데드핸드 - 레이건과 고르바초프, 그리고 인류 최후의 날 무기
데이비드 E. 호프먼 지음, 유강은 옮김 / 미지북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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냉전기에 미국과 소련이 엄청난 핵무기를 쌓아올렸다는 건 이미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그런데 이 상식을 좀 점검해 보면, 그 느낌이 다소간 화석화된 상태임을 자각하게 된다.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위험한 정보를 담고 있는데, 뭔가가 우릴 그 생생한 느낌으로부터 떼어놓기라도 한 것처럼 그 심각성이 소거된 채로 '상식'이 되어 있다. 사실 무기 경쟁이라는 말을 들을 때 어떤 위협감을 구체적으로 느끼기란 어렵다. 또는 신문지상에서 '핵실험을 했다'란 표현을 봤을 때도 마찬가지이다. 도대체 미국과 소련이 어떻게 경쟁했다는 건가? 


이제 이 책은 앞서 나온 냉전을 다룬 역사책들과 상식을 만들어온 그 밖의 것들-영화나 다큐까지- 그 권위를 뛰어넘기 위해 무진 애를 쓴 책이며, 또 상당히 훌륭하게 뛰어넘었다는 점을 언급해야 할 것 같다. 정말로 퓰리처상이 아깝지 않은 그런 책이다. 이 책은 위험한 무기들이 내뿜었던 꿈틀대는 열과 진동, 그것들을 떠받치던 강철 스프링의 질감이라든가, 탄저균 같은 생물학무기의 끔찍한 악취와 치사율 등 과감하게 그것들의 실체를 향해 직진한다. 뭣보다 그 위험한 무기 앞에 섰던 사람들의 심경을 생생하게 경험할 수 있다. 나 자신이 레이건 미 대통령이나 고르바초프 소련 서기장이 되어 핵무기 발사 버튼 앞에 선다면 어떤 느낌일까, 그리고 하필 그 순간에 그 꼴이 되어 버튼을 누르느냐 마느냐 하는 잔인한 고민을 하게 되었나, 그런 극단적인 딜레마-그렇지만 분명히 실제했던 역사의 장면을 경험할 수 있다. 한마디로 장난 아니었다.


이러한 인상적인 무기 경쟁에 대한 서사에 더해, 저자는 두 가지 더 중요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나는 퓰리처상 수여의 말에 나오듯이, 저자는 과거 무기 경쟁의 유산이 아직 사라지지 않았다고 경고한다. 예를 들어, 소련이 만들었다는 '페리미터'(이 책 제목인 '데드핸드'의 실제 버전)가 폐기됐다는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또 소련이 만든 생물학무기와 화학무기 시설이 폐기되거나 정리됐다는 증거도 없다. 뭣보다 고르바초프 시기 글라스노스트의 흐름 속에 개방됐던 군사조직과 연구조직이 현 러시아 치하에서 모조리 닫혀 버렸으며, 순식간에 미국을 비롯한 국제사회는 다시금 앞 못 보는 장님 신세가 되어 버렸다. 비록 냉전 때처럼 격렬한 증오의 정치가 벌어지진 않지만, 지금에 와선 러시아(또는 어느 나라든) 담벼락 뒤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는 점에서, 마치 냉전이 그 폭주를 시작하던 때처럼 다시금 우리의 의심과 공포가 모락모락 피어날 조건이 갖춰져 있다. 게다가 짐작컨대 냉전의 유산이 상당 부분 온존한 채로 말이다. 


저자는 이런 이야기, 즉 냉전의 위험한 유산이 아직도 남아 있다는 이야기를 꽤나 섬뜩하게 전달한다. 책의 말미에서 1990년대 소련이 해체된 대륙 전역에우라늄과 플루토늄 박스들이 아무렇게나 나뒹굴었다는 이야기를 보노라면(참고로 1994년 북핵 위기 때는 단 몇백 그램의 플루토늄 때문에 난리가 났었다) 이게 실제 역사였단 말인가 의심이 들 정도로 어처구니가 없다. 


저자의 중요한 메시지 중 다른 하나는 바로 제목에 힌트가 있다고 생각한다. 거칠게 요약하면, 이 책은 '손'에 관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데드핸드'라는 끔찍한 무기를 만든 '손', 그러한 무기의 버튼을 누르는 '손', 모든 인간이 죽어도 핵무기 발사 버튼을 누를 수 있는 '손' 같은 것들 말이다. 


좀 더 구체적인 역사 이야기로 들어가면, 


스탈린 이래 무기 경쟁을 극단까지 몰아붙였던 '손', (미국도 예외는 아니다)

안드로포프나 체르넨코로 상징되는 그 주인의 합리적 판단력이 마비된 '손',

고르바초프처럼 '손'의 불확실성과 그 위험을 알아챈 이들의 제어를 받는 '손',

그리고 특히 중요하게는 '머리'가 사라져 버린 '손', 즉 통제를 벗어난 '손'이 있었다. 


소련이 해체되던 시점에 그 어마무시하던 무기들은 어떤 '손' 아래에 놓였던 것일까? 국가가 무너지는 시점에 핵무기 발사 권한을 가진 사람은 누구일까? 정말 상상만 해도 오금이 저리는 상상이 아닐 수 없는데, 실제로 소련에서는 그런 일이 일어났다. 고르바초프는 쿠데타 와중에 순간적으로 핵무기 지휘 통제권을 상실했고, 동구권 국가들이 연속적으로 독립하면서 소련은 그들의 핵무기 중 상당수가 그들 나라의 수중에 들어가는 것을 방치해야 했다. 또 궁극적으로는 소련 자신이 무너졌고, 비록 찰나라 할지라도 그 순간 핵무기 통제권의 향방은 누구도 장담할 수 없는 것이었다. 


저자에 따르면, 미국 또한 핵무기를 비축하고 버튼을 갈고 닦은 '손'이었으며, 한때나마 생물학무기를 개발한 '손'이었다. 무엇보다도 소련이 해체되던 시점에 그 나라의 '자유낙하'를 방조했던 무책임한 '손'이었다. 미국은 소련이 해체되던 순간에 그 위협을 제대로 평가하지 못했고, 이른바 '자유낙하'론으로 변명하며 사태를 방치했다. 엊그제까지 핵무기로 싸우던 상대가 수천 개의 탄두를 남겨놓고 몰락하는 와중에, 그 '손'이 혼수 상태에 빠지게 된다는 상상 자체를 하지 못했던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저자는 '손'과 '손'의 맞잡음이 최고의 대안임을 상기시킨다. 손을 잡고 있는 동안에는 적의 '손'이 버튼을 누를 리는 없으니까 말이다. 어쨌든 적의 '손'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는 절대 놓쳐서는 안 되는 게, 바로 이 핵 시대의 숙명임을 뼈저리게 일깨워준다. 


이쯤 되면, 역사적 상상력을 발휘해 우리가 마주한 '손'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수 있다. 당장에 굉장히 적절한 예가 있다. 우리의 머리 위에는 바로 북한이 있지 않은가? 우리는 혹시 김정은의 '손'을 신뢰하고 있는 것일까? 만약 그렇다면 무엇을 근거로 우리는 평화를 낙관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우리는 그 '손'을 잘 관리하고 있는 것일까? 


뭐 아무래도 좋다. 어쨌든 지금은 평화로우니까. 그런데 만약 김정은 체제가 무너지는 순간을 생각해 보자. 마치 소련이 해체되던 장면처럼 말이다. 그럴 경우 북한이 갖고 있는 핵무기와 미사일에 대한 통제권은 누가 갖게 될까? 정상적인 권력 이양의 방식이 아니라면, 순간적으로 공백이 생길 것이라 짐작할 수 있다. 버튼을 누르는 건 정말 단 몇 분이면 끝이 난다. 그 몇 분의 운에 우리 모두의 생명과 이 모든 문명을 걸 수는 없잖은가? 다시 묻자면, 우리는 우리 적의 '손'의 상태에 확신이 있는가?  


이 책은 이러한 이야기를 하고 있다. '손'에 주목하라. 다시 환기하면, 소련은 불안과 공포의 도가니 속에서 '데드핸드'를 만들었다. 데드핸드는 그야말로 냉전의 심연에서 탄생한 최종 단계의 장치였다. 설령 미국이 소련 사람들을 전멸시켜도, 미국 또한 멸망을 피할 수 없는 그런 장치였다. 무엇보다도 데드핸드는 그 주인조차 두려워 뒷걸음질치게 만든 그런 '손'이었다. 데드핸드는 말 그대로 '죽은 손'으로서, 모든 살아 있는 '손'(소련 지도부)이 죽은 뒤에도 마치 좀비처럼 감정 없이 기계 연산을 마친 뒤 버튼을 누르는 손이었다. 대화도 중재도 중단도 불가능한, 오로지 파괴를 확증하는 그런 '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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