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출처 : Smila > 웬디 수녀, 미국에 가다.
웬디 수녀의 미국 미술관 기행 1
웬디 베케트 지음, 이영아 옮김, 이주헌 감수 / 예담 / 2003년 5월
평점 :
절판


유럽 여행을 계획한다면 많은 사람들이 미술관 리스트부터 떠올린다. 그러나, 미국의 경우는 다르다. 미국이란 나라에 가면서 미술관 구경할 생각에 가슴 부풀어 오르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미국은 보다 더 현대적이면서도 자극적인 구경거리가 가득한 곳이다. 라스베가스에서 슬럿머신을 땡기고 뉴욕 거리에서 뉴요커들과 어깨를 부딪히며 걷고 싶다는 것이 우리가 미국여행에 대해 갖는 일반적인 기대이다.

뉴욕이나 시카고에 갔을 때, 나는 그래도 메트로폴리탄 뮤지엄과 시카고 아트 인스티튜트에 들러보기는 했었다. 이제사 생각해 보면 두 곳 모두 대단한 미술관들이었다. 그러나, 지금보다 한참이나 어렸던 나는 미술관 관람에 최소한의 시간만을 할당했고 거의 뛰다시피 하면서 관람을 마쳤었다. 미술관말고도 가고싶은 곳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웬디 수녀의 책에서 두 미술관을 다시 만난 나는, 이 책에 실린 작품들 가운데 내가 기억하고 있는 작품이 거의 없다는 사실에 경악하고 말았다. 내가 그 미술관들에 과연 가보기는 했던 걸까. 미국이란 나라에 대한 나의 선입견이 아주 소중한 경험을 망쳐놓은 건 아닐까.

미국이란 나라에 대해 선입견을 갖기는 웬디 수녀도 마찬가지였던 것 같다. 그래서 그런지 웬디 수녀는 이 책 속에서 상당히 흥분하고 있다. 미국이란 나라 곳곳에 그렇게 훌륭한 미술관이 많다는 사실에, 그리고 그 미술관들마다 훌륭한 소장품들이 그토록 많다는 사실에 내내 감탄하고 있다. 애초에 기대가 크지 않았기에 놀라움이 더욱 컸을지도 모른다. 지면 상의 한계 때문에 다루지 못한 미술관들과 작품들에 대한 아쉬움이 책 전체에 가득하다.

덕분에 이 책은 웬디 수녀의 유럽 미술관 기행보다 훨씬 더 다양하고 많은 작품들을 다루고 있다. 수적으로는 많은 작품들을 만나게 되지만, 그만큼 한 작품에 대해 그녀가 풀어놓는 이야기들의 길이는 짧아졌다. 이 부분이 내가 이 책에 대해 가장 아쉬워하는 부분이다. 그녀의 푸근한 이야기들은 좀 더 길게 들어야 맛인데... 내 바램을 만족시키기에는 모든 글들이 너무 짧기만 하다.

그러나, 역시 글자 수의 제약도 그녀의 삶에 대한, 그림에 대한 통찰력을 빛바래게 하지는 못한다. (단지, 구성진 맛이 덜해졌다고나 할까.) 내가 가장 사랑해마지않는 그녀의 '보통 사람들의 세속적인 욕망에 대한 깊은 이해'도 여전하다. 그녀는 옹졸하지 않다. 성직자임에도 불구하고 보통사람들의 들끓는 욕망을 경멸의 대상으로 손쉽게 분류하지 않는다. 좀더 높은 곳에서 인간들을 가여운 대상으로 바라보지도 않는다. 그녀는 '자기로 만든 도박용 게임 세트'를 보면서 '하느님, 불쌍한 도박꾼들을 용서하소서'라고 기도드리지 않는다. 그녀는 오히려 그것들을 보며 '삶의 감각적인 품위'에 대해 이야기한다. 내게 그녀는 참으로 불가사의한 인물이다.

참, 잊지 않고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이 책에 소개된 작품 가운데는 12세기의 고려청자 물병도 있다는 사실이다. 나는 '애국하면 망한다'는 백남준의 말에 몰표를 던지는 사람이지만, 이런 순간엔 정말 순수한 즐거움에 몸서리치게 된다. 더우기 오리 모양의 이 고려청자 술병이 책속의 다른 어떤 작품들 못지않게 훌륭한 자태를 뽐내고 있을 때에는. (이 청자가 시카고의 미술관에서 수많은 세계인들을 기쁘게 만들 걸 생각하면, '어, 우리나라 문화유산이 왜 거기 가있지? 언제 약탈당한거야?' 하고 마냥 흥분해 할 일만도 아니다.) 웬디 수녀가 이 청자에 대해 뭐라고 말하는지 들어볼까? '나는 힘겨운 하루를 보내고 언짢은 기분으로 집으로 돌아온 한국인(고려인)이 이 물병의 아름다움에 미소 짓는 모습을 상상해 본다.'

웬디 수녀님, 알고 계신가요? 힘겨운 하루를 보낸 후, 당신의 이야기를 들으며 언짢은 기분을 달래는 한국의 여인네가 바로 여기에 있다는 것을....아, 미국을 다시 방문하게 되면 미술관 바닥에 죽치고 않아 하염없이 작품들을 바라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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