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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장 이후 - 혐오, 양극화, 세대론을 넘어
신진욱 외 지음 / 문학동네 / 2025년 5월
평점 :
정치적 요요는 이제 그만!
출처: 부산노동권익센터 <부산 노동자와 동행하다> vol.27. (2025.6)
『광장 이후』 / 신진욱, 이재정, 양승훈, 이승윤 / 문학동네 / 2025년5월
양솔규 노동사회교육원 운영위원
얼마 전 사무실이 이사를 했다. 짐 정리도 마저 해야 하고, 새로운 근무 환경에 적응도 해야 해서 분주한 나날이 계속되고 있었다. 오래된 자료뭉치들 속에서 불쑥 경향신문 한 부가 뚝 떨어졌다. 날짜를 보니 2022년 1월 초였다. 돌이켜보면 불가사의한 일들의 연속이었다. 정치권에 인연이 없었던 윤석열은 제1야당의 유력한 대선후보가 되었다. 그때는 ‘명태균’도 ‘건진법사’의 존재도 범인들은 알지 못하던 때였다. 윤석열 대선후보는 이철규, 장재원, 권성동 등 초기 ‘윤핵관’들을 기용하기 시작했고, 당시 당대표였던 이준석과 치열한 갈등이 드러나던 시절이었다. 윤석열은 2022년 당시 국민의힘 선거대책위원회를 해산시켰고, 김종인과 결별했다. 당의 공식 기구들은 무력화되었고 윤석열 대선후보와 윤핵관 수중에 급속히 편입되었다. 불과 3년 5개월 전의 일이었다. 그 짧은 시간에 우리는 3명의 대통령을 거친 것이다.
이후 약 2년의 시간은 경험했다시피 사회적 퇴행과 경제적 추락의 시간이었다. 무엇보다 노동기본권의 후퇴는 치명적이었다. 집권 초기부터 건설노조와 화물연대를 표적삼았던 정권의 탄압은 타임오프제에 대한 근로감독, 노조 회계공시 제도, 노동시간 유연화 확대 등으로 이어졌다. 물가는 폭등하고 임금은 낮아졌다. 실질소득은 감소하고, (청년 포함)실업률은 치솟았으며, 구직활동 포기자도 역대 최대치를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에 맞서는 투쟁은 힘있게 체계적으로 조직되지 못하고 있었다. 어느새 패배주의가 확산되었다.

12월3일의 비상계엄 선포는 어쩌면 우리의 안일함과 무기력함에 경종을 울리는 죽비와 같은 것은 아니었을까? ‘촛불혁명’을 통해 박근혜가 탄핵된 후 마치 세상은 금방이라도 변할 것처럼 상기되었지만, ‘촛불정부’라 자칭하던 문재인 정부는 ‘코로나19’를 핑계로 아무 것도 하지 않고 내려가 버렸다. 코로나19와 세계적 유동성 증가, 아파트 부동산 가격 폭등, 조국사태 등. 문재인 5년의 시간동안 식어버린 열망과 에너지는 환멸로 바뀌었다. 촛불연합은 해체되었다. 20대 여성들은 혜화역 시위, 버닝썬, N번방 사건, 신당동 사건 등을 거치면서 광장정치에 결합했지만, 20대 남성들은 불신과 절망의 늪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더불어 청년 고용시장은 악화되었고, 노동시장 이탈 현상은 가속화되었다.
윤석열 탄핵 과정에는 처음 보는 광경들이 많이 벌어졌다. 보수 기독교를 기반으로, 노년 세대들을 동원하던 태극기 집회에 청년들이 대거 등장했다. 극우 청년들은 서부지법 폭력사태에 가담하고, 건국대 앞 양꼬치거리를 행진하며 반중극우 무력시위를 했다. 주변의 이웃, 친구, 가족이 극우폭력의 주체로 세력화해 등장한 것이다. 낯선 모습에서 공포는 배가될 수밖에 없다. 사회적 현상의 이면에는 사회적 구조가 있다. 윤석열 탄핵과 내란 진압으로는 끝낼 수 없는 지난한 과제가 놓여 있다는 얘기다.

세월호 세대이고, 촛불혁명에 대거 참여했던 세대들이 불과 8년만에 탄핵반대, 극우화되었다? 믿기 힘든 현실이었다. 언론(특히 조선일보)에서는 탄핵반대와 민주당을 비판하는 청년들의 인터뷰를 지속적으로 기사화했다. 응원봉을 든 20대 여성과 탄핵반대 CCP(중국공산당) OUT 피켓을 든 20대 남성을 대비해 젠더갈등을 부추겼다. 하지만, 탄핵 과정에서 발표되는 여론조사(갤럽, 리얼미터 등)들을 보면 20대들의 탄핵찬성 비율이 훨씬 높았다. 분명 현상은 존재하고, 극우는 세력화되었으나, 과대대표되고 있는 것도 분명했다. 하지만 과대대표가 곧 다수가 될 가능성이 없다는 걸 뜻하지는 않는다. 이만큼 왔다면 저만큼도 갈 수 있는 거다. 들이밀어 봤으니, 밀어붙일 수 있는 거다. 무엇보다 극우파들에게 탄핵 사태로 열린 광장은 자신들의 발언력과 파급력, 캐파(capacity)를 가름해볼 수 있는 효과적인 실천의 장이었다.
이 글을 쓰고 있는 지금, 윤석열이 조사를 받기 위해 특검에 출석했다. 중요한 건 이제 윤석열 개인의 신상이 아니다. 윤석열을 옹호하고, 내란을 획책하고, 이를 지지해주고 엄호한 우리 사회 엘리트들과, 이에 동원되기를 마다하지 않는 사회계층들이 공고하게 존재한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두 번의 ‘혁명’을 통해 두 번의 탄핵이 이루어졌지만 아직도 약 50%의 시민들은 내란당과 보수를 지지한다. 박근혜 탄핵 이후 여론 지형이 전혀 바뀌지 않았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재명의 우클릭, 중도보수 선언은 이런 지형을 바탕으로 한다.
『광장 이후』는 두 명의 사회학 연구자와 두 명의 사회복지학 연구자가 쓴 논문 모음집이다. 이 책을 보면 과연 지난 겨울 쿠데타와 연이은 광장의 모습을 보다 더 정밀하게 추적 관찰할 수 있다. 신진욱은 한국의 극우세력이 부상하고, 보수정권이 이를 공식화해주는 유례없는 현상을 관찰하면서 파시즘의 위험을 경고한다. 탄핵 이후에도 극우 기득권 엘리트들과 대중적 하부구조(자유대학, 자유마을, 극우기독교세력 등)는 전혀 약화되지 않았다. 언제든 활성화될 수 있는 세력이 된 것이다. 이제 ‘이명박근혜’ 시기, 자생력없던 ‘어버이연합’이 아니다.
양승훈은 탄핵 정국에서 주목받은 현상, 즉 ‘청년 남성’, ‘이대남’들의 극우화 현상에 주목한다. 저자가 봤을 때 청년 남성은 전혀 동질적 집단이 아니다. 계급이 다르고, 지역이 다르고, 출신과 업종이 다르다. 이들 다수가 보수도 아니고, 보수라 하더라도 보수로 굳어진 것도 아니며, 극우파는 더더욱 아니라는 것이다. 문제는 이들에게 말을 걸어주고 관심을 가져주는 정치세력, 사회세력이 없었다는 점이다. 유일하게 이준석과 윤석열은 ‘능력주의’와 ‘공정’을 내걸고 세대포위론을 근거로 이들에게 파고든 것이다.

이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문장이 “우리에게 응원봉을 주지 않았다.”는 말이다. 여성들은 남태령에서, 광화문에서, 국회에서 응원봉을 들고 ‘다시 만난 세계’ 속에서 주체화되었지만, 남성들에게는 일종의 티켓인 ‘응원봉’을 그 누구도 주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들은 점차 소극적이 되었고, 페미니즘 등과의 일대 논쟁을 벌이기보다는, 냉소와 짜증으로 일관했다. 이른바 ‘열전’에서 ‘냉전’으로 전환되었다.
하지만, 누군가로부터의 말걸기와 광장으로의 초대장을 왜 청년 남성들은 마냥 기다려야만 하는지 의문이다. 어느 세대, 어느 누구라도 스스로 주체가 되고, 스스로 목소리를 내지 않는 이상 주목받지도, 세력화되지도 못했던 건 자명한 사실이다. 진보세력이 청년 남성세대에게 다가가는 것이 과제인 건 맞지만, 유일한 과제는 아니며, 오히려 사회 전체의 몫으로 봐야 한다.
이승윤의 논문은 이 책의 핵심을 담고 있다. 저자는 ‘진보적 청년 여성’ vs ‘보수적 청년 남성’이라는 허위적인 구도에 거리를 두는 대신, 소득, 고용형태, 사회보험 여부를 종합하여 지난 20년 간 청년 세대의 불안정성이 증가하고 양극화가 심해지는 경향을 분석한다. 노동의 경계가 녹아내리고, 노동의 개념이 모호해지는 이른바 ‘액화노동’ 속에서 청년 프레카리아트화가 진행되고 있다. 청년 남성 가운데 ‘매우 불안정한’ 집단이 눈에 띄게 증가하고, 청년 남성의 비관성이 여성에 비해 훨씬 높다. 저자는 청년 노동시장에서 청년 남성이 경험하고 있는 특수한 상황에 대한 탐구가 필요하다고 본다. 경제활동의 주 부담자 역할을 내면화한 남성들의 기대와 실제 노동시장 상황의 괴리가 남성들의 심리적, 사회적 경험에 영향을 미쳤다는 것이다. 이러한 존재의 불안정성이 급진좌파 정치쪽으로도 향할 수 있고, 반대로 극우 포퓰리즘 쪽으로도 갈 수 있다며, 섣불리 재단하기보다는 적극적인 실천을 통해 사회적 연대를 진전시켜야 한다고 강조한다.
영국의 웨스트민스터대학 교수인 정치학자 샹탈 무페는 『좌파 포퓰리즘을 위하여』에서 새로운 ‘헤게모니 구성체’를 수립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어려운 말 같지만, 서로 의견을 조율하고, 꼬시고, 같은 편을 모아야 한다는 것이다. 극우 문제의 해결은 사회 전체의 각성과 지속적인 실천, 국가의 강력한 대응과 구조변동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민주주의의 위협에 맞서 민주주의를 급진화시킬 필요가 있다. ‘광장 이후’의 실천이 ‘정치적 요요’를 좌우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