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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우주적 초라함과 삶의 부조리에 대하여 - 삶의 의미, 부조리, 반대신론의 철학 ㅣ Meaning of Life 시리즈 15
최성호 지음 / 필로소픽 / 2019년 12월
평점 :
좋은 책입니다. 서두와 맺음말이 특히 훌륭합니다. 본문은 다소 논증과 분석을 위한 장이어서, 결코 어렵지 않지만 또 쉽다고만은 할 수 없을 것 같습니다. 하지만 문체는 아주 쉬운 편입니다. 저자는 아주 어려운 얘기를 쉽게 정리하는 데 탁월한 능력이 있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주제가 주제인 만큼 분명 머리를 쓸 생각을 하고 읽는 게 좋은 그런 책입니다.
약간 아쉬움이 없진 않은데 일부 내용이 중복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저자의 견해와 차이가 있을 것 같지만 나름대로 내용을 조금 정리해보면, 문제의 발단은 전근대 단계의 세계관이 깨지면서 근대의 인간은 우주적 초라함 앞에 선다는 것입니다. 더불어 인생의 의미와 정당성, 정합성이 깨진다는 것입니다. 근대 과학의 폭로에 따르면 인간은 우주의 중심도 아니고 정말 미미한 존재인데 - 그런 채로 수백 년이 지났는데 - 인생에 무슨 의미가 있나? 우리는 왜 사는가? 이에 대해 카뮈와 네이글의 견해를 논의의 중요한 두 축으로 삼습니다.
카뮈는 인간이 인생의 의미, 정당성을 추구하지만 그에 대한 답이 결코 주어지지 않는다는 점에서, 인간과 세계 사이의 부조리를 발견합니다. 그리고 그러한 부조리를 비극으로 승화하는 길을 제시합니다. 삶의 부조리를 방조하는 신, 우주, 세계를 경멸하고 반항하는 삶 자체.
이런 논의 후에 저자는 분석적으로 인간과 허무주의적 세계를 따로 구분한 뒤, 둘 사이에는 인간의 허무주의적 세계에 대한 믿음이 있다고 말함으로써 논의의 돌파구를 엽니다. 허무주의에 따르면 그런 믿음조차 사실 허무한 것일 뿐이라는 논리적 결함도 덧붙이면서.
그러면서 저자는 네이글의 견해를 중요하게 가져옵니다. 자기의식에는 일인칭적 시점과 삼인칭적 시점이 있음을 환기합니다. 적절한 예들이 나오고 충분히 납득이 됩니다. 우린 자기 자신을 때로 타자로서 관찰하는 입장을 갖고 있음을 확인합니다. 문제는 바로 이 삼인칭적 시점입니다. 이 삼인칭적 시점은 인간만이 획득한 것으로서 이로 말미암아 인간은 삶과 세계를 '회의'할 수 있습니다. 모든 것을 허무가 집어삼키는 허무주의와는 구분해서 이를 회의주의라고 명명합니다.
그리하여 우리 삶의 부조리는 자기 의식 안의 두 시점의 존재로 인한 것으로 설명이 됩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인생의 정당성, 의미가 부여되는 건 아닙니다. 다만 왜 '삶의 부조리'가 생기는지 알게 됩니다.
이런 설명틀 아래, 제가 읽기로는 카뮈의 시지프스가 다시 소환 또는 진화한 모델로서 논의가 가능해집니다. 인간은 그러한 자기 부조리를 관찰하면서 '어리석게' 또는 '숭고하게' 또는 '담담하게' 바위를 언덕 위로 끊임없이 밀어올리는 존재가 됩니다. 카뮈식의 반항아, 낭만주의 영웅의 모습이 아니라 자기 자신의 부조리를 미소 지으면서 관조하는 시지프스가 됩니다.
마지막으로 '신'의 존재가 있다면 이 모든 논의를 쉽게 해결할 수 있다는 점에 대해서 짚고 넘어갑니다. 증명할 수 없는 것은 증명할 수 없는 채로 둘 수밖에 없고... 저자는 너무도 훌륭하게 반대신론, 찬성신론, 무신론, 유신론에 대해 설명하고 왜 자신이 반대신론의 입장에 서는지 설명합니다. 논증을 건너뛰고 그 이유를 말하면 간단합니다. 신의 존재는 인간을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만든다는 것입니다. 인간은 신의 노예가 아니라는 것... 차라리 부조리를 떠안고 가는 인간이 진짜 인간일 것이라는 이야기를 합니다.
거칠게 썼는데 실제 저자의 생각과는 차이가 있을 수 있습니다. 직접 읽어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