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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가 우선한다 - 사회민주주의와 20세기 유럽의 형성
셰리 버먼 지음, 김유진 옮김 / 후마니타스 / 2010년 12월
평점 :
2010년 12월 28일 (화)
용두사미로 끝나버린 20세기 유럽 사회민주주의 분석
고민은 지금부터! 우리에게!
『정치가 우선한다 : 사회민주주의와 20세기 유럽의 형성』, 셰리 버먼 (후마니타스, 2010)
양솔규
셰리 버먼의 『정치가 우선한다』는 아주 흥미로운 가정에 기반하고 있다. 바로 20세기 정치의 최종적 승자는 우리가 흔히 얘기하는 ‘수정’ 자유주의 또는 ‘내장된 자유주의’가 아니라 사회민주주의라는 것이다. 이전에는 공존할 수 없었던 것으로 보였던 여러 가지 요소들, 예컨대 민주주의, 자본주의, 사회적 안정을 결합시키는 것에 성공하면서 20세기에 가장 성공적인 이데올로기로 자리매김 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여기서 말하는 사회민주주의는 마르크스주의와 자유주의 사이의 어중간한 중도도 아니고, 복지국가 등의 특정한 정책을 도입하는 시도로 환원해서도 안된다. 저자에 의하면 사회민주주의는 특정한 정치적 강령을 훨씬 넘어서는 것이며, ‘정치의 우선성’과 ‘공동체주의에 대한 특유의 믿음’을 가진 마르크스주의와 자유주의 둘 모두에 대한 뚜렷한 대안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특성은 파시즘 등도 공유하고 있는 바, 따라서 파시즘과 구별되는 사회민주주의의 특성에는 민주주의에 대한 확고한 믿음이 있다는 것이다.
셰리 버먼의 이야기를 더 들어보자.
19세기와 20세기 초반에 자본주의에 대한 문제제기는 필연적인 요구였다. 이에 세 가지 해답이 제시되었다. 자유주의적 해법, 마르크스주의적 해법, 파시즘적․민족사회주의적 해법이었다. 저자가 보기에 자유주의적 해법과 마르크스주의적 해법은 모두 ‘경제 우선적’ 해법이었다. 자유방임주의는 시장이 모든 문제를 해결할 것으로 보았으며, 마르크스주의적 해법은 그 특유의 경제결정론에 입각해 대기론을 부추겼다. 요컨대 정치가 개입할 여지가 없었다. ‘혁명을 만든다는 것은...요인들을 준비하는 것’을 의미하며 ‘달리 말하자면, (우리는) 혁명을 만드는 사람들이 아니’게 되었다.(세라티) 하지만 자본주의는 대중들에게 파국을 선사했고 해결책이 필요했다.
이에 대한 해답으로 두 가지 입장이 제시되었다. 민주적 수정주의의 입장(베른슈타인)과 혁명적 수정주의의 입장(소렐)이었다.
민주적 수정주의는 민주주의와 자유주의를 사회주의에 배타적인 것으로 보지 않았다. 사회주의를 자유주의의 정신적․현실적 후계자로 보았고, 민주주의는 목표를 이루기 위한 최고의 수단이자 근본적 구성 요소로 보았다. 또한 마르크스주의의 경제우선론을 기각하고 역사 유물론과 계급투쟁을 공격했다. 이러한 민주적 수정주의는 전간기를 거치면서 사회민주주의로 등장하게 된다.
반면 혁명적 수정주의는 자유주의를 혐오했고 민주주의를 파괴적이고 퇴보적인 영향을 일으키는 사상으로 보았다. 따라서 현존 자유주의 체제는 폭력적 방식을 통해 혁명적으로 뒤엎어야 한다고 보았다. 이러한 흐름은 나중에 민족주의, 사회주의적 요소들과 결합해 파시즘과 나치즘으로 나타나게 된다.
(민주적 수정주의에서 진화한) 사회민주주의, 파시스트, 민족사회주의자들(나치)들은 공통적으로 유사한 원리와 정책을 발전시키면서 ‘정치의 우선성’을 강조했다. 자유주의와 정통 마르크스주의가 19세기와 20세기 초반의 사회적 변화와 요구에 적절한 대안을 제시하지 못한 반면 이러한 운동들은 대중들에게 하나의 선택지를 제공했을 뿐만 아니라 열망을 제공했다. 하지만 독일 사민당, 이탈리아 사회당, 프랑스 사회당 등은 모두 전간기에 제시된 여러 가지 쟁점들에 대해 무기력하게 대응했다. 다수의 의석 획득으로 인해 대두된 정부 참여 문제를 거부하는가 하면(책임성 결여), 민족주의의 위력에 대한 평가 절하, 정통 마르크스주의에 대한 고집과 이로 인한 실천의 부재가 공통적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이러한 나라들에서는 사회민주주의에 대한 요구가 증대되었음에도 불구하고 당 내에서 거절됨으로서 ‘정치의 우선성’의 필요는 무솔리니와 히틀러의 몫이 되고 말았다. 무솔리니와 히틀러는 계급교차적 이해를 주장하고(국민정당화), 민족주의를 동원했으며, 자유주의와 자본주의에 대해 공격을 가했다. 비록 탐욕스러운 자본과 창조적인 자본을 구분하여 기업계의 우려를 불식시키고 동시에 반자본주의적 자세를 유지했지만 말이다.
오로지 한 나라에서만 사회민주주의적 실천이 당 내에 안착하였다. 바로 스웨덴이다. 스웨덴에서만 가능했던 이유는 국제 사회주의 운동에서 주변적 위치에 있었고, 브란팅을 비롯한 민주적 수정주의자들의 지도력이 유지되었으며, 정치적 후진성(보통선거권의 배제)이 민주주의를 사회주의를 위한 중요한 요소로 제시하게 했다. 요즘의 용어로 말하자면 (사회주의 운동에 있어서의) ‘후발주자의 이점’ 이랄까?
어쨌든 이러한 19-20세기 초반의 이데올로기 필요성에 대한 수요와 이에 대한 각 이데올로기의 공급, 서로간의 투쟁의 과정을 거치고, 또한 두 번의 세계대전을 거친 후 끝까지 살아남은 것은 사회민주주의라는 것이다.
셰리 버먼은 사회주의(마르크스주의)와 사회민주주의(민주적 수정주의) 간의 쟁점들을 역사적 이데올로기 투쟁 과정을 통해 매우 역동적이고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있다. 저자는 ‘정치적 우선성’이 당시에 요구될 수밖에 없었던 20세기 초반의 상황 속에서, 그러나 사회주의 진영이 이를 실기할 수밖에 없었던 것을 마르크스주의의 책임으로 돌린다. 예를 들어 국가를 부르주아의 집행위원회로 보는 시각은 국가 참여주의를 기각하게 만듬으로써 국민들이 사회주의 정당에 원하는 책임감을 거부하게 했다는 것이다. 또한 민족주의에 대한 거부와 국제주의 고수는 민족주의의 거대한 잠재적 힘을 퇴행적 사회세력에게 넘겨주는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말하자면 정통적인 경제결정론과 원칙에 얽매임으로서 현실의 변화를 이루지 못했다는 것이다. 따라서 사회주의 정당들이 불가피하게 어정쩡한 모습으로 핑계를 대며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몇몇 개혁 조치들 또한 이론과 실천의 분리 속에서 전체 사회개조를 위한 장기적 목표 속에 위치 짓지 못하고 말았다는 것이다.
셰리 버먼의 책은 지금의 우리에게도 여러 가지 고민 지점을 던져주고 있다. 과거 민주노동당의 강령에는 민주적 사회주의를 지향한다는 언급이 들어있다. 이 ‘민주적 사회주의’의 정체가 무엇인가를 둘러싸고 여러 가지 논쟁도 진행된 바 있다. 사회민주주의와 유사한 어떤 것이라고 추측하기도 했고, 이를 뛰어넘는 (아직 나타나지 않은) 끊임없이 재구성해야 하는 어떤 것으로 보기도 했다. 말하자면 현실 사민주의의 극복과 +미래 α 요소의 결합? 사실 진보신당 내 좌파들이 전후 유럽 사민주의 정당들의 그들보다 더 급진적인 주장을 하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또한 사회민주주의가 제기하는 민주주의에 대한 강조 등은 타당하며, 여타 쟁점들에 대해서도 민주노동당이나 진보신당 내에서 논쟁과 검토 과정이 충분하지 않았기에 여전히 필요할 것이다. 공백지점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그러한 과감한 생략 덕분에 가능했던 이데올로기 경합 과정에 대한 정치한 분석과 분명한 주장들은 셰리 버먼의 책을 읽어볼 필요를 제공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셰리 버먼의 책에 대해 몇 가지 문제제기를 하지 않을 수 없다.
첫째 불충분한 논증의 문제이다.
셰리 버먼의 ‘정치의 우선성’의 강조가 타당하다고 하더라도 과연 그것이 책 속에서 논리적으로 충분하게 설명되고 있지 않는 것으로 보인다. 파시즘과 민족사회주의의 실패 이후 사회민주주의가 안착하는 과정에서의 ‘정치의 우선성’의 실제 모습은 거의 언급되지 않고 있다. 스웨덴에서의 2차세계대전 이전의 경험들이 거의 유일한 설명이고, 이는 전체 9장 중에 1개의 장 밖에는 해당되지 않는다.
이는 자연스럽게 이 책의 부제인 “사회민주주의와 20세기 유럽의 형성”에도 의문을 갖게 한다. 사실상 이 책의 거의 모든 내용은 20세기의 초반, 또는 30년대까지로 한정되어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20세기 유럽의 형성을 다 설명하는 듯한 부제는 적절하지 않다. 설사 이데올로기의 기초는 그 당시 30년대에 이미 마무리되었다고 하더라도, 사회민주주의가 20세기의 ‘성공적인 이데올로기’였다는 것은 역사적으로 설명되어져야 납득이 가능한 부분이다.
둘째 ‘정치의 우선성’이 사회민주주의 이데올로기의 성격 구분에서는 유용했을지 몰라도 역사적 사실에 부합하는지의 문제는 충분한 논증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전장에서 끝까지 살아남은” 사회민주주의가 자신의 힘으로 ‘승리’한 것인지, 아니면 경쟁자들의 소멸로 인해 ‘잔존’한 것인지 책 속에서 충분히 설명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말하자면 2차 세계대전 이후 전후 자본주의가 ‘경제적 필요’에 의해 선택된 ‘정치적 동력으로서의 이데올로기’가 ‘사회민주주의’ 또는 ‘수정 자유주의’가 아닌지 하는 의문이다. 말하자면 20세기가 과연 정말로 ‘정치의 우선성’을 특징으로 하는 사민주의의 승리를 증명했는지 저자의 책 속에서는 분명하지 않으며, 오히려 ‘경제의 우선성’이 사민주의 세력을 선택한 것은 아닌지 의구심이 든다.
셋째, 사회민주주의가 승리했다고 본다면, 그 승리는 어떤 것을 의미하는가? 단지 잔존? 아니면 지배적 정치주체로 등장하는 것? 아니면 애초 자신의 이론적 목표가 달성되는 것?
쉐보르스키는 자신의 유명한 저서 “자본주의와 사회민주주의”에서 선거 과정에서 사회민주주의의가 직면할 수밖에 없는 딜레마를 서술하고 있다. 다수파가 되기 위해서는 사회주의적 목표를 훼손할 수밖에 없고 노동계급 외 다른 계급들의 이해에 호소해야 한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더 이상 사회주의 정당(노동계급 정당)이 아니게 되고(노동자 정당일 수는 있어도) 이는 노동자들을 동원해 낼 수 있는 능력은 절감된다는 것이다. 사민주의에게 대의제 민주주의, 선거는 수단이자 목적이고 사회주의로 인도하는 매개자이자 미래의 정치형태이지만, 이것이 그렇게 단순하지만은 아닌 것이다. 셰리 버먼은 사회민주주의자들은 특정 정책을(개량을) 그저 그 자체 목적인 것이 아닌 좀 더 나은 미래를 향해 가는 발걸음이라고 생각했다고 주장한다. 하지만 ‘현실 사민주의’는 자본주의 경제의 기본 구조를 바꾸지도 못했을 뿐만 아니라 바꾸려는 의지 자체도 점차 희박해졌다. 이런 점에서 사회민주주의가 자신의 목표 설정과 관련해 무엇을 성공했는지 의심스럽다. 즉, 성공의 외피 속에 실패를 감추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문이 든다. 말하자면 마르크스주의의 경제결정론이 대기론에 빠져 행동의 열정을 봉쇄한다면,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의 성공에 기댈 수밖에 없는 딜레마와 민주주의에 내제한 온건화 속에서 사회주의 목표를 잃어버리고 만다고나 할까?
넷째, 사회민주주의가 중요하게 다루는 ‘민주주의’는 고정된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 20세기 내내 사회민주주의가 지배하는 소위 복지국가 내에서도 민주주의 의제와 요소는 확장되었고, 이에 대해 국가와 또는 국가 내부에서 치열한 투쟁이 벌어졌다. 그러나 사회민주주의는 민주주의의 제도화에는 기여했을지 몰라도 새로운 확장에 무엇을 기여했는지 분명치 않다.
다섯째,
셰리 버먼의 논증 과정은 매우 한정적이다. 나라로 보면, 영국과 미국은 검토에서 제외되었고, 시기로 봐도 20세기 초반에 집중하고 있다. 또한, 셰리 버먼의 논증 과정에는 20세기의 가장 중요한 역사적 현상이었던 ‘냉전’ 상황과 현실 사회주의의 존재가 미친 영향은 아예 언급되지 않고 있다.
에릭 홉스봄이 “극단의 시대”에서 주장하듯이 전후 질서의 형성 과정에서 ‘냉전의 역할’은 과소평가되어서는 안 된다. 사회민주주의가 전후 지배적 정치이데올로기로 등장할 수 있었던 이유는 전쟁으로 인해 국가사회주의와 파시즘, 일본 군국주의 등이 소련에 맞서는 ‘자유세계’의 행위자로 동원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따라서 “냉전기 서구정부들의 정치적 기반은 전쟁 전의 사회민주주의계 좌파에서부터...걸쳐 있었다.”
“미국은 유럽에서 공산주의적 위협을 인지”하고 있었다. 기본적인 핵심은, “노동자 계급의 상태가 개선되지 않는다면 대중 투쟁이 불가피하게 폭발할 것”이라는 사실이다. “공산주의적 위협”은 현실적이었다.(필립 암스트롱 외)
설사 셰리 버먼의 주장처럼 사회민주주의의 정치가 매우 적극적인 역할을 수행했다고 인정하더라도 그것이 냉전 또는 미국 중심의 질서가 부과하는 힘을 상회하는지는 분명치 않다. 또한 사회민주주의만이 할 수 있는 역할이었는지도 의문이다. 전후 중도우파 또는 보수파들도 사회민주주의적인 정책들을 펼쳤다는 것은 이에 대한 반증이 될 수도 있다.
여섯째,
역자와 저자의 몇 가지 언급에서는 21세기 현재의 세계적 과제 역시 사회민주주의를 통해 돌파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데, 이에 대한 근거는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기껏해야 ‘좌파 스스로의 지적 오류나 의지 상실을 극복’하고 ‘낙관주의와 비전을 회복’해야 한다고 본다. 옳게 지적하는 것 한 가지! 저자는 오늘날 사회민주주의 정당들의 가장 큰 실패는 운동의 기반이었던 이상주의를 상실했다는 것으로 본다. 그런데 이러한 이상주의는 앞에서 언급했던 것처럼 민주주의, 자본주의의 상관관계 속에서 고유하게 존재하는 딜레마와 연관된다. 더군다나 21세기 자본주의의 변화 속에서 이를 어떻게 구현할 것인지는 저자 역시 충분하게 제시하고 있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사회민주주의가 정치적 가능성에 대한 확고한 믿음에 기반했다면 현재의 사회민주주의는 이러한 믿음을 상실했다.
이매뉴얼 월러스틴이 얼마 전에 얘기했듯이 ‘급진적 정치에서 온건한 중도로 끊임없이 변화’한 사회민주주의가 어떻게 이러한 이상주의를 21세기적 조건 속에서 다시 되살릴 수 있는지에 대한 답이 없다면 저자의 사회민주주의의 현재의 역할에 대한 강조는 공허한 희망사항에 불과할 것이다.
일곱 번째,
저자는 세계화에도 불구하고 스웨덴 사회민주주의가 충분히 훌륭하게 버티고 있다고 본다. 하지만 2010년 9월 스웨덴은 선거에서 1914년 이후 최저의 지지율을 기록했고 중도우파 정당이 승리했으며 극우반이민 정당이 의회에 진입했다.
저자는 미래의 전략을 논하면서 현 좌파들의 다문화주의를 비판하고 사회민주주의는 이민자들을 사회적으로 통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래야만 포퓰리즘적 우파들에게 공동체라는 주제를 뺏기지 않는다는 것이다. 저자는 이러한 (스웨덴의) 정책이 새로운 형태의 공동체주의를 향한 모색이며 퇴보가 아닌 진보의 징후로 보았다.
하지만 역사 속에서 사민주의자들은 이민자들이나 다른 소수자의 권리에 대해 대체로 무관심했었다. 저자도 살폈듯이 민족주의에 사민주의는 편승했고 주류 정당으로 남기 위해 공동체를 호명했다. 그러다가 최근의 더 큰 이주노동의 물결이라는 새로운 상황을 맞이한 것이다. 그리고 저자의 주장과는 달리 현실에서 이러한 통합 정책은 실패했고 포퓰리즘적 우파의 등장을 막지도 못했다.
여덟 번째,
경제 중심론 또는 경제결정론에서 벗어나는 방식이 정치의 우선성을 강조하는 것으로 귀결되는 것이 타당한가 하는 점이다. 이러한 전환 역시 단순하기는 매한가지이다. 실제 저자의 논의들은 매우 주의주의적인 성격을 지니고 있는데 바로 이러한 단순한 치환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문제의 이면에는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 문제가 놓여 있고 국가이론이 주로 이러한 문제를 다뤄왔다. 밥 제솝이 얘기했듯이 ‘상부구조의 상대적 자율성’은 최종심급에서의 경제결정론을 기각해야 가능한 것이다. 상부구조의 변화 없이 토대의 변화는 없기 때문이다. 즉 자율성은 상대적일 수 없다. 역으로도 가능하다. 따라서 ‘상대적 자율성’을 폐기하는 대신에 ‘상호작용적’ 심급에서의 결정만이 존재한다고 본다. 어찌되었든 저자의 ‘정치의 우선성’을 강조하는 이유는 실패한 이데올로기의 공통점을 ‘경제 우선성’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 책이 여러 이데올로기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드러내는 것에는 탁월하지만 이데올로기와 경제적 상황과 전망에 대한 인식을 연결시키지 않음으로써 오히려 ‘정치의 우선성’의 장점들을 역으로 가리게 되는 것 같다.
아홉 번째, 저자는 마르크스주의를 경제결정론으로 못박는다. 또한 사회민주주의는 역사적 유물론과 계급투쟁의 개념을 기각함으로써 비마르크스주의적이라고 못박는다. 둘 사이의 연관성은 이제 존재하지 않게 된다. 이것 역시 과도한 비약과 단절을 가져온다. 결과적으로 사회민주주의는 자본주의 체제 속에서만 기능하게 되며 이상주의의 씨앗은 사라지게 된다. 그렇게 됨으로써 (스웨덴을 제외하고) 사회민주주의는 경제정책에 있어서 매우 협소한 수단들만을 사용하고 상상력은 고갈되고 만다. 이것은 사회주의와의 단절 속에서 사민주의가 걸어갈 수밖에 없었던 필연적인 길은 아니었을까?
열 번째, 이 책은 20세기 유럽에서의 사회민주주의의 형성과 관련한 책이다. 따라서 유럽 중심주의적인 논의일 수밖에 없다. 20세기 사회주의는 (저자의 표현대로라면 또다른 수정주의인 레닌주의 또는 마오주의는) 유럽 바깥의 광대한 제3세계, 그리고 민족주의와 결합했다. 그렇다면 21세기 사회민주주의는 유럽 바깥과 어떤 모습으로 결합될 수 있는지에 대해 저자는 아무런 편린을 제공해 주지 못하고 있다.
사실 사회민주주의와 관련해 저자의 많은 논의들은 충분히 수용 가능한 부분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강조나, 당시 카우츠키를 비롯한 사회주의자들이나 독일사민당 등의 무능력에 대한 설명, 직면한 현실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고자 했던 베른슈타인 등의 용기 등도 익히 알고 있는 내용들이다. 사실 내가 생각하는 사회주의의 많은 특징들은 사회민주주의의 주장과 공유하고 있다.
그런데 저자는 거의 모든 실패의 원인을 마르크스주의에게만 돌리고 있다. 결론을 향해 질주하는 기차 같다고나 할까? 이미 내려진 결론과 짜맞추어지는 논리들. 사회민주주의를 위한 알리바이를 제공해 줌으로써 사민주의를 갓 수용하는 사람들에게 사명감은 심어줄 수 있을지 모르지만 그 근거는 허약하다. 이데올로기 분석에만 치중한 나머지 20세기 역사적 현상으로서의 사회민주주의의 공과 실에 대해서는 거의 침묵하고 있기 때문이다. 21세기의 사회민주주의의 가능성에 대해서는 더 말할 것도 없다. 논증은 없고 장밋빛 전망만 있다. 그런 점에서 보자면 아담 쉐보르스키나 요스타 에스핑 엔더슨 같은 정치학자들의 논의보다 정치하지도 않고 적극적으로 사회민주주의를 옹호한다고 볼 수도 없다.
물론 21세기의 방향과 관련한 저자의 논증 공백을 메우는 것은 저자만의 책임은 아니며 이론적 검토와 더불어 실천적 모색이 병행되어야 가능할 것이다. 저자의 희망대로 아직 사회민주주의에게 기회가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사회민주주의가 ‘운동’으로서의 성격을 회복하는 것을 최소 필요조건으로 할 것이다. 민주적 사회주의는 소련의 국가사회주의와는 다른 어떤 것을 총체적으로 지칭하는 용어였을 수도 있다. 그렇다면 소련의 국가사회주의가 사라진 지금, 민주적 사회주의는 글로벌 자본주의를 자신의 대립물로 설정하고 자신의 존재 이유와 형상을 만들어 나가야 할 것이다. 이러한 문제들을 직면했던 한 세기 전의 사람들의 고민을 이 책을 통해 다시한번 확인해 보는 것도 충분치는 않겠지만 그리 나쁘지는 않을 것이다. 당시의 고민들은 매우 진솔했으며 현재의 고민들의 많은 부분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