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미지의 힘 - 영상과 섹슈얼리티 동문선 문예신서 182
아네트 쿤 지음, 이형식 옮김 / 동문선 / 2001년 7월
평점 :
절판


텍스트는 혼자서 존재하지 않는다. 텍스트는 항상 콘텍스트 사이에서만 존재하고, 그 "사이" 공간에서만 의미를 가진다. 그런데 그 사이공간은 하나가 아니다. 따라서 텍스트의 의미 역시 분화된다. 어떤 주제(텍스트)에 대한 연구는 따라서 그 주제가 생산되고 소비되는 "사이" 공간들의 연구와 함께 진행될 수 밖에 없다. 이미지도 그렇다.

그런데 한 번 "재현"된 이미지는, 이미지 자체로서 이미 하나의 의미를 갖게된다. 그리고 그 의미는 권력을 지닌다. 우리는 이미지가 가진 권력에 의해 그 이미지를 "보는 자"로서의 위치를 부여받게 된다. 다시말해서, 이미지는 조작되지만, 우리도 그 이미지에 의해 조작된다. 관람자(보는 사람), 그리고 독자(읽는 사람)는 그래서 항상 이미지(보이는 대상), 텍스트(읽히는 대상)와 긴장관계 속에 있다. 보는 행위나 읽는 행위가 여러 차원에서 신중하게 고찰되어야만 하는 이유다.

아네트 쿤의 {이미지의 힘: 영상과 섹슈얼리티}는 그래서 "이미지"라는 주제를 여러 겹의 다른 문제들로 해체한 뒤에 논의를 시작한다. 이를테면, "복장전도"라는 소재에 대한 저자의 접근방식은 이렇다. 첫째, 복장전도가 나타나는 영화 텍스트 자체를 분석한다. 둘째, 그 영화 텍스트를 생산하고 구축하는 영화 제작과 관련된 콘텍스트들을 분석한다. 셋째, 그보다 더 넓은 사회적/문화적 콘텍스트들을 분석한다. 책에서 이 각 단계는 정확히 분리된 세 부분의 텍스트로 구성된다. 분리된 세 단계를 종합해서 결론을 내리는 일(해석하는 일)은 역시 독자의 몫이다. 아네트 쿤은 이렇게 함으로서 자기 텍스트가 또다른 권력으로서 독자들에게 횡포를 부리는 일을 막으려 한다고 쓴다.

저자는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이미지와, 이미지를 재현하는 시스템, 재현된 이미지의 의미(권력)가 관객들과 상호작용하는 과정을 살펴본다. 저자의 논지는 로라 멀비의 영화관람이론과 여러 모로 닮아있지만, 이미지의 주변부에 대해 좀 더 넓게 살핌으로서 그보다 더 멀리 나간다.

이미지는 하나의 기호이며, 기호는 우리에게 권력을 행사한다. 그런데 그 이미지가 만들어지는 과정은 역사/문화/사회적 콘텍스트들에 의해 방향이 결정된다. 의식/무의식적으로 서사의 기술은 발달하지만, 그 서사의 내용은 그보다는 더디 발달하며, 오히려 답보하기도 한다. 아네트 쿤은 소프트 코어 포르노 사진들과, 복장전도가 등장하는 영화들, 그리고 성병에 관련한 선전영화들을 소재로 삼으면서 그 이미지들이 '성차'를 고정시키고, 그 고정된 '성차'에 의존하는 시스템(가부장)을 강화하고 있음을 주장한다.

이를테면, "옷 바꿔입기(복장전도)"가 등장하는 영화들에서는 이 "바꿔입기"가 어떤 맥락에서 재현되는지가 문제다. 만약 그것이 코미디 영화라면, 관객들은 주인공이 여장을 했거나 남장을 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영화 속의 다른 인물들은 그것을 모른다. 관객들이 영화를 즐길 수 있게 되는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동성에게 사랑을 느끼고 당황해하는 여주인공들을 보면서 관객들은 즐거워하는 것이다.

그런데 복장전도라는 소재 자체는 원래 성차를 흐리게 만드는 힘을 지니고있다. 옷은 성차를 확실히 드러내주는 사회적 상징이다. 남녀가 옷을 바꿔입는 일은 그래서 그 상징 자체를 위협하거나 조롱하는 일이다. 그러나 이 행위가 코미디 영화 속에서 소비됨으로서, 그 행위의 상징성은 거세되고 웃음만이 남는다. 관객들은 이미 그 남자/여자가 여장/남장을 했다는 사실을 알고 있기 때문에 결코 혼란스러워하지 않게 되는 것이다.

복장전도가 재현되는 두 번째 경우는 스릴러 영화에서다. 스릴러 영화들에서는 관객들도 그 사람의 정확한 성별을 끝까지 알 수 없다. 이 영화들은 여자인 줄 알았던 범인이 사실 여장한 남성이고, 남자인 줄 알았던 범인이 사실은 남장한 여성이었다는 서사의 "전복"에 (거의) 모든 것을 걸고 있다. 이 경우에서는 옷을 바꿔입은 그 사람들이 어떤 인물들로 그려지는가가 문제인데, 저자가 분석한 대부분의 영화에서 이 "바꿔입은 자들"은 "범인"이며 "성도착자"들인 것으로 그려진다. 결국 코미디 장르 바깥에서의 "복장전도"는 "기괴하고 공포스러운 일"이 되고, "복장전도"의 행위로 인해 성차가 흐려지는 일 역시 "나쁜 일"이 된다. 결국 두 형태의 영화들 속에서 복장전도는 모두 그 상징성을 거세당한다.

이미지는 이런 식으로 가부장에 복무한다. 하지만 저자는 성병에 관련한 도덕영화들을 다룬 마지막 장에서 "검열" 행위 자체가 하나의 생산 행위가 될 수 있으며, 이미지를 해석하는 과정 속에서 얼마든지 "버텨 읽기", "거슬러 읽기"가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이미지 역시 다양한 문맥 속에서 다른 의미를 가질 수 있다. 이미지의 힘 자체 보다는, 이미지를 해석하는 과정 속에서 그 조작된 권력을 얼마만큼 간파하는가가 문제다. "학술"로서의 페미니즘과 "실천"으로서의 페미니즘은 완벽하게 분리될 수 없다고 저자는 쓴다. 방법론의 확장이 실천에 영향을 주는 바가 분명히 있고, 실천의 확장이 방법론에 영향을 주는 바도 있다는 것이다. 이 책에 수록된 다섯 가지의 에세이들은, 그런 의미에서 "간파하는 읽기", "버티고 거스르는 읽기"의 방법론을 확장하고 발전시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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