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드핸드 - 레이건과 고르바초프, 그리고 인류 최후의 날 무기
데이비드 E. 호프먼 지음, 유강은 옮김 / 미지북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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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기에 미국과 소련이 엄청난 핵무기를 쌓아올렸다는 건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이 상식을 좀 점검해 보면, 그 느낌이 다소간 화석화된 상태임을 자각하게 된다.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위험한 정보를 담고 있는데, 뭔가가 우릴 그 생생한 느낌으로부터 떼어놓기라도 한 것처럼 그 심각성이 소거된 채로 '상식'이 되어 있다. 사실 무기 경쟁이라는 말을 들을 때 어떤 위협감을 구체적으로 느끼기란 어렵다. 또는 신문지상에서 '핵실험을 했다'란 표현을 봤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도대체 미국과 소련이 어떻게 경쟁했다는 건가? 


이제 이 책은 앞서 나온 냉전을 다룬 역사책들과 상식을 만들어온 그 밖의 것들-영화나 다큐까지- 그 권위를 뛰어넘기 위해 무진 애를 쓴 책이며, 또 상당히 훌륭하게 뛰어넘었다는 점을 언급해야 할 것 같다. 정말로 퓰리처상이 아깝지 않은 그런 책이다. 이 책은 위험한 무기들이 내뿜었던 꿈틀대는 열과 진동, 그것들을 떠받치던 강철 스프링의 질감이라든가, 탄저균 같은 생물학무기의 끔찍한 악취와 치사율 등 과감하게 그것들의 실체를 향해 직진한다. 뭣보다 그 위험한 무기 앞에 섰던 사람들의 심경을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다. 나 자신이 레이건 미 대통령이나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이 되어 핵무기 발사 버튼 앞에 선다면 어떤 느낌일까, 그리고 하필 그 순간에 그 꼴이 되어 버튼을 누르느냐 마느냐 하는 잔인한 고민을 하게 되었나, 그런 극단적인 딜레마-그렇지만 분명히 실제했던 역사의 장면을 경험할 수 있다. 한마디로 장난 아니었다.


이러한 인상적인 무기 경쟁에 대한 서사에 더해, 저자는 두 가지 더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나는 퓰리처상 수여의 말에 나오듯이, 저자는 과거 무기 경쟁의 유산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고 경고한다. 예를 들어, 소련이 만들었다는 '페리미터'(이 책 제목인 '데드핸드'의 실제 버전)가 폐기됐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또 소련이 만든 생물학무기와 화학무기 시설이 폐기되거나 정리됐다는 증거도 없다. 뭣보다 고르바초프 시기 글라스노스트의 흐름 속에 개방됐던 군사조직과 연구조직이 현 러시아 치하에서 모조리 닫혀 버렸으며, 순식간에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다시금 앞 못 보는 장님 신세가 되어 버렸다. 비록 냉전 때처럼 격렬한 증오의 정치가 벌어지진 않지만, 지금에 와선 러시아(또는 어느 나라든) 담벼락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는 점에서, 마치 냉전이 그 폭주를 시작하던 때처럼 다시금 우리의 의심과 공포가 모락모락 피어날 조건이 갖춰져 있다. 게다가 짐작컨대 냉전의 유산이 상당 부분 온존한 채로 말이다. 


저자는 이런 이야기, 즉 냉전의 위험한 유산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이야기를 꽤나 섬뜩하게 전달한다. 책의 말미에서 1990년대 소련이 해체된 대륙 전역에우라늄과 플루토늄 박스들이 아무렇게나 나뒹굴었다는 이야기를 보노라면(참고로 1994년 북핵 위기 때는 단 몇백 그램의 플루토늄 때문에 난리가 났었다) 이게 실제 역사였단 말인가 의심이 들 정도로 어처구니가 없다. 


저자의 중요한 메시지 중 다른 하나는 바로 제목에 힌트가 있다고 생각한다. 거칠게 요약하면, 이 책은 '손'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데드핸드'라는 끔찍한 무기를 만든 '손', 그러한 무기의 버튼을 누르는 '손', 모든 인간이 죽어도 핵무기 발사 버튼을 누를 수 있는 '손' 같은 것들 말이다. 


좀 더 구체적인 역사 이야기로 들어가면, 


스탈린 이래 무기 경쟁을 극단까지 몰아붙였던 '손', (미국도 예외는 아니다)

안드로포프나 체르넨코로 상징되는 그 주인의 합리적 판단력이 마비된 '손',

고르바초프처럼 '손'의 불확실성과 그 위험을 알아챈 이들의 제어를 받는 '손',

그리고 특히 중요하게는 '머리'가 사라져 버린 '손', 즉 통제를 벗어난 '손'이 있었다. 


소련이 해체되던 시점에 그 어마무시하던 무기들은 어떤 '손' 아래에 놓였던 것일까? 국가가 무너지는 시점에 핵무기 발사 권한을 가진 사람은 누구일까? 정말 상상만 해도 오금이 저리는 상상이 아닐 수 없는데, 실제로 소련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났다. 고르바초프는 쿠데타 와중에 순간적으로 핵무기 지휘 통제권을 상실했고, 동구권 국가들이 연속적으로 독립하면서 소련은 그들의 핵무기 중 상당수가 그들 나라의 수중에 들어가는 것을 방치해야 했다. 또 궁극적으로는 소련 자신이 무너졌고, 비록 찰나라 할지라도 그 순간 핵무기 통제권의 향방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저자에 따르면, 미국 또한 핵무기를 비축하고 버튼을 갈고 닦은 '손'이었으며, 한때나마 생물학무기를 개발한 '손'이었다. 무엇보다도 소련이 해체되던 시점에 그 나라의 '자유낙하'를 방조했던 무책임한 '손'이었다. 미국은 소련이 해체되던 순간에 그 위협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고, 이른바 '자유낙하'론으로 변명하며 사태를 방치했다. 엊그제까지 핵무기로 싸우던 상대가 수천 개의 탄두를 남겨놓고 몰락하는 와중에, 그 '손'이 혼수 상태에 빠지게 된다는 상상 자체를 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저자는 '손'과 '손'의 맞잡음이 최고의 대안임을 상기시킨다. 손을 잡고 있는 동안에는 적의 '손'이 버튼을 누를 리는 없으니까 말이다. 어쨌든 적의 '손'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게, 바로 이 핵 시대의 숙명임을 뼈저리게 일깨워준다. 


이쯤 되면,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해 우리가 마주한 '손'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다. 당장에 굉장히 적절한 예가 있다. 우리의 머리 위에는 바로 북한이 있지 않은가? 우리는 혹시 김정은의 '손'을 신뢰하고 있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무엇을 근거로 우리는 평화를 낙관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그 '손'을 잘 관리하고 있는 것일까? 


뭐 아무래도 좋다. 어쨌든 지금은 평화로우니까. 그런데 만약 김정은 체제가 무너지는 순간을 생각해 보자. 마치 소련이 해체되던 장면처럼 말이다. 그럴 경우 북한이 갖고 있는 핵무기와 미사일에 대한 통제권은 누가 갖게 될까? 정상적인 권력 이양의 방식이 아니라면, 순간적으로 공백이 생길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버튼을 누르는 건 정말 단 몇 분이면 끝이 난다. 그 몇 분의 운에 우리 모두의 생명과 이 모든 문명을 걸 수는 없잖은가? 다시 묻자면, 우리는 우리 적의 '손'의 상태에 확신이 있는가?  


이 책은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손'에 주목하라. 다시 환기하면, 소련은 불안과 공포의 도가니 속에서 '데드핸드'를 만들었다. 데드핸드는 그야말로 냉전의 심연에서 탄생한 최종 단계의 장치였다. 설령 미국이 소련 사람들을 전멸시켜도, 미국 또한 멸망을 피할 수 없는 그런 장치였다. 무엇보다도 데드핸드는 그 주인조차 두려워 뒷걸음질치게 만든 그런 '손'이었다. 데드핸드는 말 그대로 '죽은 손'으로서, 모든 살아 있는 '손'(소련 지도부)이 죽은 뒤에도 마치 좀비처럼 감정 없이 기계 연산을 마친 뒤 버튼을 누르는 손이었다. 대화도 중재도 중단도 불가능한, 오로지 파괴를 확증하는 그런 '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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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 - 용, 사무라이를 꺾다 1928~1945
권성욱 지음 / 미지북스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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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일전쟁이 정말로 그동안 왜 이렇게 회자가 안 됐는지 의아할 정도입니다. 대목마다 저자가 비중을 정말 잘 할애한 느낌을 받았습니다. 시안 사건이나 완난사변, 장구펑 사건, 버마 원정, 심지어 태평양 전쟁 등 얼핏 따로 노는 것 같은 수많은 사건들이 중일전쟁 이름 아래 정리가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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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의 탄생 - 시대와 대결한 근대 한국인의 진화
최정운 지음 / 미지북스 / 2013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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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책은 실로 오만 가지 이야기를 담고 있다. 저자는 모든 걸 이야기해주지 않으며, 그렇지만 모든 걸 이야기하고 있기도 하다. 나는 정형화된 일장일단, 하나의 미덕을 꼽으면 필히 하나의 악덕을 꼽아 균형을 맞추는 그런 식의 논평보다는 오히려 열광을 하고 싶다. 저자는 '홍길동'을 일컬어 한국인들에게 심긴 일종의 영구 혁명 프로그램이라 하는데, 나는 이 책 <한국인의 탄생> 역시 그 심장에 일파만파로 팽창해 나갈 심대한 에너지를 머금고 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모든 것’을 여기서 다 쓸 수는 없고, 그중 가장 의미심장하다고 생각하는 한 가지 의의만을 꼽아 보려 한다.

 

이 책은 새로운 사관을 이야기하고 있다. 엄밀히는 새로운 사관이라기보다는 기존에 있는 어떤 것을 재발견하고 '사관'으로 승화시킨 것이라고 해야 할지도 모르겠다. 이 책의 소재는 한국의 근대 문학이다. 저자는 발표 연대가 각기 다른 작품을 거듭 분석해 가며, 그 속에 구현된 공간(배경)을 이어 붙여 한국 또는 한국을 분석하기에 적당한 대표적 공간으로, 그리고 인물을 거듭해 가며 그들을 '한국인'이라는 카테고리로 묶어낸다.

 

작품 해석이기도 하지만, 글을 따라가다 보면 순식간에 역사 해석이 된다. 그렇게 해석이 끝나고 나면, 독자의 머리에는 시간적으로 진화를 거듭해 온, 그리고 공간적으로 한반도를 배경으로 서 있는 인물이 남는다. 역사의 어떤 거대한 흐름, 그 흐름을 떠받친 어떤 힘이 보인다. 근대 한국인의 탄생사가 보인다. 저자 최정운은 그것을 다시 두 흐름으로 가닥 잡고서, 개화민족주의와 저항민족주의라 부른다.

 

저자는 문학 작품과 당대 현실을 넘나들며 몇 가교를 놓는다. 저자는 해방 이전의 소설 작품 중에서 철저한 ‘사실주의’ 작품으로 여겨지는 것들을 분석의 대상으로 삼았다. 이인직의 신소설 작품, 신채호의 작품, 김동인의 작품, 이상의 작품, 이광수의 작품, 홍명희의 작품 등이다. 저자에 따르면, 근대 소설 작품은 현실의 인물(창작자)이 몸담은 당대 현실에 기반하여 창조한, 미래를 예비하는 투쟁의 결과물이다. 당대 현실은 결코 단절적 시간이 아닌 연속적인 흐름 위에 있었다. 조선이 붕괴되던 구한말부터 식민지 초기, 중기, 말기까지 매 시기 인물들은 다르게 업데이트된 ‘배경’ 속에 살아갔다. 이 지점에서 저자는 작품 속 가공의 인물과 그 창조자인 현실의 인물 사이에 그 경계가 흐려지는 지점을 포착하고, 잇는다. 현실 인물의 투쟁의 결과물인 ‘작품’은 ‘사실주의’의 결과로서 당대 현실에 관한 결정적인 힌트를 제공한다. 이 책은 이제 이를 발굴하는 작업이며, 그에 따르면 한국인은 '탄생'했으며 '진화'했다는 것이 그 요지이다. 그러나 다시 말하지만 저자는 ‘몇 가교’ 정도에서 설명을 멈춘다. 나머지는 독자의 몫으로 보인다. 저자가 모든 것을 말해주지 않음으로써 모든 것이, 독자의 몫으로 넘어온다. 독자가 발휘하는 상상의 힘에 따라 작품 즉 ‘신화’는 가벼운 유희가 되기도 하고 때론 단단한 삶의 근골이 되기도 하며, 궁극적으로 현실을 주조할 힘이 되기도 한다. 요컨대, 저자가 비워둔 여백은 방치가 아니라, 안배에 가깝다.

 

역사는 다수가 만드는 것이다. 혼자서 만들 수 없다. 시간은 흘러가고 이야기가 생기고, 누구든 어떻게든 무엇이든 소재로 삼아서 역사를 쓸 수 있다. E. H. 카든 랑케든 마르크스든 동원해서 쓰면 된다. 그리고 실제로 그들을 사랑해준 다수에 의해 그들의 것은 ‘유력한 사관’이 될 수 있었다. 그동안 역사 서술은 이런 식으로 유력한 '사관'을 중심으로 이뤄져 왔다. 그것은 거대한 흐름이며, 그 속에 콘텐츠는 넘쳐나고, 지금 이 순간에도 어린 학생들과 전공자들은 그 파고 속에 있다.

 

이 책은 잠시 그런 흐름, 모두가 올라타 있는 흐름에서 나온다. 그리고 우선 '개인'에 초점을 맞춘다. 그 '개인'이 어떤 인물인지 분석한다. 그의 정체성이 무엇이며, 그는 그에 기반해서 어떻게 동력을 얻고 세상을 헤쳐 나가는 것일까? 우선 저자는 '한국인'이 어떤 존재인지부터 알고 나서 역사 서술을 해도 늦지 않을 것임을 일깨워준다. 우리 한국인들이 머리에 무엇을 담고서 세상을 구상하였으며, 어떤 심장을 달고서 동력을 얻는지부터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사상사라고 저자 본인이 표현하지만, 사상사란 단어는 이 책이 담고 있는 원초적인 느낌을 다소간 퇴색시킨다.

 

그렇게 시대별로 공간과 인물에 대한 확인을 한 후, 몇 가교 정도를 확인하고, 서술이 멈춘다. 그렇지만 서술이 멈춘 그곳에서, 독자 자신이 그 서술을 이어갈 새로운 심장을 얻게 된다. 물론 독자 나름이겠지만 말이다.

 

1890년대

1900년대

1910년대

1920년대

1930년대

1940년대

 

우리는 위 시기를 어떻게 기억하는가? 기존의 사관은 모두 이들 시기에 대해 답을 내놓고, 이야기를 내놓고, 지식을 쌓고 있으며, 우리는 그것을 향유하고 공부하고 있다.

 

그 결과가 오늘이다.

 

사람들은 모두 사관이라는 단어를 잘 알 것이다. 아마도 한국의 역사를 시간축을 따라 선으로 표현한다면, 아마 단 하나의 선만 존재할 것이다. 시간축이 하나니까. 그런데 사관에 따라 그 과거는 전혀 다른 이야기가 된다. 마치 여러 갈래의 평행 우주가 합쳐지기라도 한 것처럼.

 

그리고 사실 사관은 꽤 많다. 한국사에만 해도 꽤 많다. 가장 유명한 민족주의 사관이 있고, 민족주의 사관이 있다면 탈민족주의 사관이 있으며, 그 옆에 포스트모더니즘이 있고, 흔히 역사의 동력은 민중이라는 식의 민중 사관이 있으며, 역사에서 정치를 거세한다는 가정을 실험한 식민지근대화론이 있다. 또 이미 1920년대부터 사회주의를 공부한 사람들에 의해 마르크스주의 사관이 있어 왔고, 구석에는 무정부주의자도 있었다.

 

식민 사관은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다만 이 식민사관은 전근대의 조선을 정체된 역사로 설명하는데(정체론), 1960년대 들어서 그에 반발해, 그리고 실제로 가시화되는 당시의 '발전'을 확인하면서, 조선 시대는 이미 '근대', 더 정확히는 '자본주의'를 예비한 시기였다는 취지의 내재적 발전론이 생겨났다.

 

다 생긴 것들이다.

 

이들 '사관'에 따라 역사가들은 시간축에서 ‘과거 사실’을 끄집어내어 재조립한다. 과거는 ‘사관’을 거쳐 모두 ‘달라진다.’ 그리하여 모두 ‘다른 역사’ 위에 서게 되며, '다른 미래'를 꿈꾸게 된다. 현재의 독자와 청자들에게는 '이야기'의 다른 버전이 쉴 새 없이 흘러다닌다. 역사학자들이야말로, 모종의 ‘사실주의’적 ‘투쟁’ 중이며, 이것이 바로 사관의 힘이다. <한국인의 탄생>이 사실주의 문학 작품을 소재로 했다면, 그간의 사관의 결과물 또한 ‘사실주의’ 작품으로서 취급이 가능하다.

 

그렇게 모인 이야기들이 '연구 업적'이 되고, '책'이 되고, '지식'이 되고, 심지어 '상식'이 되어 간다. 축적되고 축적되며, 사회 구성원들의 '사관'을 형성해간다. 어지간한 사회 구성원이라면, 이 세상에 대한 촌평 정도야 할 줄 아는 법이고, 낮은 의미에서 거의 모두 다 '사관'을 학습한 상태이다. 공부를 잘하기 위해서, 뉴스 좀 보다가, 상사의 잔소리를 듣다가, 엄마의 철학을 음미하다가, 시나브로 알게 된 이치 같은 것들이 모여서 생긴 모종의 '사관'을 말이다.

 

그리고 지금 현재를 본다. 2010년대 들어 한국 사회를 몰아치는 주요 이슈들 가운데에는 '역사'에 관한 게 많다. 크게는 진보와 보수, 좌파와 우파, 개발과 분배, 발전과 복지, 이승만과 김구, 박정희와 김대중, 노무현과 이명박 박근혜, 기존의 역사 교과서와 교학사 교과서 등. 이러한 우리는 모두 어디서 온 것일까? 우리는 어떤 흐름에 올라타 있는 것일까? 이러한 질문은 결코 기계적 중립에의 희구 따위를 위한 게 아니다. 우리는 분명히 ‘탄생’한 존재들이다. 우리의 머리와 가슴 깊숙이 자리 잡은 그 ‘에너지원’들, 결코 같은 성격의 것이 아닌 것들이 거대하게 소용돌이 치고 충돌하며, 지금 한국의 뉴스 한가운데 솟아 있는 것이다.

 

조금만 더 시야를 넓혀 보면, 신문지상과 TV뉴스, 우리의 교실과 직장, 심지어 군대와 오만 곳에 다 '사관'의 입김이 스며들어 있다. 때로 혐오하기도 하고, 떠나겠다고 다짐하겠지만, 우리 사회는 우리와 정말 빼닮았다. 그 분열과 그 민족적으로 떠안은 '정의'의 모호함까지도.

 

<한국인의 탄생>은, 이 모든 한국인, 이 모든 사관, 영광과 야만을, 이광수의 <무정>을 인용한 책에서의 표현처럼 비록 신은 될 수 없지만, 굽어보는 듯한 경험을 하게 해준다. 물론 이 또한 하나의 단계일 뿐일 것이다.

 

아직 최정운 교수의 이 '사관'이 뭔지 그 내용을 이야기하지는 않은 것 같다. 실은 아직 그에 대한 이름도 없는 것 같다. 감히 짐작해 보려 한다.

 

인간이 한반도에 깃들고,

조선이란 나라의 시대까지 조선인이란 정체성을 만들며 잘 살아왔는데,

언젠가부터 '세계'가 삐걱거리기 시작한다. 특히,

구한말로 일컬어지는 시기에 사람들은 '국가권력'이 와해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경험한다.

이것은 단순히 국가가 약해졌다는 의미가 아니라, 사람들이 그들의 '삶이 지속될 수 있을 것인지'를 확신할 수 없게 된다는 의미였다.

그 광경은 지옥이었다. 지옥은 사람이 살 수 없는 곳이다.

사람들은 조선을 저주했다. 그들은,

자살하거나, 도망(이민) 갔다. 그리고,

반역자들이 생겨났다.

반역자들은 조선의 전복을 꿈꿨다.

일본이 초대됐다.

우리 민족은 반역자들을 마주보며 '사람이 그래서는 안 된다'는 '의'에 입각해 그들을 응징했다.

새로운 권력인 일본은 반역자들을 버렸다.

조선이 무너졌지만, 일본은 무엇이 그리 다른가. 당신은 일본인인가?

반역자들은 한반도에서 살아갈 의미를 상실했다.

씨가 다른 외부 종족의 지배가 한참을 이어지는 와중에,

그렇게 10년이 걸렸다.

'민족'이 생겼다.

과거 성리학적 전통의 조선인이 아닌 민족이었다.

특이하게도 '국가'가 없었다.

국가가 없지만, '민족'은 존재했다.

전근대 조선은 폐기됐고, 일본의 지배는 현재이며, 미래는 존재했다.

민족을 만들어가는, 거대한 여정이 시작된다.

강한 자가 살아남는 시대에, 민족을 강하게 만들려는 것은 필연이었다.

그리고 누가 가르쳐주지 않아도 사람들은 이미 그렇게 살기 시작했을 것이다.

어떻게 강하게 만들 것인가 하는 민족주의의 문제가 제기된다.

'민족주의'는 최초부터 이미 개화민족주의와 저항민족주의로 나뉘었다. 

더 '개화된 조선인' 대 더 '강력한 투쟁 본능을 가진 조선인'.

이 두 흐름은 도도한 물결을 이루어가며, 점차 소용돌이처럼 맞물리며 힘을 발휘하게 된다.

 

주요한 비법은 '수입'이었다. 서구의 문명은 태양과 같았을 것이다.

그 '태양' 없이도 잘 살던 민족이, 그것에 의지하는 이상한 광경이었지만,

아주 극소수의 경우를 제외하고는, 어느 누구도 조선의 전통에 눈을 두지 않았다.

조선의 전통이 텅 비워진 공간에 서구의 것들이 채워지기 시작했다.

그러나 이 신식 '선비'들은 양반이 아니었다.

대개 도덕적 권위, 계급적 권위도 없었다.

게다가 자주는 일본에 나라를 팔아넘긴 주역들이기도 했다.

뭣보다 지금 시대는 자본주의 ‘문명’의 시대였고, 새로운 방식으로 먹고사는 문제가 사람들을 휩쓸었다.

일본을 업고 일하는 게 역사의 참 방향이라고 믿는 사람들이 있었을 것이다.

식민지 시대에도 사람들은 먹고 사는 일에 바빴다.

도시가 건설되고, 새로운 문화가 전해졌다. 조선인은 날로 새로워졌다.

그러나 조선인은 언제나 조선인이었다.

누군가에게 문명이 고도화될수록 조선민족은 볼품없어졌다.

그 민족의 앞날을 걱정하는 사람은 더욱 그러했다.

해방 직후 '조선인'은 모두 하나같이 해방을 기뻐했다. 거기에 일본인은 없었다.

 

식민지 시기 내내 지식인은 그저 지식수입상이거나 친일파(배반자)거나 돈도 제대로 못 버는 그런 존재였다.

누군가는 희망을 지식인이 아닌 다수 대중에게서 찾았다.

누군가는 그래도 그 지식인을 단련해서 민족의 지도자로 거듭나게끔 그리하여 조선인다움을 추구하게끔 만들었다.

조선인들이 어땠는가는 해방 이후를 보면 알 수 있다.

해방 당시 그 조선인들, 장차 한국인이란 이름을 가질 사람들이 그간 겪어낸 50년을 상상할 수 있다.

그리고 그들이 왜 그렇게 해방 이후 격렬한 역사를 써나갈 수 있었는지, 역동적이고 투쟁적인 그런 역사를 써나갈 수 있었는지 상상할 수 있다.

그리고 지금 2010년대의 우리 사회가 왜 이렇게 되었는지 지나온 경로를 제법 역사적으로 상상할 수 있다.

 

여기까지가 표면적인 요약에 해당할 듯하다.

그리고 더 중요한 건 그 밑바탕이다.

사관으로서 기능하게끔 하는 그게 무엇인가 하는 것 말이다.

일단은 그냥 '인간'이 덩그러니 남는다.

인간은 무엇도 될 수 있다.

괴물도 짐승도 악마도, 그리고 천사도 무엇도 될 수 있다.

 

한국인이란 잘생긴 얼굴 뒤에는 수많은 얼굴이 있다. 불과 1백 년 전에 양반놈네를 저주한 얼굴, 조선의 붕괴에 절망하고, 조국을 떠나고 싶어 하고, 동족을 배반하고, 이민족이 되고 싶어 하던 그 얼굴들, 그러면서도 조국을 근대화하고자 안달하고, 이민족을 몰아내고자 일치단결하기도 하고, 해외로 나가서까지 독립운동을 조직하던 그런 얼굴들도 있다. 기나긴 식민 지배를 거치는 동안에도 억압과 수탈이란 말로는 모자란 문명화, 도시화 속에 덩그러니 자기 정체가 뭔지 의아해하던 얼굴들이 있었고, 걔 중에서는 역사적 사명을 깨닫고 또는 착각하고 또는 뭐 어떻게 생각하든 분주하게 움직이는 얼굴들이 있었다.

 

이 여러 얼굴들을 포개 놓으면, 그냥 인간이 덩그러니 남는다. 그 인간들은 모두 꿈틀대는 생명체이며, 세상을 마주보고 그에 반응해서 점차 방향을 잡고, 에너지를 발산하며, 그게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삶을 걸고서 투쟁해나간다.

 

그리고 우리는 '사관'을 통해 심해에 잠겨 있는 과거 그들의 삶을 건져 올리고 있다. 때로는 '역사적 진리'를 위해 목숨도 내놓을 수 있는, 그런 비장함을 내뿜기도 한다.

 

앞서 말했듯이, 저자 최정운은 공간과 인물과 몇 가교를 확인하고, 일단 서술을 멈춘다. 그 끝에는 사관들의 투쟁사 역시 포함되어 있다. <한국인의 탄생>을 작품 해석이나 일차원적 시대 해석으로 이해해선 보이지 않는다. 그 광활한 행간을 봐야 한다.

 

이런 식으로 이 책의 진정한 가치는 서술이 멈춘 그곳에서부터란 생각이 든다. 그리고 사실 그 이상은 개인 단위로 가능한 작업이라거나, 한 권의 책으로 담아낼 이야기가 아닐 것이다. 역사는 다수의 힘이, 무조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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착한 인류 - 도덕은 진화의 산물인가
프란스 드 발 지음, 오준호 옮김 / 미지북스 / 201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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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다 보고 뭉클... 세상은 더 좋아질 거라는 희망을 품게 된다. 인간이 그런 존재라는 확신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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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 버냉키, 연방준비제도와 금융위기를 말하다
벤 버냉키 지음, 김홍범.나원준 옮김 / 미지북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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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책이다. 네 개의 강의 안에 무려 연준 설립부터 2008년 금융위기, 미래에 관한 전망까지 다 이야기한다. 주인공 연준의 눈을 빌려 1백년의 미국경제 또는 세계경제의 모험을 보는 기분이 들었다. 스케일이 다르다. 어렴풋이 경제학이 아니라 사람들의 심리를 만들어가는 리더십을 보는 것 같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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