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 - 반대를 앞세워 손익을 셈하는 한국 정치
김민하 지음 / 이데아 / 2022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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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부산노동권익센터 <부산 노동자와 동행하다> 이슈페이퍼 26호 (2025년5월)


목표를 세울 결심, 지면서도 앞으로 나갈 결심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 / 김민하 / 이데아 / 2022년1월




양솔규 노동사회교육원 운영위원


니체는 말했다. “진실의 가장 큰 적은 거짓이 아니라 믿음이다.” “인간은 진실보다 자신이 믿고 싶은 허구를 더 사랑한다.” 그 허구가 진실이 되지 못할까봐, 또는 타인들이 내가 ‘믿는’ 진실(?)을 인정하지 않을까봐 두려움에 떠는 것이다. 조지 오웰의 『1984』 속 빅브라더의 슬로건은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이다. 진실이 슬로건이 되지 못하고 무지가 힘이 된다.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도 비슷한 지적을 한다. “망상에 기반한 네트워크는 필패한다고 가정해서는 안 된다. 그런 네트워크의 승리를 막고 싶다면 적극적으로 노력해야 한다.”(『넥서스』 11쪽) 더 많은 정보와 명확한 진실을 제공하면 올바른 ‘결정’을 내릴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은 순진한 착각이다. 인류는 결정적일 때 대개 이러한 상식을 벗어나 행동했다. 광화문 태극기 집회에 나가는 노년세대에게 논리적인 증거를 들이밀어도, 건국대 앞 중국음식점을 돌며 ‘짱* 중국 간첩’을 외치는 ‘자유대학’ 젊은이들에게 체계적인 문답법을 제시하더라도 즉각적인 행동의 변화를 기대할 수 없는 이유다.

또 다른 문제는 진실이 무엇인지에 대해 판단하는 것이 쉽지 않다는 점이다. 누가 ‘진실’을 순수하게 판단할 수 있을 것인가? 세상의 모든 일이 그러하듯이 대개는 진실과 거짓은 종이 한 장 차이에 불과하다. 때론 진실이며 때론 거짓이고, 어쩔 땐 진실이 아니며 거짓도 아니다. 진실의 편에서 보면 거짓이 두드러지게 보이고, 거짓의 편에선 진실도 거짓으로 보인다. 사회적 위치에 따라, 시간의 흐름에 따라, 정보의 양과 질에 따라, 경험의 차이에 따라 한없이 흔들리는 개개인의 판단은 판단을 내리는 나 조차도 신뢰할 수 없을 만큼 불안하다.

그래서 다음과 같이 정의를 내려보자. “우리는 그렇기 때문에 내 판단이 틀릴 수 있다는 ‘가정’ 하에 나와는 다른 상대와 ‘대화’하고 ‘타협’하며 성과를 만들어 나가는 것이다. 결혼생활이 그렇고, 친구 관계가 그러하며, 동아리 활동도 그러하다. 때론 경쟁하고, 때론 타협하며, 때론 제압하기도 하지만, 영원히 고정된 하나의 행동패턴만 가지고 갈 수는 없다. 크게 보면 정치도 그러하다.”

위의 문단을 다시 읽어보자. 너무 교과서적이다. 마치 신문 사설에서 논설위원이 여야를 공히 꾸짖으며 맺는 결론 같다. 현실은 어떤가? 상대를 반대함으로써 자신을 구성해 온 지 오래다. ‘진보’와 ‘보수’로 자신을 규정하고 상대에 대한 반대를 조직화하고 동원하면서 대결해 왔다. 설사 그것이 ‘진실’과는 거리가 먼 ‘음모론’일 지라도 말이다. 2012년 대선에 대해서는 김어준이, 2020년 총선에 대해서는 민경욱 전 의원이 공히 ‘부정선거론’을 설파했고, 지지자들은 ‘믿음’으로 화답했다. 계엄-탄핵 국면에서 정치적 양극화, 극단화가 진행되었다는 평가가 많지만, 사실은 계엄-탄핵 이전에도 양극화와 극단화, 대립과 반대는 심화되고 있었다. 지난 대선에서부터 이재명을 둘러싼 수많은 이슈들(형수, 아들 등)을 가지고 최대반대연합을 구축해 윤석열이 승리한 바 있다. 상대도 계엄 직전, 김건희, 명태균 이슈를 고리로 반대연합을 성공적으로 구축해 나가고 있었고, 이에 윤석열 정부에 대한 지지율은 곤두박질 치고 있었다. 특검 상정은 계엄령이라는 아닌 밤중에 홍두깨의 배경이었다.

이러한 패턴을 비정상적인 행태로 치부하기보다는 정치에 내재된 속성에서 비롯된 불가피한 측면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다. 정치가 한정된 자원을 배분하는 시스템이라면 그것은 여러 가지 이슈의 선에 따라 ‘편을 갈라’ 대립하고 논쟁하는 과정이 오히려 자연스럽고 필수적인 것이다. ‘싸우지 말라’고 하는 것이 오히려 직무유기를 부추기는 것은 아닐까? 문제는 ‘싸움’ 그 자체가 아니라 ‘무엇’을 가지고 ‘어떻게’ 싸울 것인가 이다.

정치평론가 김민하의 책 『저쪽이 싫어서 투표하는 민주주의』 는 출간된 지(2022년 1월) 3년 밖에 안된(3년이나 된?), 지난 문재인 정권을 분석하는 책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윤석열 정부가 무너진 지금, 이 책의 분석틀은 그때보다 오히려 지금 그 적실성을 갖는 거 같다. 조기대선을 앞두고 ‘저쪽이 싫어서 이쪽에 표를 주는’ 행동이 예측되서기도 하고, 윤석열 정부 3년동안 정말 징하게 여야가 대립해 왔기 때문이다. 사실 정치 사회 평론서들은 시간적으로 효용성이 짧은 편인데, 이 책은 그렇지 않다. 아무래도 이 책의 분석틀이 ‘현상’ 너머의 ‘구조’와 긴 시간적 지평을 가리키고 있기 때문인 듯하다.

부제 ‘반대를 앞세워 손익을 셈하는 한국 정치’는 한국 정치가 상대를 기득권으로 낙인 찍고 반대를 조직화하고 동원하여 세력화 하는 반복되는 패턴을 집약한 문장이다. 이러한 반대와 반대를 거듭하는 과정은 진자 운동에 비유할 만 하다. 우측으로 이동한 진자가 다시 그 반동으로 좌측으로 이동하고 좌측으로 이동한 진자도 다시 우측으로 이동하며 이러한 과정이 끊임 없이 반복된다. 그런데 이러한 반복 속에서도 진자운동은 어느 한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 문제는 그 방향이 보통의 사람들의 열망을 거스르는 방향이라면? “손등이 손바닥으로, 다시 손바닥이 손등으로 위치를 바꿀” 뿐. 그럼에도 세상은 좀처럼 좋아지지 않는다면? 대세가 바뀌지 않는다면? 주류의 통치구조는 여전히 굳건하다면? 저자는 그렇기 때문에 이러한 방향을 결정짓는 ‘구조’와 이 ‘구조’가 구축되는 정치의 ‘역사’를 보아야 한다고 지적한다.

여기서 이 책의 진가가 발휘된다. 미국의 연방파와 공화파의 대립 구도, 클린턴, 오바마, 트럼프로 바뀌는 리더십 교체 속에서 무엇이 바뀌고, 무엇이 이어져 왔는지, 또 다나카파와 후쿠다파의 대립으로 점철되어 온 자민당 지배 속 일본 정치사에 대한 서술, 반공과 반일, 민주화와 독재의 각축전 속에서 새로운 조합이 만들어 낸 대립구도가 ‘반대를 위한 정치’로 고착화된 한국의 정치사. 한미일 정치사를 소화해 압축 정리하는 저자의 능력이 감탄스럽다. 그리고 이 역사 속에서 우리가 분명하게 상기해야 할 점이 떠오른다. ‘반대의 정치’ 속에서도 쟁취해야 할 ‘목표’ 말이다. 반복되는 진자운동이 축적되면서 전진해야 할 진자 축의 이동경로 말이다. (굳이 안어울리게) 주식으로 치자면 요동치는 등락세에도 불구하고 ‘달까지 가’야 하는 우상향의 좌표 말이다. 그러한 목표 부재, 전략 부재로 인해 지난 박근혜 탄핵 이후 ‘용두사미’적 허무함이 우리 사회를 휩쓸었던 것이 아닌가.

그렇기에 저자는 “우리 정치의 문제를 ‘극단주의’로 규정하고 ‘상식과 합리’를 회복할 것을 주문하는 목소리”는 근본적인 해답이 아니며 “목표의 부재”를 넘어서기 위해 ‘대안’을 찾아야지만 진자의 축을 움직일 수 있다고 말한다. ‘파레콘’, 참여예산제, ‘참여계획 모델’, 기본소득 등 벌써 진보정당에서 다루었던 그런 ‘대안’들이 또다시 언급되고 있다. 신선한 것은 참여민주주의로의 ‘참여’를 대가로 지급하는 (앤서니 앳킨슨의) ‘참여소득’을 지렛대로 삼아 ‘파레콘’과 ‘참여계획 모델’의 기본골조와 결합하자는 저자의 제안이다.

여기서 한 가지 더 짚고 넘어가자. 반복되는 ‘반대의 정치’ 라는 ‘현상’ 속에 놓치고 있는 목표, 대안을 인식하자고 했지만, ‘반대의 정치’가 지금 처한 역사적, 정치적 맥락, 즉 ‘현상’을 치밀하게 분석하는 것 역시 중요한 과제다. 시사인 천관율 기자는 ‘극우’가 ‘등장’하는 것과 ‘집권 가능한 정치세력’이 되는 것은 완전히 다른 문제라며, ‘극우의 주류화’의 이면을 파헤친다. 천 기자는 계엄과 극우의 주류화의 이면에는 최근 10년 동안 변화된, 한국 보수의 ‘소수파’라는 역사적 변화가 있다고 논증한다. 지난 시기 한국의 진보가 비록 자신이 소수파라고 할지라도 ‘체제 수용 노선’을 수용한 것처럼, 과연 한국 보수가 소수파로서 ‘체제 수용 노선’을 수용할 수 있을 것인지 갈림길에 놓여 있다. 보수 내 ‘체제 수용 노선’과 ‘체제 변혁 노선’의 대충돌이 어떤 결말을 맞을지 두렵다. 지난 서평에서 지적한 것처럼 한국의 기독교가 처한 지반과, 한국의 보수가 처한 지반은 공통된 것이다. 국민의힘의 극우화는 전술이 아니다. 노력이 필요하다.(천관율, ‘극우의 물결 일으킨 더 깊은 뿌리’, 시사인911호:2025.2.28.)

리버럴 평론가들이 말하는 것처럼 극우 포퓰리스트 지도자와 그 지지자들의 양식 없음을 탓하기만 해서는 문제의 핵심에 도달할 수 없다. 이것은 정치의 본질에 관한 문제이기 때문이다. 본질에 도달하려면 역사를 보아야 한다. - P98

반대의 정치를 각 진영이 치열하게 전개했는데도 통치의 결과는 대세를 따르는 것으로, 사실상 같은 결과에 도달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것이 움직이는 진자의 축이며, 결국 ‘구조‘라는 결론에 도달할 수밖에 없는 이유다. - P2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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