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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동사의 멸종 - 사라지는 직업들의 비망록 ㅣ 한승태 노동에세이 3
한승태 지음 / 시대의창 / 2024년 6월
평점 :
사라져가는 것들은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때로는 잔인할정도로 시리게 사라져간다. 특히 AI와 로봇의 등장이 인간의 삶을 획기적으로 바꿔줄거란 믿음과 더불어 많은 일자리를 급속도로 대체하고 있는 현실을 보면 기대보단 서글픈 생각이 든다. 노동을 통해 증명되는 나의 존재란 얼마나 가볍고 사라지기 쉬운 것인가.
허드렛일, 3D업이라고 하는 일들이 가치없는 것은 아니다. 전화상담, 요리, 청소, 물류 일이 정말 직업 전망 보고서에 나온 수치대로 사라질 일인지 나는 여전히 의문이다. 그리고 그 일이
사라졌을 때, 그 일을 하던 사람들은 어디서 무엇을 하며 사람이 부재한 덕에 더 많은 사람들이 얼마나 더 행복해질 수 있는지도 수치화 할 수 있는지 여전히 궁금하다.
근육은 산속에 난 길과 비슷하다. 자주 사용할수록 더 또렷해지고 또단단해진다. 인적이 드문 길로 다니면 부상당할 확률이 높아지는 건산이나 주방이나 마찬가지다. 하지만 주방에서는 예상치 못한 부위에 잔뜩 힘을 줘야 하는 일이 계속 생긴다. 나는 손끝에도 이렇게까지 힘을주면서 일을 한 적은 처음이었다. 냄비 닦을 때 손가락 끝에 잔뜩 힘을줘서 닦고 긁어내다 보니 그렇다. 까대기가 허리나 무릎 같은 관절 부위를 과도하게 사용한다면 주방은 관절부터 손끝까지 구석구석 안 쓰는데가 없다. 요리라는 일은 육체라는 산 전체에 빠짐없이 길을 내는 작업이라고 할 수 있다. - P242
그날이 그런 순간이었다. 내 책 좌우로 비슷한 시기에 출간된 책들이빼곡히 채워져 있었다. 그런데 책장에서 빼내 보니, 다른 책들은 새 책이나 다름없는 상태인 반면 내 책은 손때가 잔뜩 묻어 있었다. 여러분《수학의 정석>옆면을 살펴보면 첫 번째 집합 부분만 누렇게 손때가 묻어 있는 걸 본 적이 있으신지? 말하자면 그 책이 그 서가의 집합 챕터였다.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사람들이 내 책을 읽어서 기분이 좋았다는게 아니다. 그날 작은 도서관의 가장 인기 없는 코너 구석에서 느꼈던것은 내가 여전히 유의미하게 세상과 연결되어 있다는 감각이었다. 이것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는 강조하지 않아도 되겠다. 이 감각이 결핍되면 사람들은 곧잘 세상을 떠나버리겠다는 결심을 하곤 한다. 그 순간 내가 도서관에서 느꼈던 감정과 주방에서 요리를 만들면서느꼈던 감정이 결코 다르지 않았다. 그것은 얼굴도 이름도 모르는 사람들과 내가 통하였다는 느낌, 그들과 내가 교감을 이루었다는 충만감이었다. 나는 좋은 일이란 궁극적으로 인간을 덜 외롭게 만든다고 믿는다. 요리가 그렇다. 홀로 주방을 지키는 날에도 정신없이 음식을 만들다보면 누군가와 만족스러운 대화를 이어가는 기분이 든다. 서울 변두리지하 주방에 처박혀 있어도 세상의 한복판에서 나를 이해해 주는 사람들과 내 기술을 필요로 하는 사람들과 시끌벅적하게 어울리고 있는 것같다. - P24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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