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평양 횡단 특급
이영수(듀나)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0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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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게문학이라거나.. 조금은 낯선 단어들로 포장된 소설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더없이..SF다운 글로만 여겨졌다. 작가의 말에 따르면.. 이 신기하고 재미나고.. 한편으로는 잔혹한 글들은 단지 사고실험일 뿐이다. 많은 SF는 이러한 사고실험을 바탕으로 지어진다고 알고 있다.. 사실은 내가 쓰는 글도 작은 사고실험에 불과할 지도 모르겠다.

어떠한 상황을 주고.. 성격을 주고.. 그 상태에서 어떻게 행동할 지를 생각해내서.. 쓰는 것. 어떤 작가는... 무척이나 그 주인공들에 감정이입되어서.. 감동적으로 써나가기도 한다. 하지만.. 여기서 듀나는 실험실의 생쥐를 바라보는 눈으로.. 자신의 주인공들을 바라보며.. 실험일지를 적어나간다. 거기에는.. 인간이라거나, 로봇이라거나.. 그런 것에 대한 선입견, 감정 등이 배제되어있다. 오로지 객관적이고 냉혹할 뿐이다.

이글은 어떠한 교훈도 경고도 주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저 이야기를 들려줄 뿐이다. 태평양횡단특급을 만들어낸 비정한 여자 사장.. 하지만 우연한 선의, 우연한 죄.. 로봇이 지배하는 세상에서 인간들이 반란을 일으키자, 그것을 고해바친 인간 스파이, 안개를 통해 싫어하는 것을 만들어내서 마음껏 죽여 스트레스를 풀게 해주는 숲에서 죽어버린 의사, 연쇄살인범의 도덕테스트, 작가를 왜곡하는 미디어...

너무나 많은 것이 들어있고, 우리는 그를 통해 많은 것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은 작가가 우리에게 일러준 것들이 아니다. 그냥 우리가 생각해본 것일 뿐이다. 작가는 어떠한 주장도 하지 않는다. 그저 이야기를 들려줄 뿐이다. 이러이러한 일이 있었다더라.. 하고.. 이웃마을에서 죽은 소년이야기를 하듯...

듀나의 손길아래서는 잔인한 범죄도, 놀랄만한 선행도, 이해할 수 없는 기행도... 모두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그려진다. 그래서 나는 아무 생각없이 읽다가 나중에야 소름끼치는 감정을 발견하곤 한다. 내가 아무 것도 아닌 것이 되는 것은 싫다. 나는 인간이기 때문에 인간의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을 좋아한다. 나는 실험체가 되고 싶지는 않다.

자신의 캐릭터를 사랑하면 명작을 쓸 수 없다고 누군가 그러더라.. 사실일지도 모르겠다. 듀나의 글은 매끄럽고.. 송곳과 같이 날카롭기도 하다. 그 송곳은 소리 없이 조용히 가슴팍을 뚫어놓는다. 그렇지만... 나는 송곳과 같은 글은 싫은 것이다. 내 자신의 캐릭터를 사랑하고 싶은 것이다. 나는 사랑하는 글을 쓰고 싶다.. 그래서 애써.. 듀나의 글에서 사랑을 찾아헤맸지만.. 불가능한 일이었나보다.

듀나의 글은.. 차갑고.. 아름다운 얼음의 여왕이다. 나는 많은 것을 생각할 수 있었지만..(도덕율에 관한 것, 인간의 시각을 벗어나서 생각할 것에 관한것...) 그래도.. 얼음의 여왕보다는 이웃집 아줌마가 좋다. 방향은 다르지만.. 나도 이렇게 매끄럽고 좋은 글을 쓸 수 있다면.. 하고.. 부러워하는 일말의 마음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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