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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
신경숙 지음 / 문학동네 / 2010년 5월
평점 :
1. 서울이라는 도시
내 고향 대구에서 서울로 올라오는 기차 안. 나는 여느때처럼 노트를 펼쳐들고 일기를 쓴다. 그 기차안에서 했던 수많은 다짐들을 내가 정말 전부 다 지켰더라면, 아니 반이라도 지켰더라면 난 이미 성공하고도 남았을테지. 오늘의 다짐도 아마 전부 잘 지켜지기는 어렵겠지만, 난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 또 몇자 남긴다. 기차 안에서의 나의 일기 속 다짐들은 주로 한 마디로 요약된다. 열.심.히.살.것.
대구를 떠나 대학교에 진학하기 위해 처음 서울로 올라온지 7년이 지났건만, 기차를 타고 대구와 서울을 오가는 일은 항상 내게 새롭게 다가온다. 아마 그것은 내가 서울에서의 일상에서 벗어나, 가끔씩 지금의 나를 되돌아보고 생각하게 할 시간을 갖게 하기 때문일거다. 대구로 내려갈 때는 나에 대한 반성과 성찰을, 또 서울로 올라갈 때는 그래도 다시 희망 한가닥을 마음 속에 품고 새로운 결심과 다짐을 할 수 있게 해주는 그 시간.
그 시간에 내가 그렇게 일기를 쓰고 다이어리를 정리하고 하는 것은, 스무살에 처음 서울에 올라오면서부터 시작된 혹은 일종의 의식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집을 떠나 독립해서 서울에서 혼자 살게 되었을 때, 처음으로 내가 정말 혼자서 살아가야 하는 거구나를 깨닫게 된 순간, 이제 정말 남은 건 의지할 데는 나 자신밖에 없다는 걸 깨달은 순간, 외롭게 홀로 남은 나 자신을 다독여줄 존재 역시 나 자신밖에 없다는 걸 깨달은 순간, 그때 그런 나약한 나 자신을 토닥여주기 위해 시작한 일이었을 것이다. 소설 속 정윤이 스물한 살에 다시 이 도시로 돌아오면서 자기 자신과 약속한 것처럼.
'책을 다시 읽을 것'
'이 도시를 하루에 두 시간 이상씩 걸을 것'
고향을 떠나 서울로, 살기위해 이 도시로 모여든 사람들의 마음이란 결국 이렇게나 비슷한 것일까. 정윤의 다짐은 나의 다짐과 별반 다르지 않다. 서울 생활이 외롭고 힘들 때면 나 역시 소설책 속으로 숨어들곤 했다. 책 속에 흠뻑 빠져있다가 현실로 다시 나오면, 그래도 다시 살아갈 힘을 얻곤 했다.
나도 처음엔 정윤처럼 이 도시와 별로 친하지 않았다. 이 도시를 잘 몰랐기에 난 지하철만 타고 다녔다. 대학교 1학년때부터 숱하게 서울역과 학교 사이를 오갔지만, 나는 항상 지하철만 탔다. 처음에 그랬더니 버릇이 되어버렸던 모양이었다. 그러다가 몇 년이 지나서야 우연히 서울역과 학교 사이를 다니는 버스 노선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처음 서울역에서 501번 버스를 탔던 날, 그 날의 충격은 잊을 수 없다. 몇 년 동안이나 서울역과 학교 사이의 공간은 내게 그저 지하철 노선표 상의 한 점으로 존재할 뿐이었다. 그런데 버스를 타고 그 공간을 직접 가보니, 그 곳 역시 살아 숨쉬는 공간이었다. 내 고향 대구처럼. 숙대입구, 삼각지, 신용산, 한강대교, 상도터널. 거리마다 가득한 건물과 상점들. 그리고 그곳을 지나다니는 수많은 사람들과 차들. 그제서야 서울이 보였다. 내가 사는 도시가 새롭게 보였다. 지하철을 타고 검은 벽만 보고 외롭게 지나다닐 때보다, 버스를 타고 직접 그 공간을 바라보면서 지나다니니 이제서야 그 공간이 내 공간 같았고, 그곳의 사람들이 내 사람들 같았다. 정윤처럼 그 거리들을 걸어다니기까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버스로 직접 다니기 시작한 순간, 뭔가 사람사는 냄새를 맡았다고나 할까.
2. 내 방으로의 초대
<어디선가 나를 찾는 전화벨이 울리고>에서 폭풍처럼 시위가 휩쓸고 간 도시 한 복판에서 윤과 명서, 그리고 미루가 우연히 만난다. 그리고 정윤이 둘에게 말한다.
"내 방에 가겠어? 반찬은 꺳잎김치밖에 없지만 밥해줄게. 쌀은 많아. 가자."
또 정윤과 윤미루가 같이 목욕탕에 갔던 날, 윤미루가 정윤에게 말한다.
"자고 갈래?"
그렇게 그들은 서로의 방에 초대함으로써 한층 가까워지게 된다.
나 역시 혼자 사는 내 방으로의 초대, 그것의 특별한 의미를 안다. 나도 처음 서울에서 5년동안을 혼자서 지냈기에. 대학교 기숙사에서 3년, 그리고 원룸에서 혼자 2년을 살았다. 혼자 사는 것은 그토록 오랜 시간이 지났음에도 불구하고 좀처럼 익숙해지지 않았다. 밤에 방문을 열고 들어서서 아무도 맞아주는 사람이 없고 혼자서 불을 키고 들어가서 혼자서 방 안에 덩그러니 놓여있을 때의 그 이상한 기분이란. 밤마다 괜히 외롭고 우울했다. 그래, 어차피 인생 혼자라지만 이건 너무 혼자잖아라는 생각. 이 세상에서 나만 외로이 홀로 남겨져있는 듯한 느낌.
그 외로움을 떨쳐내기 위해 가끔 친구들을 초대했다. 기숙사에 살 때는 룸메이트와 함꼐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룸메이트들과는 쉽게 친해지지 않았고 우리는 그저 같은 공간을 공유하는 사람으로 존재할 뿐이었다. 그래서 룸메이트가 가끔 방을 비울 때면, 기숙사 같은 동에 사는 친구를 불러 같이 놀다가 잠을 자곤 했다. 그 긴긴 밤 동안 우리가 나누었던 수많은 이야기들. 누구 때문에 설레었던 이야기, 들뜬 연애의 감정 또는 가슴 시리도록 아픈 마음까지. 또 혼자 사는 건 정말 외로운 일이야 라는 말에 서로 공감해가며 그 외로움을 공유함으로써 우리는 그 감정에서 한발짝 정도 물러날 수 있었다. 적어도 그 밤에는 혹은 그이후로도. 기숙사에서 함께 보내는 밤의 시간들이 쌓일 수록 우리의 우정도 깊어갔다. 그리고 그 친구로 인해 조금은 덜 외로울 수 있었던 것 같다.
원룸에 나와 살게 되었을 때도 종종 친구들을 불렀다. 밤에 같이 영화를 다운받아 보기도 하고, 같이 맥주 한잔을 들이키기도 하면서 나누었던 이야기들, 방 한가득 퍼져나가던 우리의 웃음 혹은 울음. 그 밤 혹은 새벽, 같이 천장을 보고 누워서 그녀는 내게 자기 마음 가장 깊숙한 이야기를 꺼냈다. 둘이 함께 하는 밤의 시간이란 그런 것이다. 각자 마음 속 깊은 곳에 묻어두었던 이야기를 꺼내어 들게 하는 마법같은 시간. 가장 진솔해질 수 있는 시간.
20대 후반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 지금은 선뜻 친구를 초대하지는 못한다. 20대 초반의 나와는 달리 이제는 어느 정도 혼자 지내는 것에도 익숙해졌기에. 또 지난 날들 만큼 누군가에게 마치 발가벗은 듯이 오롯이 솔직해져야만 하는 그 시간들이 때로는 감당할 자신이 없어서. 그래서 가끔은 지난 날들에 그녀들과 함께 솔직하게 서로의 마음을 드러내놓고 각자의 인생의 외로움, 무게를 나눠 짊어질 수 있었던 그 밤들이 그립다.
3. 그 상처로부터 나는 얼마나 멀어졌는가
소설 속의 청춘들, 정윤, 명서, 미루는 자기가 사랑하는 사람의 상실과 이별 앞에서 큰 상처를 입는다. 20대 초반의 나도 뜻하지 않게, 전혀 예상하지도 못한 채 그녀를 잃었고 그로 인한 상처는 쉽게 가시지 않았다.
스무 살의 나, 대입에 실패하고 재수학원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곳에서 그녀를 만났다. 우연히 그녀와 나는 친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그녀가 좋았다. 그녀는 활발하고 사교적이고 성격도 좋고 잘 웃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리고 똑똑하고 공부도 잘하고 자기가 하고싶은 것에 대한 확신과 목표, 신념도 뚜렷한, 한마디로 나와는 달리 강한 여자였다. 나는 그녀 옆에서 나도 그녀와 닮아가기를, 나도 그녀처럼 좀더 강해지기를 바랬던 것도 같다. 언제부턴가 우리는 함께 어울려 다니기 시작했으며, 쉬는 시간이나 점심 시간마다 많은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으며 또 방과 후에 다른 학원도 같이 다니기 시작했다. 그리고 우리는 휴대폰 문자도 점점 더 자주 주고받으며 그렇게 점점 다 가까워졌다. 아니, 나는 적어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던 어느날 갑자기, 그녀가 내게 편지 한통을 주었다. 편지 속에서 그녀는 나와 절교하자고, 나와 친구 관계 자체를 끊자고 얘기하고 있었다. 나를 만나기 전에 자기를 엄청 좋아해서 쫓아다니던 아이가 있었는데, 그 아이가 어느새부턴가 자기의 일거수 일투족을 알려고 들면서 문자도 지나치게 자주보내고 마치 자기 스토커처럼 굴었다고 했다. 내가 그 아이처럼 스토커같다는 것까지는 아니지만, 내 애정, 관심과 연락, 문자 모두 부담스럽다고 자기는 우리관계가 불편해서 자기공부에 방해되니 절교하자고 했다.
나로서는 전혀 생각도 못한 청천벽력같은 일이었다. 일단 너무 기분이 나빠서 같은 반 오빠에게 부탁해서 그 편지를 라이터 불로 불태워버렸다. 순식간에 재가 되어 사라진 편지. 그리고 깨어진 관계. 나는 그렇게 그녀를 잃었다. 하지만 진짜 시련은 그 후로 시작되었다. 그녀에게서 그런 상처를 받기 이전에 나는 내 감정에 솔직하고 누군가에게 먼저 다가가는데 주저하지 않는 아이였다. 또 사람들과 만나고 어울리는 것을 무척 좋아했다. 그랬던 내가 마음을 주고 믿었던 그녀에게서 갑자기 거절을 당하고 나자, 그 다음에 새로이 사람을 만나고 관계를 맺을 때면 예전과 달리 머뭇거리게 되었다. 또 누군가에게서 갑자기 그런 거절을 당할까봐, 또 지금 내앞에서 웃고있는 누군가도 갑자기 돌변해서 나를 배신할까봐 두려웠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선뜻 먼저 다가가고 싶어도 쉽게 그러지 못했다. 누가 먼저 연락을 하느냐에 신경을 쓰기 시작했으며, 서로 얼마나 마음을 주고 받느냐 재어보고 어느 정도 균형이 맞다 싶어야만 안심이 되었다.
한 사람이 다른 사람에게 기대도 되는 건 어디까지 일까.
나, 그녀를 잃음으로써 20대 내내 사람들과의 관계에서 이 질문에서 쉽게 벗어날 수 없었다. 내 천성을 바꾸지는 못해서 여전히 사람들에게 먼저 다가가기는 했으나, 다가가면서도 항상 내가 그에게 너무 많이 다가간 건 아닌가, 혹시나 그래서 그가 내게서 등돌려버릴까봐 가슴 졸여야 했다. 그러다 누군가가 내게 조금만 등을 보이면, 나는 지난날의 상처가 덧나서 괜히 더 아파해야만 했다. 나의 20대는 언제나 그 적당한 거리를 찾지 못해 힘들고 외롭고, 아팠다.
그렇게 나는 깊디 깊었던 그 상처로부터 결코 자유로울 순 없었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상처로부터 조금이라도 더 멀어지기 위해 무던히도 애를 썼다. 책 속에서 정윤이 미루에게 마음 속으로 말한다.
"함께 공유하면 상처가 치유될까. 잊을 수는 없겠지만 그때로부터 마음이 멀어지길. 바래진 상처를 딛고 다른 시간 속으로 한 발짝 나아가길."
정윤의 말대로, 나는 그 상처를 다른 사람과 공유했다. 물론 그 이야기를 털어놓는 것이 무척 자존심이 상하기도 하고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지만, 나는 그래야만 그 상처로부터 벗어나 예전의 나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기에 그리 했다. 그렇게 다른 사람들이 내 이야기에 공감해주고 내 상처에 안쓰러워해줬을 때, 나는 그제야 조금씩 치유되기 시작했다. 또 새로이 알게 된 친구가 먼저 "은정아"라고 내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나는 그제야 마음을 놓고 웃음 짓기 시작했다.
그 일로부터 몇 년이라는 시간이 흐른 지금, 이제는 스무 살의 그때만큼 아프지는 않다. 물론 그 상처가 내 마음 속에 낙인처럼 찍혀서 나를 괴롭힐 때도 있지만, 그래도 거기에도 익숙해졌다. 어떤 이와의 관계에서 내가 괜히 마음 졸일 때면, 이제는 내가 스스로 내 자신을 감싸 안아주기에 이르렀다.
'괜찮아. 이 사람은 나와 오랜 시간 친한 관계를 맺었잖아. 이 사람이 지금 내게 소홀한 것 처럼 보여도 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것 너도 알잖아. 이 사람은 내게 등돌리지 않을 사람이란 거 알잖아. 그러니까... 괜찮아. 마음 졸이지 말자.'
라고.
또 그 사람이 나를 떠날 까봐 걱정하고 의심하기 보다는, 오히려 그 사람을 더 크게 믿어보기도 한다. 그 믿음이 오히려 그 사람과의 관계를 잘 유지하는데 도움이 되기도 한다는 것을 이제는 깨달았기에.
4. 청춘이란...
" 인생의 맨 끝에 청춘이 있어야 한다는 생각을 할 때가 있어.
누군가 약속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의미 없는 일은 없다고 말이야. 믿을 만한 약속된 무엇이 있었으면 좋겠다. 이렇게 쫓기고 고독하고 불안하고 이렇게 두려움 속에서 보내고 나면 다른 것들이 온다고 말이야."
라고 명서는 말한다.
글쎄, 그의 생각에 나는 별로 동의하지 않는다. 오히려 청춘이란 불안과 고독 그 자체로 정의되는 것이 아닐까.
물론 나의 청춘의 시간들에도 앞이 보이지 않아 방 안에서 혼자 엉엉 울었던 때가 있다. 내 앞에 놓인 여러 선택의 기로에 서서 이것도 선택할 수가 없고 저것도 선뜻 선택할 수가 없어서 그저 목놓아 우는 일밖에는 할 수 없었던 절망의 순간. 도저히 벗어나올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그 순간. 또 마치 내가 종교처럼 신앙처럼 믿었던 그 사랑이 깨어지고 홀로 덩그러니 남아 가슴을 치며 울었던 때도 있다.
청춘이란 그 힘든 시간들과 힘겹게 싸우며 때로 이기기도 하고 떄로는 지기도 하며, 그 시간들을 헤쳐나가는 과정 그 자체가 아닐까. 나는 그 힘든 시간들을 어떻게 견뎌내어 왔을까. 미루는 그 시간들을 자기가 먹은 것을 노트에 쓰며 견뎌왔다. 또 정윤은 다시 책을 읽고 이 도시를 걸어다니며 견뎠다. 명서는 갈색 노트에 자기의 생각, 상념들을 써서 채워가며 견뎠다. 단이는 정윤에게 편지를 쓰며 견뎠다. 그리고 결국 그들이 만났을 때, 그들은 서로 그 힘듦을 함께 하며 그 시간들을 견뎠다. 서로의 문장들을 이어나가며, 서로의 아픔을 공유하며, 서로의 상처를 어루만져 주면서.
나는 내가 좋아하는 글과 함께 하면서 그 시간들을 버텨 왔다. 내가 좋아하는 소설을 읽으며, 또 일기를 써 나가며. 그 불안하고 혼란스러웠던 시간 동안 그래도 소설 속 구절 하나하나, 문장 하나하나는 나를 버틸 수 있게 하는 힘이었다. 그 소설 속에 푹 빠져있을 때, 그 문장과 내가 하나와 되었을 때, 나는 진정으로 '살아있음'을 느꼈으므로. 또 외롭게 혼자 내 마음을 달래야했던 그 시간에 나는 일기를 쓰며 내 자신과 함께 하며 버틸 수 있었다. 그 불안과 고독을 생생히 글로 남겨놓고 나면,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곤 했다. 그렇게 혼란스러운 마음들을 그 글에 다 담아놓고 오고서야 나는 비로소 앞으로 다시 한 발 한 발 나아갈 수 있었다.
내가 이 소설 속 그들을 처음 만난 것은 작년 겨울에 인터넷 연재를 하고 있을 때였다. 수험 공부를 하느라 외롭고 힘들었던 나는 이 소설을 만나, 정윤과 명서, 미루, 단이를 만나 그 답답했던 시간들을 통과할 힘을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지금 책으로 나온 그들의 이야기를 다시 읽으면서, 나는 또다시 이 여름을 견디고 있다. 그들의 청춘의 시간들에 초대받아서 그들과 함께 할 수 있어서, 내 청춘은 오늘도 견딜만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