 너무나 괴기스러워서
오히려 결말이 살짝 용두사미가 된 감은 있다.
(어떤 부분에서는 정말 과연 그럴까? 하는 의문이 남기도 한다.
거의 엑스파일 수준. 또한 '동기'면에서는 살짝 진부한 느낌도 들었다).
하지만 이런 작은 단점을 길게 논하기에 이 소설의 흡인력은 너무 강하다!!

'정통 세팅'에서는 물론 주인공에게 부과되는 원칙도 있다.
이 소설도 이것을 지킨다.
탐정은 지적 호기심말고는 세상만사에 일체 무관심한 인간이어야 한다.
이야기의 화자인 탐정조수는 용의자들의 인간적 면모에 흔들리는 류의 인간이어야 한다.
'나'라는 일인칭 화자를 등장시킴으로써 독자는 제3의 위치에 서게 된다.
'나'의 묘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되며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 것이다. 
탐정과 조수가 도입부에 나누는 알듯모를듯한 만담류의 '범죄론' 혹은 '인간론'은
셜록 홈즈의 <주홍빛 연구>를 연상시킨다. 혹은 세이메이와 히로마사를 느끼게 한달까.
(실제로 탐정격인 교고쿠도는 세이메이계의 음양사로 묘사된다)
마지막에는 모든 용의자가 한 데 모여야 한다. 날은 최대한 음산한 날로 잡아야 한다.
무대는 콩가루 집안의 오래된 저택. <Y의 비극>의 류의.
(딴소리지만 미국 작가들의 추리소설은 아무래도 아우라가 떨어진다고 생각한다.
그나마 <Y의 비극>이 한아우라하는 정도.)

이 소설은 고전적 추리소설의 구조를 반복하는 듯하면서도
단순한 리바이벌이 아니다. 그 점이 특히 흥미로왔다.
시대에 맞게 새로운 해석을 버무려놓았달까.
어쩌면 이것은 새로운 무엇이라기보다
이미 고전적 추리소설이 갖고있던 '구멍'이었다고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건 '나'라고 하는 주관적 관찰자의 시점을 도입함으로써
과거의 고전적 추리소설이 이미 한 발을 들여놓았던 구멍이다.
(크리스티의 <애크로이드 살인사건>을 상기해보시라!)
이 소설은 이 '구멍'을 파고드는데, 함정 같기도 하고 블랙홀 같기도 한 이 구멍 주위에서
또 하나의 충돌이 벌어진다.
이 구멍을 논리적으로 설명하기 위해 탐정이 뇌까리는 각종 '이론'들은
자뭇 필사적이다. 인간의 광기를 이해하고 설명하기 위한 이 필사적인 논리의 노력을
지켜보는 것이 추리소설의 가장 흥미진진한 측면 중의 하나일 것이다.
이 소설은 그런 재미를 십분 느끼게 해줬다.  
탐정 쿄고쿠도(그러나 극중에서 탐정이라는 직업을 갖고있는 것은 아니다.
그는 음양사다. 오히려 '탐정'은 따로있다)의 말 한마디. 

"탐정이 없으면 일어나지 않는 사건도 있어.
탐정이라는 것은 처음부터 당사자임에도 불구하고 그것을 깨닫지 못하는 어리석은 자란 말일세" 

<우부메의 여름>은 이런 점에서 놀라웠다!
고전적 추리소설이 이미 갖고 있었던, 그러나 스스로 깨닫지 못했던
이 '진실'을 고전적 추리소설의 바로 그 틀 속에서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왜 포와로가 가는 곳엔 항상 살인사건이 벌어지는가?
왜 그는 조용히 쉬러 가는 곳에서 항상 사건을 만나는가?
왜 탐정에게는 사생활이 없는가?
등등.

 이 작가에 대해선 아는바 없었는데, 경력을 보니 범상치가 않다.
소설가 겸 디자이너고, 계간 <요괴>의 편집장이자 -_-;; <백귀야행>의 작가라고.
그 만화 <백귀야행>인가? 누구 아시는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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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아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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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훌'은 첫장을 펴들었을때부터 '이바나' '독학자'에서부터 감지되었던 배수아의 새로운 행로를 확실히 느끼게 해준다. 희미하게 남아있던 '세련된 취향'은 자취를 감췄다. 이제 세상에 대한 모든 짜증과 불안 대신에 그녀가 택한 것은 완전한 고립과 고독이다. 예전의 배수아는 '별난' 사람으로서의 개성은 있었지만 확실히 미문을 쓰는 작가는 아니었다. 그러나 최근 소설의 문장들은 너무나 아름답고도 치밀해서, 완전히 다른 사람이 쓴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든다. 그건 단순히 문체의 문제만은 아니다. 그건 사유의 깊이다. 이제 그녀는 드디어 자신의 소설 속의 등장인물이 된 것 같다. 어느날 홀연히 사물 속으로, 아닌 사물 그 자체가 되기위해 사라져버린다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다. '에세이스트의 책상'에서도 그랬지만, 구체적인 등장인물이 나오고 사건이 조금이라도 벌어지는 듯하면 오히려 배신감(?)이 느껴진다. 인물, 공간, 시간... 모든 것이 분해되어 어딘지 알 수 없는 방향으로 수수께끼처럼 사라진다. 그러나 '사고'라고 하는 존재가 모든 사물들이 사라진 공간에 남아 있다. 안개 속의 붉은 전조등처럼 명멸하는 이 존재의 고집은 무자비하고 또 아름답다. 하여간 "훌"은 놀랍다.  "배수아는 예전 작품이 더 좋은 것 같다"란 말을 취소하게 만드는 소설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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