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ZOO
오츠이치 지음, 김수현 옮김 / 황매(푸른바람) / 2007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오츠 이치는 열일곱 살에 여름과 불꽃과 나의 시체로 데뷔하여 천재 작가로 알려진 사람이다. 나는 너밖에는 들리지 않아 외에는 본 적이 없기 때문에 어딘가 소녀적인 감수성을 가진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 이사람은 남자. 호러(라고 말하기에는 좀 애매하지만)를 즐겨 쓰는 작가였다. 이런 놀라워라.
그렇지만 여전히 이 책을 보면서도 나는 어딘가 소녀적이라는 인상을 지우지 못했다. 이 기괴하고 비뚤어진 '동물원'이 어떤면에서 소녀적이냐고 묻는다면 딱 부러지게 대답하기는 힘들겠지만 말이다. 원래 사춘기 소녀들의 감성적인 모습 이면에는 언제나 잔혹한 광기와 황폐가 숨어있기 마련이다. 여자애들이 호러 영화나 좀비 영화를 꺅꺅거리면서도 좋아하는 것과도 일맥상통한달까나.
일곱개의 방. 스플래셔 무비의 주인공이라도 된 것처럼, 아무 맥락없이 아무 이유없이 여자들을 일곱개의 방에 가두고 전기톱으로 매일 한명씩 썰어 죽이는 살인마를 피해 도망나와야 한다. 매일 매일 죽음이 다가옴을 느끼면서 절망에서 체념으로 바뀌어가는 여자들의 감정이 천진한 어린 아이의 시점으로 그려져 더 무섭고 슬프다. 비인간적인 상황을 인간적으로 그려냈달지.
소파. So far. 특별히 악의를 갖고 있던 건 아니었는데. 돌이킬 수 없는 일이 일어나버렸다. 기괴하고 어딘가 서늘해지는 느낌이 들지만 그렇더라도 따스한 느낌이 살아있다. 어린 아이, 혹은 순진한 누군가의 시선으로 그려내는 이야기가 많은 것은 사회의 선이든 악이든 그대로 투영해내는 존재이기 때문이 아닐까. 한 없이 차가운 부모라도 그 자식은 그 부모의 사랑을 갈구하는 것처럼, 아무리 비뚤어진 세상이라도 반드시 따스함을 손에 넣고 말겠다는 의지가 보인달지.
이미 쇠락해버린 세계에서 평온하고 슬픈 죽음을 맞이하는 로봇의 이야기를 담은 양지의 시도, 괴로운 과거, 상처입고 엉망이 된 마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일을 살고자 하게 되는 과정이 담긴 떨어지는 비행기 안에서도 맥락은 비슷한 것 같았다.
표제작 ZOO도 미묘한 느낌. 너무나 사랑하는 이를 죽여버리고 정신분열적인 상태에 빠져버린(진짜로 연기하는 나와 그것을 비웃는 나로 '분열'되어 버린 듯한) '나'의 괴로운 심리가 처절해보인다. 차라리 악당이었더라면 낄낄낄 웃어넘기고 딴 여자를 찾아다닐지도 모르는데. 살해시점의 감성보다도 죄의식으로 일그러진 모습을 그려내는 데에 초점을 맞추다보니 오히려 안타깝다는 감정을 불러일으킨다는 것이 신기하다. 기괴하고 무시무시한 상황이지만 안타까운 감정을 수반한다는 게 오츠 이치식 호러의 특징일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그래서 소녀적이라는 느낌을 받은 걸지도.
가장 사춘기적이라고 느껴졌던 신의 말. 무시무시하기 짝이 없지만 그 마음만은, 남의 눈을 신경쓰다 못해 망가져버리고 만 그 마음만은 공감이 간다. 사춘기는 한창 예민한 시절이니까. 사소한 말한마디 사소한 눈짓 하나도 마음을 갉아먹는 해충으로 돌변하고 마는 걸. 내가 투명해져버리면 좋겠어. 차라리 아무도 없이 세상에 나 혼자라면 어떨까. 나만 그랬을 수도 있겠지만 나는 곧잘 그런 상상을 하곤 했다. 시선과 사회의 규율에서 자유롭기를 갈망해본 적이 있다면 그런 상상이 이런 기괴한 모습으로 재현되더라도 놀라지는 않을 듯하다.
카자리와 요코는 펫숍 오브 호러즈의 한 에피소드가 떠올랐다. 다른 사람들도 그럴지는 모르겠는데, 애완 소녀(사실은 개)를 사들인 외동딸 콧대 높은 꼬마가 구질구질한 애완 소녀와 자신이 비교되는 것을 즐기며 우쭐거리며 살던 도중 어느새 자신의 자리를 차지해 버린 애완 소녀 대신 D백작의 가게로 팔려가게된 이야기.. 였던 거 같은데(거기서는 물론 애완 소녀-개의 충성심으로 꼬마는 D백작의 펫숍에 팔려가는 처지를 면하게 되긴 한다.) 쌍둥이. 한쪽만 사랑하는 엄마. 허영. 그리고 질투. 미묘하게 변주되어있긴 하지만 소녀취향의 호러랄까. 순정만화로 그려질 법한 호러의 느낌이었다. 다른 단편들도 그렇긴 하지만 유독 그런 느낌이 강했달까.
closet은 추리 소품. 그렇지만 조금 밍숭맹숭했다. 계속 감성적으로 압박당하는 듯한 느낌을 받았는데 이 작품은 그런 느낌이 없었다. 뺑소니로 인한 죄의식, 협박, 죽음, 사랑, 벌 등으로 이어지는 감정들이 다른 작품들처럼 날카롭게 느껴지질 않았기 때문일지도. 혈액을 찾아라도 마찬가지다. 블랙코미디 같지만 너무 가볍게 표현해서 맛이 떨어지는 느낌이었다. 차가운 숲의 하얀 집은 무섭고 기괴하다. 이 작가가 그려내는 기괴함은 안타까움을 기조로 한다. 학대와 외로움으로 비뚤어진 내면이 기괴한 행위로 나타난달지.
한없이 가볍고 어떻게보면 상당히 컨셉으로 밀어부치는 듯한 느낌도 들지만 술술 읽고나면 불안하고 안타까운 마음이 사무치도록 느껴지니 그것도 참 신기한 노릇이다. 아까 펫숍 오브 호러즈하고 비슷하다고 했는데 정말로 그러하다. 혹은 시미즈 레이코의 약간 호러틱한 만화라든가. 기괴하고 이상하고 안타까운 느낌이 짙게 깔려서 슬프고 무서운 소녀 만화 단편집을 본 듯한 느낌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