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워 서부해안 연대기 3부작 3
어슐러 K. 르귄 지음, 이수현 옮김 / 시공사 / 2009년 1월
평점 :
품절


셋 다 읽었다.

셋의 공통점은 자유, 이야기, 성장에 관한 이야기라는 것이다.

존재하지 않는 종족의 풍습과 관습과 문화를 낱낱이 세밀하게 그려내는 솜씨도 여전하다. 파워 중간의 습지 사람들 이야기를 보았을 때, 나는 얼마 전에 읽은 벼농사의 다양한 풍습에 관한 책을 떠올렸다. 물 위에 뜬 벼이삭을 배를 타고 수확하는 사람들의 이야기. 너무나 선명하게 그려져서 황금빛 햇살이 내려쬘 때 함께 갈대배를 타고 나아가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자유.

관습과 속박과 억압에 대한 자유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당장의 극적인 체제 전복이나 구원을 이야기하지는 않는다. 주인공들은 그저, 읽고 노래하고 글짓기를 좋아하는 소년소녀들일 뿐이다. 여리고 때로는 겁쟁이이고, 눈돌리는 자이다. 그러나 그들은 오랜 세월 켜켜이 쌓여온 '전통'이라는 이름의 속박에서, 혹은 어느날 갑자기 찾아와 때려부수고 강제로 억압하는 폭력의 속박에서, 또 거미줄처럼 촘촘하게 짜여 모든이들을 옭아매고 있으면서도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게 하는 계급이라는 속박에서 벗어나 자유를 본다. 자유를 이야기하고 노래한다. 자유와 함께한다.

불현듯 주어진 재능에 따르기 때문에 지나치게 신비주의적으로 느껴질 수도 있지만 한편으로는 주어진 것을 살피고 자신의 의지를 정하고 흔들리면서도 나아가는 게 보기 좋았다.

가비르. 그는 에테르로 돌아갈 수 있을까. 거기서 오렉의 시를 이야기하며 앎을 통해 얻어지는 자유를 그의 동족들-피는 섞이지 않았지만 함께 자라왔던 사람들-에게 전해줄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럴 것이다. 샬로의 슬픔, 소투르의 슬픔, 계급과 관습에 얽매인 것은 노예만이 아니라 노예를 부리는 주인들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의 눈은 가리워져 있었고 귀는 막혀져 있었음에 틀림없다. 호비가 그렇게 맹목적으로 가비르를 미워했던 것은 그의 눈과 귀가 가리워져, 경주마처럼 한 곳밖에 볼 수 없도록 길들여졌기 때문이었으리라. 다른 세계를 모르는 사람들, 다른 삶의 방법을 모르는 사람들. 전쟁과 군대, 점령과 공격, 잠깐의 동맹과 배신 따위만으로 세상이 만들어지며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것처럼 구는 사람들. 그래서 그 외의 것들은 부차적인 것이 되고 낮은 것들이 되는 사회. 야벤은 온화하고 씩씩하고 싸움보다는 다른 것을 더 좋아했고 그래서 아버지의 미움을 받았을 테지. 토름은 격렬하고 군인같았고 폭력과 지배에 관심을 기울여 아버지에게 예쁨을 받았을 테고. 그러는 동안 따스하지만 아버지에게 거역하지 못하는 어머니, 아들의 잘못에도 손을 대지 못하는 어머니, 학생의 도를 지나친 문제에 대들지 못하는 선생님, 불의에 항거할 수 없는 노예... 웅크리고 종속된 이들만 남는다. 맹목적인 증오에 매이고, 사람들의 시선에 매이고, 자신의 흉폭한 기질에 매이고, 전통과 과거에 매이고... 온통 매인 사람들뿐인 듯한 에테르의 모습들이 너무나 선명해서 나는 마치 가비르처럼 비극을 예감하고 말았다. 그전까지, 그리고 앞으로도 반복되었고 반복될 비극들. 외면해도 볼 수밖에 없고, 도망쳐도 쫓아오는 것들. 바르나의 성채 또한 마찬가지였다. 너무나 손쉽게 무너졌다. 한사람의 카리스마로 유지되는 사회라는 것은 쉽게 무너져 없었던 것이 되었다. 가비르는 또다시 도망치고, 또 그럼으로써 나아갔다. 도망치는 것조차 나아감에 한 방편이 된다는 것도 놀라운 사실. 운명에 희롱당하는 듯 하지만 일부러 운명을 찾아나서는 것도 같은 가비르의 여정은 뭐랄까 기시감이 든다. 미래를 기억하는 자가 그 기억에서 자유로울 수 있을까, 기억들에 묻히거나 휘둘리지 않고 자신을 지켜낼 수 있을까. 그의 진짜 여정은 사실 지금부터가 아닐까. 이제 소년에서 성인으로 넘어가며 예전의 자신과 다를 바 없는 한 아이의 보호자가 되어 자유와 책임과 믿음과 배신을 모두 배우고 나서 모른 체 등돌리기보다는 나서서 선택하며 살아가게 되었으니까 아마도 이제부터가 또 다른 싸움이며 인생의 2막이 되지 않을까 싶다. 그 또한 분명히 오렉처럼 언젠가 어디선가 그 이름을 불리울 것이다.

이야기

이야기와 책과 역사에 대한 관심이 나를 붙잡는다. 서부 해안의 절반 정도에서는 무의미하고 무력하며 무시당하는 듯하지만 '이야기'의 힘은 언제나 사람들을 뒤흔든다. 옛 이야기가 널리 출판되고 인기를 끄는 것은 언제인가. 한말이 그랬고 에도시대가 그랬고 르네상스시기가 그랬던가. 정치적으로는 보수화되지만 폭발적인 변화가 온땅에 가득한 시기? 고요한 곳에서는 이야기는 그저 이야기일 뿐이지만, 움직이는 곳에서는 이야기가 곧 무기가 된다. 오렉이 자신의 이야기에 매료되는 사람들에 대해 언제나 낯설어 하고 가끔은 두려워하기까지 하는 것을 보면서 그것은 그저 소설이기 때문에 그렇게 그려지는 것일까, 아니면 실제로 이야기꾼, 이야기 하나가 세상을 변화시킬 힘을 내포하고 있는 것일까 의문을 가졌다. 어떨까. 서부 해안에서 이야기는 희귀한 것이지만 지금 우리들에게 이야기는 어디서나 보고 들을 수 있는 것이다. 드라마, 영화, 책, 인터넷, 만화, 연극, 뮤지컬, 오페라... 이야기의 귀중함은 잊히고 이제 거의 이야기의 홍수속에서 멀미하며 살아가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지만 그렇다고 하더라도 이야기가 가지고 있는 힘이라는 건, 여전하지 않을까. 과연 나는 그런 이야기를, 메메르와 가비르에게 '우주의 기원'이 그랬던 것처럼 내 인생을 뒤흔들 이야기를 알고 있는가. 인생과 가치관이 송두리채 바뀌는 경험이 있었는가. 의문점 투성이들.

아이들은 자란다.

흔히 겪을리 없는 고통, 그러나 지나야할, 통과의례와도 같은 것들을 이야기에 대한 열망으로 이겨낸다. 자유와 영광과 용기와 따스한 사랑과 모든 것은 기어코 흘러간다는 역사의 교훈들 모두를 끌어안고 있는 이야기를 잊지도 져버리지도 못하고 자신의 무기로, 성장을 위한 토대로 만들어낸다. 어둡고 고통스러운 삶, 억압과 속박속에서도 아이들은 자라서 날개짓한다. 저마다의 모양으로, 눈부시게.


뭐랄까 두서도 없고 그냥 가슴이 벅차서 되는대로 주절거렸지만, 역시 내가 어슐러 르귄 빠순이어서 그런 게 아니라 이 할머니 너무 대단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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