끌림 - 1994-2005 Travel Notes
이병률 지음 / 랜덤하우스코리아 / 2005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내가 후일 책을 한 권 쓰게된다면, 그것은 바로 이런 책일 것이다.

여행을 다니면서 얻은 소소한 느낌들을 모아 그것을 누군가에게

전해주고 싶은, 그런 책이랄까.

시인 이병률은 자그만치 12년동안의 외국여행 기록을 추슬러

하나의 감성을 만들어냈다.

수 많은 나라의 일상사진과 그것에 곁들여진 글은,

보는 사람으로 하여금 당장 여행을 떠나고 싶다는 마음이 들도록

불.질.러.버.렸.다.

하지만 어찌한다? 나는 지금 당장 한국을 벗어날 수 없는걸...

그래도 머릿 속 상상의 날개는 이미 그 곳에 가있다.

그리고 2010년 봄에 만나는 거다.


 

 

 

#001 열정이라는 말

이를테면 열정은 강 하나를 사이에 두고

건넌 자와 건너지 않은 자로 비유되고 구분되는 것이 아니라,

강물에 몸을 던져 물살을 타고 먼 길을 떠난 자와 아직 채 강물에

발을 담그지 않은 자, 그 둘로 비유된다.

열정은 건너는 것이 아니라, 몸을 맡겨 흐르는 것이다.

 

#004 그렇게 시작됐다

내가 그리고 싶은 그림, 얘기해줄까요?

우선 흰 도화지의 한가운데를 눈대중으로 나눈 다음, 맨 위에서부터

아래 끝까지 줄을 내려 그어요. 이 선은 뭘 의미하냐 하면 왼쪽 벽

과 오른쪽 벽을 나누는 건데 우선 지금 당장은 평면처럼 보이지만

이 두벽은 정확한 90도를 유지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왼쪽 골목에서

오른쪽 골목으로 가려면 90도, 몸을 회전해야 되는 '기역자' 벽인 거

죠. 일단 왼쪽 벽에다가는 한 남자를 그려요. 벽 쪽에 몸을 바싹 붙

이고, 오른쪽 벽을 향해 몸을 돌리고는 살금살금 숨바꼭질하듯 눈치

를 보고 있는 옆 모습의 한 남자를요. 오른쪽 벽 역시, 마찬가지로

한 여자를 그려요. 여자 역시 벽 쪽에 붙어서 조심스레 누군가를 훔

쳐보기라도 하듯 잔뜩 긴장을 하고 있는 옆 모습 여자를요. 실제 거

리는 몇 센티에 불과하지만 90도로 꺾인 벽이기 때문에 상대방은 저

벽 뒤에 누군가가 가까이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죠.

지금까지 수많은 사람들이 그린 여러 그림이 있겠지만,

내가 생각하는 가장 긴장감있는 그림은 바로 이 것이야.

그림 속에 있는 주인공의 입장이라고 생각해봐.


 

#009 탱고

내가 자꾸 너의 발을 밟아 더 이상 할 수 없을 것 같다고 두 손을

들어 보였더니 강사는 벽에 붙여놓은 사진 한장을 가리킨다.

알 파치노가 주연한 영화 '여인의 향기' 포스터였는데 거기엔

이렇게 써 있다.

"잘못하면 스텝이 엉키죠. 하지만 그대로 추면 돼요.

 스텝이 엉키면 그게 바로 탱고지요."

그 문구를 읽는 순간 내 앞에 벌어진 모든 상황들이 로맨틱하게

다가온다. 로맨틱한 뭔가를 원하는 사람들이 탱고를 배우려 한다는

사실을 그제야 깨닫는다. (중략)

춤을 추는 두 사람은 잔잔한 호수를 걷는 새들처럼 부드럽고 날렵

하다. 나는 순간 탱고의 의식 앞에서 그런 생각을 한다.

조금이라도 서로를 좋아하지 않는다면 절대 출 수 없는 춤.

저런 춤을 추는데 사랑에 빠지지 않을 수 있을까.

순간, 벽에 붙은 포스터의 글씨가 이렇게 읽히기 시작한다.

"사랑을 하면 마음이 엉키죠. 하지만 그대로 놔두면 돼요.

 마음이 엉키면 그게 바로 사랑이죠."

일단 여인의 향기부터 본 다음, 탱고를 배워야겠어. 진심.

 

#012 the land of plenty - INDIA

(처음엔 아무 것도 없는 나라, 아무 것도 아닌 나라)

우리가 어디론가 무작정 가고 싶어한다면 그곳은 모르긴 해도

이래야 할 것이다. 정신의 고향쯤으로 느껴지는 곳. 살면서 배운

몇 가지 습관과 형식이 일제히 무너지는 곳.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되는 곳. 그런 곳이 바로 인도다. 위험하다는 정보만큼 마음의 짐을

단단히 꾸릴 것. 돌아올 날짜를 못 박듯 정해놓지 말고 떠날 것.

인도로 가는 사람이 챙겨야 할 몇 가지 덕목은 그렇다.

아는 사람들이 하나같이 추천하는 여행지는 미국도 아니고 유럽도

아니며, 그 곳은 바로 인도야. 인도는 과연 어떤 나라이길래,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회자되는 것일까? 인도에 대한 마음은 아직 두려움이

지만, 언젠가는 호기심으로 바뀌겠지...?


 

#018 사랑해라

사랑해라. 시간이 없다.

사랑을 자꾸 벽에다가 걸어두지만 말고 만지고, 입고 그리고 얼굴에

문대라. 사랑은 기다려주지 않으며, 내릴 곳을 몰라 종점까지 가게

된다 할지라도 아무 보상이 없으며 오히려 핑계를 준비하는 당신에

게 책임을 물을 것이다.

사랑해라. 정각에 도착한 그 사랑에 늦으면 안 된다.

사랑은 그런 의미에서 기차다.

함께 타지 않으면 같은 풍경을 나란히 볼 수 없는 것.

나란히 표를 끊지 않으면 따로 앉을 수 밖에 없는 것.

서로 마음을 확인하지 않았다면 같은 역에 내릴 수도 없는 것.

그 후로 영원히 영영 어긋나고 마는 것.

지금까지 내 인생을 반추해보면, 나는 기차를 참 많이 놓쳤다.

제길.


 

#033 옥수수 청년

앞으로 낯선 곳으로 여행을 갔을 때 제대로 말이 통하지 않을 때,

그럴 땐 똑같이 생긴 뭔가를 두 개 산 다음 그중 하나에 마음을

담아서 건네면 된다. 환하게 웃으면서 그러면 된다.

병률씨, 감사합니다. 좋은 바디랭귀지 하나 배웠네요 :)

 

#037 사막에 가자

여행을 하면서 만난 선배 격의 많은 여행자들에게서 수도 없이 들은

소리는 '이제 당신도 사막을 여행해야 할 때'라는 소리였다. 사막에

앉아서 밤을 응시하라는 소리들이었다. 세계 각국의 고수들이 늘어

놓는 사막 여행담은 가히 눈시울을 붉힐 만큼, 가슴에 무늬를 만들

어놓는 그 무엇이 있었다. 너무 강렬해서 약간은 서글프기도 한 그

무엇. 살아 있는 생명들을 모조리 삼켜버릴 듯한 밤의 푸르름, 별의

느린 동선까지도 잡아챌 수 있는 기적에 가까운 시력, 그리고 절대

의 고요, 절대의 침묵, 강박에 의한 외로움-.

그것들이 후배 여행자에게 들려주었던 수다스런 '사막' 이었다.

사막에 가자.

우리가 발 디디고 사는 이곳 또한 사막이지 않겠냐며 살고는 있지만

그래도 사막에 가서 제대로 울다 오자.

인도와 마찬가지의 두려움이지만, 언젠가는 꼭 가고싶어.

아니, 갈테야.


 

#048 뒤

발걸음을 멈춰 서서 자주 뒤를 돌아다본다.

그건 내가 앞을 향하면서 봤던 풍경들하고 전혀 다른 느낌을 풍경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내가 보고 지나온 것이 저거였구나 하는 단

순한 문제를 뛰어넘는다. 아예 멈춰 선 채로 멍해져서 그 자리에 주

저앉는 일도 생겨버리기 때문이다. 내가 뒤돌지 않았다면 그것은 그

냥 뒤로 묻힐 뿐인 것이 돼버린다. 아예 아무것도 아닌 게 돼버린다.

내가 뒤척이지 않으면, 나를 뒤집어놓지 않으면 삶의 다른 국면은

나에게 찾아와주지 않는다. 어쩌면 중요한 것들 모두는 뒤에 있는지

도 모른다.

 

#058 그때 내가 본 것을 생각하면, 나는 눈이 맵다.

여행은, 120점을 주어도 아깝지 않은 '곳'을 찾아내는 일이며 언젠

가 그곳을 꼭 한 번만이라도 다시 밟을 수 있으리란 기대를 키우는

일이며 만에 하나, 그렇게 되지 못한다 해도 그떄 그 기억만으로 눈

이 매워지는 일이다.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120점짜리 여행지는 '요코하마'였다.

처음 들어서자마자 내 눈을 사로잡았던 이국적인 풍경, 콧등을 간지

럽히는 바다내음, 오삼비시 국제여객터미널의 천연잔디밭에서 누웠

을 때의 그 느낌, 아카렝카 창고의 노천까페, 신기한 음료수 라무네,

랜드마크타워 앞에서 벌여진 두 남녀의 묘기공연...

이 때의 행복한 느낌은 이루 표현할 수가 없다.

여의도 면적의 50배 정도인 약 430km2를 하루종일 가로질러 걸었음

에도 불구하고 피곤을 느끼지 못했다.

언젠가 다시 한 번 그 곳을 방문하겠다는 마음가짐은,

오늘 하루도 최선을 다하게 해주는 원동력이 되어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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