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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학하는 신체
모리타 마사오 지음, 박동섭 옮김 / 에듀니티 / 201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우리에게는 익숙한 '수포자'라는 단어가 다른 나라에도 있을까? 중국, 일본, 대만 등 동아시아의 몇몇 나라는 우리나라처럼 입시에 민감하기에 비슷한 말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수학 때문에 머리에 쥐가 난다고 하는 아이들과, 아이들을 쥐나게 하는 어른들의 씨름이 계속되는 이 나라에서 수학이라는 학문은 전공자 일부를 제외하고는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요원해지는 것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어쩌면 서점에 이 책이 꽂혀있다고 해도 선뜻 손이 가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우리의 일상은 수와 뗄 수 없다. 컴퓨터가 발명되어 기계가 인간의 계산능력을 이미 넘어선지 오래지만 그럼에도 수학은 앞으로 더욱 중요해지고 각광받게 될 것이라고 한다. 수학에 대한 일반적인 상식이나 고정관념을 뛰어서는 이 책은 여러 면에서 중요하고 의미있다고 본다.
처음 1,2,3,4 같은 자연수를 배웠던 때를 우리는 잘 기억하지 못한다. 그것은 아마도 몸에 자연스럽게 배어있는 기억이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에서 역시 먼 옛날 손가락과 발가락을 동원해가며 숫자를 세던 시절의 이야기 부터 시작한다. 수학이 지금처럼 관념적이고 추상화된 것이 아니었음을 알려준다. 'mathematics'의 어원으로 부터 수학은 하나의 사고 활동이라는 점을 강조한다.
'mathematics'라는 말은 그리스어(마테마타:배워야만 하는 것)에서 유래했으며, 원래 우리가 보통 '수학'이라고 부르는 것보다 훨씬 넓은 범위를 가리키는 말이었다. (중략) 마테마타가 '배워야만 하는 것'이라는 의미라는 것은 그렇다 치고, 애당초 배운다는 것은 무엇일까. 하이데거는 '배운다는 것은 자신이 애당초 무엇을 갖고 있었는지를 포착하는 일'이라고 말한다. 마찬가지로 가르친다는 것 또한 단지 무언가를 누군가에게 부여하는 것이 아니라 '상대가 처음부터 가지고 있는 것을 스스로 알아차리도록 이끄는 것'이라고 말한다.
조금 어려울지 모르겠으나 하이데거의 말을 나는 이렇게 이해하고 있다. 즉, 사람은 뭔가를 알려고 할 때 반드시 알려고 하는 것에 앞서 이미 무언가를 알고 있다. 일체의 지식이나 어떠한 믿음도 없이 사람은 세계를 상대할 수 없다. 그래서 뭔가를 알려고 할 때 먼저 자신은 '이미 무엇을 알고 있는 것일까'를 자뭇하는 것. 몰랐던 것을 알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알고 있었던 것에 대해 알려고 하는 것. 이것이 하이데거가 말하는 의미에서 수학적인 자세가 아닐까.
수학의 세계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그리는 무수히 많은 기호와 숫자로 뒤덮인 세계가 아니라, 멋진 건축물처럼 인간이 인식속에서 지어내는 구조물임을 일화를 통해 소개하기도 한다. 아라카와 슈사쿠의 '천명반전주택'에서의 에피소드는 괜히 웃음이 나오게 되는 일화다.
수학의 역사를 따라가며 유클리드의 원론, 현재 우리가 익숙하게 쓰는 미지수 x,y,z에 a,b,c와 같은 문자를 쓰는 표기법을 완성한 데카르트,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으로 유명해진 앨런 튜링의 이야기까지 읽다보면 지루하기만 할 것 같았던 수학 이야기가 가깝게 다가온다. 우리에게는 낯선 수학자이지만 일본의 오카 키요시라는 수학자에 대해 소개하며 그의 삶과 수학이 얼마나 일치되는 것이었는지 감성적으로 그린 부분도 와닿는다.
다양한 학자의 관점과 생각을 담아내려 노력한 저자의 노력에도 감동하게 되는 부분이 있다.
생물이 체험하는 것은 그 생물과는 독립된 객관적인 '환경'이 아니라 생물이 행위와 지각의 연관으로 스스로 만들어낸 '환세계'다. 생물을 기계적인 객체로 간주하는 행동주의가 지극히 융성했던 시대에 생물을 하나의 주체로 간주해서 이렇게 피력한 사람은 독일의 생물학자 윅스퀼이다.
윅스퀼의 발상은 소박하다. 아무리 아름다운 케이크가 있어도 짐승의 피를 쫓는 모기는 눈길을 주지 않는다. 어떤 생물에게는 강렬한 '의미'를 가진 자극이 다른 생물에게는 전혀 무의미할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는 자칫 모든 생물이 주어진 객관적인 환경에서 살고 있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각각의 생물을 둘러싸고 있는 것은 어디까지나 그 생물에 고유한 국소적인 세계(환세계)일 뿐이다. 윅스퀼에 따르면 나비에게는 나비의 환세계가 있고 벌에게는 벌의 환세계가 있다.
수학이 수세기처럼 몸에서 시작하여 기계로 옮겨 갔다가, 이제는 그 기계로 인간의 사고까지 재현해내려고 하는 시대에 살고 있다. 수학이 단순히 시험 성적을 위한, 입시를 위한 도구가 아니라 아름다운 학문임을 사람들에게 일깨워주어야 하는 이유가 거기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