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의 해방일지 (30만부 기념 특별 리커버)
정지아 지음 / 창비 / 2022년 9월
평점 :
품절


출처 : 노동사회교육원 <연대와소통> 통권70호 2023년 겨울호


 

책담(冊談)

 

회한 속에도 쌓이는 미완의 과제들

 

 

양솔규 편집위원장

 

아버지의 해방일지/정지아/창비/20229/15,000

 

87년 6월항쟁은 표현 사상의 자유를 억압하던 군부독재의 지배방식에 일정한 파열구를 내었다비록 국가보안법이 여전히 존재했고방송예술에 대한 직접적간접적 검열이 존재하기는 했지만예술 창작 소재가 그 이전에 비해서는 훨씬 넓어졌다. TV에선 금지곡이 된 이후 들어본 적이 없던 아침이슬이 흘러나왔고노찾사의 노래 사계는 MBC 퀴즈 아카데미의 오프닝송으로 쓰이기도 했다대대적인 탄압이 자행되기는 했지만 노동운동농민운동학생운동 등 대중운동의 괄목할만한 성장에 대응하는 군부독재 잔존세력의 반작용으로(여겼고감당할 만했다어둠이 깊을수록 새벽이 다가오고 있다고 믿었다그만큼 자신감이 팽배하던 시절이었다.

 

이런 배경 속에 88년 이태의 소설 남부군이 출간되었다그동안 들어본 적 없던 빨치산의 존재가 대중적으로 각인되는 순간이었다. 90년에는 이 소설을 가지고 정지영 감독이 영화남부군을 찍었다안성기최민수최진실 등 인기 절정의 배우들이 빨치산이 되었다. 91년에는 왜곡과 자극적인 내용에도 불구하고, MBC 여명의 눈동자를 통해 여순반란사건과 4.3항쟁에 대한 대중적인 인지가 가능해졌다조정래의 태백산맥권운상의 녹슬은 해방구(1989-1991), 실록 정순덕(1989) 등 그 외 빨치산을 소재로 한 수많은 문학작품들이 쏟아져 나왔다그 와중인 1990년 계간 실천문학에서는 정지아의 빨치산의 딸이 연재되었고, 3권으로 묶여 출간되었다.

 

소설가 김남일은 월간 말》 913월호에서 빨치산 증후군이라고 이름 붙일만한 현상이 일어난 것이었다.……운동권 학생들은 철을 가리지 않고 떼지어 지리산으로 몰려들었는데……뱀사골장터목노고단 등지의 계곡 산장은 밤마다 그들이 불러대는 투쟁가로 들썩거렸다.……내 스스로 그런 증후군을 앓고 있으면서도 언제부턴가 가슴 한구석에 묘한 거부감을 키워내기 시작했다어딘가 너무’ 흥분하고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나 역시 그러한 증후군을 앓고 있었다. 89년 여름고등학생이던 시절 친구 몇과 함께 지리산 종주에 나섰다힘들게 도착한 세석평전에 텐트를 치고 소주를 기울이던 밤세석평전엔 전국에서 모인 대학생청년노동자들의 온갖 투쟁가가 합쳐졌다가 흩어졌다가 번갈아 가며 불리며 메아리쳤다. (당시에는 세석평전에서 캠핑과 취사행위가 가능하던 시절이었다.) 지리산의 빨치산이라는 존재는 과거의 잊혀진 그림자가 아니라미래의 등불과 같은 것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다그럼에도 소설가 김남일과 마찬가지로 빨치산 존재에 대한 열광’(?)에 묘한 거부감이 들기는 했다분단을 반대하고 통일을 완수하자는(?) 빨치산 정신을 NL 운동은 전면에 내세웠으나여기에는 아직 해결되지 않은 의문점과 논리적 공백지점들이 많이 남아 있었다그리고 거기에 대한 알리바이는 항상 미국’ 이라는 거악으로 귀결되곤 했다답이 정해져 있는 논리의 반복 속에서 질문은 생명력을 잃어버렸다. ‘북한 바로알기와 한국 현대사 바로 알기의 맥락’ 속에서 빨치산의 좌표는 정해졌고, ‘바로알기는 논리적 구조에 부합하는허용가능한 정도의 정보만을 제공할 따름이었다이후에 대중적으로는(?) 안재성의 경성 트로이카(2004)가 80년대 말의 열기 속의 공백지점들을 메꿔준 듯하다.


1994년 5월 제2기 한총련은 신념의 강자’ 빨치산 전사들을 조선대에서 열린 출범식 무대에 세웠다조국통일운동에 앞장선 어린 학생 선봉대들의 모습에서 빨치산 생존자들은 자신들의 젊은 시절의 모습을 투영했는지 모르겠지만, 당시 NL 주류의 과잉된 감정에 치우친 정세판단은 결국 몇 년 뒤 대중적인 파산을 선고받는다한총련 1~3기가 달성한 대중동원력의 절정 이면에는 발밑부터 무너지고 있던 현실·대중과의 괴리가 있었다아무튼한총련 지도부튼 빨치산 전사들을 통해 자신들의 반미자주애국투쟁이 역사적 정당성과 시대적 연속성북한과의 접점을 만들고 싶었는지 모른다.

 

지금의 세대가 영화 서울의 봄을 통해 79년 12.12 쿠데타를 마주하고 있다지금으로부터 44년 전 사건이다우리 대중운동이 한참 꽃피던 1990년의 44년 전은 해방공간(1946)이었다우리가 그 당시 해방공간에 대해 느끼는 거리감과 지금의 MZ세대가 12.12와 5.18에 대해 느끼는 거리감이 비슷할 것이다. 1990년 당시 1960년 4.19는 30년 전이었고지금으로부터 보자면 1993년 김영삼 문민정부의 시작가 같다그러나 시간적 거리는 상대적이기도 하다사회적 맥락에 따라 압축되기도 하고이완되기도 한다아마도 NL운동 때문이기도 할텐데우리에게 해방공간과 빨치산은 시간적으로 더 가까운 60년 4.19보다 훨씬 익숙했었다북한과는 독립적으로 일어난 4.19 혁명은 NL이 득세하면서부터는 주목도가 떨어진 건 아닌가 싶다.

 

아무튼 이 당시 나는 정지아의 빨치산의 딸을 읽지 않았다그리곤 정지아라는 소설가에 대해서도 오랫동안 잊고 지냈다물론 그의 다른 글들도 본 적이 없다따라서 소설가 정지아의 문체가 어떤지이후 어떤 삶을 살았는지어떤 작품활동을 했는지 전혀 알지 못하고 지냈다작년정지아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라는 책이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지만, JTBC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의 제목과 유사한 이 소설책에 대해 그다지 흥미를 가지지 않았다그러다 아주 작은 마을 도서관에서 대출할 만한 책이 워낙 없길래 빌려와서 읽기 시작했다.

 

이 책의 시작은 빨치산이었던 아버지의 죽음으로부터 시작한다실제 소설가 정지아의 부친인 빨치산의 딸》 실존인물인 정운창씨는 2008년 51일 별세했다소설은 장례 후 아버지의 유골을 아버지의 고향이자 삶터였던 구례 곳곳에 뿌리면서 끝이 난다그 사이사이 상갓집에 조문을 오는 수많은 사람들(빨치산 전사들구례 등 친척가족들 등)과의 인연의 타래들을 풀어내는 것이 이 소설의 골자다이 소설에는 빨치산 출신 사회주의자인 아버지와 어머니그 인연들에 대해서 풀고 있지만그 사회주의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아버지는 혁명운동 속에서 무엇을 고갱이로 보고 있는지사회적 관계를 어떻게 바라봐야 하는지그 관점을 가지고 결국 그 관계를 어떻게 맺어가야 하는지 등을 언뜻언뜻 이야기하고 있다작가의 아버지 故 정운창씨가 세상을 떠난지도 15년이 넘었다그런 시점에 아버지의 해방일지라니늦어도 너무 늦었다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말하고 싶은 것은 빨치산의 존재에 대한 재소환은 아닐 것이다아니 독자의 입장에서는 더더욱 빨치산’ 책이 아니다감칠맛 나는 전라도 사투리의 능수능란한 속도감이 재미를 더하지만 읽으면 읽을수록 현재의 상황을 소환하게 된다누군가는 노동운동을누군가는 진보정당운동을누군가는 자신의 가족사를 소환하고 재해석하게 될 것이다굳이 여기서 그 유추의 실마리를 다 풀어낼 필요는 없을 듯하고.

다만 소설 속에서 주목할 만한 한 가지 대목이 있다.

 

밀란 쿤데라는 불멸을 꿈꾸는 것이 예술의 숙명이라고 했지만 내 아버지에게는 소멸을 담담하게 긍정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었고개인의 불멸이 아닌 역사의 진보가 소멸에 맞설 수 있는 인간의 유일한 무기였다.” (44)

 

입을 다문 건 현실주의자인 아버지도 알기는 한다는 의미였다아버지는 자신의 신념을 후회하지 않았지만 사람인데 설마 괴물처럼 확장하는 자본주의의 기세 앞에 절망이든 회한이든 어떠한 서글픈 감정을 잠시나마 느끼기는 했을 터였다목숨을 건 자신들의 투쟁이 무의미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아버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147)

 

이제 빨치산 전사들이 자신들의 젊은 날의 모습을 투영하며 기대해 마지않았던, (젊었던 왕년의노동운동가들이 은퇴를 하고노년에 접어들고 있으며부고 소식도 들린다신념을 후회하지는 않았지만우리의 투쟁이 무의미해지는 것을 지켜보는 것은 빨치산뿐만이 아니다역사를 허무주의적으로 바라보면 안 된다고 누차 의식화 교육을 받으며 살아왔지만 역사가 아닌 개인에게 회한이 없을 수는 없지 않겠나나는 이 소설을 통해 우리 노동운동의 선배들이 느낄지도 모르는 그 회한을 헤아린다빨치산들의 죽음에 고령화된 노동운동가들의 모습이 겹쳐지는 것이다.

 

내 부모는 평등한 세상이 곧 다가오리라는 희망을 품고 산에서 기꺼이 죽은 사람들을 늘 부러워했다쭉정이들만 남아서 겨우겨우 살고 있노라한탄을 하기도 했다.” (196)

 

죽음이란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것아버지는 보통 사람보다 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으니 해방의 기쁨 또한 그만큼 크지 않을까다시는 눈 뜰 수 없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198)

 

그리하여 그 고통으로부터 아버지는 해방되었지만자식에게는 여전히 그 고통이과제가이어지는 것일까학살과고문차별과궁핍이라는 외부적 고통 외에도 아버지는 자신의 이상과 꿈이 무너지고 멀어지는 것을 지켜봐야 하는 내부적실존적 고통이 있었다그 고통은 자본주의 속에서 여전히 대물림 되는 현실이다그 대물림을 끊기 위해 노동운동은 수십 년을 싸워 왔다그러나 그 실패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는 오늘날빨치산 아버지가 산에서 내려와 굳이 왜 고향 구례로 다시 돌아갔는지 생각해 봤으면 좋겠다미완의 과제들이 역사 속에서 켜켜이 쌓여가는 가운데새롭게 되살아나는 과제들은 예전과 같지 않지만다르지도 않다.

밀란 쿤데라는 불멸을 꿈꾸는 것이 예술의 숙명이라고 했지만 내 아버지에게는 소멸을 담담하게 긍정하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었고, 개인의 불멸이 아닌 역사의 진보가 소멸에 맞설 수 있는 인간의 유일한 무기였다. - P44

죽음은 그러니까, 끝은 아니구나, 나는 생각했다. 삶은 죽음을 통해 누군가의 기억 속에 부활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화해나 용서 또한 가능할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 P231

어떤 딸인지, 어떤 딸이어야 하는지, 생각해보지 않았다. 누구의 딸인지가 중요했을 뿐이다. 빨치산의 딸이라는 수렁에서 빠져나오기 위해 발버둥치는 데 나는 평생을 바쳤다. 아직도 허우적거리는 중이다. 빨치산의 딸이라는 말에는 ‘빨치산‘이 부모라는 전제가 존재한다. 그 부모에게도 마땅히, 자식이 부모에게 기대하는 것이 있듯 자식에 대한 기대가 있었을 것이다. 그런 생각을 해보지도 못했을 만큼 빨치산의 딸이라는 굴레가 무거웠다고, 나는 변명이라도 하고 싶었다. 그러나 그 변명을 들을 아버지는 이미 갔고 나에게는 변명의 기회조차 사라졌다. 그 사실이 뼈아파 나는 처음으로 소리 내 울었다. 아버지를 위한 울음이 아니라 나를 위한 울음이었다. 아버지 가는 길에까지 나는 고작 그 정도의 딸인 것이다. - P224

죽음이란 고통으로부터 해방되는 것, 아버지는 보통 사람보다 더 고통스러운 삶을 살았으니 해방의 기쁨 또한 그만큼 크지 않을까, 다시는 눈 뜰 수 없는 아버지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다. - P198

내 부모는 평등한 세상이 곧 다가오리라는 희망을 품고 산에서 기꺼이 죽은 사람들을 늘 부러워했다. 쭉정이들만 남아서 겨우겨우 살고 있노라, 한탄을 하기도 했다. - P196

나는 주로 비아냥거렸고, 아버지는 분노에 찬 시선으로 나를 노려보며 입을 다물었다. 입을 다문 건 현실주의자인 아버지도 알기는 한다는 의미였다. 아버지는 자신의 신념을 후회하지 않았지만 사람인데 설마 괴물처럼 확장하는 자본주의의 기세 앞에 절망이든 회한이든 어떠한 서글픈 감정을 잠시나마 느끼기는 했을 터였다. 목숨을 건 자신들의 투쟁이 무의미했을지도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아버지는 어떤 마음이었을까? - P147

만에 하나 어머니가 월북했다면 자기 농사에 심혈을 기울이다 진작에 숙청당했을 거라고. 그것이 당신들이 믿는 사회주의의 실체라고. - P103

먼지에서 시작된 생명은 땅을 살찌우는 한줌의 거름으로 돌아가는 법, 이것이 유물론자 아버지의 올곧은 철학이었다. 쓸쓸한 철학이었다. 그 쓸쓸함을 견디기 어려워 사람들은 영혼의 존재를, 사후의 세계를 창조했는지도 모른다. - P98

그런데 기실 어머니의 사회주의란 첫사랑, 좀 더 풀어쓰자면 여자도 공부를 할 수 있는 세상, 가난한 자도 인간 대접받는 세상에 불과했다. 신자유주의 대한민국도 그 정도는 해준다. - P21

사상이란 저렇듯 느닷없이 타인을 포용하게 만드는 대단한 것일까. 내 부모에게는 그랬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저 느닷없는 친밀감과 포용이 퍼스트 클래스에 탄 돈 많은 자들끼리의 유대감과 별반 다르게 느껴지지 않았다. - P23

고통도 슬픔도 지나간 것, 다시 올 수 없는 것, 전기고문의 고통을 견딘 그날은 아버지의 기억 속에서 찬란한 젊음의 순간이었을 것이다. - P27

"여호와의 증인들이 한 감방에 있었는디 갸들은 지 혼차 묵들 않애야. 사식 넣어주는 사램 한나 읎는 가난뱅이들헌티 다 노놔주드라. 단 한멩도 빠짐없이 글드랑게. 종교가 사상보담 한질 윈갑서야." - P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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