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외딴방, 나의 글쓰기
- <외딴방>을 읽고
1.
조금 전 <외딴방>을 다시 다 읽었다. 어지럽혀진 책상을 정돈하고, 자질구레한 쓰레기를 버리고, 커피한잔을 타서 방으로 돌아와서 컴퓨터 앞에 이 글을 쓰기 위해 앉아있다. 문득 피식 웃음이 난다. <외딴방>을 다시 읽기 직전까지, 근 한달을 거시경제학 공부에 매달려왔던 나였다. <외딴방>을 읽기 전까지, 거시경제학 복습을 다 끝내기 위해, 밖으로 놀러나가고 싶은 마음을 반으로 줄이고 책상 앞에 앉아있던 나, 약속도 취소하고 책상 앞으로 다시 돌아왔던 나. 그 한달의 ‘나’와, <외딴방>을 손에 쥐고 있었던 며칠 간의 ‘나’가 과연 같은 사람인가 싶어서, 두 명의 ‘나’가 너무 달라서 그냥 어리둥절하기도하고 피식 웃음도 난다. 어느 ‘나’가 진짜 ‘나’에 가까운 모습일런지.
<외딴방>을 읽으며, 그동안 단단하게 조여맸던 내 마음이 다 풀려버렸다. 마음 깊숙한 곳에 쑤셔넣고 또 쑤셔넣었던 어떤 기억들이 자꾸만 제멋대로 내마음 한가운데로 들어와, 내 마음에 가득차 버린다. 현재에 충실하자며, 책 한글자라도 더 보고자 애쓰고, 마음이 약해질때면 미래를 생각하며 다시 마음을 다잡았던 나는 점점 스물스물 사라져버린다. <외딴방>의 ‘나’에게 온통 마음을 빼앗긴 채, 그녀의 이야기를 내 일기를 읽듯 읽어가면서, 나는 자꾸만 뒤를 돌아보게 된다. 나의 과거를. 그리고 어떤 그리움.
<외딴방>은 십년이 지나도록 작가에게 아프고 쓰라리고 깊은 상처로 남아 차마 정면으로 마주볼 자신이 없어서 외면하고 또 외면했던, 그녀의 열여섯에서 열아홉, 그 사 년의 이야기이다. 열여섯의 그녀가 시골에서 서울에 올라와, 큰오빠와 외사촌과 셋째 오빠와 함께 외딴방에 살았던 사 년. 다른 형제들 때문에 고등학교에 진학하지 못했던 그녀가, 서울에 올라와 직업훈련원에서 훈련을 받은 뒤, 공장을 다니며, 회사에서 보내주는 산업체 특별학급 영등포여고 야간반을 다녔던 그 사 년. 그녀는 오후 다섯시를 가장 사랑했다. 공장의 힘든 근무가 끝나고, 교복으로 갈아입고 학교로 등교하던 시간 그 오후 다섯시.
*
지난 2월말의 나, 택배를 싸다말고, 책꽂이 앞에서 고민에 잠겼다. 방학 동안 대구 집에 있다가, 이제 다시 개강을 맞이하여 서울의 기숙사로 올라가기 위해 택배를 싸던 도중에. 이번에는 무슨 책을 가져가야 할까. 내가 샀던, 내가 읽었던, 내가 좋아하는 책들을 모두 기숙사로 또 가져갈 수는 없었다. 매번 택배를 쌀 때마다, 나는 이 행복한 고민에 휩싸인다. 이 행복한 선별작업을 오늘 또 하고 있다. 이번 선별 작업의 기준은, 지난번에 서울에 가져가서 결국 읽지 않고 그대로 다시 가져온 책은 무조건 제외할 것. 그러다가 <외딴방>이 눈에띈다. 책을 넘겨보다가, 내가 밑줄 쳐 놓은, 내가 접어 놓은 한 페이지에서 멈춘다.
“열여섯에, 그 파란 대문집 마루에 앉아 오빠의 편지를 기다리다가 내 발바닥을 쇠스랑으로 찍어버렸던 열여섯에, 나는 생은 독한 상처로 이루어지는 거라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 그 독함을 끌어안고 살아가기 위해서는 무엇인가 순결한 한 가지를 내 마음에 두지 않으면 안 되겠다고. 그걸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야겠다고. 그러지 않으면 너무 외롭겠다고. 그저 살고 있다가는 언젠가 다시 쇠스랑으로 또 발바닥을 찍어버리겠다고. ”
그 페이지에 오래 멈춰있다가, 다시 이번에는 천천히 페이지를 넘기다가, 또 다시 어떤 페이지에 멈춰선다.
“풍속화 속의 고독의 날들 속에서 내가 자주 힘겹게 떠올린 건 도시로 나오던 그날 밤, 외사촌이 보여준 사진집 속의, 아득한 밤하늘 아래, 별을 향해 높고 아름답게 잠든 새들이었다. 나, 그들을 내 눈으로 보러 갈 날이 있을 것임을 힘겹게 나에게 기약하며 그 풍속화 속에서의 나날들을 살아내곤 했다. 훗날, 살아가는 피로와 관계의 부재 속에 처절하게 외로워졌을 때도, 그날 밤 외사촌이 들고 있던 화보 속의 새들, 백로들. 숲속에, 밤이 온 숲속에, 마치 세상의 모든 일을 다 용서한 듯, 서로 올망졸망 기대어 숲을 아름다이 잠으로 뒤덮고 있던 백로들의 무리를 내 눈으로 보러 가겠다는 마음 버리지 않았다. 나, 언젠가, 기차의 창틀에 팔을 흔들리며, 눈앞을 가로막는 능선을 넘어서 가리라고, 절망과 고독의 날일수록 남몰래 나에게 기약하였다. ”
<외딴방>을 책꽂이에서 꺼내 굳이 이 구절을 확인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내 마음에 고이고이 새겨놓았던 구절들이다. 이미 다 외울대로 외워버린 구절인데도, 나는 이 구절들을 이 페이지들을 이 책을 놔두고 떠날 자신이 없어진다. 서울의 나의 외딴방, 기숙사 방에서 이 책과 함께 하고 싶다. 결국 <외딴방>을, 택배 박스도 아닌, 가방에 넣고 <외딴방>과 함께 서울행기차에 올라탄다.
*
그리고 지금, 서울의 나의 외딴방에서, <외딴방>을 다 읽었다. 읽는 도중 무언가 이상하였던 것을, 책을 덮고난 지금은 알 것 같다. 나는 분명히 저 구절들을 보고 엄청 감명을 받아, 내 가슴속에 새겨놓기 까지 했는데, 왜 지금 다시 저 구절들을, <외딴방>을 보는 동안은 처음 저 구절을 읽었을 때만큼의 감흥이 오지 않는지, 그것이 이상했다. 이젠 알겠다. 저 구절을 처음 본 순간, 처음 <외딴방>을 다 읽은 순간부터 내게 저 구절은 더 이상 <외딴방>의 한 구절이 아니었다. 저 구절은, 내가 처음 만나서 내마음에 새긴 그 순간부터, 어느새 나의 일부가 되어 나와 함께 살아왔던 것이다. 그래서 지금 내가 다시 저 구절을 만났을 때 무언가 새로운 것을 깨달은 감동을 받을 수가 없는 것이다. ‘아! 저 구절처럼 나도 앞으로 살아야 겠구나.’라는 생각 대신 ‘아, 내가 저 구절대로 몇 년을 살아왔구나.’라는 생각을 하게 된 것이다. 그렇게 나는 나와 함께 살아온 내 마음의 촛불을 오랜만에 다시 바라볼 수 있었다.
<외딴방>의 열여섯, 열일곱, 열여덟, 열아홉의 그녀를 살게 한 건, 작가가 되고 싶다. 글을 쓰고 싶다는 그녀의 바람과 희망이었다. 학교에서 최홍이 국어선생님을 만나, 선생님이 “너 소설을 써보는게 어떻겠냐?”라고 말한 그 순간부터, 선생님에게서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올린 작은 공이란 책을 건네받은 순간부터, 그녀는 그 꿈을 기둥삼아 살아간다. 공장의 컨베이어 벨트 위에서 틈이 날 때마다, 그 책을 노트에 옮겨 적으며 그녀는 꿈을 키워 간다. 힘이 들때마다 그녀를 지탱해준 것은, 언젠가는 이 외딴방에서 벗어나 작가가 되겠다는 그녀의 꿈이다.
"그것만이 나를 지켜줄거야."
그녀의 모습을 보며, 나는 지금의 나를 보고있는 듯도 하고, 예전의 나를 보고있는 듯도 하다. 지금의 나. 책상 앞에 놓인 탁상 달력을 바라본다. “흔들리지 말 것. 약해지지 말 것. 우선순위, Myself, Study!”라고 쓰여져있다. 그래도 흔들리거나 약해질 때마다, 내 마음속으로 가만히 이 말을 되뇌인다. ‘출발역에서 도착역까지.’ 2월말에 서울로 올라오는 기차표를 예매하는 웹 페이지에, 출발역과 도착역을 입력하는 칸이 있었다. 출발역과 도착역. 가끔은 막막해질 때가 있다. 지금의 내가 어디에 있는지, 무엇을 하고 있는건지, 무엇을 위해 살고 있는 것인지. 그럴 때, 조용히 나의 출발역과 도착역을 생각해본다. 쉽지 않았던 나의 대학교 출발. 그리고 몇 년 후에 도착할, 나의 대학교 졸업 그리고 나의 목표 성취. 그러고 나면 내가 지금 어디 서있는지가 조금은 뚜렷해지고, 나를 감쌌던 막막함이 걷힌다. 작가가 되겠다는 그녀의 꿈이 그녀를 지탱해주었듯, 나는 또 나만의 꿈이 나를 지탱한다.
예전의 나. 고등학생인 나. 대구의 내 방을 떠나, 더 넓은 세계, 서울로 꼭 가고야 말겠다는 꿈이 나를 지탱하고 있다. 매일 밤 열두시면 어김없이 나를 찾아오는, 라디오 디제이 유희열의 목소리를 들으며 그렇게 나는 꿈을 꾼다. 재수해서 들어간 대학교를 한학기 다니고 휴학하고 다시 내발로 대구로 내려와, 다시 반수 혹은 삼수를 시작한 나. 이제 나의 꿈을 선명하고 또렷하고 확실하다. 법조인이 되는 것. 재수때처럼 그냥 마냥 대학생이 되고 싶은 것이 아니라, 이젠 확고하게 법대생이 되고 싶다. 대학교의 멋진 여름방학도 마다하고, 내발로 다시 학원으로 들어간 나는, 내 손으로 다시 책을 펼쳐 들고 수학 공부를 하기 시작한다. 그 힘들었던 재수를 다시 내 뜻으로 시작하게 한 건, 법대생이 되고싶다는 꿈, 법을 공부하고 싶다는 꿈, 나를 업그레이드하고 내 능력을 진정 최대로 발휘해보고 싶다는 꿈, 오직 그 꿈 하나이다.
어쩌면 산다는 것은 그런게 아닐까. 자신만의, 무엇인가 순결한 한가지, 무엇인가 절대로 변하지 않는 한가지를 내 마음에 두고 그것을 믿고 의지하며 살아가는 게 아닐까. 내게 그 ‘무엇인가’는 ‘나자신’이다. 나자신의 미래에 대한 꿈과 목표와 희망, 그리고 그에대한 절대적인 믿음이다. 그리고 그 ‘무엇인가’를 품은 나를 지탱해주는 ‘누군가’는 나의 사랑하는 가족과 나의 친구들이다. 내가 언제 어디에 있든 어떤 상황에 있든, 내가 웃고 있든 울고 있든 항상 나의 가까이에서 혹은 멀리서 함께해줄 그 누군가.
2.
내게 글쓰기란 무엇인가?
작가는 <외딴방>의 처음과 끝에서 그렇게 묻는다. 어쩌면 이책은 작가가 그 물음에 대한 답을 찾아가는 과정에 놓여있는 건지도 모른다. 작가는, <외딴방>의 그녀는 말한다.
"글쓰기란, 그런 것인가. 글을 쓰고 있는 이상 어느 시간도 지난 시간이 아닌 것인가. 떠나온 길이 폭포라도 다시 이 지느러미를 찢기며 그 폭포를 거슬러 돌아오는 연어처럼. 아픈 시간 속을 현재형으로 역류해 흘러들 수 밖에 없는 운명이, 쓰는 자에겐 맡겨진 것인가.”
열아홉의 여름에 그 외딴방에서 갑자기 뛰쳐나왔던 그녀는, 글쓰기를 통해, 다시 그녀의 아픈 열여섯에서 열아홉의 과거와 마주한다. 어느 날 그녀가 좋아하던 희재언니가 시골집에 내려갈려고 하는데 깜빡 잊고 자기 방문을 잠그지 않았다고 그녀에게 저녁에 집에 돌아왔을 때 자기 방문을 자기대신 잠궈달라고 부탁한다. 그렇게 그날 저녁 그녀는 희재언니의 부탁대로 언니의 열쇠통을 채워주었을 뿐인데, 여러날이 흐른후 희재언니의 그 남자가 방문을 부수고 들어간 그 방에는 희재 언니가 죽어있다. 그렇게 그녀의 열아홉에 희재언니가 결코 지워지지 않는 상처로 아픔으로 남아있었기에, 그녀는 <외딴방>을 쓰기 전까지 그녀의 열여섯에서 열아홉, 사 년의 시간을 외면하고 또 외면해왔던 것이다. 외딴방의 그녀에게 육체로 목소리로 남아 불쑥 그녀를 고요하게 만드는, 그녀에게 지워지지 않는 한 이름, 희재언니. 십 몇 년 만에, 그녀는 그녀의 글 속에서 희재언니를 다시 만난다. 그리고 십여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희재언니를 그녀의 글 속에 띄워 흘려 보낸다.
내게 글쓰기란 무엇인가? 지난 여름, 캐나다 벤쿠버로 여행을 떠났다. 여행 가방 속 가장 앞에는, 나의 일기장이 있었다. 비행기에 올라타자마자 나는 내 일기장을 펼치고 일기를, 나의 글을 쓰기 시작했다. 벤쿠버에서 밤마다 나는 일기를 썼다. 새로이 느낀 것들, 깨달은 것들, 새로운 다짐들을 잊지 않고 잘 새겨두기 위해. 그리고 누군가가 절실히 보고싶고, 눈물이 나고, 슬프고, 마음이 아플 때, 그 마음을 둘 곳이 없어서, 나는 내 마음을 내 글 속에 담았다. 캐나다 록키에서의 3박4일간의 여행 중에도, 나는 글을 썼다. 지금도 기숙사 내 책상 서랍 가장 밑 칸에는 지난 일기들이 있다. 그리고 나는 오늘밤도 어젯밤처럼 일기를 쓸테지.
일기장을 가장 절실하게 찾게 되는 때는 마음이 어지럽고 슬프고 우울하고 힘들 때이다. 그럴 때 일기를 쓴다. 글을 쓰다보면, 어지럽고 울렁대던 마음이 가라앉기 시작한다. 그 글 속에 어지럽고 슬프고 여린 내 마음을 놓고 오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보람차고 기쁘고 가슴 벅찬 순간에도 꼭 일기를 챙겨서 쓴다. 이 기쁜 마음을, 벅찬 마음을 잊지않고, 더 오래오래 간직하기 위해.
일기를 쓸 때, 그리고 지난 일기들을 다시 꺼내 읽을 때, 나는 그 순간 가장 온전한 ‘나’가 된다. 지난 일기 속에, 오늘의 일기 속에, 진짜 '나'가 있다. 글을 쓰며 그 글을 다시 읽으며 끊임없이 계속해서 나자신과 대면하고 대화한다. 그 글 속에서 나는 가장 안락하다. 넘치는, 결코 사그러들지 않는 아픔과 눈물이 나를 엄습할 때, 나는 나의 글 속에서만큼은 그 눈물을 감당할 수 있다. 나의 글 속에서만큼은 내 아픔과 눈물과 슬픔을 내 손으로 감싸안고 보듬어 안을 수 있다.
내게 글쓰기란, 그렇게, 나를 가장 나답게 만드는 한가지. 내가 가장 나다운 나자신을 만나는 길. 내가 나약하고 흔들리고 약한 나자신을 보듬어안고, 내 눈물을 닦아주는 장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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