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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월 10일
조지 손더스 지음, 박아람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5년 4월
평점 :
절판
출퇴근길에 지하철 풍경은 지극히도 클리셰 합니다.
저 역시도 그러하지요. 제법 거리가 먼 편이라 종착역에서 가뿐하게 앉은 채로 출발하면 보통은 10여분 정도는 인터넷을 뒤적거리거나 메일을 확인하고 40여분 정도는 책을 읽고 10분 정도는 까무룩 졸다 내려야 할 때 즈음에는 용케도 눈이 번쩍 뜨여 내리는 짓을 십 몇년 째 하고 있습니다. 물론 어떨 때에는 저 세 가지의 시간이 맞바뀌는 경우도 다반사이긴 하지요. 인터넷을 하다가, 졸다가 책을 10여분 서너장도 못 보고 내리는 경우도 있으며 책을 읽다가, 졸다가 웹서핑을 하다 끝내는 경우가 더 많기도 합니다. 그래서 주로 이 시간대에는 단편소설집을 들고 다니곤 합니다. 한 꼭지씩 끊어서 읽기도 편할 뿐더러 딴짓(?)을 하기에도 부담스럽지 않으니 말입니다. 그러다 고개를 들어서 가만히 보면 늘 그렇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음악을 듣거나 스마트폰으로 게임을, 인터넷이나 카톡을 하지 책을 들여다 보는 이는 거의 없어 어떨 때에는 책을 대놓고 읽기가 왠지 쑥쓰러워지는 날도 있습니다.
그런데 이 책 [12월 10일]을 처음 만난 날은 그러하지 않았던 것 같았습니다. 보통의 퇴근 길은 무척 혼잡합니다. 출근 때에는 앉아 가는 것이 당연하지만 퇴근 때에는 운이 좋아야 가능한 일이었고 대부분은 앞에 앉은 이가 자리를 내어줄때까지 꼼짝없이 선채로, 가방을 메고 - 책을 읽기란 몹시도 짜증나는 기분에 집중도 되지 않지요- 졸수도 없어 쓸데없이 웹페이지만 이리저리 배회하기 일쑤였는데 그 날은 좀 달랐던 것 같습니다. 늦은 저녁이어서 그랬는지 앞 전철이 다들 태우고 갔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앉을 곳은 넉넉했고 제일 선호하는 중간자리도 남아 있었습니다. 느긋하게 유머 게시판에 들어가서 업데이트된 글을 키득대며 읽다가 옆자리의 아가씨가 책을 펴고 읽는 것이 눈에 들어오고서야 마지못해 이 책을 꺼내들었지요. 그리고는 곧 한 페이지를 읽었을때 막연한 불안함이 순간적으로 엄습해 왔습니다. 뭐지 ? 이 느낌은 하고 말입니다. 졸음은 순식간에 달아났고 눈에는 책이 활자만이 온전히 들어왔던 그런, 흔치않는 경험은 오랫만이었습니다.
프로이트는 '마음은 빙산과 같다. 커다란 얼음 덩어리의 일부만이 물 위로 노출된 채 떠다닌다.'라고 하였지요. 그 유명한 빙산이론을 굳이 들먹이지 않아도 조지 샌더슨의 단편소설 대부분은 끊임없이 밖으로 표출되고 욕구를 충족시키고자 하는 내면의 소리에 관하여 이야기 하고 있다는 것을 첫장부터 선언합니다. 그것들은 너무 다양해서 사실은 미국인만이 느낄 수 있는 것도 있었으나 인류의 보편적인 것, 사실과 환영, 부조리에 관해 정제된 언어로 직설적으로 표현하여 현실을 직시하게 만들어 마음을 몹시 불편하게 합니다. 그 불편함은 불안감으로 고스란히 옮겨 가지요. 거기에는 특정한 줄거리를 따라 흘러가는 일반적인 소설과는 다른 형식도 한몫을 합니다.
첫번째로 실려있는 <승리의 질주>는 납치를 당해 죽을 뻔한 앨리슨 포프의 내밀한 욕망을 처음부터 거리낌없이 보여주며 이야기를 시작합니다. 작가는 의식의 흐름이 몽상으로 이어져 얕은 잠을 자면서 꾸는 꿈처럼 정돈되지 않는 산만한 마음을 그대로 내버려 둡니다. 그러면서도 곳곳에 나타나 주인공의 상태를 설명하기도 합니다. 독자를 매 순간 순간 불안하게 만드는 이유는 이야기가 어디로 어떻게 갈지 감 잡을 수 조차 없기 때문이기도 하고, 아이의 마음을 들여다 보는 페이지가 넘어갈수록 안 좋은 일이 분명히 벌어질 것이라는 예감을 지울 수 없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순간, 이야기는 앨리슨 포프를 구할(앞으로) 카일 부트의 내면으로 넘어갑니다. 제한된 정보를 조금씩 조금씩 내어주는 문장을 읽을수록 읽기가 불편해지기 시작하지요. 그리고는 이 불안함의 정체가 급작스럽게 드러나는데 앨리슨 포프를 좋아했던 소심하고 착한 카일부트가 납치범을 어떻게 그리 잔인하게 죽였는가는 사실 중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 이야기를 하려니 어쩔 수 없는 스포일러가 되어 버렸군요. - '역사시간에 본 비디오에 나왔던 포로 같은 자세를 하고 있었다. 눈을 가린 채 무릎을 꿇고 앉아 철모 쓴 군인 같은 사내가 칼을 내리치기를 기다리는, 그런 포로로 말이다. p36' 라는 문장에서 힌트를 얻을 수도, 아니면 10대 소년의 압제의 해방의 분출구로 볼 수도 있고 말입니다. 사실 이것 보다 충격적인 사실은 - 작가가 우리에게 던져주고 싶었던 것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만 워낙 여러 각도로 해석이 가능한 계층적인 소설이라 다르게 생각할 수도 여지도 상당히 많습니다. - 앨리슨의 부모가 아이에게 그날 있었던 일을 말하라고 하던 것이 아니였을까 싶습니다.
' 앨리슨이 말한다. 난 밖으로 달려 나갔어요. 소리를 쳤죠, 아빠가 대꾸한다.
그래, 맞아, 넌 소리를 쳤어. 챔피언처럼 소리쳤지.
그래서 카일이 어떻게 했지? 엄마가 묻는다.
돌을 내려놨어요. 앨리슨이 말한다. 너희 둘한테 나쁜 일이 일어났어. 하지만 그 정도에서 끝난 게 천만다행이야. 아빠가 말한다.
더 나쁜 일이 벌어질 수도 있어. 엄마가 거든다.
하지만 너희들이 잘 대처해서 더 나쁜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 아빠가 말한다.
정말 잘했어. 엄마가 말한다.
장하다. 아빠가 말한다. p37'
이 이야기를 온전히 알고 있는 독자라면 엄마 아빠가 말한 '잘했다'라는 말이 얼마나 무서운 말인지를....... 잘 대처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오싹하게도 인터넷뉴스에 달린 어떤 댓글과도 몸서리치게 닮은 이 현실을 이렇게 잔인하게 표현할 수 있는지 놀랍기만 합니다.
전쟁터에서 누명을 쓰고 불명예 제대 후 돌아온 병사의 귀환 후 이야기를 다룬 <집>또한 마음을 무겁게 합니다. 그 자리의 부재가 몰고 온 피폐해진 삶을 집이라는 공간을 통해 짧은 단편으로 흡인력있게 써 내려간 조지 샌더슨의 문장을 보노라면 '자본주의 문화의 부조리하고 비 인간적인 면을 가장 잘 관찰하는 눈을 가진 작가'라고 평한 주노 디아즈(우리 나라에는 <오스카 와오의 짧고 놀라운 삶>으로 알려진 소설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 밖에 없습니다. 저에게는 가장 미국적인 소설임에도 가장 공감이 갔던 가슴 아픈 이야기로 인상이 깊이 남아 있습니다. 영화 <길버트 그레이프>에서 처럼 어찌할 수 없는 길버트의 마음이 떠올랐지만 어찌할까요. '좋아, 좋다고, 당신들이 나를 보냈으니 이제 나를 다시 대려와. 나를 다시 데려올 방법을 찾으라고, 빌어먹을 인간들아. 그렇지 않으면 당신들은 세상에서 가장 한심한 개자식들이야. p236' 재앙의 윤곽을 겨우 잠재우는 그를 보고 있자니 짠하네요.
또한 이 단편선집의 표제작인 <12월 10일>은 기묘한 감동이 전해지는 것 같습니다. 공상적인 상상을 하며 산책하다 추운 겨울 호숫가에 빠진 약간 모자란 소년을 얼어 죽기로 결심하고 옷을 벗은 말기 암 환자가 구한다는 이 이야기는 조지 샌더슨의 열 편의 단편소설 중 가장 희망적이고 따스한 눈길을 담고 있습니다. 냉철한 눈으로 사회를 비판하고 있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따스한 마음을 지닌 작가의 심성을 여기에서 살짝 맛볼 수 있었지요.
커트 보네거트를 소설을 연상케 하는 <셈플리카걸 다이어리>은 SF소설의 경계소설이면서 유쾌한 풍자로 웃기면서도 슬픈 부조리의 극치를 맛보게 해 줍니다. 가난에 허덕이다 운 좋게 복권에 당첨된 소시민 부부가 딸의 생일 축하를 위해 벌이는 소동을 다룬 이야기로 정원에 배치한 셈플리카걸이 - 뇌에 미세한 줄이 꿰여 높은 곳에 매달린 채 바람에 흰옷을 휘날리며 부자들의 잔디밭을 장식해주는 여성들로, 다양한 제3세계 국가들(몰도바, 소말리아, 라오스 등)에서 돈을 벌기 위해 미국으로 온 이주민들을 지칭 - 빈약한 상상력으로는 머리속에 잘 그려지지 않아 내심 섭섭했으나(아무리 생각해도 그 미세한 줄로 무게를 어떻게 지탱을 해줄지에 대해 의문이 떠나지 않았으나 그려려니 포기를...) 막판의 소소한 반전으로 인해 - 전반적으로 소지 샌더슨의 단편소설은 읽는 내내 불안함을 안겨 주기 때문에 어느정도 예측이 가능한가 싶기도 하다가도 뒤통수를 깜찍하게 갈겨주는 반전도 있어 상당히 흥미롭게 읽을 수 있습니다 - 즐거움과 씁쓸함이 기묘하게 뒤섞이는 묘한 감정을 들게도 하고 말입니다. <나의 기사도적인 대실책>은 풍자소설의 맛을 제대로 보여주기도 하였습니다. 이럴테면 정직한 내부고발자에 대한, 혹은 행동하는 양심의 기사도 발현이 어떤 식으로 매장되어지는가에 대한 오마주(?)라고나 할까요.
한가지 아쉬운 점이라면 원서를 보지는 못했지만 조지 손더스가 꽤 독특한 문체라 한국어로 번역하기가 어려울 것이라고 어디에선가 읽은 기억이 있는데 역시 군데 군데 한번 읽어서는 언뜻 들어오지 않는 문장들이 보였고 한국어로 적당히 대체할 말이 없었는지 <거미머리 탈출기>의 경우 "말이술술 ™" 이던가 "꼿꼿이서™", "우울폭포™" 등 -개인적으로 코믹해서 매우 마음에 들었습니다만~ - 재미난 의역이 눈에 걸렸습니다. 그리고 지극히 개인적인 아쉬움을 하나 더 꼽자면 역자후기를 저는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는데 (어떠한 것을 중점적으로 이해하면서 번역하였는지 역자의 느낌이라던가 어려웠던 점 등 등을 읽으면 더욱 더 역자의 수고스러움에 감사를 표하게 됩니다. 원서 읽기의 괴로움과 그 많은 시간을 투자하기 어려운 독자들에게 쉽게 읽게 도와주니 이렇게 고마울 때가 어디 있겠습니까) 편집자가 일부러 뺀 것인지 아니면 역자가 쓰지 않은 건지 모르겠으나 없어서 은근 섭섭 했습니다~
어느 하나도 버릴 것 없는 성찬을 맛보면서 - 그 외 <거미머리 탈출기>에서는 인간의 존엄에 대해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았고 <강아지>는 겉으로 보이는 것이 다가 아니다. 당신도 그걸 겪었지만 외면하는 잔인함에 마음이 아팠으며 <권고>에서는 직장인의 실적으로 인한 공포가 고스란히 전해져 왔습니다. 초 엽편소설인 <막대>는 아버지의 집착이 무엇을 의미하는지에 대해 고민하게 되었지요. - 사실은 지하철에서 간간히 보려고 했는데 두 꼭지 읽고 나머지는 집에서 완전 몰입해 하루만에 끝장을 내고 말았습니다. 분량이 부담스럽지 않았기에 한번 더 재독을 하였는데 역시 두번째 읽을때에는 처음에 보이지 않던 여러 느낌들이 다르게 다가오더군요. 자연스럽게 정독하면서 생각을 정리 하는데 오랫만에 이런 어렵지 않는 포스트모더니즘 계열의 소설을 만나니 놀랍고 신선하기까지 합니다. 이런 좋은 작가의 소설이 이렇게도 늦게 국내에 소개되었다는 점이 아쉽기만 합니다. 아무쪼록 조지 손더슨의 다른 단편소설집도 국내에 번역되어 읽어 보았으면 하는 간절한 희망 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