좌파가 알아야 할 것들 마니에르 드 부아 Maniere de voir 시리즈 1
세르주 알리미 외 32인 지음, 이진홍 옮김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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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노동당 기관지 <미래에서 온 편지> 2015년2월호


전세계 좌파의 민낯을 살핀다

양솔규 기획조정실 국장


『좌파가 알아야 할 것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 2014년12월 / 19,800원


한국의 사회운동이 프랑스 일간지 ‘르몽드’가 내는 잡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를 대중적으로 인식하게 된 것은 아마도 IMF 구제금융 직후인 1998년 2월 즈음인 거 같다. 생소한 디플레이션 상황과 IMF 구제금융, 처음으로 겪게 된 대량실업에 사람들은 어리벙벙했고 이는 운동권도 예외가 아니었다. 김대중은 대통령에 당선된 뒤 바로 IMF 캉드쉬 총재를 만나 성실한 구조조정 프로그램 이행을 약속했다. 한국사회는 이제 개발독재시기와 단절하고 신자유주의의 세례를 받게 되었다. 그러던 중 ‘전태일을 따르는 민주노조운동연구소’에서 ‘르몽드 디플로마티크’의 글들을 편역해 ⟪신자유주의와 세계민중운동⟫이라는 책을 발간했다. 이 책에는 세계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는 민중들의 신자유주의에 대한 격렬한 투쟁이 소개되어 있었다. 예를 들어 미국 화물트럭노동자들의 투쟁(보통 ‘팀스터’라 불리는 조직. 마피아와 결탁했던 전설적인 노동운동가 호파가 위원장으로 있던 조직)은 당시 제조업과 사무직 중심의 한국 노동운동으로서는 생소한 싸움이었다. 훗날 미국 노동운동은 이러한 팀스터 등 새로운 노동조합운동을 동력으로 개혁파 스위니 집행부를 출범시키고 미국노총(AFL-CIO)의 개혁을 추진한다. 한국의 노동운동은 전국운송하역노조를 종자돈으로 삼고 전략적 조직화 사업을 통해 ‘화물연대’를 건설한다. 또한 이 책에는 브라질 PT당의 주요한 지지기반 중 하나였던 무토지농민운동(MST)도 소개했다. 그리고 1995년 1월1일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가 발효되던 날 멕시코 치아파스에서 봉기한 싸빠띠스따 민족해방군 부사령관 마르코스의 명문 ‘제 4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었다’도 이 책에 실린 바 있다. 네그리와는 다른 결을 가진 자율주의자 존 홀로웨이의 ‘새로운 권력개념’ 역시 신선한 충격을 줬다. 무엇보다 이 책이 우리에게 전달해준 가장 큰 메시지는 신자유주의가 가져온 재앙이 우리만 겪고 있는 것이 아니며, 이러한 재앙에 맞선 투쟁이 전세계적 맥락을 가지고 치열하게 곳곳에서 벌어지고 있다는 사실을 알려준 것이다. (물론 이전에도 ‘전국노동운동단체협의회’나 ‘전국노동운동단체연합’. ‘매일노동뉴스’와 같은 다양한 조직들의 소식지에 이러한 투쟁의 단면들은 전해지고 있었다.)


지금 소개하는 책은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프랑스판이 발행하는 격월간지 ⟪마니에르 드 부아 Manière de voir⟫ 124호 ⟪집권 좌파의 역사⟫를 번역한 것이다. 다소 어색한 제목인 ‘좌파가 알아야 할 것들’은 이 책의 서문의 제목이기도 하다. 지금 우리 당의 처지가 ‘집권’과는 상당한 거리가 있지만, 그렇기에 더더욱 서구와 남미의 집권 좌파의 역사를 검토해보는 것은 의미있는 일일 것이다. 그렇다고 그들을 너무 부러워할 필요는 없다. 이 책은 오히려 “변화와 개혁을 잘 이끌기 위해서 집권은 필요조건일 뿐이지 충분조건은 아니라는 사실”을 분명하게 보여준다.


1부는 세계진보정치가 품은 ‘거대한 희망’을 보여준다. 최초의 노동자공화국이라는 ‘파리 코뮌’을 비롯해 비록 독일과의 환율 협상에서 패배하고 항복하고 말았지만 전후 서구 최초의 좌파정권을 수립한 프랑스사회당의 사례 등이 소개된다. 미테랑이 73년에 쓴 글에는 프랑스사회당의 원대한 꿈이 이렇게 서술되어 있다. “유럽을 건설하는 일은 프랑스에 사회주의를 이룩하려는 의지와 분리될 수 없다. 사회당은 노동자 조직 전체와 유럽 사회주의 운동과 함께 행동해나갈 것이다.” 그러나 이보다 더욱 감동적인 서술은 이미 파리 코뮌의 선거관리 위원회가 다음과 같이 발표했다. “코뮌의 깃발은 전 세계 공화국의 깃발이며 모든 도시는 그 도시를 위해 봉사하는 모든 외국인들에 대해서도 시민이라는 칭호를 마땅히 부여할 권리가 있는 점 등을 고려할 때 위원회는 외국인들도 허용되어야 한다고 판단한다.” 반제국주의자인 부르키나 파소의 대통령인 토마 상카라가 1984년 유엔 총회 연설은 또 어떤가? “가난한 대중을 위해, 하나의 사상을 위해서 싸우는 것은 결코 헛된 것이 아닙니다. 여러분 모두에게 부탁합니다. 합리적이지 못한 인간의 교만이 더 이상 횡행하지 못하도록, 기아로 죽어가는 어린아이들의 슬픈 광경을 더 이상 볼 수 없도록, 기아로 죽어가는 어린아이들의 슬픈 광경을 더 이상 볼 수 없도록, 무지가 사라지도록, 그리고 더 이상 무기 소리가 들리지 않도록 함께 노력하자고 말입니다.”


2부는 지구상 수많은 좌파들의 다양한 경험과 맞부딪힌 문제들을 다룬다. 민주노동당 시절부터 중요한 정책으로 받아들였던 포르투알레그레의 ‘참여예산제’는 21세기 좌파가 추구하는 민주주의 제도의 상징이었다. 그러나 현재 참여예산제의 예산폭도 축소되었고, 심지어 “지지층 표심을 확실하게 하려는 인기전술로 활용되어 의미가 퇴색하고 그 활용도가 떨어지고 있다”는 것이다. 한편으로는 경제 엘리트와 공권력에 의한 제도화, 다른 한편으로는 시민사회의 진정한 활동 수단을 다시 부여하는 것 사이에 놓여 있는 참여예산 제도는 좌파들이 다시금 부여잡고 재생해야 하는 주제이다.


3부는 좌파들이 맞이했던 실패의 경험들을 보여준다. 충분조건을 마련하지 못한 좌파들이 겪은 실패들에는 미테랑의 ‘긴축정책 대전환’, 새로운 노동당주의 등이 해당된다. 말하자면 ‘변변치 못한 수단과 무거운 책무만이 남아있는 시대’의 좌파들이 맞이할 수밖에 없는 운명들이라는 것인데, 그러나 이러한 ‘구조’, ‘조건’이 결코 견고하게 고착화되어 있는 것만은 아니다. 참여 민주주의적 상상력은 오히려 정치가 정당성을 상실하는 정치 위기 상황에서 생겨나기 마련이다. 시리자(급진좌파연합)는 변변치 못한 수단과 무거운 책무만이 존재하는 수렁에 빠진 그리스의 상황이기에 더더욱 중대한 시대적 역할을 부여받고 있다. 비록 올랑드가 파리를 방문한 시리자의 젊은 당수 치프라스를 문전박대했지만 말이다.


4부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좌파는 여전히 새로운 세상과 유토피아의 현실화를 꿈꾼다. 여전히 뜨거운 감자 ‘기본소득’을 다루면서, ‘수입과 노동의 분리에 기초한’ 다양한 복지제도들과 마찬가지로 기본소득 역시 실현될 수 있다고 주장한다. 기본소득과 관련해 이 책에는 유명한 인도의 여성단체 SEWA가 실시한 무조건부 현금지원 실험을 소개한다. 또한 좌파시장 더블라지오를 선출한 뉴욕의 변화도 다룬다.


르몽드 디플로마티크 한국판 발행인은 “(한국) 좌파 정치의 가장 큰 오류는 선거 때마다 유권자의 표를 얻기 위해, 혹은 여론과 미디어에 영합하고자 자신들의 주장과 정체성을 일관되게 끌고 가지 못했다는 점”이라고 꼬집는다. “선거가 끝나면 정당과 지지자들 사이에서는 늘 정당 통합이나 신당 창당 같은 이야기가 나온다. 늘 그렇듯이, 예전과 같은 정치공학적인 통합이나 창당이 반복된다”며 “집권을 꿈꾸는 정당이라면 가치와 비전 그리고 대중과 호흡할 수 있는 정책, 이를 만들어낼 실력을 갖추는 데 노력을 쏟아야 한다.”고 충고한다. 정동영의 탈당과 국민모임의 신당창당 움직임이 본격화되고 있는 지금, 이러한 충고가 가볍게 들리지만은 않는다. 다만, 좌파라고 볼 수 없는 손학규, 주대환 등의 한국 필자들에게 ‘갈림길에 선 한국 좌파’(5부)를 물어보는 것은 귀한 충고에는 어울리지 않는 이 책의 실책이라 지적하지 않을 수 없다.


<더 읽을만한 책>


⟪좌파로 살다⟫/ 뉴레프트리뷰 엮음 / 사계절 / 2014년2월 / 35,000원

⟪레프트 사이드 스토리⟫/ 장석준 / 개마고원 / 2014년1월 / 15,000원

유럽을 건설하는 일은 프랑스에 사회주의를 이룩하려는 의지와 분리될 수 없다. 사회당은 노동자 조직 전체와 유럽 사회주의 운동과 함께 행동해나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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