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서와 사랑의 뼈아픈 교훈 / 알랭 드 보통
사랑과 문학의 관련성은 근본적인 것이다. 연인만큼이나 울림이 큰 말을 우리에게 건네는 책들이 있다. 연인들이 그렇듯이 그런 책들도 우울한 의심들, 예를 들어 자신이 인간 종(種)에 완전히 속해 있지 않다거나 이해를 얻을 수 없는 존재일지 모른다는 의심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편집자 주 : 아래 글은 [New Statesman] 1998년 8월에 발표된 "The sorrows of young Alain (avid reader's insights on reading and love in literature)"을 번역한 것이다. )
문학과 짝사랑은 깊은 친화성을 가지고 있다. 후자를 경험할 때 (잠들기 직전 초콜릿을 먹게 되고 새벽 3시에 외로움을 느낄 때) 우리는 전자에 이끌리게 된다. 행복은 육신에는 유익하지만 출판 산업 그리고 문학의 생존에는 불행이 훨씬 이롭다.
몇 년 전 나는 파리의 서점을 둘러보다가 한 권의 페이퍼백 커버에 쓰여진 글귀에 시선을 멈추게 되었다. "심리학적으로 살아 있다는 것은 사랑 혹은 정신분석학 또는 문학의 매력에 빠져 있다는 뜻이다." 책제목은 "사랑 이야기 (Tales of Love)"이었고 줄리아 크리스테바가 썼으며 내가 오랫동안 그녀의 이름(first name)을 좋아했기 때문에 (나는 아홉 살 때 안경을 낀 동명의 어린 줄리아를 사랑했다) 책을 구입했다. 하지만 줄리아는 300페이지가 넘는 책에서 줄곧 나를 실망시켰다. 그녀는 출판사 직원이 책 뒤표지에 교묘하게 써놓은 매력적이기 이를 데 없는 문장을 공들여 부연하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하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책 표지 문구의 사유는 가치 있으며 아직도 나와 함께 머물러 있다. 사랑과 독서에는 중요한 연관이 있으며 그 둘이 유사한 기쁨을 일으킨다는 사유 말이다.
둘의 관련성은 근본적인 것이다. 연인만큼이나 울림이 큰 - 동시에 더욱 신뢰할만한 - 말을 우리에게 건네는 책들이 있다. 연인들이 그렇듯이 그런 책들도 우울한 의심들, 예를 들어 자신이 인간 종(種)에 완전히 속해 있지 않다거나 이해를 얻을 수 없는 존재일지 모른다는 의심에서 벗어나게 해준다. 책은 당혹, 삐침, 죄의식 등의 현상을 유발하지만 그 때에도 우리는 행복한 자아 인식을 유지할 수 있다. 작가가 단어들을 배치해서 고립감을 느낄만한 상황을 묘사하더라도 독자들은 이른 저녁 식사 데이트를 하는 연인과 닮게 된다. 서로에게서 공통점을 발견하고는 희열을 느끼는 (그래서 앞에 놓인 해물 파스타를 쳐다볼 뿐인) 연인의 심경이 될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책을 잠시 내려놓고는 책등을 보면서 옅은 미소를 짓게 된다. 흡사 "너를 만나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라고 말하는 것처럼.
그런 현상은 왜 문학이 사랑의 실패자에게 안식이 될 수 있는지 설명해준다.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을 읽었을 때 나는 대학에 다녔고 21세였고 그리고 당연히 베르테르였다. 거시생물학을 공부하고 좌우 대칭의 가르마를 딴 밤색 머리카락이 어깨까지 내려 왔던 클레어가 로테였으며 알베르트 역할을 했던 로빈은 그녀와 3년 동안 알고 지내던 경제학 전공자였다. 누군가 문학이 사랑의 실패자에게 위안일 수 있는 증거를 대라면 나는 그 때 상황을 거론할 것이다. 당시 나는 소설들이 스스로 우리 삶의 주위를 감싸고 조명하는 기적적인 능력을 갖고 있다고 깨달았다.
프루스트는 대단히 긴 책의 끝 부분에 얼추 다음과 같이 섰다. "모든 독자는 실제로는 그 자신 속에 이미 들어 있는 것만을 읽어 낸다. 책은 작가가 독자에게 제공하는 광학 도구이며, 독자는 책의 도움 덕분에 놓칠 뻔한 것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이다." 이 설명은 미묘한 긴장을 강조한다. 책은 우리 자신에 대해 말해주지만 책에서 발견한 것들은 실은 우리의 일부가 아니다. 위대한 책의 가치는 독자에게 이미 친숙한 사람이나 감정을 묘사하는 데 머물지 않는다. 위대한 책은 독자보다 훨씬 우월한 묘사 능력을 갖고 있어서, 우리가 자신의 것으로 감지하면서도 명확히 언어화하지 못한 것들을 선명하게 인식하도록 만든다.
이 세상에 혼자가 아니라는 느낌은 안온한 것이다. 하지만 어두운 이면이 있다. 우리는 자신이 특별하고 독특하다고 느끼고 싶어한다. 그런데 문학은 우리의 존재를 그렇게 설명하지 않는다. 이런 일이 있었다. 나는 런던에서 에든버러로 비행하는 도중에 다음과 같은 라 로쉬푸코의 경구를 읽었다. "사랑이란 것에 대해 이전에 들어보지 못했다면 어떤 사람들은 결코 사랑에 빠지지 않을 것이다." 나의 반사적인 반응은 이랬다. "이건 결단코 내 아이디어가 아닌가." 마음이 언짢아 창 밖으로 솜처럼 부풀부풀한 미들랜드(Midlands)를 바라보았다. "그가 내 생각을 훔쳤다." 그러나 불가능했다. 그는 1613년 생이고 나는 1969년 생이기 때문이다. 좀 더 관대하게 "내가 그에게 훔친 아이디어일 지도 모른다"라고 생각해봤지만 그것 또한 불가능했다. 그 금언을 읽은 일이 전혀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다소 자존심이 상하면서도 으쓱해지는 해답을 얻게 되었다. 비록 그는 천재이며 나는 그렇지 않더라도 라 로쉬푸코와 나는 같은 세계에 사는 것이며 그 때문에 때로는 유사한 생각을 할 수 있다는 것이다. (어쩌면 라 로쉬푸코는 위의 자기 연민에 대해서 다음과 같이 조언함으로써 의기소침함을 간단히 털어 줄 것 같다 : "세상 사람들은 대부분 자신의 천재성을 확신하지 못하고 아둔함에 대해서만 불평한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우리의 정체감을 위협한다. 정체감이란 차이의 믿음에 기반해 있기 때문이다. 문학에 노출될수록 우리가 타인과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공개된다는 것은 어떤 뜻일까. 만일 우리의 지극히 사적인 경험들이 다른 작가들에게는 빈번히 거쳐간 사유의 토대였다면 우리가 무엇을 말하고 쓸 수 있을까.
읽고 쓰기를 배운다는 것은 우리가 상상만큼 완벽한 개성의 소유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받아들인다는 의미이다. 또 우리가 자신에게 고유하다고 믿는 것들이 실은 완전히 사적인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수용한다는 뜻도 된다. 그렇다고 우리의 사적인 세계가 (패스트푸드 레스토랑의 서비스가 연상시키는 것처럼) 무개성하다는 말은 아니다. 대신 개인에게 고유한 것들을 모든 인간 존재가 공유하고 있다는 말이다. 자신이 고립되어 있지 않다는 걸 깨닫는 대신 우리는 대가를 치러야 한다. 자신이 유일무이하다는 인식에서부터 멀어지게 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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컬티즌에서 갖고 온 글. 독서는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의식하는 과정이라는 데 공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