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이 지구에 살고 있는 사람들 중의 절대 다수가 책을 읽지 않는다. 그들은 평생 동안 살아있는 자연만을 마주하고 살아간다. 죽어있는 글자 따위는 눈에 담지 않는다. 책이 그들의 삶에 파고들 여지는 전혀 없으며 그런 까닭에 '내 인생을 바꾼 한 권의 책'과 같은 게 있을 수가 없다. 책을 읽지 않는 그들은 자연과 자신의 일치 속에서 살아가므로 원초적으로 행복하다. 또한 그들은 지구에게도 행복을 준다. 지구가 원하는 것은 한치의 어김도 없이 순환의 바퀴가 맞물려 돌아가는 것인데 그들은 나무를 베어 그걸로 책을 만들고 한 쪽 구석에 쌓아놓는, 이른바 순환의 톱니바퀴에서 이빨을 빼내는 짓을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프리카 초원의 사자나 얼룩말처럼 평생을 살다가 어머니인 대지의 품에 안겨서 잠든다. 나서 죽을 때까지 단 한번의 자기반성도 하지 않는다. 마치 사자가 지금까지의 얼룩말 잡아먹기를 반성하고 남은 생을 풀 뜯어먹으면서 살아가기로 결심하지 않는 것처럼. 사자가 위장에 탈이 나면 풀을 먹듯이 병든 인간만이 책을 읽는다.


나는 이 글에서 '왜 책을 읽어야만 하는가'에 대한 대답을 내놓을 수가 없다. 대신 전 지구인의 입장에서 보면 한 줌도 되지 않을 책 읽는 사람들이 책을 어떻게 읽고 있는지를 서술하고, 그에 이어서는 책을 어떻게 읽는 게 좋은지, 몇 권이나 읽는 게 좋은지 따위와 같은 하찮은 문제 등을 생각해보는 것에 그치려 한다.


2. 책 읽는 방식은 몇 가지로 유형화될 수 있다.


2.1 동화책 읽기

누구나 세상에 태어나서 조금 자라면, 그가 이른바 '문명세계'에 살고 있다면 '책을 읽어야 한다'는 지상명령을 만나게 된다. 처음에는 문자를 알지 못하므로 누군가 옆에서 책을 읽어준다. 그러니까 최초에 하는 일은 읽기가 아니라 듣기인 것이다. 이렇게 듣다가 문자를 깨우치게 되면 스스로 읽는 단계에 접어든다. 시작할 때와 마찬가지로 왜 책을 읽는지에 대해서는 고민하지 않고 그저 읽을 뿐이다. 어린 시절만이 아니라 어떤 분야에서든지 초보자는 무작정 듣는 단계를 거치지 않으면 스스로 읽는 단계에 들어설 수가 없다. 가령 대학원생이 되어 논문을 쓰겠다는 사람이 있다고 해보자. 그는 학문 세계의 초보자이다. 그가 논문을 쓰려면 책을 읽어야 한다. 그가 아무리 이전에 책을 많이 읽었다 해도 논문을 쓰기 위한 책읽기는 해본 적이 없으므로 그는 사실상 어린아이이다. 그가 책읽기를 하려면 먼저 듣기를 해야 한다. 듣기 단계를 거치지 않은 학생들은 약간의 지식을 가지고 논문 하나, 잡글 서너 개 쓰고 만다.


2.2 교과서와 하이틴 로맨스 읽기

인간은 육체적 존재다. 책은 기본적으로 정신에 호소하는 것이므로 인간은 본능적으로 책을 멀리하게 되어 있다. 굳이 책을 읽어야 한다면 몸에 좋은 책을 읽는 것이 순리에 맞다. 이런 책들이 하이틴 로맨스와 무협지다. 하이틴 로맨스, 무협지와 더불어 읽는 책은 교과서이다. 학교에서 배우는 책만이 교과서는 아니다. 사실을 담고 있다고 여겨지는, 반드시 외워야 한다고 기성체제가 강요하는 책들이 교과서이다. 교과서 별거 아니라고 생각하면 큰 오산이다. 사람은 어떤 판단이나 행동을 할 때 그것의 근거를 확실해 보이는 사실에서 찾는다. 청소년기에 읽게 되는 교과서는 대한민국 사람의 의식의 저변에서 그 역할을 한다. '돈이 많으면 세상살이가 편하다', '어떤 직업을 가지면 돈벌이가 괜찮다', '자본주의 체제를 비판하는 건 빨갱이다' -― 이 모든 것들이 교과서에 나온다.

 

체제 유지를 위한 사실 묶음으로서의 교과서와 피곤하고 괴로운 현실의 휴식처로서의 무협지, 하이틴 로맨스라고 하는 두 가지 줄기는 다양한 형태로 변주되기는 하지만 평생에 걸쳐 남아 있다. 대학에 다니는 동안에는 강의 시간에 교재로 쓰이는 책에서 시험 치르기에 필요한 사실들을 외우고 남은 시간에는 위안을 가져다주는 환타지 소설을 읽으며 보낸다. 인간 존재의 근본을 흔드는 책읽기 경험은 거의 일어나지 않는다. 직장에 들어가서도 이 줄기는 바뀌지 않는다. 업무에 필요한 매뉴얼 읽기와 따라 해보기, 그리고 가끔 읽는 '누가 내 치즈...' 류의 책들이 그들의 삶을 채운다. 이런 식의 독서가 이어져 나이가 들면 눈이 어둡다는 핑계로 저절로 책을 읽지 않게 된다. 더 이상 매뉴얼 읽지 않아도 된다면 더 이상 읽을거리를 찾지 않게 된다. 이제 그에게 남은 것은 치매예방을 위한 두뇌활동으로서의 고스톱 치기와 술자리에서의 토론을 위한 테레비 보기뿐이다.

 

많은 이의 책 읽는 활동이 이 유형에 속한다. 심지어 책 읽고 글쓰는 것을 직업으로 한다는 사람들도 이 유형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공부를 하고 논문을 쓰는 과정이 자신의 실존적 문제를 해결해나가는 과정이 아니라 높은 외면적 지위를 얻게 하는 과정이기 때문에 그러한 필요에 따라 책을 읽고 글을 쓴다. 그 필요에 잘 맞춰진 논문을 만들어낸 다음에는 공인 학술지에서 요구하는 조건에 맞추어 논문을 쓴다. 가끔씩 나도 모르고 너도 모르는 멋스러운 글도 쓴다. 이런 과정을 거쳐 일정한 위치에 올라서면 책읽기가 불필요해진다. 회사원들이 직장에서 짤리지 않기 위해 업무에 도움이 되는 책을 읽는 것과 마찬가지로 학교라는 직장에서 버티기 위해 필요한 만큼만 책을 읽고 자신의 삶과 타인의 삶, 세계의 변화와는 무관한 글을 만들어내는 게 학술활동의 전부가 된다. 그러다 퇴직을 하면 편안한 노후를 보내게 된다.


 

2.3 <<교양>> 읽기

아주 가끔 디트리히 슈바니츠의 <<교양>>같은 책을 읽는 이를 만날 수 있다. 두서없이 헛소리를 해대던 사람이 지금 <<교양>>을 읽고 있다는 말을 하면 얼마나 황당한지 모른다. 그들은 떠들기 위해 책을 읽는다. 이 분야 저 분야로 옮겨 다니고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책을 읽는다. 'xx아카데미'에 다니기 위해 책을 읽는다. 수준이 비슷한 사람들끼리 모여서 세미나를 하면서 집단적인 최면 상태에 빠져들기 위해 책을 읽는다. 방대한 지식을 자랑하기 위해 책을 읽는다. 상대방을 주눅들게 하기 위해 책을 읽는다. 스스로가 독서인임을 자랑스러워하기 위해 책을 읽는다. 과시적으로 책을 읽는다. 사람들이 잘 안 읽는 책만 골라서 읽는다. 이 사람들은 늙어서도 책을 읽는다. 늙어서까지 출판사에게는 가장 고마운 사람들이다. 그러나 그들의 인생은 낭비되었고 그들의 지식은 그들의 몸속으로 들어가지 못한 채 곁에 쌓여 있을 뿐이다.


 

3. 지금까지 말한 세 가지 정도의 책읽기 유형 중에서 자신은 어디에 속하는지 한번 체크해 보기 바란다. 어느 유형에도 속하지 않는다면 그는 자연인이다. 사자와 마찬가지다. 첫 번째 유형에 속한다면 인생의 행복은 보장된 것이나 다름없다. 두 번째 유형에 속한다면 빨리 책읽기를 그만두는 게 좋다. 세 번째 유형에 속한다면 계속하라. 내가 그만두라 한다 해서 그칠 사람이 아닐 테니까. 이제부터는 책읽기와 글쓰기의 방식에 대해 말하겠다. 이 방식은 아주 이상적인 것이다.

 

3.1 어떤 책을 읽을 것인가

 

정답은 하나다 -- 좋은 책을 읽어야 한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세상에는 좋은 책이 없다. 이 책은 뭐가 부족하고 저 책은 또 뭐가 모자란다. 그러니 좋은 책에 대한 환상을 버리고 일단 아무 책이나 읽어야 한다. 어떤 주제에 관한 책 하나를 읽어서 별로였다 싶으면 다른 책을 골라서 읽어야 한다. 맘에 드는 책을 만날 때까지 읽어야 한다. 관심 주제가 걸쳐져 있는 범위에서 아무거나 골라서 다섯 권만 읽으면 저절로 선별이 될 것이다. 처음부터 좋은 책을 골라서 읽겠다는 건 한심한 결심이다. 책을 읽어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어떻게 고를 수 있겠는가. 다른 사람에게 물어보는 것도 어이없는 일이다. 무지하기는 매일반이니 특별히 책에 관한 도사가 아니면 누구에게 물어볼 생각은 하지 않는 것이 좋다.


 

3.2 어떻게 읽을 것인가

두말할 필요도 없이 꼼꼼히 읽어야 한다. 세상사에 그리 관심이 없는 사람이라면 고전을 붙잡고 한 자 한 자 정성들여 읽는 게 좋다. 이른바 원전강독이라는 게 이런 식으로 읽는 건데 요즘처럼 바쁜 세상에 이 짓을 하는 건 바보로 여겨지지만 최소한 두 권은 이렇게 읽어야 한다. 도서관에 가지 말고 방구석에 처박혀서 혼자서 읽어야 한다. 무슨 책을 읽어야겠다는 생각이 들면 많은 사람들은 대개 함께 읽을 사람들을 찾아서 세미나라는 걸 한다. 그렇게 여럿이 모여 읽으면 다 읽어도 내가 다 읽은 게 아니다. 다섯이 모여서 백 페이지를 읽었다 할 때 내가 읽은 건 사실 20페이지 밖에 되지 않는데도 다 읽었다는 착각에 빠지게 된다.

 

3.3 얼마나 많이 읽어야 하는가

 

절대로 장서가의 꼬임에 넘어가서는 안된다. 만 권의 책을 읽었다는 말에 현혹되면 안된다. 만 권을 가지고 있을지는 몰라도 그걸 다 읽었다는 건 거짓말일 가능성이 아주 높다. 많이 가지고 있고 많이 읽었다 해서 대단한 지식을 가지고 있다고 판단하면 안된다. 중세 시대 최고의 도서관 중의 하나였던 이탈리아 보비오 수도원의 장서는 666권이었다는 사실을 늘 상기할 필요가 있다. 지금은 중세가 아니니 더 읽어야 한다는 말 따위에 귀 기울이면 안 된다. 사람이 평생을 살아가면서 관심을 가지게 될 분야는 셋을 넘지 않으니 각 분야 당 100권씩 읽으면 300권이고 거기에 고전 50권을 덧붙여서 350권이면 충분하다. 이만큼만 꼼꼼하게 읽고 죽으면 후회하지 않는다.


 

3.4 글은 어떻게 써야 하는가

 

책읽기에서 그치면 더없이 좋으나 글을 쓰고 싶어지는 사람이 가끔 있다. 그러나 될 수 있으면 글을 써서는 안 되고 책을 쓰겠다는 생각은 더더욱 해선 안 된다. 도저히 참기가 어려우면 100:1의 공식을 떠올려라. 책 한 권 쓰려면 먼저 100권을 꼼꼼히 읽어야 한다는 말이다. 글 한 페이지 쓰려면 100페이지는 읽어야 한다. 이 공식을 머리에 담아두면 뭘 쓰겠다는 욕심이 저절로 없어진다. 그래도 이 공식을 다 충족시켰고 뭘 쓰겠다는 생각이 들면 다음과 같은 일을 하라.

1) 자신이 읽은 책을 하나도 빠짐없이 요약 정리하라. 요약정리는 중고등학교 때부터 많이 해봤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 그것은 책을 읽고 내 머리로 요약한 것이 아니라 남이 정리해놓은 것을 되풀이해서 읽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니 내 머리로 다시 읽고 내 손으로 요약정리를 해야 한다. 책을 한 권 쓰고 싶으면 반드시 100권의 책을 꼼꼼하게 읽고 반드시 요약 정리해야 한다.

 

2) 요약정리를 하면서 기본적으로 중요한 개념들은 따로 정리하여 개념 카드를 만들어라. 세상에 굴러다니는 대부분의 글은 자신이 쓰는 개념에 대한 정리가 안 된 상태에서 시작되고 끝나며 그에 따라 의사소통 불능상태로 공적인 토론 영역에 던져진다. 개념카드 만들기는 이런 무책임한 글쓰기를 방지하는 핵심적인 장치이다. 개념카드가 있어야 자신이 내놓은 글을 가지고 나중에 다른 사람과 토론을 할 때 효과적인 의사소통을 할 수가 있다.


 

3) 개념카드와 요약정리를 되풀이해서 읽으며 자신이 쓰고자 하는 주제에 관해 가장 잘되었다 싶은 글 하나를 골라서 필사한다. 컴퓨터 워드 프로세서에서 타이핑하는 것 말고 자신이 직접 손으로 종이에 필사를 해야 한다. 필사를 해보지 않으면 글을 쓰는 일이 얼마나 힘든지 잘 알지 못한다. 필사를 하다보면 의식이 몽롱해질 때가 있는데 사람들은 자신의 글을 쓰면서도 그렇게 몽롱한 상태에서 하는 경우가 많다. 남의 글 베끼기도 제대로 된 정신상태에서 하지 못하면서 어떻게 자신의 글을 세상에 내놓겠는가. 필사는 문장연습에도 도움이 된다. 그러나 이쯤 되면 글을 쓰고자 하는 마음이 없어질 것이고 그에 따라 글쓰기를 단념하는 것이 가장 좋은 것이다.


 

4) 그래도 기어이 글을 쓰고 싶다면 써보라. 단 글을 쓴 다음 적어도 세 달을 묵혀두고 나서 다시 읽어 보라. 그때 괜찮다 싶으면 다시 또 세 달을 묵혀두고 다시 읽는다. 그래도 괜찮다 싶으면 그때 주변 사람에게 보여라. 그들이 괜찮다 하면 다시 세 달 후에 보여라. 그래도 괜찮다고 하면 그때 가서 세상에 내보여라. 세상에 내보인 다음에는 곧바로 잊어라.

4. 이 글을 읽는 사람들은 그렇게 말하는 당신은 그렇게 하고 있느냐고 물을지도 모른다. 당신은 책을 350권만 읽었느냐고, 당신은 글을 그렇게 쓰느냐고 물을 것이다. 아니다. 난 책을 350권 더 읽었다. 뻔뻔한 대답이다. 굳이 변명을 하자면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저지르는 일일 뿐이다. 다른 할 일이 별로 없기 때문에 책을 읽는 것이다. 회사에서 일을 잘하기 위해 책을 읽는 일도 없다. 그냥 자신의 도락과 심심풀이를 위해 책을 읽을 뿐이다. 글도 나는 그렇게 쓰지 않는다. 이렇게 청탁을 받아서 후다닥 뚝딱 쓰는 게 습관처럼 되어 있다. 그러니 그에 걸맞는 대접을 받는 게 옳다고 본다. 이 글을 읽은 다음 독자 여러분은 이 글이 실린 신문을 곧바로 접어서 구석에 쌓아 두었다가 자장면을 먹을 때 받침으로 쓰기 바란다. 다 먹고 난 다음 그릇을 싸서 현관 밖에 내놓으면 더 좋을 것이다.

 

/ 연세대학 대학원신문 2002. 12.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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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강유원 - 책읽기와 글쓰기에 대하여
    from Jongsup. 2009-12-06 14:20 
    강유원 - 책읽기와 글쓰기에 대하여 1. 책 읽는 사람은 좆도 없다. 2. 책 읽는 방식 2.1. 동화책 읽기 : 생각없이 책읽기 2.2. 교과서와 하이틴 로맨스 읽기 : 체제유지를 위한 책읽기 + 현실의 휴식처를 얻기 위한 책읽기 2.3. > 읽기 : 보여주기식 책읽기 3. 책읽기와 글쓰기 방식 3.1. 어떤 책을 읽을 것인가 : 좋은 책 3.2. 어떻게 읽을 것인가 : 꼼꼼히 3.3. 얼마나 많이 읽어야 하는가 : 350권 3.4. 글은..
 
 
 
 전출처 : 하이드 > 이 작가 책은 다 살꺼야

 

 

 

 

 

1. 마르크 레비.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을 당신은 믿을 수 없겠지만' 을 읽고 완전 감동받은 이후로 시간이 꽤 흘렀다. '너 어디 있니?' 를 산지도 오래되었지만, 처음 몇페이지를 넘기다가 팽개쳐둔 상태였다. 오늘 기분도 꿀꿀하고 왠지 감동적인 책이 땡기는 날이어서 집었는데, 재미있고 감동적이고 로맨틱하고, 멋지고 강하고 유머감각 있고 헌신적인 남자주인공과 여자주인공이 나오고. 책 넘긴지 얼마 되지 않아서부터 눈에 물을 달고 보고 있다. 책 뒤표지의 '18세기 프랑스에 알렉상드르 뒤마가 있었다면, 21세기 프랑스 대중소설은 마르크 레비가 이끌어간다' 라는 선전이 있다. 좀 오바인데, 싶었는데, 읽다보니 제발 뒤마처럼 책 팍팍 써주세요. 라는 심정이 되어버렸다.

 

 

 

 

 

 

 

 

 

 

 

 

 

 

 

2. 존 버거. 누군가의 소개로 알게 된 작가도 아니고, 소문을 들어서 사야지 찜해놓았던 작가도 아니였다. 어쩌다가 오프라인에서 그의 책을 집었고, 그의 문장을 읽게 된 바로 그 순간이 내가 존버거에게 반하게 된 바로 그 순간이고, 그와 사랑에 빠지게 된 것도 그 순간이다. 그의 글을 읽게 되는 그 순간. 처음 읽었던 책은 열화당에서 나온 '그리고 사진처럼 덧없는 우리들의 얼굴, 내가슴' 이었다. 제목부터 시적인 이 책에서 시공간과 전우주를 누비는 그의 철학을 군더더기 없는 유려한 문장으로 접할 수 있었다. 다행히 번역된 책도 많고, 영문권 작가라 주문하기도 좋다. 그에게는 존경을 넘어선 경외감마저 느낀다. 존버거를 알게되서 난 참 행복하다.

 

 

 

 

 

3, 알랭 드 보통. 입소문 듣기 전에 오프라인에서 먼저 '여행의 기술'이라는 책을 사면서 알게 된 작가다. 솔직히 이 작가에 대해서는 질투가 먼저다. '여행의 기술' 에서 나는 여행을 보는 다른 눈을 얻었고,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에서는 '사랑론'을 들었다. 근데, 이 멋진 책이 알랭드 보통이 25세때 쓴 처녀작이라는 뒷말을 읽으면서부터 난 이 작가를 시기하고 질투하며 책을 모으기 시작했다. 삶의 철학산책은 못 구한 책이고, 표지가 예쁜 펭귄판 원서를 몇권 더 가지고 있다.

 

 

 

 

 

 

 

 

 

 

 

 

 

 

4. 가브리엘 마르께스. 중남미문학을 좋아하는데, 지명도가 높으면서 어렵지 않으면서 읽고 나면 털썩 대단해! 외치게 하는 작가. 그래봐야 난 꿈을 빌려드립니다라는 단편집과 그 외 컴필레이션에 실린 단편들, 그리고 백년의 고독! 을 읽었을 뿐이지만. 콜레라의 사랑 칠레이야기, 그리고 내 슬픈 창녀들의 추억 세상에서 가장 잘생긴 익사체가 책꽂이에 얌전히 들어가 있긴하다, 사실 '백년의 고독'  이 너무 대단해서 그의 다른 책 읽을 기운이 없을 지경이었다.  책읽고 카타르시스 느끼기는 처음이었다고!

 

 

 

 

 

 

 

 

 

 

 

5. 패트리샤 콘웰. 저 위의 책들은 얇게 분권으로 나와서 나홀로불매운동하고 있다. 헌책방에서 혹은 지인들께 부지런히 졸라서 예전 시공사버전으로 일곱편을 다 모았다. 그리고 오늘 마지막 ' 악의 경전' 보고 울었다. 가슴이 벅차서. 책 속의 주인공에 이렇게 감정이입을 해 본적은 처음인듯. 이제 크게 심호흡하고 아마존에서 사 놓은 unnatural exposurepoint of origin 을 읽어야겠다. 전문용어가 많아서 겁내고 있었는데, 그렇게 어렵지는 않다고 하니 슬슬 시작해야겠다.

6. 그 외. 폴오스터, 무라카미 하루키, 움베르트 에코, 미셸 푸코등의 책은 꽤나 많이 나와 있어서 덜부지런한 나로서는 다 모아야겠다. 는 정도의 생각은 없지만, 생각날때마다 이름만 보고도 사는 작가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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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서와 사랑의 뼈아픈 교훈 / 알랭 드 보통


사랑과 문학의 관련성은 근본적인 것이다. 연인만큼이나 울림이 큰 말을 우리에게 건네는 책들이 있다. 연인들이 그렇듯이 그런 책들도 우울한 의심들, 예를 들어 자신이 인간 종(種)에 완전히 속해 있지 않다거나 이해를 얻을 수 없는 존재일지 모른다는 의심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편집자 주 : 아래 글은 [New Statesman] 1998년 8월에 발표된 "The sorrows of young Alain (avid reader's insights on reading and love in literature)"을 번역한 것이다. )


문학과 짝사랑은 깊은 친화성을 가지고 있다. 후자를 경험할 때 (잠들기 직전 초콜릿을 먹게 되고 새벽 3시에 외로움을 느낄 때) 우리는 전자에 이끌리게 된다. 행복은 육신에는 유익하지만 출판 산업 그리고 문학의 생존에는 불행이 훨씬 이롭다.

몇 년 전 나는 파리의 서점을 둘러보다가 한 권의 페이퍼백 커버에 쓰여진 글귀에 시선을 멈추게 되었다. "심리학적으로 살아 있다는 것은 사랑 혹은 정신분석학 또는 문학의 매력에 빠져 있다는 뜻이다." 책제목은 "사랑 이야기 (Tales of Love)"이었고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썼으며 내가 오랫동안 그녀의 이름(first name)을 좋아했기 때문에 (나는 아홉 살 때 안경을 낀 동명의 어린 줄리아를 사랑했다) 책을 구입했다. 하지만 줄리아는 300페이지가 넘는 책에서 줄곧 나를 실망시켰다. 그녀는 출판사 직원이 책 뒤표지에 교묘하게 써놓은 매력적이기 이를 데 없는 문장을 공들여 부연하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책 표지 문구의 사유는 가치 있으며 아직도 나와 함께 머물러 있다. 사랑과 독서에는 중요한 연관이 있으며 그 둘이 유사한 기쁨을 일으킨다는 사유 말이다.

둘의 관련성은 근본적인 것이다. 연인만큼이나 울림이 큰 - 동시에 더욱 신뢰할만한 - 말을 우리에게 건네는 책들이 있다. 연인들이 그렇듯이 그런 책들도 우울한 의심들, 예를 들어 자신이 인간 종(種)에 완전히 속해 있지 않다거나 이해를 얻을 수 없는 존재일지 모른다는 의심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책은 당혹, 삐침, 죄의식 등의 현상을 유발하지만 그 때에도 우리는 행복한 자아 인식을 유지할 수 있다. 작가가 단어들을 배치해서 고립감을 느낄만한 상황을 묘사하더라도 독자들은 이른 저녁 식사 데이트를 하는 연인과 닮게 된다. 서로에게서 공통점을 발견하고는 희열을 느끼는 (그래서 앞에 놓인 해물 파스타를 쳐다볼 뿐인) 연인의 심경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책을 잠시 내려놓고는 책등을 보면서 옅은 미소를 짓게 된다. 흡사 "너를 만나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런 현상은 왜 문학이 사랑의 실패자에게 안식이 될 수 있는지 설명해준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었을 때 나는 대학에 다녔고 21세였고 그리고 당연히 베르테르였다. 거시생물학을 공부하고 좌우 대칭의 가르마를 딴 밤색 머리카락이 어깨까지 내려 왔던 클레어가 로테였으며 알베르트 역할을 했던 로빈은 그녀와 3년 동안 알고 지내던 경제학 전공자였다. 누군가 문학이 사랑의 실패자에게 위안일 수 있는 증거를 대라면 나는 그 때 상황을 거론할 것이다. 당시 나는 소설들이 스스로 우리 삶의 주위를 감싸고 조명하는 기적적인 능력을 갖고 있다고 깨달았다.

프루스트는 대단히 긴 책의 끝 부분에 얼추 다음과 같이 섰다. "모든 독자는 실제로는 그 자신 속에 이미 들어 있는 것만을 읽어 낸다. 책은 작가가 독자에게 제공하는 광학 도구이며, 독자는 책의 도움 덕분에 놓칠 뻔한 것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 설명은 미묘한 긴장을 강조한다. 책은 우리 자신에 대해 말해주지만 책에서 발견한 것들은 실은 우리의 일부가 아니다. 위대한 책의 가치는 독자에게 이미 친숙한 사람이나 감정을 묘사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위대한 책은 독자보다 훨씬 우월한 묘사 능력을 갖고 있어서, 우리가 자신의 것으로 감지하면서도 명확히 언어화하지 못한 것들을 선명하게 인식하도록 만든다.

이 세상에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은 안온한 것이다. 하지만 어두운 이면이 있다. 우리는 자신이 특별하고 독특하다고 느끼고 싶어한다. 그런데 문학은 우리의 존재를 그렇게 설명하지 않는다. 이런 일이 있었다. 나는 런던에서 에든버러로 비행하는 도중에 다음과 같은 라 로쉬푸코의 경구를 읽었다. "사랑이란 것에 대해 이전에 들어보지 못했다면 어떤 사람들은 결코 사랑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나의 반사적인 반응은 이랬다. "이건 결단코 내 아이디어가 아닌가." 마음이 언짢아 창 밖으로 솜처럼 부풀부풀한 미들랜드(Midlands)를 바라보았다. "그가 내 생각을 훔쳤다." 그러나 불가능했다. 그는 1613년 생이고 나는 1969년 생이기 때문이다. 좀 더 관대하게 "내가 그에게 훔친 아이디어일 지도 모른다"라고 생각해봤지만 그것 또한 불가능했다. 그 금언을 읽은 일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다소 자존심이 상하면서도 으쓱해지는 해답을 얻게 되었다. 비록 그는 천재이며 나는 그렇지 않더라도 라 로쉬푸코와 나는 같은 세계에 사는 것이며 그 때문에 때로는 유사한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라 로쉬푸코는 위의 자기 연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조언함으로써 의기소침함을 간단히 털어 줄 것 같다 :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천재성을 확신하지 못하고 아둔함에 대해서만 불평한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우리의 정체감을 위협한다. 정체감이란 차이의 믿음에 기반해 있기 때문이다. 문학에 노출될수록 우리가 타인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공개된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 만일 우리의 지극히 사적인 경험들이 다른 작가들에게는 빈번히 거쳐간 사유의 토대였다면 우리가 무엇을 말하고 쓸 수 있을까.

읽고 쓰기를 배운다는 것은 우리가 상상만큼 완벽한 개성의 소유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이다. 또 우리가 자신에게 고유하다고 믿는 것들이 실은 완전히 사적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수용한다는 뜻도 된다. 그렇다고 우리의 사적인 세계가 (패스트푸드 레스토랑의 서비스가 연상시키는 것처럼) 무개성하다는 말은 아니다. 대신 개인에게 고유한 것들을 모든 인간 존재가 공유하고 있다는 말이다. 자신이 고립되어 있지 않다는 걸 깨닫는 대신 우리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자신이 유일무이하다는 인식에서부터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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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티즌에서 갖고 온 글. 독서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의식하는 과정이라는 데 공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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