챗GPT, gemini, perplexity, 이외에도 온갖 AI가 인간을대체하는 시대에, 인간으로서 쓸모를 증명하는 일은 책을 읽고 사유하고 공감하는 일이라고 생각한다. 과연 미래에도 인간이 현재의 모습으로 가능할 수 있을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스티글레르는 인간이 발휘할 수 있는 진정한 사고와 계산적 사고를 구분한다. 그는 오늘날 일과 삶에 팽배한 위기가 거침없는 계산적 사고의 파도에 밀려 생각하는 힘, 즉 개인의 주체적 사고 능력을 잃어 가는 데 있다고 봤다. 우리는 계산적 사고의 합리성을 컴퓨터 기술에 맡기고 그것이 일상을 지배하도록 방치하고 있다. 계산적 사고가 진정한 사고와 반드시 상호 배타적인 관계인 것은 아니다. 계산적 사고, 즉 수학적 합리성은 우리가 의지하는 중요한 사고의 보철물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디지털 시대의 재앙은 계산적 이성과 이윤 극대화 논리로 구동되는 경쟁적 세계 경제로 인해 많은 사람이 독립적인 성찰의 지평에 이르지 못한다는 데 있다.개인의 의식 자체를 파악해서 예측하고 적극적으로 형성하려고까지 드는 알고리즘에 의해 자신이 제한당한다는 사실조차 자각하지 못하거나 무신경한 상태로 하루하루를 살아간다.무엇보다 걱정스러운 것은 디지털 기술이 지닌 강력한 표준화의 힘이다. 빅데이터와 그것을 기반으로 한인공지능의 확산은 분명 우리에게 적지 않은 편리와 유용함을 더해 주겠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인간 삶의 다양한 가능성에 대한 우리의 감각을 새로운 틀 안에 가둘 수 있다. (중략) 지금 우리 일상의 모든 측면이 새로운 디지털 기술과 이를 주도하는 소수 집단에 의해 재편되고 있는데, 다수는 이것이 자신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는지 깊이 생각하지 않은 채 사용한다. 그 결과 다른 삶의 방식을 상상할 수 있는 감각과 사고능력을 잃어간다. 우리의 미래는 새로운 기술에 의해 이미 결정된 것처럼 보인다. - P171
오래되고 낡아빠졌지만 버릴 수 없는 사랑 이야기.
걱정되지?…….그 마음이 제일 중요한 거야. 그 마음을 까먹으면 안 돼. 걱정하는 마음?응. 그게 있어야 세상에 흉한 짓 안 하고 산다.
심뇌혈관 질환, 치매, 암.내가 생각하는 가장 치명적인 병이다. 게다가 암은 내가 겪어본 사람 중에 가장 강하다고 생각하는 우리 엄마를 가장 무력하게 만들고 끝내 숨을 거두게 한 질병이라 그런지 두렵고 무서운 병이다. 어른에게도 고통스러운 암인데 하물며 어린 아이에겐 얼마나 아프고 괴로울까. 그리고 그 고통을 대신 겪을 수 없어 매일 피눈물을 쏟을 환아의 부모는 얼마나 끔찍한 시간을 견뎌내야 할까.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아이가 백혈병으로 투병하는 과정에서 이렇게 훌륭한 글을 써내려 간 작가의 의지와 노력이 존경스럽다. 순간마다 무력함을 느껴도 결코 무너지지 않고, 긴 시간을 버텨내고 때로는 투쟁했을 과정이 선하다. 아픈 아이들을 위한 공교육 체계의 부족함을 꼬집는 내용은 공감가면서도 교육부에서 정책이 나오기 전까지 당장 현장에선 뾰족한 방법이 없어 답답하기도 했다.
가족은 하나의 단일 세포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지금껏고정된 집단 정체성을 부여받으면서 가장 순수하고 무결한탈정치의 영역이 되어버렸다. 그러나 사실 이곳이야말로 가장정치적인 곳이어야 한다. 부부가 영원한 사랑을 약속하며기대했던 것과 달리, 영아가 자신과 양육자를 한몸이라 여기는것과 달리 가족은 서로 너무 다른데, 이렇게 다름에도 불구하고오랜 시간 함께 존재해야(be with) 하는 관계이기 때문이다.이해 당사자 간의 생각이 다르더라도 합의의 여지를 찾고협력을 모색함으로써 모두에게 긍정적인 결과를 도모하는 데정치의 역할이 있다면 이보다 정치가 더 필요한 공간도 없다.어차피 발생할 싸움과 갈등이라면 서로에게 상처를 남기지 않고가족이라는 공동체의 기반을 더욱 단단하게 만드는 것이 가정 내정치의 목적이 될 것이다. 또한 가정에서 이뤄지는 의사결정이구성원들의 인생에서 결정적인 분기점으로 작용한다는 점에서그 결정은 반드시 정치적이어야 한다. 윤이의 돌봄 문제는 가장정치적인 의제였어야 했다. - P111
아이가 병원에 오래 입원한다면 대체 무엇이 필요할까. 아무리 철저하더라도 이런 걱정까지 미리 하며 준비해두는 엄마는 없다. 언제 발발할지 모를 전쟁에 대비해 약간의 금과 달러까지 집에 챙겨두는 나조차 이런 경우는 상상하지 못했다. 수전 손택의 유명한 비유처럼 우리 모두는 건강의 왕국과 질병 왕국의 이중국적자다. 하지만 질병의 왕국으로 이주할 때 필요한 준비물에 대해서는 아무도 알려주지 않는다. - P19
‘희망‘(hope)이란 단어가 천년 전 영어에 처음 등장했을때는 지금과 달리 소망뿐 아니라 ‘확신‘도 결합한 의미였다고한다. 우수한 신경외과 레지던트로 살다 느닷없이 폐암 판정을받았던 폴 칼라니티가 그랬다. 본인 스스로가 뛰어난 의사이자인문학자였던 그는 자신의 생존율과 완치율을 추정할 수 있는여러 통계 자료를 굳이 해석하지 않았다. - P21
"그래도 남편만은 날 사랑한다고 생각하려 노력했지만...그의 사랑은 오락가락했고, 나를 기쁘게 하기 위해서라기보다스스로 만족하기 위해 계산된 방식일 때가 많았어. 자신이 미리결정해서 행동했고, 내 바람은 조금도 반영되지 않았지." 현대여성들의 삶과 우정을 그린 최신 드라마 속 대사 같지만 무려1861년에 엘리자베스 개스켈이 영국 빅토리아 시대를 배경으로쓴 소설 『회색 여인의 한 대목이다. 예나 지금이나 남자들은 여자를 자신에게 끼워 맞추려 애쓴다. 뜻대로 되지 않으면 금세 공격성을 드러내기도 한다. - P112
사라져가는 것들은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잔인할정도로 시리게 사라져간다. 특히 AI와 로봇의 등장이 인간의 삶을 획기적으로 바꿔줄거란 믿음과 더불어 많은 일자리를 급속도로 대체하고 있는 현실을 보면 기대보단 서글픈 생각이 든다. 노동을 통해 증명되는 나의 존재란 얼마나 가볍고 사라지기 쉬운 것인가. 허드렛일, 3D업이라고 하는 일들이 가치없는 것은 아니다. 전화상담, 요리, 청소, 물류 일이 정말 직업 전망 보고서에 나온 수치대로 사라질 일인지 나는 여전히 의문이다. 그리고 그 일이사라졌을 때, 그 일을 하던 사람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사람이 부재한 덕에 더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더 행복해질 수 있는지도 수치화 할 수 있는지 여전히 궁금하다.
근육은 산속에 난 길과 비슷하다. 자주 사용할수록 더 또렷해지고 또단단해진다. 인적이 드문 길로 다니면 부상당할 확률이 높아지는 건산이나 주방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주방에서는 예상치 못한 부위에 잔뜩 힘을 줘야 하는 일이 계속 생긴다. 나는 손끝에도 이렇게까지 힘을주면서 일을 한 적은 처음이었다. 냄비 닦을 때 손가락 끝에 잔뜩 힘을줘서 닦고 긁어내다 보니 그렇다. 까대기가 허리나 무릎 같은 관절 부위를 과도하게 사용한다면 주방은 관절부터 손끝까지 구석구석 안 쓰는데가 없다. 요리라는 일은 육체라는 산 전체에 빠짐없이 길을 내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 P242
그날이 그런 순간이었다. 내 책 좌우로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책들이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그런데 책장에서 빼내 보니, 다른 책들은 새 책이나 다름없는 상태인 반면 내 책은 손때가 잔뜩 묻어 있었다. 여러분《수학의 정석>옆면을 살펴보면 첫 번째 집합 부분만 누렇게 손때가 묻어 있는 걸 본 적이 있으신지? 말하자면 그 책이 그 서가의 집합 챕터였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들이 내 책을 읽어서 기분이 좋았다는게 아니다. 그날 작은 도서관의 가장 인기 없는 코너 구석에서 느꼈던것은 내가 여전히 유의미하게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이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강조하지 않아도 되겠다. 이 감각이 결핍되면 사람들은 곧잘 세상을 떠나버리겠다는 결심을 하곤 한다.그 순간 내가 도서관에서 느꼈던 감정과 주방에서 요리를 만들면서느꼈던 감정이 결코 다르지 않았다. 그것은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과 내가 통하였다는 느낌, 그들과 내가 교감을 이루었다는 충만감이었다. 나는 좋은 일이란 궁극적으로 인간을 덜 외롭게 만든다고 믿는다. 요리가 그렇다. 홀로 주방을 지키는 날에도 정신없이 음식을 만들다보면 누군가와 만족스러운 대화를 이어가는 기분이 든다. 서울 변두리지하 주방에 처박혀 있어도 세상의 한복판에서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들과 내 기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시끌벅적하게 어울리고 있는 것같다. - P249
유홍준 선생님의 글은 군더더기 없으면서도 몰입되게 하는 신묘한(?) 능력이 있는 것 같다. <나의 인생만사 답사기>에는 이름난 미술평론가나 문화재청장으로서 그의 모습도 볼 수 있지만, 그보다도 가끔은 동네 아저씨 같고, 어떨 때는 명절때 뵙는 큰 어른 같기도 한 인간 ‘유홍준’의 솔직하고 꾸밈없는 이야기를 들여다볼 수 있어서 더없이 좋다. 어머니 이야기에서는 따뜻하고 애정이 가득한 아들이 보이고, 담배를 보내는 글에서는 쿰쿰한 담배냄새를 잊지 못해 아쉬워하는 아저씨(?)가 보인다. 문화재를 사랑하는 그가 앞으로의 문화재에 대해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는지도 엿볼 수 있고, 여러 문화재를 답사한 후기에서는 우리 문화재 뿐만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의 문화재에 대해서도 편견 없는 시각으로 바라보고자 한 점이 인상적이었다. 무엇보다 ‘오윤’, ‘신학철’같은 예술가를 새롭게 알려준 점이 좋았다. 혼란스러운 시대에서 민중미술을 통해 자신의 목소리를 높인 예술가에 대하여 덕분에 새롭게 알게되고 관심이 생겼다. 작가 유홍준을 어려운 미술, 문화재를 알기 쉽고 재미있게 소개한 사람으로만 알고 있었다면 이 책을 통해 인간 유홍준에 대해 더 매력을 느끼게 되었다. 오래된 한옥 한 켠에 줄지어 놓인 장독 중에서도 유독 크고 깊은 항아리 안에서 묵은 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형언하기 어려운 맛이 그의 글맛이라고나 할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