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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의 변화 - 상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05년 7월
평점 :
품절


열정으로 처음 만난 산도르 마라이는 정말 오랜만에 고전의 묵직함을 다시 느끼게 해주었다. 19세기 근대소설을 읽을 때나 느꼈음직한 이런 고전들은 소설을 읽는데 걸리는 시간만으로도 감정의 깊이가 생기게 되는데 무게감있는 감정이 그 작은 책으로부터 생겨날 줄은 예상치 못했다. 그래서 산도르 마라이는 나에게 최근 몇 년간 가장 반갑게 만난 작가 중의 한 명으로 남아 있다.

결혼의 변화 역시 작가의 무게감을 느낄 수 있는 작품이었다. 특유의 대화체로 이루어진 소설은, 3명의 인물들이 각각 견디고 기다리며 살아 온 소설 속의 시간을 독자들에게도 고스란히 느끼게 하려는 듯 그 시간 속의 이야기를 섣불리 풀어내지 않는다.

 

산도르 마라이의 주인공들은 단 한 마디 말을 위해, 단 하나의 풀지 못한 의문을 위해 시간을 견뎌내고, 기다린다. 그리고 그 시간 뒤에 얻을 수도 얻지 못할 수도 있는 답이 아니라, 기다림 그 자체가 결국 삶이라는, 새롭지 않지만 우리는 매번 잊고 지내는 깨달음을 준다 

죽을 것을 알면서도 살아가는 것이 인간의 숙명인데 그런 기다림을 품지 않고서야 어떻게 삶을 지속할 수 있을 것인가.

 

산도르 마라이가 풀어가는 이야기는, 아주 천천히 지속적으로 긴장감이 증폭되어서 그 긴장감을 실제로 느낄 때에는 더 이상 견디기가 힘들 정도로 팽팽해진다. 그래서 그것이 폭발할 때에는 실제로 몸에 소름이 돋을 정도의 힘을 뿜어낸다. 그 폭발을 만들어내는 건 너무나 작은 무엇인가이고, 너무나 짧은 순간일 뿐이다.

작은 리본 한 조각, 돌아보지도 않고 느낀 등 뒤의 살의의 순간 결국 그것들은 주인공들의 삶을 집어 삼키고, 그 순간을 묘사한 산도르 마라이의 몇 구절은 읽는 이의 마음을 집어 삼키고 만다.

 

결혼의 변화는 세 인물의 고백을 듣고 나서야 이야기와 인물들의 마음과 시간이 풀리는 3부 구조로 되어 있다. 알고 있다고 생각한 사건에 대한 변주가 계속 되고 풀리지 않은 비밀이 풀리는 듯한 즐거움이 있지만, 개인적으로는 이야기와 이야기가 주는 긴장감이 3부까지 잘 유지되지 않아서 조금 아쉬웠던 기억이 있다.

어쩌면 내 개인이 1부의 일롱카와 2부의 페터의 이야기에 더 이입하였기 때문에 그랬는지도. 그러니 유디트의 파괴적 사랑’에 이입하는 독자라면 소설을 읽으며 긴장감과 흥미로움은 더욱더욱 커질지도 모를 일이다. 그리고 어차피 이런 엇갈림들이 사랑을 만들고 연인과 결혼의 관계를 만들면서, 시간을 완성시켜나가는 것이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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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0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할머니 할아버지로부터 듣는 옛날 이야기가 재미있는 건 그 이야기의 내용 때문만이 아니라 이야기를 하는 그 자신이 살아온 시간이 녹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어디에서도 열정의 주인공 헨릭과 같은 노인에게 옛날 이야기를 들을 수는 없다. 자신의 과거 속에서만 사는 귀신 같은 노인은 그 자신 이야기의 대상이 될지언정 그에게 호기심을 느끼는 세상 사람들에게 절대 자기 이야기를 풀어내는 이야기꾼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또 그래서 우리는 책을 읽고 소설을 읽는 게 아닌가, 괴팍한 노인으로부터 자신의 평생을 밤새도록 풀어내게 하고 예기치 못한 과거의 순간을 함께 겪으며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경험을 하고.

작가가 주인공의 유모 니니에 대해서 말하듯 이 소설은 ‘노인들 특유의 솔직함으로, 담담하게’ 쓰여졌으나, 단 한 번 언성을 높이지 않고도 읽는 이를 극도의 긴장 상태로 몰아간다. 결투장에서 등을 돌리고 걸음을 걷는 두 남자 사이에도, 낮은 목소리의 인사와 악수로 재회하는 헨릭과 콘라드 사이에 흐르는 정도의 긴장감을 느끼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백년 전, 대륙의 다른 쪽 끝에 살았던 두 노인의 이야기는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다 그렇듯 시간과 장소에 매이지 않는 인간 보편의 감정이 실려있다. 둘도 없는 친구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은밀한 우정의 추억, 그러나 그 각별함이 빚어내는 그림자 아래 쌓이는 질투, 소외감, 그리고 절대 함께 할 수 없는 그만의 일부. ‘그가 다른 종류의 사람’이라는 깨달음.

몇 십 년간, 헨릭은 자기가 수없이 되새긴 과거를 매일 다시 살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 세월이 헨릭에게는 41년의 수천번 겪는 긴 시간이었을 것이며, 같은 이유로 그는 41년 전 청년의 모습 그대로 남아있기도 하다. 콘라드가 다시 돌아온 날, 콘라드와 함께 과거를 되씹으며, 단 하룻밤만에 헨릭은 41년의 세월을 지나 비로소 노인이 된다, 자신의 삶을 인정하게 된다.

콘라드를 만나기 위해,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 삶을 버틸 수 있었다고 헨릭은 생각한다. 그러나 헨릭과 콘라드, 그리고 크리스티나가 겪은 한 순간의 불타는 열정 또는 영원히 타오르는 정열, 그리움을 자신의 삶으로 인정하기 위해 겪어야 했던 41년 간의 기다림, 그것 자체가 그의 삶에 의미를 주는 것은 아닐까. 사랑도 그리움도 그 대상보다 감정 자체가 삶의 의미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은 헨릭과 콘라드가 함께 풀어야만 했던 문제였던 것이다. ‘사물과 말이 돌고돌아, 이따금 전세계를 돌고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와 완성되’듯이 헨릭도 콘라드도 다시 서로를 만나야만 했던 것이다.

매일 매일 풀어야 하는 문제가 생기고 그때마다 우리는 어떻게든 그 문제를 해결하며 그 날을 넘기고, 그 해를 넘기며 나이를 먹지만, 어떤 문제는 풀리지 않은 채 그 스스로 살아 남는다. 지금의 나는 그것을 알 지 못할 테지만, 그 문제로 인해 내가, 내 삶이 어떻게 방향을 바꾸는지, 또 내가 어떻게 길을 벗어나 새로운 길에 들어섰는지, 이 모든 것을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헨릭 스스로의 말처럼 ‘중요한 문제들은 결국 언제나 전 생애로 대답’할 수 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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