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자와 죽은 자의 대화. 작가가 만들어 낸 환상의 이야기일까 비유적인 이야기일까? 환상이라면 슬프고도 아름답고 비유라면 처절하고 간절하다.
나는 눈을 감는다. 먼 서향 창의 블라인드 틈으로 점점 깊이 들어와 마침내 내 얼굴까지 다다랐던 열람실 복도의 햇빛이 생생해졌기 때문이다. 방금 읽은 숫자들 아래 낭자하게 흐르는 피를 단박에 휘발시키려는듯 찬란한 빛이었다. 눈이 부셔 자리를 옮기기 직전에 읽은 각주가. 한밤의 일에 대한 증언이었는데도 빛을 쏘고 있었던 것처럼 기억된 건 그 때문일 거다. - P266
인선이 남긴 기록 중 하나. 인간은 어디까지 잔인할 수 있을까? 이런 잔혹한 역사를 자랑스럽게 여기는 자들과 어떻게 살아가야할까? 내가 2025년의 대한민국에 살고 있는 것이 맞나 싶은 요즘이다.
다음날 새벽에내가 우리 아기를 업고 아기 아빠 몰래 바닷가로 갔습니다. 떠밀려온 젖먹이가 꼭 있을 것 같아서 샅샅이 찾았는데 안 보였어요. 사람이 그렇게 많았는데, 옷가지 한 장 신발 한 짝도 없었어요. 총살했던 자리는 밤사이 썰물에 쓸려가서 핏자국 하나 없이 깨끗했습니다. 이렇게 하려고 모래밭에서 죽였구나, 생각이 들었어요. - P226
성근 눈이 내리고 있었다.내가 서 있는 벌판의 한쪽 끝은 야트막한 산으로 이어져 있었는데, 등성이에서부터 이편 아래쪽까지 수천 그루의 검은 통나무들이 심겨 있었다. 여러 연령대의 사람들처럼 조금씩 다른 키에, 철길 침목 정도의 굵기를 가진 나무들이었다. 하지만 침목처럼 곧지않고 조금씩 기울거나 휘어 있어서, 마치 수천 명의 남녀들과 야윈 아이들이 어깨를 웅크린 채 눈을 맞고 있는 것 같았다.묘지가 여기 있었나. 나는 생각했다.이 나무들이 다 묘비인가. - P1
죽은 자가 산 자를 살리는 일.
사람을 악하게 만드는 것, 사람을 약하게 만드는 것…