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유냐 존재냐 까치글방 114
에리히 프롬 지음, 차경아 옮김 / 까치 / 1996년 5월
평점 :
구판절판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 썸과 사랑 사이에서

심리학자, 철학자, 정신분석학자, 사회학자인 에리히 프롬(Erich Fromm)은 <소유냐 존재냐>에서 일상생활의 여러 부문들이 소유와 존재의 양식을 가지고 있음을 분석합니다. 프롬이 처음으로 다루는 것은 '사랑'입니다.
-
"우리는 사랑을 소유할 수 있는가?"
-
이것이 사랑의 항목에서 프롬이 처음 언급하는 말입니다. 사랑을 소유할 수 있을까? 우리의 오해와 달리 엄밀히 말해 사랑은 '경험'할 수 있는 것일 뿐이지, 가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실제로 존재하는 것은 '사랑의 행위'일 뿐입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능동적인 것, 하나의 능동성입니다. 그것은 강아지나 사람, 나무 등을 존중하고 그에 반응하며, 그 대상을 알아가고 긍정하는 과정입니다. 사랑은 사랑하는 그 대상의 생명력을 증대시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행위입니다.

하지만 무엇을 '소유'하는 것이 너무나 익숙해진 우리에게 사랑은 가질 수 있는 것, 소유할 수 있는 것이 됩니다. 우리시대에 "넌 내 거야"라는 말은 곧 "널 사랑한다"는 말입니다. 사랑을 소유로 할 때에 사랑의 대상은 그 대상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내 것이 되어버리고, 이에 따라 사랑의 대상은 내 마음대로 조종하고 통제할 수 있는 것이 됩니다. 따라서 소유적 사랑은 사랑하는 대상을 제한하고 감금하고 통제하는 것을 뜻합니다. 프롬은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대상을 목 조르고 질식시키는 것이라고 합니다.

프롬은 사랑은 가지는 것이 아니라 사랑에 '빠지는 것'이라고 강조합니다. 그 중에 구애(求愛)기간, 쉽게 말해 '썸' 탈 때의 사랑과 결혼 후의 사랑에 대한 분석은 재미있습니다. 구애기간, 즉 썸탈 때 사람들은 아직 상대방에 대한 확신이 없습니다. 그러므로 서로는 서로의 흥미를 끌고 매력으로 상대를 유혹하고 상대방을 자극하려고 애씁니다. 서로가 서로는 소유하지 못한 상태이기 때문에 서로는 '존재'한다. 상대방이 상대방 자체로 나의 매력을 느끼게 하기 위해 노력합니다.

그러다 구애의 기간이 끝난 다음, 결혼에 접어들 때, 또는 너무나 독점적인 연애가 시작될 때 사랑은 변화하기 시작합니다. 결혼이란 보통 계약이고 내용은 상대방의 육체와 감정을 독점적으로 소유하는 것입니다. 이렇기 때문에 결혼을 하거나 독점적인 깊은 연애 관계가 될 때에 흔히 빠지는 것은 상대방이 이미 나의 '소유'라는 착각입니다.

이런 까닭에 더이상 서로는 서로의 존재를 자극하기 위한 노력을 하지 않고, 사랑스러우려고 애쓰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그들은 결국 '권태'를 느끼고 그로 인해 그들의 아름다움은 사라지고 서로에 대한 실망은 깊어집니다. 그래서 그들은 서로가 변했다고 생각하고 변화하려 하지만 근본적인 이유를 찾지는 못합니다. 그들은 오직 '사랑'만을 가지고 싶다는 고귀한 착각에 빠집니다.

그러나 사실상 그들이 원하는 고귀한 사랑은 '상대방을 소생시키는 것'이 아니라 상대방이 자신에게 복종하기를, 다시 말해 '상대방을 자기 하고 싶은 대로 하는 것'입니다. 이제 결혼의 당사자들은 서로를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이 가지고 있는 것으로 허탈한 마음을 채웁니다. 돈이나 좋은 집, 자식의 성적 같은 것으로 말입니다. 이렇게 해서 사랑으로 시작된 남녀의 연애는 이기주의가 뭉쳐진 하나의 조합으로 전락해버립니다.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는 인간이 구현할 수 있는 소유지향적인 삶과 존재지향적인 삶을 분석하고 대비시키면서, 존재지향적인 삶을 촉구하는 책입니다. 프롬의 책은 고전 중에는 쉬운 편에 속합니다. 그래도 독서가 익숙치 않은 분들께서는 박찬국 선생님이 지은 소개서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 읽기>를 읽어보는 것도 좋을 것 같습니다. 또 까치출판사에서 나온 차경아 번역의 <소유냐 존재냐>에 해제가 실려있기도 해서 그것을 보고 본문을 읽어도 좋을 것 같습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