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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기춘과 그의 시대 - 위험한 법 기술자의 반면교사 현대사
김덕련 지음 / 오월의봄 / 2018년 5월
평점 :
책담(冊談)
위험한 법 기술자의 반면교사 현대사
《김기춘과 그의 시대》/김덕련/오월의봄/2018년5월/19,500원
출처 : 노동사회교육원 <연대와소통> 49호(2018년 9월호)
양솔규 / 편집위원장
이번 호의 제목은 지금 소개하는 책의 부제와 같다. 위험한 법 기술자의 반면교사 현대사! 이 부제와 같이 이 책의 내용을 잘 설명해주는 제목은 없는 거 같다.
특이한 점은 저자가 ‘법 기술자’라는 표현을 쓴 점이다. 보통 우리는 판검사, 변호사 등 법조인들을 지칭할 때, ‘법 기술자’라고 하지는 않는다. 기술자라고 하면 법조인에 비해서는 어떤 의미에서 하위 계층이라는 뉘앙스도 있고, 법조인에 대해 오랜 기간 동안 전문적인 ‘자격’을 갖춘 직업인이라는 ‘상식’이 있기 때문이다. 더군다나 ‘법’이라는 건 누구에게나 공평부당한 기준이자, ‘진리’, ‘정의’ 등의 이미지가 덧 씌워져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책에는 처음부터 끝까지 ‘법 기술자’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명시적으로 밝히지는 않았지만, 저자는 누군가의 주문에 따라 ‘법’을 이용하고 적용하고 만들어내는 일종의 ‘도구적 존재’로 법률가들을 보고 있는 거 같다. 그렇다면 누가 법조인들을 일종의 기술자로 고용하고 부리는 것일까? 바로 권력자일 것이다. 권력자의 입맛에 맞게 ‘법’을 이용하는 ‘법 기술자’들은 공명정대하지도 않으며, 합리적이지도 않다. 개인의 출세와 욕망을 위해 반공극우체제 권력자들에게 기생해 ‘법’을 수단화하는 존재로 전락하고 만다. 그리고 이들이 그렇게 구축해 온 ‘암흑의 현대사’가 대한민국의 현대사이다.
또 하나 특이할만한 점이 있다. 보통 현대사를 다루는 책을 보면, “87년 민주화 이후…”, “87년 6월 항쟁이 지나고…” 등의 표현이 많이 쓰인다. 그러나 이 책에는 87년 6월 항쟁과 더불어 ‘7‧8‧9월 노동자 대투쟁’을 시대의 결절점으로 반복해서 언급한다. 그만큼 저자는 소위 일반민주주의, 형식 민주주의의 분기점이라고 얘기되는 6월 항쟁뿐만 아니라, 경제적, 사회적 민주주의, 실질적 민주주의의 도약점이 되는 7‧8‧9월 노동자 대투쟁을 중요시하고 있다. 저자는 국사학을 전공했을 뿐만 아니라, <세계를 바꾸는 파업>(이후, 2001)이라는 책을 통해 국내외 노동자들이 파업이라는 자신의 무기를 가지고 어떻게 세상을 바꾸었는지 요약한 바가 있다.
중앙정보부 대공수사실장 시절의 김기춘
이 책에서 다루는 인물은 우리가 다 아는 그 김기춘이다. 그런데 이 김기춘이라는 인물은 그를 통해 한국 현대사가 거의 전부 설명될 정도로 지대하고 광범위하게 ‘악’영향을 미친 인물이다. 얼마나 광범위한지는, 요즘 뉴스에 자주 나오는 ‘적폐’꺼리들, 예컨대 “최악 인권유린에도 무죄…다시 재판정 서는 ‘형제복지원’”(2018.9.13.),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노태우 정권 기획 여부 조사”(2018.9.10.) 등 연결되지 않는 구석이 없는 걸 봐도 잘 알 수 있다.
김기춘은 61년 사법고시에 합격한 이후 67년 대학원 석사논문을 쓰게 된다. 석사 논문 제목은 <습관적 범인의 처우에 관한 연구: 보안처분의 도입을 중심으로> 이다. 그는 이 논문을 통해 ‘보안 처분을 광범위하게 도입’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정신 장애자의 치료 요양 시설, 음주자, 중독자 등을 위한 요양 금단 시설, 부랑자의 노동소 수용, 경향범에 대한 보안 구금 제도 등을 시급히 채용’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잘 알려져 있다시피 김기춘은 유신 헌법을 기초한 사람이다. 유신 헌법은 보안 처분을 최초로 규정하였고, 이후 사회안전법, 보안관찰법, 내무부 훈령 제410호 등이 만들어진 바 있다. 이를 통해 수많은 사람들이 영문도 모른 체 강제로 끌려가 강제노동과 폭행, 고문 등에 시달리다가 500명 넘은 사람들이 사망한 사건이 바로 형제복지원 사건이다. 그리고 형제복지원 사건이 일어났을 때 이를 방조한 사람이 김기춘의 고등학교, 대학교 1년 선배이자, 고시 한 기수 후배인 박희태 전 국회의장이다. 박희태는 87년 6월 당시 부산고검장이었고, 김기춘은 대구고검장을 하다가 법무연수원장으로 이동한다.
강기훈 유서대필 사건은 김기춘과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 당시 노태우 정권에 항의하며 분신 자살한 김기설 전민련 사회부장의 유서를 강기훈 총무부장이 써줬다는 말도 안되는 날조된 사건이다. 오죽하면 한국의 드레퓌스 사건이라고 불렸을까? 당시 법무부장관이 바로 김기춘이었다. 김기춘이 법무부 장관으로 임명된 91년 5월26일, 검찰은 강기훈에 대해 자살 방조 혐의로 사전 구속 영장을 발부받았다. 강기훈은 94년 8월 만기 출소했고, 2015년, 사건 발생 24년만에 재심을 통해 무죄 확정을 받았다. 그러나 그를 구속 기소했던 책임자들, 법무부 장관 김기춘, 검찰총장 정구영, 서울지검장 전재기, 그리고 잘못된 판결을 내렸던 1심 부장 판사 노원욱, 2심 부장 판사 임대화, 주심 대법관 박만호 등 그 누구도 강기훈에게 사과와 반성, 참회의 말 한마디 건넨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1988년 12월, 노태우로부터 검찰총장 임명장을 받은 김기춘
이 책의 목적은 한국 현대사를 암흑으로 만든 ‘악의 축’들이 어떤 방식과 과정을 통해 이를 수행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지배체제의 민낯을 확인하기 위함이다. 저자의 말대로 이 세력의 “뿌리가 너무나 깊고 그 해악이 크기 때문”이다. 김기춘은 노태우 정부 시절, 검찰총장으로 재직시에 다음과 같이 이야기 했다고 한다. “공산주의자들은 무좀과 비슷”해서 “뿌리를 뽑지 않으면, 또 언제 독버섯처럼 돋아날는지 모른다.……그만큼 끊임없는 사상 투쟁, 국민의 사상 무장이 필요”하다고 말이다. 김기춘이 92년 대선을 앞두고 부산시장, 부산경찰청장, 부산고검장 등 주요 기관장들을 ‘초원복집’에 모아놓고 관권선거, 부정선거를 획책했으나, 처벌 받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초원복집에서 김기춘의 선거 부정 발언에 한 술 더 떠 맞장구를 쳤던 당시 부산지방경찰청장은 5개월 후 경찰청장이 되었고, 1997년 대선에서는 안기부 1차장으로서 김대중 후보를 떨어뜨리기 위해 북풍 공작을 주동했다. 요즘 화제를 불러일으킨 바 있던 영화 <공작>의 실제 사건이 바로 저 북풍 공작인 것이다. 발본색원 하지 못하면 독버섯처럼 피어나는 극우지배세력의 끈질긴 생명력과 멈추지 않는 활동력을 보여주는 사례가 아닐 수 없다.
6월항쟁과 노동자대투쟁, 그리고 문민정부와 김대중, 노무현 정부를 지나왔지만, 유신의 잔재, 군사독재의 뿌리는 광범위하고 건재하다는 것을 우리는 지난 ‘이명박근혜 시대’를 통해 확인한 바 있다. 방심하고 있거나, 역사를 망각하고 ‘용서’를 입에 올리는 순간 저들은 자신들의 학맥, 혈맥, 지연 등을 이용해 순식간에 상황을 역전시킨다.
400쪽이 넘는 분량에 빼곡한 ‘원조 법꾸라지’, 위험한 ‘법 기술자’의 행적을 좇다보면 우리는 이번 정부가 촛불혁명의 성과를 어떻게 계승할 것인지, 그리고 적폐청산과 제도적 변화를 어떻게 구축할 것인지 꼼꼼하게 감시해야 할 필요성을 절절하게 느끼게 된다. 유신잔재, 5공, 6공 잔재를 청산하지 않고 타협하고 이와 더불어 재벌중심 경제체제를 오히려 강화시킨 김대중 정부, 노무현 정부가 사실은 이러한 권력에 기생하는 위험한 ‘법 기술자들’과 적폐세력의 숨통을 열어준 것에 다름 아니었기 때문이다.
김기춘이 제시한 노무현 탄핵 논리들은 고스란히 박근혜 파면의 정당성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김기춘은 블랙리스트 사건 관련 대법원 선고가 늦어지면서 구속된 지 1년 반 만에 풀려났다. 수많은 사람들을 간첩으로 조작하고, 고문하고, 감금했던 사람, 부정선거를 기획하고, 헌법을 유린하고, 민주주의를 말살한 사람, 법의 허점을 이용해 법을 권력자의 도구로 전락시킨 사람은 지금 자유롭게 활보하고 있다. 우리가 ‘김기춘과 그의 시대’를 반추해야 할 이유는 김기춘 한 사람만의 처단을 넘어서는 문제다. 해고 노동자들과 민주화를 위해 힘써 온 사람들의 피눈물을 닦아주기는커녕 청와대와 결탁해 재판을 거래하고 삼권분립을 스스로 허문 사법부, 그리고 아직도 권력에 빌붙어 정치 검찰공화국의 신화를 이어나가고 있는 검찰, 재벌과 권력자에 기생하는 수많은 로펌 등 ‘법 기술자’들의 네트워크는 여전히 강고하다. 그들의 잘못된 행태를 반면교사 삼아 그들이 군림할 수 있었던 ‘토양’을 바꿔 내는 것, 그것이 살아남은 자, 남아 있는 자들의 도리일 것이다. 아직 촛불혁명은 끝나지 않은 것이다.
<함께 보면 좋은 책>
《남산의 부장들》, 김충식, 폴리티쿠스
《시크릿파일 반역의 국정원》, 김당, 메디치미디어
역사의 퇴행을 막기 위해서도 그렇게 해야 한다. 청산해야 할 것을 청산하지 못했을 때 얼마나 값비싼 대가를 치러야 하는가를 해방 후 한국인들은 뼈아프게, 거듭해서 되새겨야 했다..."뿌리를 뽑지 않으면, 또 언제 독버섯처럼 돋아날는지 모른다." 이것이 어쩌면 김기춘이 자신의 삶을 통해 반면교사 형태로 한국 사회에 전한 최대 교훈일지도 모른다. 396~39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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