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브루클린 풍자극
폴 오스터 지음, 황보석 옮김 / 열린책들 / 2005년 12월
평점 :
품절
다양한 인종이 모여 사는 고향 브루클린을 쓸쓸히 자신의 생을 마감하기 위한 장소로 선택한 50대 남자 네이선. 거기서 자신의 죽은 여동생의 아들, 조카 톰을 만나면서 그의 생은 전혀 새로운 국면을 맞게 된다. 자신의 진정한 안식처를 찾아가는 작은 여행이 시작된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외롭다. 대단히 이성적이고 지적인 사람이라도 돈을 휴지로 쓸 만큼 부유한 사람이라 하더라도 혹은 영원히 살 수 있는 사람이거나(혼자 영원한 건 지옥일 거다.) 세계를 쥐락펴락할 수 있을 정도의 권세를 가진 사람이라 할지라도 때로는 본인이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다 하더라도 사람은 누구나 외롭다. 그렇기에 사람은 사랑할 수밖에 없다. 사랑만이 한 사람과 그의 삶을 변화시킬 수 있다. 브루클린은 바로 그런 희망을 그려 내기에 적합한 장소로 작가에 의해 낙점된다. 인종도 성별도 나이도 학력이나 이력도 문제가 되지 않는 곳, 심지어 힘의 논리조차도 아무런 영향력을 발휘하지 못하는 곳으로.
인상 깊었던 몇 부분을 소개해 보고자 한다.
"(전략)제 실존의 호텔은 어디인가요, 해리? 잘은 모르겠지만 어쩌면 다른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문제와 관계가 있을 것 같아요. 이 쥐구멍 같은 도시에서 벗어나 내가 존중하고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는 삶 말이에요."(중략)
"자네의 그 작은 이상향(실존의 호텔)은 어디에 있는 건데?"
"이 나라 밖의 어딘가에 있겠지요. 거기에서 살고 싶어하는 사람을 다 받아들일 수 있을 만큼 넓은 땅과 충분한 건물이 있는."
톰과 해리가 주고 받은 말이다. 톰은 의미없는 삶에 지쳐 있었고 큰 희망도 없는 상황이었다. 현실은 그에게 아무런 만족을 주지 못하고 있다. 그래서 이 나라 밖이라고 못 박고 있는 것일까? (사실 미국이라는 나라가 그렇지 않은가, 실존의 호텔과는 거리가 먼 나라다.) 그는 사랑하고 존중하는 사람들과 더불어 사는 삶을 기대하고 있다. (톰은 정말 착한 남자다.) 나는 나의 실존의 호텔을 생각했다. 이상하게도 내가 아는 만큼 꿈 꿀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조급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기에 다양한 분야의 책들을 더 많이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또 내가 믿는 하나님과 내 삶의 신념을 더 확고히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오, 나는 얼마나 좁은가? 지경을 넓혀야만 한다.)
"내가 길로 들어선 것은 오전 여덟시, 세계 무역 센터의 북쪽 타워에 첫 번째 비행기가 충돌하기 딱 46분 전인 2001년 9월 11일 오전 여덟시였다.(중략) 하지만 그 때는 아직 오전 여덟시였고, 눈이 시리게 푸른 하늘 밑에서 거리를 따라 걷는 동안 나는 행복했다. 그 때까지 살아왔던 어느 누구 못지않게 행복했다."
주어진 생에 족하자는 뜻이리라. 고난과 역경이 올지라도 - 우리가 의도했든 그렇지 않았든 - 그저 담담하게 받아 들이라는 얘기로 들렸다. (나는 그렇게 이해했다. 아니라고 화를 내도 어쩔 수 없다.) 생이 우리에게 주는 고통에 너무 낙심하고 절망하지 말라고 말하는 것만 같다. (해리는 절망 때문에 죽었다.)
"어느 경우에나 그것은 사랑의 문제일 수 밖에 없을 터였다."
절대적으로 공감한다. 이보다 더 정확한 표현은 없을 것이다. 모든 삶의 문제는 사랑에 귀결된다. 그러기에 사랑하는 법을 배우려 한다. 치열하게 주어진 삶을 사랑하려 한다.
가슴 한 가득 푸근한 정이 넘치게 하는 소설이다. 밝고 따뜻한 색을 잔뜩 입힌 아름다운 수채화 한 편을 감상한 느낌이다. 폴 오스터는 훌륭한 이야기꾼이다. 이 책으로 혹 영화를 찍는다면 꼭 보러 가야겠다고 마음 먹었을 정도다. 무엇보다 작위적인 느낌이 없어서 참 좋았다. 조용히 삶을 뒤돌아 보게 하는 힘이 이 책에는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