햇볕이 아깝잖아요 - 나의 베란다 정원 일기
야마자키 나오코라 지음, 정인영 옮김 / 샘터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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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작년 즈음에 엄마께서 무화과 화분을 사 오셨다. 겨우 내 허리 정도 오는 무화과나무는 정원 생활에 대해 잘 모른다고 다 죽어가는 걸 판 게 아닌가 의심될 만큼 비실댔지만 튼튼하게 자라 열매 수확의 시기가 되면 두세 개 정도의 무화과가 열렸다. 물론 단맛도 없고 비실거리는 무화과 열매 두 세 개로는 허기를 달래는 것조차 어려워 결국은 마트에서 박스째 무화과를 구입하게 되지만 열매가 열릴 때면 그 맛없는 과실을 먹겠다고 반으로 쪼개고 입을 벌리게 된다.

작년에는 무화과나무를 키우는 걸로는 성이 안 차시는지 아파트 화단에 작은 고추밭을 만드셨다. 매연을 먹고 자란 고추는 아무리 커도 약지 크기를 넘지 못했지만, 아파트 뚱냥이의 안식처가 되기도 했고 종종 이 작은 고추를 서리하겠다고 주위를 살피는 주민이 적지 않을 정도로 인기가 많았다. 직접 채소를 키우는 목적은 건강한 채소를 먹기 위해서인데 코너 쪽에 위치한 고추밭은 주인인 엄마보다 차를 매연을 더 많이 만났지만 더는 열리지 않게 될 때까지 쉴 새 없이 새로운 고추를 키워냈다.

성공적이진 않지만 무화과나무와 고추밭 가꾸기에 재미가 들린 엄마는 귀농 이야기를 심심찮게 꺼내시지만 먼 귀농보다는 베란다 정원 같은 게 훨씬 더 현실적이라는 생각을 자주 했었지만 마땅한 책을 찾지 못하고 있을 때쯤 야마자키 나오코라 작가의 정원 에세이집 「햇볕이 아깝잖아요 : 나의 베란다 정원 일기」를 만났다.


소설 「타인의 섹스를 비웃지 마라」로 익숙한 작가 야마자키 나오코라는 일본의 흔한 여자 이름 중 하나인 나오코와 콜라의 합성어인 나오코라 Nao-cola라는 특이한 필명을 사용한다는 작가 소개에서부터 힙함이 느껴졌는데, 역시나 글이 필명을 따라간다고 에세이 하나하나가 흥미로웠다.


1966년 5월 1일

해 질 녙의 벚꽃이 가장 아름답다. 몇 번이고 바라본다. 전부 내 것이다.

다케다 유리코 「후지 일기」 상권 中


첫 에세이에 작가 다케다 유리코의 「후지 일기」 에세이의 일부를 인용하는데, 지금 내가 보고 있는 풍경을 내 것이다,라고 표현하는 게 재밌기도 하고 공감이 갔다. 방 안에서 보는 노을, 작업실로 올라가는 길에 창밖으로 보이는 풍경은 꼭 내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다. 글이 잘 써지지 않을 때면 부러 그 창 앞에 서서 너머의 풍경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 한편이 고요해지고는 한다. 에세이에서의 풍경은 자연이지만, 나에게 풍경은 그 무엇이든 상관없다. 지금은 건너편 건물의 복도인데, 사무실이 있는지 직원 몇 명이 담배를 피우고 있기도 하고 너무 이르거나 늦은 시간에는 아무도 없는 황량한 콘크리트 벽이 보인다. 사람이 있을 때는 힐끔 시선이 닿았다 빠르게 떨어지지만 사람이 없을 때는 오로지 내 것 같다는 생각이 자꾸 밀려들었다.


베란다가 남향이라 낮에는 빛이 많이 들어온다. 햇볕을 쬐어 세로토닌을 몸에 저장하면 우울증 예방에 좋다고 한다. 아침에 빛을 느껴 체내 시계를 어지럽히지 않도록 조심하는 것이 중요하다는 이야기다.

움직이는 것이 우리 집에 찾아온다 中


정원 에세이집 「햇볕이 아깝잖아요 : 나의 베란다 정원 일기」의 또 다른 특이점이라면 정원을 주제로 하고 있지만, 마치 소설처럼 시간의 흐름에 따라 바뀌는 게 아니라 작가가 "내 것이다."라고 자랑하는 풍경이 있는 집이 주된 배경이 된다는 점이었다. (물론 이 전의 이야기를 다루기도 하지만) 그러다 보니 책을 읽으면서 나 역시 지금 내가 공유하고 있는 공간과 관련된 기억이 자꾸 겹쳐졌다. 앞서 언급한 작업실 너머 보이는 풍경이라든가 앞으로 쓸 작업실 내에 내가 하고 있는 작업에 대한 이야기가 그러할 것이다.

사람과 장소, 일 사이의 모든 관계는 시간과 함께 계속 변한다. 거리가 생기는 시기도 있다. 가까워졌다가 멀어지고, 다시 가까워지고, 관계도 파도처럼 출렁인다. 지금은 가드닝과 멀어졌지만, 어느 순간 다시 가까워질 수 있겠지.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처럼 한 번 맺어진 관계는 가늘어지기는 해도 끊어지지는 않는다.

그 이후의 이야기 中


책 내용 자체가 굉장히 힘이 됐지만, 이 책이 이상적으로 남았던 가장 큰 이유는 마지막 장인 <그 이후의 이야기>때문이었다. 마지막 장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재밌는 에세이 정도로만 치부했던 마음이 달라졌다. 취미 생활에 관련된 에세이는 대부분 지속성을 가지고 있다. 오랜 시간 해왔으며 앞으로도 끊임없는 애정을 줄 취미 생활. 그러다 보니 내가 아예 관심을 갖지 않고 있었던 취미 생활에 대한 에세이는 대리 만족처럼 느껴지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무언가를 좋아하는 마음을 비교하게 만들기도 한다.

최근 나는 글을 쓰고 있다. 블로그에 쓰는 일기뿐만 아니라 다양한 종류의 소설을 쓰고 있다. 하지만 그 소설을 쓰면서 자꾸만 작아지고 조급해진 나를 발견했다. 다른 사람들이 내 글이 아닌 나에게 좋은 글 쓰기 습관을 가지고 있다고 말할 때면 더더욱 그렇다. 사실 나는 꽤 오랜 시간 소설을 쓰지 않았다. 다시 쓰려고 하니 손이 벌벌 떨리고 낯설고 투박해진 문장에 지레 겁을 먹는다. 그럼에도 계속 무언가를 썼다는 수많은 사람들과 비교했을 때, 글쓰기에 대한 나의 열정은 작고 보잘것없어진다. 하지만 무언가를 좋아하는 것에 대한 거리, 그것도 지금 현재 멀어진 상태에서 그 거리를 기꺼이 받아들이고 다시 가까워질 순간을 기다리는 사람의 글을 읽으면서 조급해진 마음이 조금은 진정이 됐다. 늘 잘 풀리지는 않지만 가끔은 웃으면서 타자를 치기도 하고, 지금 쓰고 있는 게 있어 미루고 있지만 번뜩하는 소재에 눈을 반짝인다. 작가처럼 나 역시 내가 다시 소설 쓰기에 열정을 갖게 되기를 간절하게 바랐을 거라 생각하면 가슴 한편이 뒤늦게 두근두근 떨린다. 멋 훗날 내가 다시 소설 쓰기와 멀어진다고 해도 지금처럼 타격을 입지 않을 거라는 확신이 든다. 이렇게 타인의 글은 나를 보호하기도 하고 성장시키기도 한다.


다시 인터넷 사이트를 뒤지다가 결국 자동관수기를 구입하고야 말았다. 자그마치 30만 원짜리였다. 하지만 장미가 죽고 나서 내가 겪을 고통과 슬픔보단 저렴한 값이었다.

아주 오랫동안 여행하기 위해 中


물론 베란다 정원이라는 애정 가득한 소재에 대한 글이다 보니 다양한 정원 가꾸기 정보들과 함께 좋아하는 사람이 아니고는 이해하기 힘든 소비에 대한 언급 역시 글을 읽는 재미를 더한다.


그래도 나에게는 인간 세상과 잘 지내는 것이 중요하니까, 트위터에 '태풍이 좋아' 같은 말을 남기지는 않는다. 다만 내가 쓰는 글에서는 이런 경솔함도 표현하고 싶다. 어쨌든 나는 태풍이 부는 날 태어났으니까.

태풍이 불던 날 中


"나는 내 얼굴의 생김새와 전혀 상관없이 글을 쓴다. 대중적으로 인기 있는 외모를 가진 작가들이 자신의 얼굴을 자신만만하게 여긴다고 해도 비난할 생각은 없다. 외모를 중시하는 사람들의 태도 역시 존중한다. 사람은 제각각이니 내가 하는 일도 존중해 줄 수 없을까. 서로 너그럽게 봐줄 수는 없을까. …"

기형을 사랑하는 마음 中


누구의 인생에든 그저 시간이 지나기만을 기다릴 수밖에 없는 때가 있다. 그런 시기에는 몸과 마음을 평소처럼 유지하기가 힘들다. 그럴 때는 겨울잠을 자면서 이 시기가 지나가기를 믿어보자.

흙 속의 작은 씨앗을 찾으며 나이를 먹는다 中


해충을 제거하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익충과 해충을 구별하는 기준도 인간의 시선이라는 걸 알기 때문에 가능하면 죽이고 싶지 않다. … 나를 괴롭게 할 때는 없어지길 바라면서도 죽는 장면은 가능한 한 보고 싶지 않고, 자연과 함께 사라져주면 좋겠다. 지극히 인간 중심적인 사고방식이다.

세상의 솎음질에 익숙해진다는 것 中


게다가 가끔씩 심장을 찌르는 말 역시, 잠깐 호흡을 멈추고 주변을 돌아볼 수 있게 만들어준다. 책을 읽다 일본에서 일어난 지진 사건을 예시로 들며 전력을 아끼려고 노력한 일화를 읽으면서 나 역시 충전이 다 됐지만 귀찮다는 이유로 계속 꽂아둔 노트북과 핸드폰 충전의 콘센트를 빼기도 했다.

책을 다 읽고 보통은 작업실에 꽂아 놓지만 여주 심기와 아보카도 나무 키우기는 엄마께서 좋아할 대목이라 일단 집에 가져가 거실 미니 책장에 꽂아놓기로 했다. 그리고 이 리뷰를 다 쓰고 나면 그동안 미루고 있었던 토마토와 바질 키우기에 대해 찾아볼 생각이다. 누군가 베란다 정원에 관심이 있거나 내가 꾸준히 할 수 있을까 걱정하고 있다면 꼭 이 책을 선물해 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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