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7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윤상인 옮김 / 민음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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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년 전 한 카페에 올라온 서평을 읽고는 "이 책 꼭 읽어봐야지."라고 결심했고, 얼마 뒤 저는 그 계획을 실행에 옮겼습니다. 작가의 이름을 소리내 읽으면 안 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죠. (리뷰는 책을 낳고 책은 리뷰를 낳는 법이죠.)  

 <그 후>는 이렇듯 아주 평범한 이유로 저와 인연을 맺은 책입니다. 이 책을 읽고 저는 나쓰메 소세키(본명 : 나쓰메 긴노스케)를 가볍지 않은 마음으로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일본에 대한 편견에 사로잡혀 있던 당시의 제게 소세키는 '일본이란 나라를 편견없이 한번 제대로 관찰해 보자'라는 생각까지 하게 만들었지요. 문학만큼 이에 적합한 방식도 없다는 판단을 내렸고, '그 후' 저는 꽤 여러 일본 작가의 작품들을 접해 보았습니다. 물론 그 탐구는 느리지만 끊이지 않고 지금까지 이어지고 있습니다. 뭐, 그다지 심도 깊은 작업을 하고 있는 건 아니지만 말입니다. 아무튼 소세키는 제게 그런 작가입니다.  

 "왜 이런 책이 많이 읽히지 않는 걸까."
저는 평소 무척 안타까운 마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애정을 가득 담아서 이 책을 한번 소개해 보고자 합니다. 제 소개 글이 비록 많이 부족하더라도 이 글을 읽은 분들께서는 책을 직접 읽어 보신 후, 녀석의 진가를 판단해 주셨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나쓰메 소세키는 늦깎이 작가였습니다. 그가 작가로 입문한 때는 러일전쟁이 막바지로 치달을 즈음이었습니다. 사회, 경제적으로 지위가 보장된 제국대 교수가 당시로서는 이례적으로 소설을 발표해 상당한 주목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그가 늦은 나이(39)에 소설을 쓴 이유에 대해 뚜렷하게 밝혀진 바는 없습니다. 아무튼 처녀작 <나는 고양이로소이다>(1905)를 문예지에 연재하면서 시작된 그의 작가 인생은 그 후 10년간 이어졌고 매우 왕성한 활동을 보여주었습니다. 1916년 지병으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말이죠. 

 <그 후>는 <산시로>, <문>과 함께 전기 삼부작이라고 일컬어지고 있는 작품으로 서구 리얼리즘의 영향을 받았기 때문에 초기 작품인 <나는 고양이로소이다> 나 <도련님>에 비해 작풍이 안정적이라는 평을 듣고 있습니다. 이해를 돕기 위해 전기 삼부작에 대해 잠깐 언급하고 넘어가겠습니다. <산시로>는 시골에서 올라온 산시로란 청년이 동경 제국대학에 입학한 후 겪게 되는 일을 그린 청춘 방황 소설입니다. <문>은 친구를 배반하고 친구의 애인을 아내로 삼은 후 죄의식과 함께 살아가는 중년 남자의 내면을 무거운 필치로 그린 작품입니다.  

 그리고 오늘의 메인 북인 <그 후>는 <산시로>와 <문>의 중간쯤에 위치한 작품이라 할 수 있죠. 간단히 줄거리를 짚어보겠습니다. 이 작품은 미치요라는 한 여자를 사이에 두고 두 남자가 대립하는 형태로 이야기가 진행됩니다. 주인공 다이스케와 히라오카, 스가누마는 대학을 함께 다닌 막역한 친구들입니다. 미치요는 그 중 스가누마의 여동생입니다. 어느 날 스가누마가 장티푸스에 걸려 병사病死하자 다이스케는 자청해서 히라오카와 미치요의 결혼을 주선합니다. 미치요를 마음에 품고 있었는데도 말이죠. 몇 년 후 미치요가 불행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데다 병에 걸린 사실을 알게 되자, 다이스케는 미치요에 대한 연민을 품게 되고 그 연민이 애틋한 사랑의 감정을 다시 불러 일으키게 되면서, 이야기는 복잡하게 얽히기 시작합니다.  

 저는 이 작품의 특징을 크게 세 가지 정도로 정리하고 싶습니다.
 첫째, 표면적으로는 뻔한 통속소설처럼 보이지만 그 이면에 사회 비판적 내용이 다분하다는 사실입니다. 특히 다이스케와 그의 아버지의 대결 구도가 무척 흥미롭습니다. 대학 졸업 후 한번도 직업을 가져본 적이 없는 다이스케는 아버지가 주는 돈으로 비교적 풍족하게 살아갑니다. 아버지 나가이는 '성실과 열의'를 최고의 덕목으로 생각하기 때문에 무위도식하는 둘째 아들이 늘 못마땅합니다. 그러나 정작 나가이 자신은 부도덕한 수단으로 사업을 경영하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다이스케 눈엔 아버지가 속물로 보일 수밖에 없습니다.  

 둘째, 일본적 서정성이 내재돼 있으면서도 누구도 흉내낼 수 없을 거 같은 소세키적인 아니, 소세키만의 '심미주의'가 돋보입니다. 눈에 선명한 색감과 코를 자극하는 여러 종류의 향기, 거기에 조용하게 들리는 빗소리는 환상적인 느낌마저 줍니다. 또 작가는 손의 움직임, 옷 차림, 머리 모양 그리고 방 안이나 바깥 풍경 등을 세밀하게 천천히 묘사함으로서 종종 어떤 의도를 보여주기도 합니다. 영화로 치자면 롱테이크로 촬영한 장면을 보는 듯하달까요. 아무튼 이보다 오감을 자극하는 책을 저는 만나본 일이 없습니다.  

 셋째, 제목의 의미를 꼽을 수 있습니다. <그 후>에는 '그 후'의 이야기가 나오지 않습니다. 주인공이 마지막에 어떤 선택을 하고 난 다음 이야기는 독자의 몫으로 돌리고 있기 때문이지요. 전기 삼부작 중 이 책이 중간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은 위에서도 언급했습니다. 그렇지만 그 다음에 전개될 이야기가 전기 삼부작의 마지막 작품인 <문>의 스토리대로 흐를 것이라 미리 결론지을 필요는 없습니다. <산시로>, <그 후>, <문>은 어떤 의미에선 서로 같은 선상에 있지만 또 어떤 의미에선 독립된 이야기라고 생각해도 상관없기 때문이지요. 작품은 작가의 손을 떠나면 이미 작가 혼자만의 것이 아닙니다. 그러니 독자로서의 권리를 행사해도 큰 무리는 없을 거 같습니다. 아무튼 그 후 어떻게 됐을지는 각자의 상상에 맡기는 것도 나쁘지는 않겠지요.   

 저는 나쓰메 소세키의 전작을 꿈 꾸는 사람입니다. 그렇지만 너무 서둘러 끝을 내버리면 그것 또한 무척 아쉬울 거라는 생각에 조금은 천천히 그를 만나려 합니다. 그래서 조금 더 갈 길이 남아 있음을 다행으로 생각합니다. 그리고 지금 저로 인해 그의 작품 세계로 첫 발을 내딛는 당신에게 저는 알베르 카뮈가 장 그르니에의 <섬> 서문에 썼던 마지막 문장을 패러디하는 것으로 소개글을 갈음할까 합니다. 

 "...... 나는 아무런 회한도 없이, 부러워한다. 오늘 처음으로 나쓰메 소세키를 만나게 되는 저 낯 모르는 젊은 사람을 뜨거운 마음으로 부러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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