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십이국기 1
오노 후유미 지음, 김소형 옮김 / 조은세상(북두) / 2002년 3월
평점 :
품절
소설 번역이 라다가스트에 올라오던 걸 조금 봤는데, 요코의 어물쩍거리는 성격이 싫어서 처음에 때려쳤던 것이다. 그런데, 그랬던 요코가 그렇게 씩씩하게 자라서, 좋은 사람들을 만나고, 믿음을 먼저주는 법도 배우고, 용기를 배워서 진정한 왕이 되어가는 게 너무나 기특했다. 훌륭하게 자라준 아이를 보는 부모의 심정이랄까? 마치 일부러 그런 것을 노린 것처럼, 그렇게 훌륭해진 요코를 보니 마음이 뿌듯해진다.
코우린-타이키... 나는 이녀석은 좀 싫어한다. 그리고 태왕도 별로다. 하지만, 타이키 녀석이 그렇게 어리버리한 주제에 도철을 사령으로 절복시킨 걸 보니 그것 또한 기쁘다. 십이국기는 아무래도 육성시물레이션과 같은 뿌듯함을 위한 소설 같다.(이건 내 주관적 생각일뿐...)
연왕과 엔키. 참 씩씩한 녀석들이다. 여러가지 힘든 일들을 겪고도 절망하지 않고, 그래도 누군가를 위해 삶을 바치는 것이 아름답다. 게다가 그 엉뚱함이라던가 태평함도 좋다.
여기는 내 세계가 아니야. 하는 이야기는 이해되질 않는다. 다른 세계에 떨어져서 적응을 못하고 혼란스러워하는 것은 당연하다. 다른 나라에 혼자 떨어진 것보다 더 한 것이니까. 하지만, 그것이 거짓된 삶일까. 그 세계에서 역할이 주어지지 않으면, 그것은 '나의 세계'가 아닌 것일까. 그건 아니다. 라고 생각한다. 어차피 내가 살아가고 있는 이곳에서도 내게 주어진 역할 따위는 없다. 우리는 그저 살아갈 따름이지만, 그것이 '거짓된 삶'일까? 그래서 '나의 세계'라고 부를 수 없을까? 소설에서는 왕이니 백성이니 주후니 신선이니 역할이 주어지지만 우리의 세계에서는 아니다. 역할은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다. 그것이 거짓에 불과하다고는 아무도 말할 수 없다. 자기 스스로 자신의 삶의 가치를 만들어 내는 것이 당연하다. 어느 세계에 가더라도, 그것이 '나의 세계'가 아니라고, 내가 살아갈 곳이 아니라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설사 거기서 왕이 되는 것도 아니고, 세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는 것도 아닐지라도, 그것이 인간의 삶인데, 그게 원래 다들 살아가는 방식인데, 그걸 거부하는 건 이해되지 않는다.
왕은 실도하지만 않으면, 영원하다. 영원히 옥좌에 앉아, 영원히 그 부담을 짊어지고 가야한다. 나는 왕이 실도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생각한다. 그도 인간인데... 그 부담이 얼마나 괴로울 것인가. 연왕이 '심심해지면 나는 안을 부숴보고 싶어질 거야.'라고 말하는 것도 당연한 거다. 요코가 씩씩하게 자라준 것은 좋은데 사실 조금 무섭다. '왕'이나 '기린'은 결국은 희생양, 자기 스스로 살아가는 의미를 만들어낼 수 없는 꼭두각시. '왕'이 아니고서는 생명을 이어갈 수조차 없는 그 것들은 사실은 잔혹한 족쇄인 것이다. 왕은 눈물을 마시는 새, 라는 건 정확한 말인 거다. 변화할 수 없는 건 인간에겐 아무래도 괴로운 일. 아무런 변화없이 끈질기게 이어지는 삶을 끊으려해도 . 마음대로 죽을 수조차 없다. 나의 죽음은 만민의 죽음. 십이국기의 이면, 불로불사의 이면을 생각하니 조금 무섭다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세계보다도 더 끔찍한 패러독스에 말려 들어 있는 것이다. 십이국기란 세계는...
오노 후뮤미씨는 사실, 요코의 성장기같은 휴머니즘으로 포장해서, 끔찍한 패러독스를 가진 세계관을 통해 또다른 판타지 호러를 만들어내려던 건 아닌가... 하고 엉뚱한 생각을 해본다. 멸망할 수 있기에 온 힘을 다해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인데... 멸망할 수 없는데도 발버둥치며 살아가는, 그 커다란 부담을 이고 씩씩하게 살아가는 이들이 대단하다. 감동스러운 거다.
그러나 번역본 자체의 질은.... 말하기 싫을 정도로 엉망이니까 일본어를 공부해서 원서를 사서 읽는 편이 더 낫다. (게다가 원서가 훨씬 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