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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만인을 기다리며
존 쿳시 지음, 왕은철 옮김 / 들녘 / 2003년 9월
평점 :
구판절판
존 쿳시의 소설.
제목 그대로 식민주의, 야만인과 문명인, 그런 것들에 대한 이야기이다. 요즘은 감동받은 책이라도 그걸 어떻게 표현해야할지 잘 모르겠다. 야만인을 기다리며도 그랬다. 사색적이면서도 상징적이고.. 아무튼 뭐라 표현할 수 없이 꿰뚫는 듯한 문체였다. 나에게는 김훈의 글도, 어슐러 르귄의 글도 그랬다. 어느새인가 그 이야기 안으로 빨려들어가서는 찌릿찌릿한 고통을 느끼면서 튕겨져 나온다. 눈물이 날 것 같은 이야기들이다.
제국의 먼 변방, 느닷없이 군인들이 들이닥치고 야만인을 잡아야겠다고 나선다. '야만인'이란 것은 실제하는 것인가. 그걸 누가 구분하는 거지? 콜럼버스가 신대륙에서 원주민들을 줄줄 끌고 나타나 동물마냥 구경시키고 돈을 받았던 게 생각났다. 짧은 저고리 밑으로 젖먹이느라 축쳐진 젖가슴이 드러난 아낙을 '야만'의 증거라고 신기해하며 사진찍는 개화기의 서양 사진가들도 생각났다. 서울역을 배회하는 부랑자들, 다큐멘터리에 나오는 정글의 부족들... 동정과 호기심과 경멸로 뒤엉킨 그 시선들에 그들의 본질은 아마도 소외되어있겠지.
군인들은 우리마음속의 어두운 그런 욕망, 야만인을 원하는 우리의 욕망을 이용해서 원하는 것들을 차지한다. 늙은 치안판사는 믿었다. 어떠한 사람들이 부당하게 고통받으면 그 고통을 목격한 사람들은 수치심 때문에 괴로워하게 되어있다고... 그러나 실제로 인간은 그러할까? 야만인의 뺨을 철사로 꿰고 아무이유없이 고문하고 낄낄거리고, 강간하고 살해하고 서슴없이 폭력을 행하는 이들도 어머니께 다른 이를 상처주지 말라고 배웠을까? 그들도 누군가 고통스러워할때, 그것으로 인해 수치스러워할까? 나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이새끼!'하고 화를 내는 고문관을 바라볼때, 나는 그것을 믿을 수가 없다.
나는 그래서 이글을 보면서 너무 슬펐다. 어디서나 일어나는 잔혹한 일들이 그려져 있다. 우리나라, 바로 이땅에서도 그런 일들이 벌여져왔고, 또 벌어지고 있다. 나는 곰곰히 과거부터 현재까지 계속 존재하는 그런 수치들을 생각하면서 부끄럽기도하고 눈물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