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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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서울이라는 도시 

 

  내 고향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기차 안.  나는 여느때처럼 노트를 펼쳐들고 일기를 쓴다. 그 기차안에서 했던 수많은 다짐들을 내가 정말 전부 다 지켰더라면, 아니 반이라도 지켰더라면 난 이미 성공하고도 남았을테지. 오늘의 다짐도 아마 전부 잘 지켜지기는 어렵겠지만, 난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또 몇자 남긴다.  기차 안에서의 나의 일기 속 다짐들은 주로 한 마디로 요약된다. 열.심.히.살.것. 

 

 대구를 떠나 대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처음 서울로 올라온지 7년이 지났건만, 기차를 타고 대구와 서울을 오가는 일은 항상 내게 새롭게 다가온다. 아마 그것은 내가 서울에서의 일상에서 벗어나, 가끔씩 지금의 나를 되돌아보고 생각하게 할 시간을 갖게 하기 때문일거다. 대구로 내려갈 때는 나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또 서울로 올라갈 때는 그래도 다시 희망 한가닥을 마음 속에 품고 새로운 결심과 다짐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그 시간. 

 

그 시간에 내가 그렇게 일기를 쓰고 다이어리를 정리하고 하는 것은, 스무살에 처음 서울에 올라오면서부터 시작된 혹은 일종의 의식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집을 떠나 독립해서 서울에서 혼자 살게 되었을 때, 처음으로 내가 정말 혼자서 살아가야 하는 거구나를 깨닫게 된 순간, 이제 정말 남은 건 의지할 데는 나 자신밖에 없다는 걸 깨달은 순간, 외롭게 홀로 남은 나 자신을 다독여줄 존재 역시 나 자신밖에 없다는 걸 깨달은 순간, 그때 그런 나약한 나 자신을 토닥여주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을 것이다. 소설 속 정윤이 스물한 살에 다시 이 도시로 돌아오면서 자기 자신과 약속한 것처럼.  

 

'책을 다시 읽을 것'
'이 도시를 하루에 두 시간 이상씩 걸을 것'
 

고향을 떠나 서울로, 살기위해 이 도시로 모여든 사람들의 마음이란 결국 이렇게나 비슷한 것일까. 정윤의 다짐은 나의 다짐과 별반 다르지 않다. 서울 생활이 외롭고 힘들 때면 나 역시 소설책 속으로 숨어들곤 했다. 책 속에 흠뻑 빠져있다가 현실로 다시 나오면, 그래도 다시 살아갈 힘을 얻곤 했다.

 

나도 처음엔 정윤처럼 이 도시와 별로 친하지 않았다. 이 도시를 잘 몰랐기에 난 지하철만 타고 다녔다. 대학교 1학년때부터 숱하게 서울역과 학교 사이를 오갔지만, 나는 항상 지하철만 탔다. 처음에 그랬더니 버릇이 되어버렸던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몇 년이 지나서야 우연히 서울역과 학교 사이를 다니는 버스 노선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 서울역에서 501번 버스를 탔던 날, 그 날의 충격은 잊을 수 없다. 몇 년 동안이나 서울역과 학교 사이의 공간은 내게 그저 지하철 노선표 상의 한 점으로 존재할 뿐이었다. 그런데 버스를 타고 그 공간을 직접 가보니, 그 곳 역시 살아 숨쉬는 공간이었다. 내 고향 대구처럼. 숙대입구, 삼각지, 신용산, 한강대교, 상도터널. 거리마다 가득한 건물과 상점들. 그리고 그곳을 지나다니는 수많은 사람들과 차들. 그제서야 서울이 보였다. 내가 사는 도시가 새롭게 보였다. 지하철을 타고 검은 벽만 보고 외롭게 지나다닐 때보다, 버스를 타고 직접 그 공간을 바라보면서 지나다니니 이제서야 그 공간이 내 공간 같았고, 그곳의 사람들이 내 사람들 같았다. 정윤처럼 그 거리들을 걸어다니기까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버스로 직접 다니기 시작한 순간, 뭔가 사람사는 냄새를 맡았다고나 할까.  

 

2. 내 방으로의 초대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에서 폭풍처럼 시위가 휩쓸고 간 도시 한 복판에서 윤과 명서, 그리고 미루가 우연히 만난다. 그리고 정윤이 둘에게 말한다.
 "내 방에 가겠어? 반찬은 꺳잎김치밖에 없지만 밥해줄게. 쌀은 많아. 가자."
 또 정윤과 윤미루가 같이 목욕탕에 갔던 날, 윤미루가 정윤에게 말한다. 
 "자고 갈래?"
 

 그렇게 그들은 서로의 방에 초대함으로써 한층 가까워지게 된다.

 

 나 역시 혼자 사는 내 방으로의 초대, 그것의 특별한 의미를 안다. 나도 처음 서울에서 5년동안을 혼자서 지냈기에. 대학교 기숙사에서 3년, 그리고 원룸에서 혼자 2년을 살았다. 혼자 사는 것은 그토록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밤에 방문을 열고 들어서서 아무도 맞아주는 사람이 없고 혼자서 불을 키고 들어가서 혼자서 방 안에 덩그러니 놓여있을 때의 그 이상한 기분이란. 밤마다 괜히 외롭고 우울했다. 그래, 어차피 인생 혼자라지만 이건 너무 혼자잖아라는 생각. 이 세상에서 나만 외로이 홀로 남겨져있는 듯한 느낌.

 

그 외로움을 떨쳐내기 위해 가끔 친구들을 초대했다. 기숙사에 살 때는 룸메이트와 함꼐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룸메이트들과는 쉽게 친해지지 않았고 우리는 그저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사람으로 존재할 뿐이었다. 그래서 룸메이트가 가끔 방을 비울 때면, 기숙사 같은 동에 사는 친구를 불러 같이 놀다가 잠을 자곤 했다. 그 긴긴 밤 동안 우리가 나누었던 수많은 이야기들. 누구 때문에 설레었던 이야기, 들뜬 연애의 감정 또는 가슴 시리도록 아픈 마음까지. 또 혼자 사는 건 정말 외로운 일이야 라는 말에 서로 공감해가며 그 외로움을 공유함으로써 우리는 그 감정에서 한발짝 정도 물러날 수 있었다. 적어도 그 밤에는 혹은 그이후로도. 기숙사에서 함께 보내는 밤의 시간들이 쌓일 수록 우리의 우정도 깊어갔다. 그리고 그 친구로 인해 조금은 덜 외로울 수 있었던 것 같다.

 

원룸에 나와 살게 되었을 때도 종종 친구들을 불렀다. 밤에 같이 영화를 다운받아 보기도 하고, 같이 맥주 한잔을 들이키기도 하면서 나누었던 이야기들, 방 한가득 퍼져나가던 우리의 웃음 혹은 울음.  그 밤 혹은 새벽, 같이 천장을 보고 누워서 그녀는 내게 자기 마음 가장 깊숙한 이야기를 꺼냈다. 둘이 함께 하는 밤의 시간이란 그런 것이다. 각자 마음 속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이야기를 꺼내어 들게 하는 마법같은 시간. 가장 진솔해질 수 있는 시간.

 

20대 후반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지금은 선뜻 친구를 초대하지는 못한다. 20대 초반의 나와는 달리 이제는 어느 정도 혼자 지내는 것에도 익숙해졌기에. 또 지난 날들 만큼 누군가에게 마치 발가벗은 듯이 오롯이 솔직해져야만 하는 그 시간들이 때로는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그래서 가끔은 지난 날들에 그녀들과 함께 솔직하게 서로의 마음을 드러내놓고 각자의 인생의 외로움, 무게를 나눠 짊어질 수 있었던 그 밤들이 그립다.

 

3. 그 상처로부터 나는 얼마나 멀어졌는가

 

소설 속의 청춘들, 정윤, 명서, 미루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과 이별 앞에서 큰 상처를 입는다. 20대 초반의 나도 뜻하지 않게,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채 그녀를 잃었고 그로 인한 상처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스무 살의 나, 대입에 실패하고 재수학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곳에서 그녀를 만났다. 우연히 그녀와 나는 친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가 좋았다. 그녀는 활발하고 사교적이고 성격도 좋고 잘 웃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리고 똑똑하고 공부도 잘하고 자기가 하고싶은 것에 대한 확신과 목표, 신념도 뚜렷한, 한마디로 나와는 달리 강한 여자였다. 나는 그녀 옆에서 나도 그녀와 닮아가기를, 나도 그녀처럼 좀더 강해지기를 바랬던 것도 같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함께 어울려 다니기 시작했으며, 쉬는 시간이나 점심 시간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으며 또 방과 후에 다른 학원도 같이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는 휴대폰 문자도 점점 더 자주 주고받으며 그렇게 점점 다 가까워졌다. 아니, 나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그녀가 내게 편지 한통을 주었다. 편지 속에서 그녀는 나와 절교하자고, 나와 친구 관계 자체를 끊자고 얘기하고 있었다. 나를 만나기 전에 자기를 엄청 좋아해서 쫓아다니던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가 어느새부턴가 자기의 일거수 일투족을 알려고 들면서 문자도 지나치게 자주보내고 마치 자기 스토커처럼 굴었다고 했다. 내가 그 아이처럼 스토커같다는 것까지는 아니지만, 내 애정, 관심과 연락, 문자 모두 부담스럽다고 자기는 우리관계가 불편해서 자기공부에 방해되니 절교하자고 했다.  

 

나로서는 전혀 생각도 못한 청천벽력같은 일이었다. 일단 너무 기분이 나빠서 같은 반 오빠에게 부탁해서 그 편지를 라이터 불로 불태워버렸다. 순식간에 재가 되어 사라진 편지. 그리고 깨어진 관계. 나는 그렇게 그녀를 잃었다. 하지만 진짜 시련은 그 후로 시작되었다. 그녀에게서 그런 상처를 받기 이전에 나는 내 감정에 솔직하고 누군가에게 먼저 다가가는데 주저하지 않는 아이였다. 또 사람들과 만나고 어울리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그랬던 내가 마음을 주고 믿었던 그녀에게서 갑자기 거절을 당하고 나자, 그 다음에 새로이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맺을 때면 예전과 달리 머뭇거리게 되었다. 또 누군가에게서 갑자기 그런 거절을 당할까봐, 또 지금 내앞에서 웃고있는 누군가도 갑자기 돌변해서 나를 배신할까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선뜻 먼저 다가가고 싶어도 쉽게 그러지 못했다. 누가 먼저 연락을 하느냐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으며, 서로 얼마나 마음을 주고 받느냐 재어보고 어느 정도 균형이 맞다 싶어야만 안심이 되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기대도 되는 건 어디까지 일까.  


나, 그녀를 잃음으로써 20대 내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이 질문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 내 천성을 바꾸지는 못해서 여전히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기는 했으나, 다가가면서도 항상 내가 그에게 너무 많이 다가간 건 아닌가, 혹시나 그래서 그가 내게서 등돌려버릴까봐 가슴 졸여야 했다. 그러다 누군가가 내게 조금만 등을 보이면, 나는 지난날의 상처가 덧나서 괜히 더 아파해야만 했다. 나의 20대는 언제나 그 적당한 거리를 찾지 못해 힘들고 외롭고, 아팠다.

 

그렇게 나는 깊디 깊었던 그 상처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순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상처로부터 조금이라도 더 멀어지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다. 책 속에서 정윤이 미루에게 마음 속으로 말한다.
"함께 공유하면 상처가 치유될까. 잊을 수는 없겠지만 그때로부터 마음이 멀어지길. 바래진 상처를 딛고 다른 시간 속으로 한 발짝 나아가길."
정윤의 말대로, 나는 그 상처를 다른 사람과 공유했다. 물론 그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이 무척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고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나는 그래야만 그 상처로부터 벗어나 예전의 나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에 그리 했다. 그렇게 다른 사람들이 내 이야기에 공감해주고 내 상처에 안쓰러워해줬을 때, 나는 그제야 조금씩 치유되기 시작했다. 또 새로이 알게 된 친구가 먼저 "은정아"라고 내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나는 그제야 마음을 놓고 웃음 짓기 시작했다.

 

그 일로부터 몇 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 이제는 스무 살의 그때만큼 아프지는 않다. 물론 그 상처가 내 마음 속에 낙인처럼 찍혀서 나를 괴롭힐 때도 있지만, 그래도 거기에도 익숙해졌다. 어떤 이와의 관계에서 내가 괜히 마음 졸일 때면, 이제는 내가 스스로 내 자신을 감싸 안아주기에 이르렀다.
'괜찮아. 이 사람은 나와 오랜 시간 친한 관계를 맺었잖아. 이 사람이 지금 내게 소홀한 것 처럼 보여도 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것 너도 알잖아. 이 사람은 내게 등돌리지 않을 사람이란 거 알잖아. 그러니까... 괜찮아. 마음 졸이지 말자.'
라고.
또 그 사람이 나를 떠날 까봐 걱정하고 의심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 사람을 더 크게 믿어보기도 한다. 그 믿음이 오히려 그 사람과의 관계를 잘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이제는 깨달았기에.  


 

4. 청춘이란...

 

" 인생의 맨 끝에 청춘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어.
누군가 약속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의미 없는 일은 없다고 말이야. 믿을 만한 약속된 무엇이 있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쫓기고 고독하고 불안하고 이렇게 두려움 속에서 보내고 나면 다른 것들이 온다고 말이야."
라고 명서는 말한다.

 글쎄, 그의 생각에 나는 별로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청춘이란 불안과 고독 그 자체로 정의되는 것이 아닐까.

 

물론 나의 청춘의 시간들에도 앞이 보이지 않아 방 안에서 혼자 엉엉 울었던 때가 있다. 내 앞에 놓인 여러 선택의 기로에 서서 이것도 선택할 수가 없고 저것도 선뜻 선택할 수가 없어서 그저 목놓아 우는 일밖에는 할 수 없었던 절망의 순간. 도저히 벗어나올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그 순간. 또 마치 내가 종교처럼 신앙처럼 믿었던 그 사랑이 깨어지고 홀로 덩그러니 남아 가슴을 치며 울었던 때도 있다.

 

청춘이란 그 힘든 시간들과 힘겹게 싸우며 때로 이기기도 하고 떄로는 지기도 하며, 그 시간들을 헤쳐나가는 과정 그 자체가 아닐까. 나는 그 힘든 시간들을 어떻게 견뎌내어 왔을까. 미루는 그 시간들을 자기가 먹은 것을 노트에 쓰며 견뎌왔다. 또 정윤은 다시 책을 읽고 이 도시를 걸어다니며 견뎠다. 명서는 갈색 노트에 자기의 생각, 상념들을 써서 채워가며 견뎠다. 단이는 정윤에게 편지를 쓰며 견뎠다. 그리고 결국 그들이 만났을 때, 그들은 서로 그 힘듦을 함께 하며 그 시간들을 견뎠다. 서로의 문장들을 이어나가며, 서로의 아픔을 공유하며,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면서. 

 

나는 내가 좋아하는 글과 함께 하면서 그 시간들을 버텨 왔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을 읽으며, 또 일기를 써 나가며. 그 불안하고 혼란스러웠던 시간 동안 그래도 소설 속 구절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는 나를 버틸 수 있게 하는 힘이었다. 그 소설 속에 푹 빠져있을 때, 그 문장과 내가 하나와 되었을 때, 나는 진정으로 '살아있음'을 느꼈으므로. 또 외롭게 혼자 내 마음을 달래야했던 그 시간에 나는 일기를 쓰며 내 자신과 함께 하며 버틸 수 있었다. 그 불안과 고독을 생생히 글로 남겨놓고 나면,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곤 했다. 그렇게 혼란스러운 마음들을 그 글에 다 담아놓고 오고서야 나는 비로소 앞으로 다시 한 발 한 발 나아갈 수 있었다.

 

내가 이 소설 속 그들을 처음 만난 것은 작년 겨울에 인터넷 연재를 하고 있을 때였다. 수험 공부를 하느라 외롭고 힘들었던 나는 이 소설을 만나, 정윤과 명서, 미루, 단이를 만나 그 답답했던 시간들을 통과할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책으로 나온 그들의 이야기를 다시 읽으면서, 나는 또다시 이 여름을 견디고 있다. 그들의 청춘의 시간들에 초대받아서 그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내 청춘은 오늘도 견딜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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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끝 여자친구
김연수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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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이별의 순간 

우리는 언제 이별하기 시작했던걸까?
나는 그 이별이 시작되던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그건 어느 겨울날 저녁 버스정류장에서였다. 그와 나는 여느때처럼 만나서 밥을 먹고 함께 시간을 보낸 뒤, 내 기숙사로 가는 5512번 버스를 함께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내가 그에게 말했다. 

 "오빠 나 기숙사까지 데려다줘. "
 "에이, 뭘. 됐어."

여느때와 똑같은 대답이었다. 버스정류장에서 기숙사까지는 얼마 안되는 거리였지만, 또 그 버스정류장 근처의 그의 집에서 나의 기숙사까지는 얼마 안되는 거리였지만, 그는 별로 바래다준 적이 없었다. 처음 사귈때만 빼고. 그 뒤론 가끔 바래다달라는 내 부탁을 항상 거절하곤 했다. 

그날도 언제나처럼 그는 내 사소한 부탁을 들어주지 않았다. 그때 그가 내 부탁을 거절하는 그 순간, 나는 그를 바라보는 내 목에서 피로를 느꼈다. 그는 나보다 키가 컸으므로 나는 항상 그를 올려다봐야했는데, 그뿐만 아니라 내 마음도 항상 그를 목빠지게 바라봤었다. 내가 언제나 더 좋아하고 그래서 언제나 목빠지게 그를 기다렸었다. 그에게서 연락이 오기를. 그가 언젠가는 나를 내가 그를 사랑하는 만큼 많이 사랑해주기를, 내게 잘해주기를. 그랬던 나였는데, 드디어 그 순간 그를 바라보던 내 목이, 그를 그렇게 바라봤던 내 마음이 한꺼번에 와락 몰려오는 피로감을 느꼈다.  

그리고 어떤 강렬한 느낌이 나를 관통했다.  
'아, 이 사람은 나를 별로 사랑하지 않는구나.' 라는.  

그 순간 이별이 시작되었다. 

마치 <달로 간 코미디언>에서 어느 여름날 저녁, 보름달을 배경으로 날아가던 부엉이를 바라보던 '내'가 감격에 젖어 청혼했던 그 행복했던 몇 분 사이에 이별이 시작된 것 처럼. 이별의 시작은 어쩌면 그렇게 순간적인 건지도 모르겠다. 
 


2. 책이 답해주리라. 
 


나는 그를 정말로 사랑했다.  

그가 세상에서는 알아주지 않는 별 볼 일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나만은 그가 최고라고 믿어주고 싶을만큼. 무엇보다도, 오랫동안 꿈꿔왔던 내 진로를 단숨에 바꿔버릴 만큼. 그렇게 스물 세 살의 나, 내 인생을 걸고 도박을 했다. 그 사랑에 올인했다.

나를 아는 모든 친구들이 전부 나의 선택을 뜯어 말렸다. 분명히 너 나중에 후회할 꺼라면서. 하지만 그때의 내게 친구들의 충고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에게는 세상 그 무엇보다 그 사랑이 가장 소중했으므로. 내가 그토록 갈망하던 사랑하는 사람이 내 눈앞에 나타났으므로. 나중에 내가 아무리 성공한다 하더라도, 미래에 성공한 내 옆에 그가 없다면, 나는 결코 행복하지 않을 것 같다는 확신마저 들었다.

아무도 나를 이해하거나 지지해주지 않았다. 그래서 내가 마지막으로 찾은 건, '책'이었다. 책이라면, 내게 답을 말해줄 것만 같았다. 내가 원하는 답을. 그래, 나를 이해해주는 책 한 권, 시 한 편 쯤은 있겠지 싶었다. 그래서 어느 날은 책상 위에 나를 이해해줄 것 같은 책들을 수북 하게 쌓아놓고, 나를 이해해줄 구절을 찾아 헤맸다. <내겐 휴가가 필요해>에서 그가 도서관에 있는 그 많은 책 중에 단 한권이라도 자기 같은 인생도 이 세상에 필요했다고 말해주는 책이 있을 것 같아서, 그 책을 찾아 그렇게 헤맨 것 처럼. 
  
산문집 <빗방울처럼 나는 언제나 혼자였다>에서 찾아낸 시 <선술집에서> 에서, 시인 루미는 말했다.  "네가 참 사람이라면, 사랑에 모든 걸 걸어라."      

<삶을 위한 지침>이란 시에서도 "사랑은 깊고 열정적으로 하라. 상처받을 수도 있지만, 그것만이 완전한 삶을 사는 유일한 길이다. "라고 말해주었고, 또 산문집 <끌림>에서도 "사랑해라. 시간이 없다. 사랑을 자꾸 벽에다가 걸어주지만 말고 만지고, 입고 그리고 얼굴에 문대라. 사랑해라. 정각에 도착한 그 사랑에 늦으면 안된다."라고 말해주었다.  그리고 그때 우연히 그가 읽는걸 보고 따라 읽게된 책도 하필이면 <달콤 쌉싸름한 초콜릿>이었다. 주인공들이 뜨겁게 사랑하는.  

그렇게 나는 책 속에서 이해받고 위로받았다.  

그리고 책이 말해준 대로 열정적으로 사랑했다. 모든 걸 걸고. 
 

  

3. 그 사랑이  다 어디로 갔을까  
 


그렇게 내 소중한 것을 버려가며 선택한 사랑이었는데, 그 사랑이 끝이 났다.   

 

내게 남은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남은 것이라고 해봤자, 그의 집 바로 맞은 편에 마련한 나의 집 정도. 그와 헤어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나는 결국 원래의 진로로 돌아왔다. 그렇게 원점으로 돌아오니 미칠 노릇이었다. 나는 2년 전의 나로 돌아와 다시 공부를 하고 있는데, 이미 2년의 소중한 시간들은 흘러버렸으니. 그렇게 사랑했던 사람이었는데, 결국 이렇게 헤어지고 다시 그를 만나기 전의 나로 기어이 돌아오고 말았으니. 

그 헤어짐이 어색해 나는 고개를 갸우뚱거렸다. 얼마 전까지 그를 만나고 그의 전화를 기다리던 일상이 이제는 갑자기 흔적도 없이 자취를 감춰버렸으니. 
 

아니, 내가 그렇게 사랑했던 사람이었는데, 그 사랑이 다 어디로 간걸까? 그 사랑은 다 어디로 가고 나만 결국 홀로 남은 걸까?  결국 이렇게 될꺼였으면, 도대체 그 사랑은 내게 다 뭐였단 말인가? 결국 그 사랑은 내 선택이 바보짓이였다는 것을 증명한 것뿐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정말 미칠 것 같았다. 


그러던 나는 어느 날 스스로 행복한 결론에 이르게 되었다. 내 인생에서 하고 싶은 것 중의 하나가 소설쓰기인데, 이 지나간 사랑은 내 소설의 탄탄한 소재가 되어줄 것이라는 것. 그리고 나는 원래부터 사랑에 굉장히 큰 가치를 두고 항상 사랑을 꿈꿔온 사람이었으므로, 꼭 그 사랑이 아니었더라도 내 인생에서 나는 반드시 한 번은 그런 열정적인 사랑을 했을 것이라는 것. 그러므로 그 사랑이 끝났음에 슬퍼하지 말고, 내 인생에서 한 번은 겪었을 그 진한 사랑을 이번에 한 것이라고 생각하자는 것. 그 사랑이 비록 사라진 것처럼 보이기는 하지만, 사실 아주 사라진 것은 아니며 나름의 의미가 있는 것이었으며 또 언젠가 내 소설로 재탄생할 것이라는 생각에 이르자, 겨우 마음이 편안해졌다. 

김연수 작가 역시 이 소설집에서 "그 사랑이 다 어디로 갔을까?"하고 끊임없이 묻고 답한다. <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의 '나'도, <당신들 모두가 서른 살이 됐을 때>의 '나'도, <달로 간 코미디언>의 '나'도. 그들은 그 사랑은 아주 없어진 게 아니라 우주 어딘가로 날아갔을 뿐이라고 말한다. 단지 우리가 그걸 보지 못할 뿐이라고.

 

내 지나간 사랑도 우주 어딘가에서 언젠가 나의 손길로 소설로 재탄생될 날을 기다리며 잘 지내고 있겠지.

 

4. 내가 공감하는 것들

 

<세계의 끝 여자친구> 소설집 속의 사람들은 공감받고 싶어하고, 또 공감을 통해 그제서야 소통하게 된다. <케이케이의 이름을 불러봤어>의 '나'와 해피가 누군가를 잃은 상처로부터 공감하게 되고. <네가 누구든, 얼마나 외롭든>의 '나'는 노을 사진을 통해 자신의 고통을 위안받고. 나는 누구에게 공감하는가?

 

얼마 전 친구가 오래 사귄 남자친구와 헤어졌다. 그 남자친구가 헤어지면서 친구의 발 앞에 침까지 뱉었다고 친구는 분개했다. 친구 앞에서 나는 친구에게 공감하는 척 했지만, 사실 나는 이상하게도 그 남자친구가 이해가 되었다. 그럴 수도 있지 하면서. 왜냐면 그는 더 많이 좋아한 사람, 그래서 상처받은 사람이니까. 나처럼.

 

또 어느 친구의 남자친구는 헤어지고 나서 커플링을 돌려달라고 얘기했다면서, 어느 친구 역시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흥분했다. 나는 이상하게 또 그 남자친구가 이해가 되었다. 그 남자 역시 더 많이 좋아한 사람이었으므로.

 

헤어짐 앞에서 어쩌면 더 힘든 사람은 더 많이 좋아한 사람이 아닐까 한다. 그가 나를 사랑하는 것보다 더 많이 그를 사랑한 나는, 사랑하는 동안에도 힘들었다. 그가 나만큼 나를 사랑해주지 않는 것에 상처받고, 기다리고 또 기다림에 상처받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랑하니까 그 사랑을 지켜나가고자 참고 기다리고 노력했다. 그런데 결국 헤어지게 되었다. 그 상처, 그 많은 고통의 순간들 끝에 결국 헤어지고 만 것이다. 그동안의 눈물 섞인 노력들이 다 물거품으로 돌아간 것이다. 그 사랑에 걸었던 기대와 애정이 더 많았던 만큼, 이별하는 동안에도 나는 무척 아팠다.

 

그 아픔 역시 겪어본 사람 아니면 공감하기 힘든 성질의 것이다. 사랑하는 동안 받았던 상처들이 이별의 상처와 뒤섞여서 그 아픔이 두배가 되니까. 사랑하는 동안엔 상대가 나를 봐주지 않고, 이젠 이별 앞에서 더이상 바라볼 상대 마저 사라지는 그 고통이란. 그러므로 나는 친구가 아닌, 친구를 더 사랑한 남자친구들의 이별 앞에서의 돌발 행동들이 그저 안쓰럽고 마음 아플 뿐이다.

 

5. 나이가 든다는 건,

 

나이가 든다는 건 이별을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달로 간 코미디언>의 '나'도 처음에는 갑작스런 이별 앞에서 힘들어 하며 그 이별의 이유가 너무 알고 싶어서, 또 그 이유조차 모르는 것에 고통스러워한다. 그러다가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난 뒤 어느 순간 '사랑은 질병 같은 것이고, 그래서 아무런 이유없이 사랑하고, 아무런 이유없이 이별하게 된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대목에서, 나도 같이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는 것이다.

 

나도 20대 초반에 느닷없는 이별 앞에서 어쩔 줄 몰라하던 때가 있었다. 얼마 안 만난 사이이긴 했지만 나는 그 아이에게 홀딱 반해버렸는데, 어제까지만해도 나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던 그가 갑자기 헤어지자고 했다. 이런 저런 이야기를 하면서. 정말로 왜 헤어지는 지는 말해주지 않은채 갑작스럽게.

 

그 아이와 헤어지고 나서 내가 힘들었던 건 헤어졌다는 사실 자체보다 왜 헤어졌는지를 모른다는 사실때문이 더 컸다. 상대와 왜 헤어진지도 모르고 그래서 상대를, 그 헤어짐을 이해할 수도 없으니 더욱 고통스러울 수 밖에. 그래서 나는 그 이유도 모르는 이별 앞에서 생각보다 오래 서성거렸다.

 

그랬던 나였지만, 나이를 하나 둘 더 먹고, 또 더 많은 사람을 만나고 사랑하고 또 진짜 이별을 하고 하다보니, 어느 순간 옛날의 그 이유를 알 수 없었던 이별이 이해가 되었다. 그건 그저 이별이었을 뿐이었다. 이별이란 게 원래 그렇게 생겨먹은 것이었다. 이유도 없고 이해도 안되는 것으로. 

 

그러므로 나이가 든다는 건, 결국 김연수의 소설을 이해하게 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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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딴방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199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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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외딴방, 나의 글쓰기

- <외딴방>을 읽고
 

 

1.

 조금 전 <외딴방>을 다시 다 읽었다. 어지럽혀진 책상을 정돈하고, 자질구레한 쓰레기를 버리고, 커피한잔을 타서 방으로 돌아와서 컴퓨터 앞에 이 글을 쓰기 위해 앉아있다. 문득 피식 웃음이 난다. <외딴방>을 다시 읽기 직전까지, 근 한달을 거시경제학 공부에 매달려왔던 나였다. <외딴방>을 읽기 전까지, 거시경제학 복습을 다 끝내기 위해, 밖으로 놀러나가고 싶은 마음을 반으로 줄이고 책상 앞에 앉아있던 나, 약속도 취소하고 책상 앞으로 다시 돌아왔던 나. 그 한달의 ‘나’와, <외딴방>을 손에 쥐고 있었던 며칠 간의 ‘나’가 과연 같은 사람인가 싶어서, 두 명의 ‘나’가 너무 달라서 그냥 어리둥절하기도하고 피식 웃음도 난다. 어느 ‘나’가 진짜 ‘나’에 가까운 모습일런지.



 <외딴방>을 읽으며, 그동안 단단하게 조여맸던 내 마음이 다 풀려버렸다. 마음 깊숙한 곳에 쑤셔넣고 또 쑤셔넣었던 어떤 기억들이 자꾸만 제멋대로 내마음 한가운데로 들어와, 내 마음에 가득차 버린다. 현재에 충실하자며, 책 한글자라도 더 보고자 애쓰고, 마음이 약해질때면 미래를 생각하며 다시 마음을 다잡았던 나는 점점 스물스물 사라져버린다. <외딴방>의 ‘나’에게 온통 마음을 빼앗긴 채, 그녀의 이야기를 내 일기를 읽듯 읽어가면서, 나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된다. 나의 과거를. 그리고 어떤 그리움.

 

 <외딴방>은 십년이 지나도록 작가에게 아프고 쓰라리고 깊은 상처로 남아 차마 정면으로 마주볼 자신이 없어서 외면하고 또 외면했던, 그녀의 열여섯에서 열아홉, 그 사 년의 이야기이다. 열여섯의 그녀가 시골에서 서울에 올라와, 큰오빠와 외사촌과 셋째 오빠와 함께 외딴방에 살았던 사 년. 다른 형제들 때문에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던 그녀가, 서울에 올라와 직업훈련원에서 훈련을 받은 뒤, 공장을 다니며, 회사에서 보내주는 산업체 특별학급 영등포여고 야간반을 다녔던 그 사 년. 그녀는 오후 다섯시를 가장 사랑했다. 공장의 힘든 근무가 끝나고, 교복으로 갈아입고 학교로 등교하던 시간 그 오후 다섯시.




*




 지난 2월말의 나, 택배를 싸다말고, 책꽂이 앞에서 고민에 잠겼다. 방학 동안 대구 집에 있다가, 이제 다시 개강을 맞이하여 서울의 기숙사로 올라가기 위해 택배를 싸던 도중에. 이번에는 무슨 책을 가져가야 할까. 내가 샀던, 내가 읽었던, 내가 좋아하는 책들을 모두 기숙사로 또 가져갈 수는 없었다. 매번 택배를 쌀 때마다, 나는 이 행복한 고민에 휩싸인다. 이 행복한 선별작업을 오늘 또 하고 있다. 이번 선별 작업의 기준은, 지난번에 서울에 가져가서 결국 읽지 않고 그대로 다시 가져온 책은 무조건 제외할 것. 그러다가 <외딴방>이 눈에띈다. 책을 넘겨보다가, 내가 밑줄 쳐 놓은, 내가 접어 놓은 한 페이지에서 멈춘다.

 

 “열여섯에, 그 파란 대문집 마루에 앉아 오빠의 편지를 기다리다가 내 발바닥을 쇠스랑으로 찍어버렸던 열여섯에, 나는 생은 독한 상처로 이루어지는 거라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 그 독함을 끌어안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순결한 한 가지를 내 마음에 두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그걸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야겠다고. 그러지 않으면 너무 외롭겠다고. 그저 살고 있다가는 언젠가 다시 쇠스랑으로 또 발바닥을 찍어버리겠다고. ”

 

 그 페이지에 오래 멈춰있다가, 다시 이번에는 천천히 페이지를 넘기다가, 또 다시 어떤 페이지에 멈춰선다.

 

 “풍속화 속의 고독의 날들 속에서 내가 자주 힘겹게 떠올린 건 도시로 나오던 그날 밤, 외사촌이 보여준 사진집 속의, 아득한 밤하늘 아래, 별을 향해 높고 아름답게 잠든 새들이었다. 나, 그들을 내 눈으로 보러 갈 날이 있을 것임을 힘겹게 나에게 기약하며 그 풍속화 속에서의 나날들을 살아내곤 했다. 훗날, 살아가는 피로와 관계의 부재 속에 처절하게 외로워졌을 때도, 그날 밤 외사촌이 들고 있던 화보 속의 새들, 백로들. 숲속에, 밤이 온 숲속에, 마치 세상의 모든 일을 다 용서한 듯, 서로 올망졸망 기대어 숲을 아름다이 잠으로 뒤덮고 있던 백로들의 무리를 내 눈으로 보러 가겠다는 마음 버리지 않았다. 나, 언젠가, 기차의 창틀에 팔을 흔들리며, 눈앞을 가로막는 능선을 넘어서 가리라고, 절망과 고독의 날일수록 남몰래 나에게 기약하였다. ”

 

 <외딴방>을 책꽂이에서 꺼내 굳이 이 구절을 확인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내 마음에 고이고이 새겨놓았던 구절들이다. 이미 다 외울대로 외워버린 구절인데도, 나는 이 구절들을 이 페이지들을 이 책을 놔두고 떠날 자신이 없어진다. 서울의 나의 외딴방, 기숙사 방에서 이 책과 함께 하고 싶다. 결국 <외딴방>을, 택배 박스도 아닌, 가방에 넣고 <외딴방>과 함께 서울행기차에 올라탄다.



 

*

 

  그리고 지금, 서울의 나의 외딴방에서, <외딴방>을 다 읽었다. 읽는 도중 무언가 이상하였던 것을, 책을 덮고난 지금은 알 것 같다. 나는 분명히 저 구절들을 보고 엄청 감명을 받아, 내 가슴속에 새겨놓기 까지 했는데, 왜 지금 다시 저 구절들을, <외딴방>을 보는 동안은 처음 저 구절을 읽었을 때만큼의 감흥이 오지 않는지, 그것이 이상했다. 이젠 알겠다. 저 구절을 처음 본 순간, 처음 <외딴방>을 다 읽은 순간부터 내게 저 구절은 더 이상 <외딴방>의 한 구절이 아니었다. 저 구절은, 내가 처음 만나서 내마음에 새긴 그 순간부터, 어느새 나의 일부가 되어 나와 함께 살아왔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 내가 다시 저 구절을 만났을 때 무언가 새로운 것을 깨달은 감동을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아! 저 구절처럼 나도 앞으로 살아야 겠구나.’라는 생각 대신 ‘아, 내가 저 구절대로 몇 년을 살아왔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나는 나와 함께 살아온 내 마음의 촛불을 오랜만에 다시 바라볼 수 있었다.

 

  <외딴방>의 열여섯, 열일곱, 열여덟, 열아홉의 그녀를 살게 한 건, 작가가 되고 싶다. 글을 쓰고 싶다는 그녀의 바람과 희망이었다. 학교에서 최홍이 국어선생님을 만나, 선생님이 “너 소설을 써보는게 어떻겠냐?”라고 말한 그 순간부터, 선생님에게서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란 책을 건네받은 순간부터, 그녀는 그 꿈을 기둥삼아 살아간다.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틈이 날 때마다, 그 책을 노트에 옮겨 적으며 그녀는 꿈을 키워 간다. 힘이 들때마다 그녀를 지탱해준 것은, 언젠가는 이 외딴방에서 벗어나 작가가 되겠다는 그녀의 꿈이다.

 

 "그것만이 나를 지켜줄거야."

 

 그녀의 모습을 보며, 나는 지금의 나를 보고있는 듯도 하고, 예전의 나를 보고있는 듯도 하다. 지금의 나. 책상 앞에 놓인 탁상 달력을 바라본다. “흔들리지 말 것. 약해지지 말 것. 우선순위, Myself, Study!”라고 쓰여져있다. 그래도 흔들리거나 약해질 때마다, 내 마음속으로 가만히 이 말을 되뇌인다. ‘출발역에서 도착역까지.’ 2월말에 서울로 올라오는 기차표를 예매하는 웹 페이지에, 출발역과 도착역을 입력하는 칸이 있었다. 출발역과 도착역. 가끔은 막막해질 때가 있다. 지금의 내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건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인지. 그럴 때, 조용히 나의 출발역과 도착역을 생각해본다. 쉽지 않았던 나의 대학교 출발. 그리고 몇 년 후에 도착할, 나의 대학교 졸업 그리고 나의 목표 성취. 그러고 나면 내가 지금 어디 서있는지가 조금은 뚜렷해지고, 나를 감쌌던 막막함이 걷힌다. 작가가 되겠다는 그녀의 꿈이 그녀를 지탱해주었듯, 나는 또 나만의 꿈이 나를 지탱한다.  

 

  예전의 나. 고등학생인 나. 대구의 내 방을 떠나, 더 넓은 세계, 서울로 꼭 가고야 말겠다는 꿈이 나를 지탱하고 있다. 매일 밤 열두시면 어김없이 나를 찾아오는, 라디오 디제이 유희열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렇게 나는 꿈을 꾼다. 재수해서 들어간 대학교를 한학기 다니고 휴학하고 다시 내발로 대구로 내려와, 다시 반수 혹은 삼수를 시작한 나. 이제 나의 꿈을 선명하고 또렷하고 확실하다. 법조인이 되는 것. 재수때처럼 그냥 마냥 대학생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이젠 확고하게 법대생이 되고 싶다. 대학교의 멋진 여름방학도 마다하고, 내발로 다시 학원으로 들어간 나는, 내 손으로 다시 책을 펼쳐 들고 수학 공부를 하기 시작한다. 그 힘들었던 재수를 다시 내 뜻으로 시작하게 한 건, 법대생이 되고싶다는 꿈, 법을 공부하고 싶다는 꿈, 나를 업그레이드하고 내 능력을 진정 최대로 발휘해보고 싶다는 꿈, 오직 그 꿈 하나이다.

 

  어쩌면 산다는 것은 그런게 아닐까. 자신만의, 무엇인가 순결한 한가지, 무엇인가 절대로 변하지 않는 한가지를 내 마음에 두고 그것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게 아닐까. 내게 그 ‘무엇인가’는 ‘나자신’이다. 나자신의 미래에 대한 꿈과 목표와 희망, 그리고 그에대한 절대적인 믿음이다. 그리고 그 ‘무엇인가’를 품은 나를 지탱해주는 ‘누군가’는 나의 사랑하는 가족과 나의 친구들이다. 내가 언제 어디에 있든 어떤 상황에 있든, 내가 웃고 있든 울고 있든 항상 나의 가까이에서 혹은 멀리서 함께해줄 그 누군가.

 



 

2.




 내게 글쓰기란 무엇인가?

 작가는 <외딴방>의 처음과 끝에서 그렇게 묻는다. 어쩌면 이책은 작가가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놓여있는 건지도 모른다. 작가는, <외딴방>의 그녀는 말한다.

 

 "글쓰기란, 그런 것인가. 글을 쓰고 있는 이상 어느 시간도 지난 시간이 아닌 것인가. 떠나온 길이 폭포라도 다시 이 지느러미를 찢기며 그 폭포를 거슬러 돌아오는 연어처럼. 아픈 시간 속을 현재형으로 역류해 흘러들 수 밖에 없는 운명이, 쓰는 자에겐 맡겨진 것인가.”

 

 열아홉의 여름에 그 외딴방에서 갑자기 뛰쳐나왔던 그녀는, 글쓰기를 통해, 다시 그녀의 아픈 열여섯에서 열아홉의 과거와 마주한다. 어느 날 그녀가 좋아하던 희재언니가 시골집에 내려갈려고 하는데 깜빡 잊고 자기 방문을 잠그지 않았다고 그녀에게 저녁에 집에 돌아왔을 때 자기 방문을 자기대신 잠궈달라고 부탁한다. 그렇게 그날 저녁 그녀는 희재언니의 부탁대로 언니의 열쇠통을 채워주었을 뿐인데, 여러날이 흐른후 희재언니의 그 남자가 방문을 부수고 들어간 그 방에는 희재 언니가 죽어있다. 그렇게 그녀의 열아홉에 희재언니가 결코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아픔으로 남아있었기에, 그녀는 <외딴방>을 쓰기 전까지 그녀의 열여섯에서 열아홉, 사 년의 시간을 외면하고 또 외면해왔던 것이다.  외딴방의 그녀에게 육체로 목소리로 남아 불쑥 그녀를 고요하게 만드는, 그녀에게 지워지지 않는 한 이름, 희재언니. 십 몇 년 만에, 그녀는 그녀의 글 속에서 희재언니를 다시 만난다. 그리고 십여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희재언니를 그녀의 글 속에 띄워 흘려 보낸다.





 

 내게 글쓰기란 무엇인가? 지난 여름, 캐나다 벤쿠버로 여행을 떠났다. 여행 가방 속 가장 앞에는, 나의 일기장이 있었다. 비행기에 올라타자마자 나는 내 일기장을 펼치고 일기를, 나의 글을 쓰기 시작했다. 벤쿠버에서 밤마다 나는 일기를 썼다. 새로이 느낀 것들, 깨달은 것들, 새로운 다짐들을 잊지 않고 잘 새겨두기 위해. 그리고 누군가가 절실히 보고싶고, 눈물이 나고, 슬프고, 마음이 아플 때, 그 마음을 둘 곳이 없어서, 나는 내 마음을 내 글 속에 담았다. 캐나다 록키에서의 3박4일간의 여행 중에도, 나는 글을 썼다. 지금도 기숙사 내 책상 서랍 가장 밑 칸에는 지난 일기들이 있다. 그리고 나는 오늘밤도 어젯밤처럼 일기를 쓸테지.

 

 일기장을 가장 절실하게 찾게 되는 때는 마음이 어지럽고 슬프고 우울하고 힘들 때이다. 그럴 때 일기를 쓴다. 글을 쓰다보면, 어지럽고 울렁대던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한다. 그 글 속에 어지럽고 슬프고 여린 내 마음을 놓고 오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보람차고 기쁘고 가슴 벅찬 순간에도 꼭 일기를 챙겨서 쓴다. 이 기쁜 마음을, 벅찬 마음을 잊지않고, 더 오래오래 간직하기 위해.

 

 일기를 쓸 때, 그리고 지난 일기들을 다시 꺼내 읽을 때, 나는 그 순간 가장 온전한 ‘나’가 된다. 지난 일기 속에, 오늘의 일기 속에, 진짜 '나'가 있다. 글을 쓰며 그 글을 다시 읽으며 끊임없이 계속해서 나자신과 대면하고 대화한다. 그 글 속에서 나는 가장 안락하다. 넘치는, 결코 사그러들지 않는 아픔과 눈물이 나를 엄습할 때, 나는 나의 글 속에서만큼은 그 눈물을 감당할 수 있다. 나의 글 속에서만큼은 내 아픔과 눈물과 슬픔을 내 손으로 감싸안고 보듬어 안을 수 있다.

 

 내게 글쓰기란, 그렇게, 나를 가장 나답게 만드는 한가지. 내가 가장 나다운 나자신을 만나는 길. 내가 나약하고 흔들리고 약한 나자신을 보듬어안고, 내 눈물을 닦아주는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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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오기 2009-08-13 0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호~ 금상을 받은 작품이군요. 축하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