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과지성 소설 명작선 3
서정인 지음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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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정인 소설에서 받는 느낌은 일종의 당혹감이다. 그것은 그의 소설이 전통적 소설과의 결별을 통해서 얻어진 것 그의 독특한 문체에서 비롯되는 것이다. 소설 <강>은 늙은 대학생 김씨와 세무서 직원 이씨, 그리고 얼마 전까지 국민학교 선생이었던 박씨가 군하리라는 소읍에서 있는 결혼식에 참석하기 위해 가는 여정과 그 소읍에서의 하루를 그린 소설이다.

그러나 전통적 소설에서 찾아볼 수 있는 갈등구조라든지 사건은 어디에도 없다. 단지 서정인의 소설이 전통적 소설 문법의 반경에서 벗어나 소시민적 일상을 그대로 그려내고 있을 뿐이다. 이는 그의 문체를 통해서 본격적으로 드러나는데, 등장인물의 대화에서 특히 두드러진다.

“눈이 내리는군요.”
(중략)
“예. 진눈깨빈데요.”
(중략)
“뭐? 아, 진눈깨비! 참 그렇군.”
(중략)
“정말이지 이건 진눈깨비야”

“아직 안 가?”
“곧 가요.”
“여기가 중국집인 줄 아니?”
“왜 내가 중국집에 있어요?”
차장은 비로소 뒤를 돌아본다.
“너, 곰이로구나?”
“내가 왜 곰이어요? 아저씬 뭔데요?”
“나? 난 네 할배다.”

“왜 저 사람들은 여기서 안 내릴까?”
“여기에 볼일이 없는 모양이지.”
“그게 아니고 다음 정거장에 볼일이 있는 모양이지.”
“그렇겠군. 우리가 율평인가 밤평인가에 볼일이 없었던 것처럼.”

소설 <강>에서 이루어지는 이러한 등장인물들 간에 대화는 지극히 사소하기 짝이 없을뿐더러 언어 유희에 가깝다. 그러나 서정인은 이러한 시시껄렁한 등장인물의 대화 속에서 그의 주제의식을 날카롭게 묘파해내고 있는 듯 보인다. 등장인물의 이러한 대화의 기원은 일종의 상실로 보여진다.(그런데 이걸 증명하기 위해선 책을 더 읽어 봐야 되고, 언어학적 분석이 더 따라가야 할 것 같다.)

이 세계에서 더 이상 지탱할 수 없는 상황에서 오는 상실감이 그것이다. 소설 <강>의 등장인물들에게 남아 있는 감정은 세계와 자기 자신에 대한 일종의 혐오감일 뿐이다. 자연히 이들은 세계와 자기 자신에 대해 저주하기 시작한다. 즉 세계와의 불화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불화가 등장인물이 가진 상실감의 기원이 된 듯하다. 늙은 대학생 김씨는 여관집에서 만난 공부 잘하는 소년을 통해서 그러한 상실감을 확인한다.

“너는 아마도 너희 학교의 천재일 테지. 중학교에 가선 수재가 되고, 고등학교에 가선 우등생이 된다. 대학에 가선 보통이다가 차츰 열등생이 되어서 세상으로 나온다. 결국 이 열등생이 되기 위해서 꾸준히 고생해온 셈이다. 차라리 천재이었을 때 삼십 리 산골짝으로 들어가서 땔나무꾼이 되었던 것이 훨씬 나았다. 천재라고 하는 화려한 단어가 결국 촌놈들의 무식한 소견에서 나온 허사였음이 드러나는 것을 본 것은 결코 즐거운 일이 못 된다.…(중략)…아―, 되찾을 수 없는 것의 상실임이여!”

이러한 상실감은 소설 말미에 나오는 술직 작부에게서도 보여진다.

“아, 신부는 좋겠네. 첫날밤에 눈이 쌓이면 부자가 된다는데, 복두 많지.”
그녀는 두 눈을 껌벅인다. 수많은 눈송이들이 눈앞에서 명멸한다. 그녀는 신부의 얼굴을 모른다. 그러나 모든 신부들은 똑같은 하나의 얼굴을 가지고 있을 것 같다. 그것은 행복, 기대, 불안. 또는 그 전부… 그녀는 고개를 떨어뜨린다.

세계와의 불화, 자기 자신과의 불화가 기원이 되는 등장인물들의 상실감은 그 자신들을 주변인으로 남게 하고, 끊임없이 자신의 정체성을 되묻는다. 그러나 서정인은 소설에서 등장인물들의 그러한 갈등상태를 배면으로 넘기고 등장인물들 간의 재기발랄한 대화를 전면에 배치시키는 전략을 구사한다. 이러한 아이러니적 이중 구조를 통해 서정인의 소설은 짙은 페이소스를 자아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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