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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들의 범죄
요코제키 다이 지음, 임희선 옮김 / 샘터사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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0. 미뤘던 책을 드디어 읽었다. 챌린지 앱의 도움을 이렇게 받는구나.

0-1. 연달아 실망하다 도착한 책의 제목과 내용을 보고 마음이 갔다. 문제는 평균 이하로 떨어진 독서 속도였다. 하지만 읽었고, 이렇게 쓴다.

1. 1988년 일본 이토시 사가미 해안에서 34세 여성 진노 유카리의 시체가 발견된다. 그리고 총 세 장으로 구성된 소설이 시작된다. 그녀들의 사정, 그녀들의 거짓말, 그리고 그녀들의 비밀. 대기업 홍보과에 다니고 있는 독신 마유미와 뉴스에서 피해자로 지목된 유카리의 시점이 빠르게 오간다. 접점이랄 게 없어 보이는 두 사람의 삶이 나열되다 갑자기 진노 도모아키라는 인물이 나타난다. 마유미에게는 대학 선배, 유카리에게는 남편이다. 마유미는 도모아키가 대학 시절 벌인 범죄의 목격자였지만, 괜찮은 상대와 결혼해야 한다는 압박감에 그가 늘어놓는 변명에 넘어간다. 도모아키가 결혼한 줄 몰랐던 마유미는 결혼을 전제로 그와 교제를 시작한다. 반면 유카리는 그와 결혼한 지 8년 차지만 시부모의 아이 압박, 그리고 남편의 무관심에 지쳐가다 우연히 금전적인 걱정 없이 혼자 사는 미도리와 친해지면서 자신의 위치가 가족이 아닌 하인임을 깨닫지만, 오랜만에 전화한 친정 식구와의 단절감에 자신이 돌아갈 곳은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에 혼란스러워한다. 1장에서는 도모아키가 유부남임을 알게 된 마유미와 결혼 생활에 회의감을 느끼던 중 남편이 외도한다는 사실을 안 유카리의 만남을 시사하며 끝난다. 2장과 3장에서는 유카리의 실종과 죽음 이후를 다룬다. 2장에서 새로운 등장인물이 무대 위에 오른다. 바로 형사 구마자와 리코다.

책 제목을 잊지 않았다면 어렵지 않게 예측 가능한 전개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찜찜함이 남는다. 작가는 정말 독자에게 모든 사실을 다 보여줬을까? 몇 년 전까지만 이런 류의 소설에 법칙이 있었다. 예측 가능한 전개, 반전, 그리고 범인 검거와 나름의 교훈을 남긴다. 하지만 이 책의 결말은 법칙을 빗나간다. 그들은 어떤 정의를 실현하기 위해 범죄에 가담한 게 아니었다. 각각의 뚜렷한 욕망이 존재했고, 그 욕망은 사건과 관계된 일이 해결되고 나서도 형태만 달리했을 뿐, 그 자리에 존재한다. 그것들이 정상적이지 않아 보일지라도, 작가는 그 심리와 모습을 그대로 드러낸 후 결말부에 강렬한 한 문장을 남긴다.

저 사람에게, 아니 우리 여자들에게 오늘 새롭게 시작된 헤이세이라는 세상은 어떤 시대가 될까.

385p

이는 작가가 차례 앞에 심은 문장과 닮아있다.

앞으로의 세상은 우리 여자들에게 새로운 시대가 될 거야.

최근 박완서 작가의 소설을 필사하고 있어선지, 1970-80년대 여성들이 품었던 희망들이 겹쳐 보였다.

후남이는 거듭한 고배로 의식은 더욱 명료해져 눈 아래 거대한 도시, 그 갈피에 여자 길들이기의 아직 끝나지 않은 음모가 공룡처럼 징그럽게 도사리고 있음까지를 분명히 볼 수 있었다. "칼아, 되살아나렴." 그녀는 주문처럼 이 소리를 외며 거듭거듭 고배를 들었다.

박완서 「아직 끝나지 않은 음모3」 중

박완서 작가가 일상을 통해 한계와 희망을 드러냈다면, 요코제키 다이는 범죄라는 욕망의 직접적인 실현을 통해 변화의 의지를 보여준다. 단지 그럴 뿐이다. 그 욕망을 어떻게 읽을 것인지는 온전히 독자의 몫으로만 남겨둔다. 나는 이 점이 좋았고, 또 부러웠다. 작가의 직접적인 끼어듦 없이도 욕망이 날 것의 상태로 올라와, 제각각 해석될 수 있지만, 결국 남는 건 작가가 심어둔 굵직한 문장이다. 앞으로 변할 여성의 삶을 이야기하면서 욕망을 거세하지 않고, 연대를 강요하지도 않는다. 작가 요코제키 다이에 흥미가 생겼다. 일본 작가에게 관심이 생긴 건 오랜만이다. 그의 다른 작품들도 읽어봐야겠다.

2. 읽으면서 피터 스완스의 「죽여마땅한 사람들」이 생각나기도 했고, 몇 년 전 좋아했던 미드 〈How to Get Away with Murder(범죄의 재구성)이 떠오르기도 했다. 뒤틀린 연대와 욕망은 언제나 즐겁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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햇볕이 아깝잖아요 - 나의 베란다 정원 일기
야마자키 나오코라 지음, 정인영 옮김 / 샘터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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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 즈음에 엄마께서 무화과 화분을 사 오셨다. 겨우 내 허리 정도 오는 무화과나무는 정원 생활에 대해 잘 모른다고 다 죽어가는 걸 판 게 아닌가 의심될 만큼 비실댔지만 튼튼하게 자라 열매 수확의 시기가 되면 두세 개 정도의 무화과가 열렸다. 물론 단맛도 없고 비실거리는 무화과 열매 두 세 개로는 허기를 달래는 것조차 어려워 결국은 마트에서 박스째 무화과를 구입하게 되지만 열매가 열릴 때면 그 맛없는 과실을 먹겠다고 반으로 쪼개고 입을 벌리게 된다.

작년에는 무화과나무를 키우는 걸로는 성이 안 차시는지 아파트 화단에 작은 고추밭을 만드셨다. 매연을 먹고 자란 고추는 아무리 커도 약지 크기를 넘지 못했지만, 아파트 뚱냥이의 안식처가 되기도 했고 종종 이 작은 고추를 서리하겠다고 주위를 살피는 주민이 적지 않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직접 채소를 키우는 목적은 건강한 채소를 먹기 위해서인데 코너 쪽에 위치한 고추밭은 주인인 엄마보다 차를 매연을 더 많이 만났지만 더는 열리지 않게 될 때까지 쉴 새 없이 새로운 고추를 키워냈다.

성공적이진 않지만 무화과나무와 고추밭 가꾸기에 재미가 들린 엄마는 귀농 이야기를 심심찮게 꺼내시지만 먼 귀농보다는 베란다 정원 같은 게 훨씬 더 현실적이라는 생각을 자주 했었지만 마땅한 책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쯤 야마자키 나오코라 작가의 정원 에세이집 「햇볕이 아깝잖아요 : 나의 베란다 정원 일기」를 만났다.


소설 「타인의 섹스를 비웃지 마라」로 익숙한 작가 야마자키 나오코라는 일본의 흔한 여자 이름 중 하나인 나오코와 콜라의 합성어인 나오코라 Nao-cola라는 특이한 필명을 사용한다는 작가 소개에서부터 힙함이 느껴졌는데, 역시나 글이 필명을 따라간다고 에세이 하나하나가 흥미로웠다.


1966년 5월 1일

해 질 녙의 벚꽃이 가장 아름답다. 몇 번이고 바라본다. 전부 내 것이다.

다케다 유리코 「후지 일기」 상권 中


첫 에세이에 작가 다케다 유리코의 「후지 일기」 에세이의 일부를 인용하는데, 지금 내가 보고 있는 풍경을 내 것이다,라고 표현하는 게 재밌기도 하고 공감이 갔다. 방 안에서 보는 노을, 작업실로 올라가는 길에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꼭 내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글이 잘 써지지 않을 때면 부러 그 창 앞에 서서 너머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 한편이 고요해지고는 한다. 에세이에서의 풍경은 자연이지만, 나에게 풍경은 그 무엇이든 상관없다. 지금은 건너편 건물의 복도인데, 사무실이 있는지 직원 몇 명이 담배를 피우고 있기도 하고 너무 이르거나 늦은 시간에는 아무도 없는 황량한 콘크리트 벽이 보인다. 사람이 있을 때는 힐끔 시선이 닿았다 빠르게 떨어지지만 사람이 없을 때는 오로지 내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밀려들었다.


베란다가 남향이라 낮에는 빛이 많이 들어온다. 햇볕을 쬐어 세로토닌을 몸에 저장하면 우울증 예방에 좋다고 한다. 아침에 빛을 느껴 체내 시계를 어지럽히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움직이는 것이 우리 집에 찾아온다 中


정원 에세이집 「햇볕이 아깝잖아요 : 나의 베란다 정원 일기」의 또 다른 특이점이라면 정원을 주제로 하고 있지만, 마치 소설처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바뀌는 게 아니라 작가가 "내 것이다."라고 자랑하는 풍경이 있는 집이 주된 배경이 된다는 점이었다. (물론 이 전의 이야기를 다루기도 하지만) 그러다 보니 책을 읽으면서 나 역시 지금 내가 공유하고 있는 공간과 관련된 기억이 자꾸 겹쳐졌다. 앞서 언급한 작업실 너머 보이는 풍경이라든가 앞으로 쓸 작업실 내에 내가 하고 있는 작업에 대한 이야기가 그러할 것이다.

사람과 장소, 일 사이의 모든 관계는 시간과 함께 계속 변한다. 거리가 생기는 시기도 있다.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고, 다시 가까워지고, 관계도 파도처럼 출렁인다. 지금은 가드닝과 멀어졌지만, 어느 순간 다시 가까워질 수 있겠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처럼 한 번 맺어진 관계는 가늘어지기는 해도 끊어지지는 않는다.

그 이후의 이야기 中


책 내용 자체가 굉장히 힘이 됐지만, 이 책이 이상적으로 남았던 가장 큰 이유는 마지막 장인 <그 이후의 이야기>때문이었다. 마지막 장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재밌는 에세이 정도로만 치부했던 마음이 달라졌다. 취미 생활에 관련된 에세이는 대부분 지속성을 가지고 있다. 오랜 시간 해왔으며 앞으로도 끊임없는 애정을 줄 취미 생활. 그러다 보니 내가 아예 관심을 갖지 않고 있었던 취미 생활에 대한 에세이는 대리 만족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비교하게 만들기도 한다.

최근 나는 글을 쓰고 있다. 블로그에 쓰는 일기뿐만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소설을 쓰고 있다. 하지만 그 소설을 쓰면서 자꾸만 작아지고 조급해진 나를 발견했다. 다른 사람들이 내 글이 아닌 나에게 좋은 글 쓰기 습관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때면 더더욱 그렇다. 사실 나는 꽤 오랜 시간 소설을 쓰지 않았다. 다시 쓰려고 하니 손이 벌벌 떨리고 낯설고 투박해진 문장에 지레 겁을 먹는다. 그럼에도 계속 무언가를 썼다는 수많은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글쓰기에 대한 나의 열정은 작고 보잘것없어진다. 하지만 무언가를 좋아하는 것에 대한 거리, 그것도 지금 현재 멀어진 상태에서 그 거리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다시 가까워질 순간을 기다리는 사람의 글을 읽으면서 조급해진 마음이 조금은 진정이 됐다. 늘 잘 풀리지는 않지만 가끔은 웃으면서 타자를 치기도 하고, 지금 쓰고 있는 게 있어 미루고 있지만 번뜩하는 소재에 눈을 반짝인다. 작가처럼 나 역시 내가 다시 소설 쓰기에 열정을 갖게 되기를 간절하게 바랐을 거라 생각하면 가슴 한편이 뒤늦게 두근두근 떨린다. 멋 훗날 내가 다시 소설 쓰기와 멀어진다고 해도 지금처럼 타격을 입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든다. 이렇게 타인의 글은 나를 보호하기도 하고 성장시키기도 한다.


다시 인터넷 사이트를 뒤지다가 결국 자동관수기를 구입하고야 말았다. 자그마치 30만 원짜리였다. 하지만 장미가 죽고 나서 내가 겪을 고통과 슬픔보단 저렴한 값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여행하기 위해 中


물론 베란다 정원이라는 애정 가득한 소재에 대한 글이다 보니 다양한 정원 가꾸기 정보들과 함께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고는 이해하기 힘든 소비에 대한 언급 역시 글을 읽는 재미를 더한다.


그래도 나에게는 인간 세상과 잘 지내는 것이 중요하니까, 트위터에 '태풍이 좋아' 같은 말을 남기지는 않는다. 다만 내가 쓰는 글에서는 이런 경솔함도 표현하고 싶다. 어쨌든 나는 태풍이 부는 날 태어났으니까.

태풍이 불던 날 中


"나는 내 얼굴의 생김새와 전혀 상관없이 글을 쓴다.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외모를 가진 작가들이 자신의 얼굴을 자신만만하게 여긴다고 해도 비난할 생각은 없다. 외모를 중시하는 사람들의 태도 역시 존중한다. 사람은 제각각이니 내가 하는 일도 존중해 줄 수 없을까. 서로 너그럽게 봐줄 수는 없을까. …"

기형을 사랑하는 마음 中


누구의 인생에든 그저 시간이 지나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때가 있다. 그런 시기에는 몸과 마음을 평소처럼 유지하기가 힘들다. 그럴 때는 겨울잠을 자면서 이 시기가 지나가기를 믿어보자.

흙 속의 작은 씨앗을 찾으며 나이를 먹는다 中


해충을 제거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익충과 해충을 구별하는 기준도 인간의 시선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가능하면 죽이고 싶지 않다. … 나를 괴롭게 할 때는 없어지길 바라면서도 죽는 장면은 가능한 한 보고 싶지 않고, 자연과 함께 사라져주면 좋겠다.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사고방식이다.

세상의 솎음질에 익숙해진다는 것 中


게다가 가끔씩 심장을 찌르는 말 역시, 잠깐 호흡을 멈추고 주변을 돌아볼 수 있게 만들어준다. 책을 읽다 일본에서 일어난 지진 사건을 예시로 들며 전력을 아끼려고 노력한 일화를 읽으면서 나 역시 충전이 다 됐지만 귀찮다는 이유로 계속 꽂아둔 노트북과 핸드폰 충전의 콘센트를 빼기도 했다.

책을 다 읽고 보통은 작업실에 꽂아 놓지만 여주 심기와 아보카도 나무 키우기는 엄마께서 좋아할 대목이라 일단 집에 가져가 거실 미니 책장에 꽂아놓기로 했다. 그리고 이 리뷰를 다 쓰고 나면 그동안 미루고 있었던 토마토와 바질 키우기에 대해 찾아볼 생각이다. 누군가 베란다 정원에 관심이 있거나 내가 꾸준히 할 수 있을까 걱정하고 있다면 꼭 이 책을 선물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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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
도제희 지음 / 샘터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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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도르 도스토옙스키, 내가 그의 책을 마지막으로 읽었던 게 언제였는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가장 최근은 뮤지컬 까라마조프를 보러 가기 전으로 기억하는데, 초반만 살짝 들췄다 덮었으니 읽어다고 하기에는 양심이 찔린다. 내 최초의 기억은 학교 도서실이다. 그가 쓴 책을 호기롭게 집어 들었던 교복 입은 학생은 세 글자 이름에만 익숙해졌던 머리로 등장인물을 쫓아가느라 진이 빠졌고, 그렇게 애써 책을 읽었는데 내용조차 제대로 기억하지 못했다. 그 뒤로도 몇 번의 시도가 이어졌지만, 쉽지 않았다. 그랬기에 누군가 그의 책을 들이민다면, "저는 그 작가를 별로 좋아하지 않아서요."라고 대답하는 게 가능했고, 이 책을 읽고 있던 방금 전까지 작업실 멤버인 W가 이 책에 관심을 보이자, 생각보다 재밌긴 한데, 제가 도스토옙스키를 좋아하지 않아서 망설였다 말하는 것 역시 가능했다.


하지만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를 읽으면서 생각이 바뀌었다. 정확히 말하면 생각이 바뀔지도 모른다는 희망이, 읽고 싶은 독서 목록 사이에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을 끼어 넣으며, 꿈틀거렸다. 필자는 「난데없이 도스토옙스키」라는 에세이를 통해 그동안 긴 이름에 지쳤거나 하는 이유로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소설을 제대로 읽어본 적 없었던 이들에게, 근데 말이죠, 이 대목이, 이 인물이, 하면서 자신의 도스토옙스키 덕질에 독자를 적극 영업한다. 게다가 흥미는 가지만, 그의 두꺼운 대표작을 견디길 겁내하는 이들을 위해 친절하게 이 정도의 짧은 단편은 괜찮지 않나요, 하며 들이미니 어니 한 번,이라고 마음이 동하는 건 당연한 수순이 아닌가.


이 에세이가 술술 읽히는 데는 필자가 제가 좋아하는 작가, 그리고 작품을 적극적으로 영업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에 어울리는 그림이 곁들어졌기 때문이었다. 에세이 중간중간 필자는 낯선 이름을 가진 등장인물을 펜으로 쓱쓱 그린 듯한 이미지로 구현해낸다. 그렇게 필자의 손끝에서 탄생한 인물들은 상상력이 부족한 독자가 길을 잃지 않도록 도와준다. 물론 익살스러운 일러스트는 웃음을 자아내기도 하는데, 예를 들면, 단편 「백치」의 등장인물인 나스따시야같은 인물이 되고 싶었다고 고백하며, 전 남친과의 이별에 쿨해지려고 굴지만, 결국 연락을 기다리고 마는 필자의 모습을 나스따시야가 화들짝 놀라며 지켜보고 있다거나, 「스쩨빤치꼬보 마을 사람들」에서 제대로 다뤄주지 않지만, 중요한 역할을 하는 가브릴라에게 어깨동무를 하고, 나는 당신이 가장 우아한 사람인 걸 알고 있다고 말을 거는 필자의 모습은, 책을 읽으며 작게 낙서를 하거나 혹은 속으로 한 마디씩 던지는 흔한 독자의 모습을 너무나도 잘 구현해내고 있다.


"그러면 무미건조하지 않으세요?"

학연, 지연, 혈연은 죄가 없다


책을 읽으면서 가장 와닿았던 말은 바로, 책을 통해 만나는 도스토옙스키의 작품 속 대사였는데, 최근 지나치게 자신을 재단하며 지쳐 있는 내게 꼭 필요한 말이었다. 나를 너무나도 잘 알고 있고, 그렇기에 자꾸만 작아지고, 동시에 그럼에도 내가 만든 윤리의 틀 안에 갇혀 이도 저도 하지 못하고 머리를 쥐어뜯는 나날들에 대한 말. 나에 대한 재단은 사실 타인에 대한 재단으로 이뤄지고, 종종 우리가 위선이라 부르는 예외 역시 그 대상이 됐다. 이와 관련해서는 최근에 블로그에 쓴 글 중에 <예외, 그리고>라는 짧은 글에 담긴 최근 좋아하게 된 나이 차이가 많이 나는 헤테로 커플에 대한 이야기가 떠올랐다. 철저하게 나를 재단하고 윤리적인 사람이 되면 좋겠지만, 가끔은 감정에 이끌려 하나 정도의 예외를 두는 게 중요했구나,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곱씹었다.


인간이 타인과의 작은 공통점만으로도 편향되기 쉬운 존재라는 사실, 언제나 어딘가에 소속되고 싶어 하는 연약한 존재라는 사실을 알고 인정해야 한다는 뜻이다.

학연, 지연, 혈연은 죄가 없다


모든 에세이가 주옥같았지만, 개인적으로 최고를 꼽으라면 <가족끼리 무슨 여행입니까>였다. 해당 편에 쓰인 솔직하면서도 가차없는 언어가 좋았다. 전통적인 가족의 모습이나 규범을 해체하고자 하는 이들의 글은 많이 읽었지만, 그들에 글에는 항상 선이 있었기에, 종종 그래도, 그럼에도,라는 딜레마를 직면할 때가 있었다. 하지만 필자는 거침없다. 이미 에세이를 여는 첫 문장이 "나는 호래자식이다.", 누구든 이렇게 자신을 표현하면 뒤에 어떤 글이 펼쳐져도 이렇게까지 호래자식이라고?,라며 놀라지 않게 된다. 엄청난 기술이다,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리고 이 글은 처음부터 끝까지 제목을 배신하지 않는다. 물론 그 말에 상처받는 다른 가족 구성원의 연약한 마음을 약간 배려하긴 하지만, 앞서 말했듯 "나는 호래자식이다"라고 선언한 이상, 이렇게까지,라고 생각할 사람은 없으리 본다. 오히려 그 약간의 배려를 보며, 이 정도면 그래도 호래자식까지는 아닌 것 같은데,라고 생각하는 이도 있을지도 모른다. 나는 초등학교 이후로 가족 여행이라는 걸 가 본 적이 없기도 하고, 아직까지는 효도를 핑계 삼은 가족 여행 권유(라고 쓰고 강요라고 읽는다. 어떤 의도로 거절하든 속뜻을 들키는 순간 호래자식이 되기 때문이다.)를 걱정하지 않아도 되니, 아, 세상에, 맞아, 까지는 아닌 아, 세상에, 나도 저런 권유를 받으면 이 에세이를 권해야지, 정도의 공감이었지만, 문득 가족 여행을 앞두고 길게 속내를 털어놨던 C 언니의 걱정과 고민의 말들이 떠올랐다. 오래전 일이다 보니 그 걱정과 고민이 이제는 조금 다른 방향으로 변했을지도 모르지만, 아직도 같은 걱정과 고민이 잔류해있다면 언니에게 이 에세이를 권하고 싶다.


공간이란 물리적인 것만을 뜻하진 않는다. 정신적으로도 서로가 독립적 개체라는 사실, 성향도 가치관도 성격도 판이한 한 개인이란 사실을 받아들일 때 누구 하나 상처 입거나 일방적으로 희생하지 않고 서로 행복하게 사랑할 수 있지 않을까.

가족끼리 무슨 여행입니까


그 외에도 "물론이다. 창작이나 연구 활동 역시 연애처럼 자기 자신을 쏟아붓는 '작업'이다. (자기 자신과 화해하는 법)"을 읽으면서 지금은 일이 중요하니 연애는 내 소설 속 인물들이나 실컷 해라,라는 나를 위로한다거나, "아침에 일찍 일어나 근력 강화를 위한 요가를 하기도 한다.(멋있게 나이든다는 것)"를 읽으며 운동하기 싫다는 마음과 싸우기 위해 거금을 필라테스 수업 강의료로 소비하고 있는 지금 내 모습을 떠올리며, 꽤 재밌게 책장을 넘겼다.

필자의 영업에 손을 댄 도스토옙스키의 작품이 필자처럼 내 인생에도 비슷하거나 또 다른 형태의 울림을 줄지, 이 책을 읽기 전처럼 기겁하며 또 책장을 덮을지 모를 일이지만, 영리하게 제가 좋아하는 것을 영업하며 자신의 삶을 솔직하게 써 내려간 이 에세이는 재밌고 유용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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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 세상을 균형 있게 보는 눈 - 시장경제를 알면 보이는 것들 아우름 43
김재수 지음 / 샘터사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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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는 경제가 쉽다 그러고, 또 누군가는 경제가 어렵다고 말한다. 하지만 경제의 쉽고 어려움을 결정하는 건, 경제라는 학문이 가지는 필연적인 약점일 뿐이다. 수식과 글로만 경제를 배우면 경제만큼 쉬운 게 없다고 말할 것이고, 그 안에 사람을 넣으면 경제만큼 어려운 게 없다고 말할 것이기 때문이다.


네, 알아요. 태어나는 순간부터 공평하지 않다는 거. 그렇지만 사는 동안에는 함께 사는 거잖아요. 그러면 자기들이 무언가를 갖는 과정에서 최소한 낙오자는 만들지 말아야죠. 그건 이미 많은 것을 가진 자들의 의무이고 책임이에요.

드라마 <머니게임> 이혜준 대사 中


나는 책 「시장, 세상을 균형 있게 보는 눈」을 읽으면서 드라마 <머니게임>을 떠올렸다. 그리고 이 책의 리뷰를 쓰면서 드라마 후반에 나온 이혜준의 대사를 떠올렸다. 드라마 속 주요 인물들은 대부분 정부의 고위 공무원이다. 서민이라고 묶이지 않는 부류의 사람들. 그 안에서 이혜준은 조금 다른 결을 가지고 있다. IMF로 가족을 잃었고, 가난한 집 안에서 어렵게 공부해 5급 공무원 시험에 합격했다. 그는 이제야 안정적인 직장을 가지게 됐지만, 그래도 가장 현실에 가까운 인물이다. 드라마 속 선택이 서민들에게 미칠 영향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 경제가 어떻게 사람을 배제하고 살아왔는지 잘 아는 사람. 그런 인물이 했던 말이기에 이 책의 리뷰를 쓸 때, 이 대사를 꼭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경제를 다룬 인문 교양서를 읽다 보면, 쏟아지는 낯선 용어에 휩쓸려, 저도 모르게 사람을 지우는 오류를 범하게 되니까.


경제학적 사고방식의 첫걸음은 모든 일에 어떤 대가를 지불하는지 확인하는 일입니다. 저는 이를 '양면의 얼굴 보기', 또는 '무대의 뒷면 보기'라고 이름 붙입니다. 보통 미디어는 한 면만 보여줄 때가 많습니다.

피할 수 없는 선택의 대가 中


필자의 말처럼 경제는 무 자르듯 가를 수 있는 게 아니다. 나 역시 책을 읽는 내내 설득과 의심 사이를 바쁘게 오갔다. 책은 세 개의 장으로 나뉘어 있는데, 1장에서는 주로 자유 경제에 대해 다룬다면, 2장과 3장은 경계가 모호하다. 특히 2장은 자유경제의 논리로 당연해 보이는 불공평한 일을 언급하고, 그 일이 안고 있는 근본적인 문제를 꼬집는다.


그렇다면 남녀 임금격차는 여성에 대한 차별에서 비롯되지 않았다고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요? 저는 여전히 차별이 존재한다고 판단합니다. 아이와 부모를 돌보는 일을 여성 책임으로 떠넘기는 가정과 사회의 문화에 차별이 존재합니다. 바로 이 때문에 여성이 유연한 업무 시간을 선호하고 상대적으로 적은 임금을 받아요.

노동은 정당하게 평가받고 있을까


경제학 교과서는 외부효과를 중요성에 비해 너무 가볍게 다룹니다. 이웃과 사회가 함께 지불한 고통스러운 사례를 최대한 많이 담아야 합니다.

기업은 왜 비용과 책임을 떠넘길까?


특히 남자와 여자의 임금 차이와 대기업 위주의 경제 발전 정책과 관련된 환경 문제를 읽는데, 앞서 경제적인 논리를 들이밀 때는 이해를 하면서도 불쑥 튀어나오는 모난 마음을 누르기가 어려웠지만, 근본적인 문제, 그리고 필자가 사회적인 위치에서 현재 경제학 교과서에 부족한 지점을 집어주는 게 좋았다.


하지만 우리 인간은 불공정한 결과를 처벌하고 싶은 욕망이 있습니다. 불공정을 향한 복수가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는 이기심을 이깁니다.

주인-대리인 문제는 무책임한 기업을 만들까


갑질을 거부하는 것은 바로 외부 대안이 존재하는지에 달려 있습니다. 다른 대안이 있으면 떠날 자유가 있어요. 갈 곳이 있는 사람은 얼마든지 갑질을 거부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 않은 을은 갑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습니다.

갑질을 막을 수 있을까


관련 도서를 읽고 리뷰를 남길 때마다 느끼지만, 일반 사람들에게 정치와 경제는 늘 다루기 어려운 문제로 다가온다. 잘 알지 못하기에, 잘 알 수 있는 기회가 없기에 접근조차 할 수 없고, 막상 그런 전문 지식이 필요한 상황에서는 가짜 뉴스에 휘둘리게 된다. 물론 이 책 한 권으로 모든 일에 통달할 수는 없겠지만, 그래도 이를 계기로 다음에 읽게 될 경제 관련 서적은 조금 더 술술 읽혀가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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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새를 너에게
사노 요코 지음, 히로세 겐 그림, 김난주 옮김 / 샘터사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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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하루 종일 활자에 둘러싸여 있다보면, 허상의 활자가 아닌, 무게감이 느껴지지 않는 그림책의 위로가 필요해지는 순간이 온다. 오늘이 딱 그랬다. 진전 없이 자료 조사만 사흘째, 이럴 줄 알았으면 학생 때 책상 앞에서 수업이라도 열심히 들어 놓을 걸 싶다가도, 그래도 자료 조사할 때가 좋은 게 아니냐, 쓰기 시작하면 자괴감과 막막함에 숨을 쉴 수 없게 될 걸 생각하면 물러설 길이 없다. 지금 주문해둔 마음 공급용 동화책이 도착하지 않아 임시방편으로 집어 든 책이 바로 사노 요코 작가의 「나의 새를 너에게」였다. 신작이라니, 사노 요코 산문집 뭐라고 시리즈 이후 오랜만이다. 오래전이라 이 작가가 어떤 작가의 글이 어떻게 남았는지, 기록으로 밖에 남지 않았지만, 거부감이 들지 않는 거 보니 그때도 마음 공급용으로 잘 썼나 보다.

짧은 그림 동화 책인 「나의 새를 너에게」는 이마에 우표가 붙은 자그만 사내아이로부터 시작된다. 사내아이를 받은 의사는 새로운 발견으로 노벨상을 받을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우표를 훔치고, 그 우표는 의사의 아내, 도둑, 가난한 소년, 하숙집 아주머니, 하숙집 남편, 뱃사람 등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고 거쳐 한 가정집에 소중하게 보관된다. 우표는 그 우표를 소유한 사람의 사고에 따라 귀중하게 여겨지기도 하고, 흔해빠진 물건으로 취급되지만, 모두들 우표에 그려진 새와 정체불명의 언어에 매료된다. 그리고 한 여자가 그 우표의 소유자가 된다. 우표는 그렇게 너와 나를 잇고, 하나는 둘이 된다.


줄거리만 늘어놓으니 어딘가 흔해빠진 이야기처럼 느껴지지만, 사람과 사람 손에서 전달되는 우표의 여정을 따라가다 보면 불쑥 내 이마에도 우표가 붙어있지 않았을까,라는 엉뚱한 상상을 하게 된다. 그렇다면 내 우표는 어디를 떠돌고 있을까, 내 우표를 훔친 첫 번째 사람은 사내아이처럼 의사일까, 아니면 부모님일까, 그도 아니면 실수로 떨어져 엄마 자궁 속을 헤매고 있을까. 내가 그 누구도 깊이 사랑하지 않고, 엄마 곁에 껌딱지처럼 붙어있는 건, 그 이유 때문인가. 엄마가 내 우표를 품고 있기 때문에. 상상력이 살짝 가미된 그림책은 나를 데리고 어디로든 떠난다.


일상에 지쳐 잠시 마음을 보충해야 한다면, 이런 엉뚱한 상상이 허용되는 사노 요코의 신비한 글 속에 시간을 나눠주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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