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본 조선, 조선인 - 러시아 장교 조선 여행기
카르네프 지음, A. 이르계바예브.김정화 옮김 / 가야넷 / 2003년 6월
평점 :
품절


러일 전쟁 이전, 동학농민전쟁, 아관파천, 명성황후 시해 사건에 이르기까지(순서는 이게 아니지만) 개화기 조선의 사건과 풍경을 철저히 타자의 관점에서 읽어내린다. 아니 솔직히 말하자면 철저히 타자라고 하기 힘들다. 이들은 일본과 계속해서 동북아 패권을 두고 경쟁하고 있던 러시아의 장교들이었으니까 조선의 상황을 철저하게 파악하는 것이야 말로 그들의 의무였겠지. 어떻게 하면 조선의 방향을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이끌어 갈 수 있는가. 일본이 조선 지배를 위해 청이 조선에 압력을 넣는 현실을 더 강조하고 비탄한 것처럼, 러시아 장교들은 일본의 만행에 대해 마치 자신들의 일인냥 분노하고 동정한다. 한편 그렇게나 적대관계인 일본인을 부산의 일본인마을 등지에서 직접 만났을 때에는, 경계는 하지만 예의를 차리는, 속에 능구렁이 수백마리가 앉아 있는 듯한 모습으로 대하는데-싸울 이유가 없다면서- 왠지 실제로는 불꽃이 튀는 안절부절한 분위기가 아니었을까 싶다. 살피고 경계하지만 쉽사리 우를 범하지는 않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정치'싸움이랄까. 이런 러시아 장교의 눈에, 일본인에 대해 곧바로 분노를 터트리는 한국인은 너무 올곧고 순박한 인간상으로 보였던 것도 같다.
또 진귀한 것은 한창 나주 등지에서 동학 농민군이 진주해 있을 때 러시아 장교들이 그 우두머리들을 직접 만났던 것이다. 자기네들도 외국인인 주제에, 그 침략의 선봉인 장교들 주제에 간도 크지. "외세에 저항하는 기치는 좋으나 그렇다고 일본인이든 여타 외국인이든 민간인들을 함부로 붙잡아 죽이는 것은 뜻을 이루는 데에 오히려 해가 될 것이다."라고 충고를 해주었더니 동학군 측에서도 순순히 충고를 받아들이고 잘 대접해주었더라는 것이다. 자신들이 적대시하는-아마 당시에는 공동의 적(일본)을 둔 동지처럼 느껴졌을지도 모르지만- 외국인의 충고를 순순히 따라준 동학군 지도층이야말로 대인배! 뭐 이런 기분도 들었다.
당시 도로 상황이 나쁜 건 정말 아무리 개항을 하고 일본인들이 자신들을 위해 신작로를 닦았어도 여전해서, 말조차도 타고 움직이기 힘든 곳도 여러곳 있었던 모양이고, 그나마 역참이 잘 되어 있는 것이 인상이 깊었던 모양이고 여관-아마도 주막이나 역참-의 지저분한 상태에 대해 당황한 모양이고... 아니 그 이전에 이사람들 침대 생활하다가 그냥 단단한 바닥에 이불깔고 눕는 거 허리는 안 아팠나 모르겠다. 겨울이나 선선한 가을에는 방에 불을 떼는 것이 좋았던 모양이지만 여름에 여행한 모양인 장교 하나는 비는 비대로 맞고, 눅눅하고 더운데 음식한다고 불을 떼서 찜통 같은 방안에서 잠을 청해야 했던 모양이다. 우악, 진짜 내가 상상해도 끔찍하다.
각자 다른 코스로, 다른 시간대에 여행한 세 명의 이야기를 모아놓은 것이라서 일상 생활에는 겹치는 부분도 있지만 다른 부분도 많다. 배타고 부산으로 와서 북쪽으로 올라온 이야기, 그리고 육로로 연해주까지 와서 남쪽으로 내려온 이야기, 서해안을 따라 남쪽으로 내려온 이야기. 경상도, 평안도-황해도, 전라도 등 잘 읽다보면 지역마다 달랐던 당시 상황도 알 수 있다.


사료로서도 가치가 있겠고 그냥 교양서로 읽기에도 충분히 재미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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