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정
산도르 마라이 지음, 김인순 옮김 / 솔출판사 / 2001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할머니 할아버지로부터 듣는 옛날 이야기가 재미있는 건 그 이야기의 내용 때문만이 아니라 이야기를 하는 그 자신이 살아온 시간이 녹아있기 때문일 것이다. 그러나 누구도 어디에서도 열정의 주인공 헨릭과 같은 노인에게 옛날 이야기를 들을 수는 없다. 자신의 과거 속에서만 사는 귀신 같은 노인은 그 자신 이야기의 대상이 될지언정 그에게 호기심을 느끼는 세상 사람들에게 절대 자기 이야기를 풀어내는 이야기꾼은 아닐 것이기 때문이다. 또 그래서 우리는 책을 읽고 소설을 읽는 게 아닌가, 괴팍한 노인으로부터 자신의 평생을 밤새도록 풀어내게 하고 예기치 못한 과거의 순간을 함께 겪으며 온 몸에 소름이 돋는 경험을 하고.

작가가 주인공의 유모 니니에 대해서 말하듯 이 소설은 ‘노인들 특유의 솔직함으로, 담담하게’ 쓰여졌으나, 단 한 번 언성을 높이지 않고도 읽는 이를 극도의 긴장 상태로 몰아간다. 결투장에서 등을 돌리고 걸음을 걷는 두 남자 사이에도, 낮은 목소리의 인사와 악수로 재회하는 헨릭과 콘라드 사이에 흐르는 정도의 긴장감을 느끼게 하지는 못할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약 백년 전, 대륙의 다른 쪽 끝에 살았던 두 노인의 이야기는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다 그렇듯 시간과 장소에 매이지 않는 인간 보편의 감정이 실려있다. 둘도 없는 친구에게서만 느낄 수 있는 은밀한 우정의 추억, 그러나 그 각별함이 빚어내는 그림자 아래 쌓이는 질투, 소외감, 그리고 절대 함께 할 수 없는 그만의 일부. ‘그가 다른 종류의 사람’이라는 깨달음.

몇 십 년간, 헨릭은 자기가 수없이 되새긴 과거를 매일 다시 살았을 것이다. 그래서 그 세월이 헨릭에게는 41년의 수천번 겪는 긴 시간이었을 것이며, 같은 이유로 그는 41년 전 청년의 모습 그대로 남아있기도 하다. 콘라드가 다시 돌아온 날, 콘라드와 함께 과거를 되씹으며, 단 하룻밤만에 헨릭은 41년의 세월을 지나 비로소 노인이 된다, 자신의 삶을 인정하게 된다.

콘라드를 만나기 위해, 진실을 확인하기 위해 삶을 버틸 수 있었다고 헨릭은 생각한다. 그러나 헨릭과 콘라드, 그리고 크리스티나가 겪은 한 순간의 불타는 열정 또는 영원히 타오르는 정열, 그리움을 자신의 삶으로 인정하기 위해 겪어야 했던 41년 간의 기다림, 그것 자체가 그의 삶에 의미를 주는 것은 아닐까. 사랑도 그리움도 그 대상보다 감정 자체가 삶의 의미가 되기도 한다. 그리고 그것은 헨릭과 콘라드가 함께 풀어야만 했던 문제였던 것이다. ‘사물과 말이 돌고돌아, 이따금 전세계를 돌고 다시 출발점으로 돌아와 완성되’듯이 헨릭도 콘라드도 다시 서로를 만나야만 했던 것이다.

매일 매일 풀어야 하는 문제가 생기고 그때마다 우리는 어떻게든 그 문제를 해결하며 그 날을 넘기고, 그 해를 넘기며 나이를 먹지만, 어떤 문제는 풀리지 않은 채 그 스스로 살아 남는다. 지금의 나는 그것을 알 지 못할 테지만, 그 문제로 인해 내가, 내 삶이 어떻게 방향을 바꾸는지, 또 내가 어떻게 길을 벗어나 새로운 길에 들어섰는지, 이 모든 것을 언젠가는 알게 될 것이다. 헨릭 스스로의 말처럼 ‘중요한 문제들은 결국 언제나 전 생애로 대답’할 수 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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