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야기는 오래 산다 - 30년 문학전문기자 생애 첫 비평에세이
최재봉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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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는 오래 산다>는 30년 동안 문학 전문기자로 일한 최재봉이 그동안 쓴 글들을 정리하며 덧붙인 글이다. 작가들과의 인터뷰, 저자의 서평과 부고들이 담겨 있다. 문학계의 시대적 문제와 고뇌들, 문학사의 논쟁거리, 가령 단편 위주의 창작 문화, 서구 중심의 노벨문학상, 신경숙 표절 문제 등을 넘나든다.


이야기는 의미 없는 세계에 의미를 부여하는 행위이고, 그런 이야기를 대표하는 것이 바로 문학이다.

6p

문학계에서 가장 중요한 정신 중 하나는 창작이기에, 문학사에서 크게 논란된 사건은 표절 사건일 것이다. 신경숙 표절 사건은 2015년 이응준 작가가 신경숙의 표절을 폭로하면서 벌어진 것으로, 이후에 신경숙은 다양한 작가의 글을 표절한 걸로 드러났다. 당시에 출판사 창비는 신경숙의 표절을 감쌌는데, 많은 논자들이 창비가 신경숙이라는 작가가 지닌 상업적 가치에 눈멀었음을 비판했다고 전한다.


그러면서 저자는 문단에 만연했던 '문단 보험 카르텔'을 비판한다. "자신이 편집위원으로 있는 문학잡지를 내는 출판사의 상업적 이익을 챙겨 주려는 평론가들의 이해관계와, 문학상으로 상징되는 문단 내 평판을 좇는 작가들의 이해가 맞아떨어진 결과 그런 카르텔 구조가 나타났다는 것이 비판적 관찰자들의 견해다."(153p) 출판문화에는 물론 출판산업을 위한 상업적 가치를 쫓아야 하는 경우도 있지만, 어디까지나 그것은 지식이라는, 정직이라는 바탕을 두고 있음을 항상 생각해야 한다.


더불어 그는 비판적인 서평을 시도했다가 작가나 출판사에게 좋지 않은 소리를 듣고 사이가 나빠진 경우를 언급하며, 글 쓰는 사람으로서 비평과 후기는 그저 좋게만 작성해야 하는가 질문한다. "비평의 가치는 타당성과 설득력의 다과로써 판단되어야 한다. 타당성과 설득력이 떨어지는 비평이라 할지라도 최소한의 생존 근거를 제공받아야 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것이 건강한 토론 문화다." (143p)


그의 책은 2000년대에 쓴 글을 모은 것이기도 하기에 과거의 쓴 글을 돌아보는 흥미로움을 느낄 수 있다. 2007년 그는 한국소설이 독자와 더불어 호흡하는 데에 단편보다는 장편이 요구된다 말하면서도 장편이 나오기 힘든 문학계의 현실적인 문제들을 안타까워했지만, 현재엔 그 바람이 어느 정도 이뤄졌음을 현재에 와서 돌아본다. 


한때 많은 학문에서 언급되었던 노벨문학상에 관한 문제도 짚고 넘어간다. 그는 노벨문학상이 서구 중심적인 현실이지만, 최근 한국을 포함한 비 서구권 작가들의 작품이 부커상 후보에 오르는 현실을 보고 최선을 다해 보면 이 기울어진 운동장을 바로잡을 것이라 희망한다. 조금이 지난 후, 우리 문학계를 돌아본다면 그만한 발전을 이룰 수 있을까?


카뮈의 <페스트>에 관한 글을 쓰며 주인공 의사 리외의 말, "문학의 본질과 역할에 대한 중요한 통찰을 담고 있"는, "문학은 발언이며 증언이고 추억이라는 것, 인간의 존엄성과 가치에 대한 찬양이어야 한다는 생각"을 말하면서 그는 문학과 문인들이 사회에 무엇을 해야 하는지 고찰한다. 


과거 그의 글에 언급된 작가들은 하나둘 세상을 떠났다. 저자는 박태순의 장례식에 찾아오지 않는 문인들, 마땅히 얼굴을 비쳤어야 할 이들을 비판한다. 부고를 읽으며 문인이란 사회에 어떤 역할을 해야 하는지 생각해 본다. 작가들은 의미 없는 세상에 의미를 부여하는 이들이었고, 나름의 지향점들을 제시했기에 우리는 이 의미들을 따라가본다.


조세희, 박완서, 안도현과 같은 고전 작가들부터 김초엽, 최은영과 같은 최근에 흥행한 작가들까지 작가 최재봉은 한국 문학사를 훑는다. 그의 글에서 아는 책이 나올 때면 평론에 공감하면서 읽을 수 있었다. 문학을 사랑하는 사람과 문학사 및 문예 창작을 공부하는 이들에게 좋은 책이 될 것이다.


책장에서 빛나는 문학 작품들과 몰랐던, 기억될 미래에 존재하는 책들이 새로이 반짝인다.  이렇게 이야기는 오래 산다. 가장 좋았던 황현산의 말로 마무리한다.


일단 아름답고 완벽한 세계를 보고 나면, 현실에서 벽에 부닥치고 실패하더라도 크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 우리에게는 그런 아름다운 세계에 대한 꿈이 있기 때문이다. 신비주의자 같은 말일지도 모르겠지만, 사람들이 머릿속으로 생각한 것은 설사 밖으로 표현되지 않아도 어떤 식으로든 세상사에 영향을 끼친다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어떤 생각을 하는 건 이미 세상에 그런 물질적 기반이 조성돼 있기 때문인 것이다.

102p

한겨레 출판에게 도서를 제공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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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드러시
서수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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골드러시 Gold Rush, 주로 19세기 캘리포니아에서 금이 발견돼 많은 사람들이 금을 캐러 갔던 사건을 말한다. 이 당시 많은 동양인들도 미국으로 갔다. <골드러시>는 호주 시드니에서 살고 있는 서수진 작가의 단편 소설을 묶은 소설집으로, 일종의 '희망'과 그에 따르는 현실에 대한 이야기를 담고 있다. 등장인물들은 이민자로서의 정체성과 표현하기 힘든 다양한 감정, 특히 마음속에서 자라나는 두려움과 걱정을 나타낸다.

등장인물들은 '정체성'에 대한 질문을 마주한다. 호주 이민자로 사는 한국인, 즉 호주에서 아시아인의 위치에 있는 인물들은 각종 편견 속에서 살아가는 사람이자 한국인 혹은 아시아인이라는 정체성을 인지하고 살아가는 주체다.

<입국 심사>는 주인공 유미가 이태원에서 만나 남자친구가 된 에디를 보러 미국 입국심사를 받는 상황이다. 입국심사를 위해 인터뷰하는 사람은 갈색 피부의 이민자 출신이었지만 편견을 가지고 질문했다. 그녀는 유미가 미국에 와서 살림을 차리지 않길 바라며 사소한 것 하나하나까지 추궁한다.

에디는 어느 날 유미에게 쓰레기 섬 소설을 쓰고 싶다 말했는데, 그것은 쓰레기 더미가 있는 자신의 방에서 영감을 얻은 것이었다. 사람은 상상할 수 있는 한도 내에서 생각할 수밖에 없다. 저자는 그것을 편견이라 말하고 있다.

편견에 대한 이야기는 <캠벨타운 임대주택>에서 더욱 두드러진다. 주로 이민자들이 사는 캠벨타운 임대주택 보수 관리자로 일하는 다니엘 리는 집을 어지럽히는 이민자들에 대한 편견을 가지고 있다. 어느 날 한국인 부모 아래서 자란 여자아이가 찾아와 옛날 집에 놔두었던 물건을 찾아달라 말하지만 다니엘 리는 편견을 가지고 미친 여자로 취급하며 부탁을 들어주지 않는다.

다니엘 리의 일을 도와 방문 청소를 하는 그의 부모는 반난민 정책을 지지하는 집회에 나갔다. 이민자로 들어온 이들은 자신의 밥벌이를 지켜야 한다는 것과 같은 이유로 반난민 정책을 지지했을 것이다. 그러면서 아버지는 한국인은 전쟁이 나도 난민 신청을 하지 않을 것이라 말한다. "한국인은 강하기 때문"에. 강한 한국인이란 뭘까.

나중에 벽을 파보니 조약돌 세 개뿐이었다. 조약돌은 아이의 세계였겠지만 다니엘 리의 마음의 크기는 손에 집히는 조약돌만한 것이 아니었을까. 작가는 조약돌로 그 마음을 형상화했다. 아니면 강한 한국인이란 그 조약돌 같은 것일까. 여자아이에게 돈을 쥐여준 아버지처럼 사람은 가까이서 보면 안타까움을 느끼지만, 저 먼 이야기가 된다면 생각이 올바로 서지 않게 된다.

소설집의 제목과도 같은 <골드러시>는 연인인 진우와 서인이 차를 몰고 가다 다친 캥거루를 보며 시작한다. 서인은 골드러시 체험 상품을 알아보고 진우에게 통보식으로 같이 가자 말한다. 셰어하우스에서 처음 만나 결혼한 지 7년이 된 둘이다. 호주에서 비자를 받기 위해 계속해서 열심히 일한 둘이지만, 홀에 들어왔던 젊은 남자와 사랑에 빠진 서인은 떠날 거라 말한다. 진우는 비자 문제로 1년만 기다려 달라 말하지만 계속 같이 지내며 둘은 장기주택자금을 얻어 단독주택을 산다.

체험 상품은 사기에 가까웠고, 금광 체험을 한 후 둘은 다시 차를 타고 가다 캥거루를 차로 치게 되는데, 진우는 편하게 가라고 죽이지만, 서인은 살아있다고 말한다. 캥거루는 감정을 형상화 한 것인지 모르겠다. 그 감정을 억누르고 죽이는 삶인지, 그저 그대로 두고 살아있음을 느끼는 삶인지.

진우는 금광 체험에서 실수를 해 주저앉아 버리고 바지가 젖는다. 그는 예쁜 돌을 발견해도 서인에게 줄 생각을 하지 못했다. 그에겐 많은 상황들이 압박이었을지도 모르고, 서툰 삶의 연속이었을지도 모르겠다. 그를 감싸 이해가 필요했던 것일까. 둘은 빛나는 순간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충격의 순간들은 있었어도.

<졸업 여행>은 졸업여행을 떠난 아들 잭이 연락이 되지 않아 불안한 엄마 미연이 주인공이다. 아들이 졸업 여행을 간다고 말했던 곳이 아닌 친구네 할머니 집에 가게 되고, 그 지역에 산불이 났다는 소식을 듣고 남편 승수에게 아들을 찾아가라 말한다.

미연은 비자 문제로 끙끙대며 억지로 학교를 다니며 아르바이트로 돈을 모아 아들을 뒷바라지했다. 승수는 돈을 벌기 위해 한식 가게를 운영했다. 잭이 호주 대학을 졸업하면 다른 삶을 살 거란 믿음을 가지고 열심히 살았다. '오스트레일리안 드림'인 것이다.

모래폭풍이 가게를 덮쳤고 전기도 나갔다. 잭을 찾으러 간 승수는 친구들과 코카인을 한 잭을 발견한다. 불이 번지는 것은 마음의 불이 번지는 것이었으리라. 열심히 했으니 이 정도 일탈은 괜찮지 않냐는 말.

우리는 어디까지 참아야 하는가에 대해 생각한다. 이 정도 했으니 끝내야 하는 것인지, 이 정도까지 했는데 계속할 수 있는지. 현실에 의해 메말라버린 감정에 불이 붙으면 확 퍼져나간다. 꿈은 현실과 다르다. 꿈이 현실을 움직이게 하겠지만, 그 결과까지 담보하진 않는다.

<헬로 차이나>는 부동산 에전트 일을 하는 혜선의 이야기다. 혜선은 자신의 딸이 중국인 남자친구를 만나는 것을 탐탁지 않아 하면서도 괜찮다고 생각한다. 그런데 어느 날 마당에 자신이 걸어둔 국기 중에 누군가 티베트 오색기만 잘라갔고 혜선은 그 범인을 찾고 있었다.

혜선은 호주에 와서 생활할 때 중국인 취급을 받았다. 그럼에도 그녀는 집을 구하려고 굉장히 노력했다. 경매에 좋은 물건이 나오면 중국인 얀에게 알려주며 중국어도 연습했다. 자신의 고객이자 싱글맘인 얀과 친하게 지냈다. 얀의 딸은 한국인이 되고 싶어 했다. 같은 아시아인이지만 분명히 다른 나라의 사람이었다. 의뢰받은 집의 주인인 한국인은 인도인 세입자를 거절했다. 같은 아시아인 끼리도 선을 그었다.

혜선은 딸 에이미와 남자친구 케빈이 같이 있는 모습을 보며 어느 순간 매우 닮았다고 느끼며 낯섦을 느낀다. 주립 도서관에선 홍콩지지의 반중국 집회가 열렸고 혜선과 얀은 그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다. 얀은 중국정부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 말한다. 돈을 벌지 못하게 하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티베트를 지지하진 않았다. 그저 어떤 정의나 가치가 중요하지 않았다. 얀의 세상을 움직이는 건 돈이었다.

집에 돌아오니 또다시 깃발은 사라져 있었고, 혜선은 에이미와 같이 있는 케빈에게 집에서 나가라 말한다. 혜선은 마음속에서 수많은 경계를 아슬아슬히 타고 있었다.

<한국인의 밤>에 등장하는 클로이 최는, 한인회 임원 아버지의 부탁에 따라 한국 휴전 60주년 기념행사에서 한복 모델을 하는 등 한국인이라는 정체성을 강요받는다. 한국에 대해서는 잘 모르는데도 말이다. 아버지는 일식집을 운영하며 말을 포함해 모든 것들을 일본식으로 바꿨다. 아버지는 호주의 사는 한국인을 영주권자 이상과 이하로 나눴다. 클로이의 친구들은 중학생 때까지 모두 다 같이 놀았지만 고등학교에선 인종에 따라 무리가 나뉘었고, 친구들은 너를 호주인이 아니라 아시안이라 말했다.

'앤잭데이' 행진에서 한 참전 노인을 만나 이야기한다. 노인의 훈장엔 Korea가 쓰여있는데, 이를 보는 클로이는 자신에게도 이 korea라는 딱지가 붙었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노인은 "우리를 누가 기억해 주겠나?"라고 말한다. 패션쇼를 한 후 노인을 찾지만 결국 찾지 못한다. 그러다 한 노인이 쓰려져 cpr을 하게 된다. 행사에선 "우리는 기억할 것입니다"라고 말하지만, 그렇게 쓰러지는 한 노인들처럼 과거는 잊히고 있었다. 기억은 경험 속에서만 증폭된다. 누군가에게 과거의 정체성이 살아가게 하는 동력일지도 모른다. 사고 기사를 쓰지 말아달란 영사관 직원의 말은 행사의 이미지를 생각하는 것이었겠지만, 그 동력에 상처를 내지 않으려는 것이기도 하지 않을까 애써 생각해 본다.

먹고살기 위해 정체성을 바꾸는 삶과, 나의 정체성을 기억하는 삶. 기억하고 싶어 하는, 잊지 않고자 하는 욕망이 교차한다. 하지만 클로이가 느낀 한국의 정체성이란 껍데기뿐이었고, 이렇게 하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는지 묻게 된다. 잊지 않겠다고 말하지만, 서서히 잊히고 있었다.

성 정체성에 대해 말하는 <외출 금지>는 레즈비언 커플 희율과 은영이 동성 결혼이 합법화된 호주로 가서 살기로 하는 내용이다. 둘은 바다가 보이는 호주의 숙소를 예약하지만 실망한다. 호주에 가기 전 이태원 클럽에서 놀다 나왔는데 전 남자친구가 버스킹 하는 걸 보게 된다. 희율은 남자를 좋아했었다.

희율은 은영에게 시드니 퀴어축제에 참여하자 말하지만, 한국의 퀴어 문화 축제에 참여했다 적대적인 시선을 받았던 은영은 부담을 느끼고 둘은 다투게 된다. 은영은 축하받거나 자랑스러워하지 않아도, 그저 미움받지 않고 외면당하지 않은 삶을 살고 싶었다. 희율은 술에 취해 선택적으로 레즈비언 한다고 말한다.

희율이 전 남자친구의 노래를 틀고 있었고 맛없는 와인 때문에 또다시 싸우게 된다. 따로 나가서 살 방을 구하지만, 코로나 때문에 호주 전역에 외출 금지령이 떨어진다. 같이 살지만 희율은 울고 은영은 미안하다 말한다. 둘은 마트에 들러 먹을 것을 사며 화해를 한다.

정체성의 외출 금지다. 사랑의 외출 금지랄까. 둘이 마트에서 돌아오다 검은 터널 같은 곳으로 들어가는 모습처럼, 사랑이란 때론 캄캄한 곳으로 들어가 질척한 물속에서 걷는 것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가끔 살다 보면 어쩌다 이만큼 멀리 왔나, 무엇을 향해 왔나, 감정이라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는 때가 있다. <배영>의 주인공 여진을 보면 그런 생각이 든다. 대학생 때 우현을 만난 여진은 임신을 하지만 낙태하고 둘은 졸업 후 취직해 동거한다. 우현이 캠핑을 좋아해 캠핑 갈 날짜를 잡지만 여진은 전날에 회식으로 늦게 들어오게 되고 둘은 다투게 된다. 결국 캠핑을 같이 가고 수영을 한다. 둘의 과거를 회상하고 문득 바다로 들어가 하늘을 바라보며 잠기는 여진. 텐트에서 잠을 자다 너무 추워 자지 못하겠어 집에 가자 말한다. 도착한 집은 한결같았고, 우현 또한 한결같았다. 괜찮다고 말한 우현의 상처만 곪아있을 뿐. 여진은 주저 앉아 운다.

저자는 환상과 부딪히는 현실을 그려낸다. 저자 스스로가 호주의 삶에서 그런 감정을 느꼈을지 모르겠지만, 등장인물들은 각자의 환상, 이민을 통한 성공이나 행복한 여행과 같은 환상을 가지고 호주에 가지만 현실은 그렇지 못했다. 사기를 당하거나, 비참한 현실을 겪거나 사랑하는 사람과 갈등을 겪는다.

밝고 몽글몽글 피어오르는 소설이라기보단 찜찜함을 표현하는 소설에 가깝다. 우린 잘해보자고 생각해 거창하게 시작한 일이 있지만, 생각대로 되지 않은 경험이 있을 것이다. 그것이 사랑일지도, 먹고사는 문제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 거창한 마음은 어느 순간 변해있거나 꺾이게 되어있고 어쩌다 그렇게 됐을까 생각하기도 한다. 주저앉으면서, 때로는 화를 내면서 갈등을 겪으면서. 나는 무엇을 향해 달려왔을까.

<골드러시>는 대체로 이민자의 정체성으로, 경계에 있는 정체성들을 다룬다. 환대 받는다면 그 나라에 속하는 것이겠고, 또 마음속으로 환대 받는다면 그것은 사랑에 속하는 것이겠다. 이 소설들은 그 경계에 서있는 이들에 대해 말하고 있다. 정체성이란 딱지같이 붙어있는 것이라 상대도 의식하고, 나 스스로도 의식하는 것이다. 이 두 의식 중에 더 강하게 밀려오는 것은 무엇일까. 밀어내고 밀림 당하기란 꽤 어려운 것이다. 축축한 것 같기도 하다.



한겨레출판에게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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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이후의 세계 - 다원 패권 시대, 한국의 선택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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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으로부터 2년 전, 2022년 2월 14일.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침공했다. 군대를 전진 배치했다는 소식이 들려올 때조차 설마 했는데, 러시아는 진심이었다. 전쟁은 지금도 계속되며 끝을 보이지 않고 있다. 게다가 중국과 대만의 갈등이 깊어지고 하마스-이스라엘 전쟁이 일어나며 세상은 중국과 미국의 신 냉전과 더불어 또 한 번의 긴장 상태와 전쟁에 놓였다. 


러시아 출신으로 오슬로 대학에서 한국학과 동아시아학을 가르치고 있는 박노자 교수는 <전쟁 이후의 시대>에서 우크라이나-러시아 전쟁과 원인(푸틴의 의도와 세계정세)을 분석한다. 미국 패권의 약화를 바탕으로 중동지역까지 포함한 세계적인 긴장관계 또한 분석하는데, 새로운 전쟁의 시대에서 우리나라(한국)의 대응 방향도 제시한다.박노자는 먼저 푸틴이 지배하고 있는 지금의 '러시아 프로파간다'는 과거의 평등한 공산주의 혹은 사회주의를 외쳤던 모습과는 굉장히 멀어져있음을 비판한다. 현재 푸틴의 행보는 극우의 행보이며, 푸틴은 레닌이 아닌 스탈린의 후계자로, 소련 시절의 연합체가 아닌 오스트리아를 포섭하려는 국가주의적 사고를 보인다 말하면서 다음과 같이 종합적으로 평가한다.


사회주의의 반대편에 "야만"이 있다면, 푸틴주의는 바로 그 야만을 대표하는 이데올로기 중 하나라고 봅니다. 그러한 국가주의, 군사주의, 교권주의, 팽창주의 속에는 계급적 정의나 약자, 환경, 기후에 대한 배려란 추호도 없습니다. 푸틴주의가 지향하는 미래 세계는 강국들이 약소국을 지휘, 통제하는 서열적 세계이지, 평등의 세계는 절대 아닙니다.

35p


러시아 내에는 현재 이를 극복할 만한 대중적인 좌파 세력이 부족함은 물론이고, 지식인과 대중, 중산층마저 국가와 연관돼있는 군수산업체에게서 이익을 얻기 때문에 국가에 저항하는 것은 곧 자신의 밥줄을 끊는 것이라 말한다. 여론 상황도 폐쇄돼있어 친 러시아 성향의 목소리만 노출된다. 그렇게 '제국주의적 사고'가 자체가 러시아 현대 문화에 녹아들어 있다.


푸틴의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인들을 "러시아 제국의 신민"으로 만들려고 하기에 우크라이나인들은 더욱 강렬히 저항하고 있다. 푸틴은 다양한 민족이 공존하는 세계가 아닌, 스탈린의 후예로서 하나의 통합된 제국을 원하고 있다. 몇몇 지식인들은 나토의 영향력 확장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을 유도했다고 주장하는데, 박노자는 그 주장을 거부하며 러시아의 침공이 궁극적으로 푸틴 주의 집단이 추진하는 일종의 "국가 주도 개발 전략"이라고 말한다. (139p) 전쟁을 통해서 국가의 경제적 목적을 포함해, 세계 정치 지형을 바꾸려는 시도인 것이다. 그렇기에 이 전쟁은 쉽게 끝나지 않을 것이라 전망한다.


'전쟁'은 '돈'과 함께한다. 세계의 많은 열강들은, 특히 미국은 전쟁을 통해 경제 위기를 극복해냈다. 러시아는 군수물자가 곧 국가의 부의 원천이며 우리나라 또한 군수물자로 돈을 버는 나라의 순위권에 올라섰다. 사람을 죽여서 돈을 버는 것에 대한 상당한 책임이 생겼다는 것이다. 전선에는 돈 없는 청년들이 나선다. 상대를 그저 적으로만 인식한다. 계급적 사고나 인권을 바탕으로 연대하는 것이 아니라 단순히 프로파간다에 선동된 악의 세력을 처벌하러 나가고 있다. 자유와 평등을 부르짖었던 그 시대, 그 생각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신자유주의적 격차 사회에서 빈민으로 전락한 옛 소련 공민들과 그 자녀들이 이제 "고액의 보수"를 보고 우크라이나에 가서 같은 소련 유민과 그 자녀들을 죽인다는 사실은 엄청난 역사적 비극이 아닐 수 없습니다. 이와 같은 비극이 벌어질 수 있었던 배경에는 전쟁의 주력 부대가 된 러시아 노동자와 농민들에게 계급의식이나 계급 조직이 거의 없다는 점이 매우 크게 작용했습니다. 그들은 우크라이나의 전장에 갔을 때에 자신의 반대편에 서 있는 우크라이나 병사들을 "같은 계급에 속하는 형제"가 아닌, 러시아 프로파간다의 가르침대로 "서방이 유혹하고 매수한 배신자"로 보는 것입니다.

128-129p


박노자는 이 새로운 전쟁의 시대에서 제국주의 세력들에 대한 실사구시(實事求是)와 비판적 태도를 가져야 한다고 말한다. 어떤 열강에 대해서도 우리는 어떤 환상도 갖지 않고 실리적 외교를 해야 한다는 의미다. 이런 견지에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 초기 애매한 줄타기 외교를 펼친 문재인 정부에서 미국을 추종하며 우크라이나를 전적으로 지원하는 윤석열 정부의 정책을 비판한다. 더 이상 세계정세가 미국 중심으로 돌아가지 않으며 미국 스스로도 문을 걸어 잠그고 있기 때문에 우리 나름대로의 살길을 모색해야 하기 때문이다.



한국의 친우크라이나 행태에 대응해 러시아는 북한과 회담을 가지며 더욱 가까워졌고 북한이 소련에 무기를 수출하는 일까지 벌어졌다고 말한다. 만약 위에서 언급했듯 '전쟁'이 경제를 포함한 세계 문제의 해결책이 된다면, 우크라이나처럼 우리나라도 언제든 열강의 대리전의 장소가 될 수 있음을 생각할 수 있다. 그렇기에 우크라이나 전쟁을 단순히 다른 나라의 일로 여겨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박노자는 제국주의나 미국, 러시아에 대한 비판뿐 아니라 모든 "시민들이 '자기' 체제 속에서 인권과 민주, 평등의 이상을 실천하려는 투쟁" 또한 절실하다 말한다. 서구 세계와 달리 러시아나 중국 같은 체제에서는 이런 운동 자체가 굉장한 위험을 감수하는 것이기 때문에 긍정적인 전망을 내놓지는 않지만, 결국 전체주의적 흐름과 신자유주의적 체제 자체의 모순이 생길 가능성을 제시하고 시민사회를 통한 독재에 저항하는 세력과 우크라이나에 대한 지원 등이 필요함을 말한다.


저자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가 '자살골'이었다고 말한다. 이제 그 주도 세력이었던 미국(혹은 일본)의 위상은 떨어졌고, 미국과 러시아 모두 자신의 생각대로 전쟁이 흘러가지 않았고, 우리는 새로운 전쟁의 시대를 맞았다. 전쟁 이후의 세계는 어떻게 흘러갈지, 한국은 어떻게 대응해야 하는지 박노자의 글과 함께 생각해 보자.



한겨레출판에게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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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캐나다의 한국인 응급구조사 - 나를 살리러 떠난 곳에서 환자를 살리며 깨달은 것들
김준일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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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자 김준일은 40살에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캐나다로 이민을 간다. 그는 가족을 먹여 살리기 위해 아르바이트와 같은 일을 전전하다 응급구조사라는 직업을 알게 되고, 2년 넘게 노력을 거듭해 시험에 합격하면서 캐나다 온타리오주에서 응급구조사(Paramedic, 파라메딕) 일을 하게 된다. <나는 캐나다의 한국인 응급구조사>에서 다양한 일화와 함께 자신이 일을 하면서 느낀 점을 써내려간다. 그는 죽음의 현장을 마주하며 어려움을 호소하기보다는 독자들에게 삶의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보길 권유한다.

"모쪼록 독자들이 각자의 처지에서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조금 더 만족할 수 있는 부분을 찾고, 숨어 있는 행복을 찾을 수 있는 마음 한편, 혹은 여유를 마련하는 데 이 책이 도움이 되길 바란다." 13p


저자는 응급구조사로서 일하는 모습을 설명한다. 많은 사람들의 생각과 달리 응급 현장이 매번 극적이진 않으며, '비응급 환자'들의 잦은 신고와 다양한 사람들을 대하는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하지만 대체로 응급 구조는 시간을 다투며 정신없이 벌어지기 때문에 밥을 거르며 초과근무를 하는 경우도 많았다.


응급구조는 체력보다 정신력이 더욱 강해야 할 수 있는 일이기도 했다. 그는 환자들을 마주하면서 살릴 수 없는 환자를 만날 때면 혹시라도 죽는 모습을 보기 싫어 그저 넘겨주고 돌아오고 싶은 마음이 든다고 고백한다. 동료는 트라우마 때문에 일을 그만뒀다. 구조대, 소방관, 경찰관 같은 일을 하는 사람  트라우마로 일을 그만두거나 심지어 스스로 목숨을 끊는 경우가 많았다. 신고 전화를 응대하는 과정에서도 트라우마가 생긴다. 전화를 받으며 신고자의 고통, 절규를 듣게 된다. 전화 통화 도중에 극단적 시도를 하는 사람도 있으며, 위급 혹은 사망을 전하는 목소리, 떨림과 공포의 상황을 느끼는 것 자체가 고통이다.

정신건강 사각지대에 선 최초대처자들 (https://www.hyunbulnews.com/news/articleView.html?idxno=288376)

"내가 하는 일의 무게란 무엇일까?
어쩌다 사람이 죽고 사는 일이 나에게 일상이 된 것이며, 죽음보다 살아남은 사람들을 견뎌내는 일에는 언제쯤 익숙해질 수 있을까?"
9p


사고는 우연적으로 발생하고 그는 기적을 바란다. 환자가 제발 살길 바라는 마음. 가족이 아니지만 가족처럼, 보호자와 다투더라도 환자가 살길 바랐다. 환자가 명을 달리하면 자신도 그 공허함을 똑같이 느꼈다. 저자는 휴가를 보내거나 쉬는 시간에도 끝내지 못한 일이 많다고 생각해 불안을 느낀다. 그리고 점점 죽음에 무뎌갔다. 그리고 이런 자신의 모습에 대해 죄책감을 느꼈다.


저자는 자해하는 사람들을 보며 더욱 힘들었다 말한다. 자기 손으로 자신을 죽이기는 어렵다. 많은 이들이 자해 후 고통이 심했기 때문에 혹은 후회를 하면서 신고했다. 저자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방법'을 알길 원한다. 아프면 아프다고, 힘들면 힘들다 말하는 법. 저자 스스로도 자신에게 친절하게 대하는 방법을 모르고 있었다고 고백한다. 응급 상황을 마주하면서 죄책감을 가졌다. 하지만 저자는 오히려 고통의 상황을 직접 바라보며 사람 사는 세상을 느낀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에게 의지할 수 있고, 응당 그래야 함을. 또 그것은 부끄러운 것이 아님을. 인간이란 원래 약한 존재임을.


늦은 나이에 치열한 경쟁 속에서 응급구조사가 되기 위해서 열심히 노력해야 했다. 체력 시험에서는 기절할 만큼 포기하지 않았다. 그런 그도 실습과정에서 수많은 실수를 했고 계속해서 배웠다. 이제는 신입 구조사들을 가르치며 그들의 실수를 교정해 준다. 그는 직업에 의해 성격이 바뀌었다 말한다. 응급구조사 일을 하고 난 뒤 타인에게 더욱 관심을 갖게 되었고 혹시 모를 일들, 비상 상황을 상상한다. 또한 겸손함을 배운다. 인간은 약하며 언제들 도움을 받고, 또 줄 수 있는 존재임을. 결국 세상의 많은 일은 사람을 대하는 일이고, 사람 사는 이야기를 배우는 직업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우리가 다른 사람들을 위해 대단한 일을 한다고 여기는 이들이 있다. 하지만, 어쩌면 우리는 스스로를 위해 이 일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다른 사람을 돕는 과정에서 생채기 나고 찢긴 마음을 겉으로 드러내거나 쉽게 털어놓지 못하고, 그렇다고 위로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는 우리들은, 사람들로부터 오지랖 부린다고 핀잔을 들을지언정 스스로 나서서 남을 돕는 자들에게만 허락되는 따뜻함으로 우리의 다친 마음을 스스로 어루만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174p


우리가 한 문장으로 설명하는 현실 뒤엔 수많은 노력이 있다. 김준일의 글을 읽으면 타인을 구하는 것이 자신을 구하는 것이라는 말이 이해된다. 그는 수많은 상황에서 얼마나 간절했을까. <나는 캐나다의 한국인 응급구조사>를 읽으며 그의 솔직하고 자세한 이야기들을 들어보는 것은 어떨까.


한겨레출판에게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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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 헌터 - 어느 인류학자의 한국전쟁 유골 추적기
고경태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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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우연히 케이블 방송에서 <태극기 휘날리며>를 봤었다. 거기서 이진태(장동건)의 약혼녀 김영신(이은주)이 쌀을 받기 위해 보도연맹 가입에 서명했다가 반공청년단에게 총살당하는 장면이 나왔다. 영신은 보도연맹 가입을 추궁하는 청년단장(김수로)에게 서명하면 쌀을 준다는데 먹고살려면 어떡하냐고 말했다. 이 영화는 한국전쟁이 벌어져 죽은 형의 유골을 찾는 내용으로, 실화(를 각색한 것이지만 보도연맹 학살사건 민간인 학살이라는 또 다른 한국전쟁의 참상을 드러내는 영화였다.

 

<본 헌터>는 한국전쟁과 같은 비극적 시대에 묻힌 이들의 이야기를 발굴의 형식으로 풀어나가는 책이다. 체질 인류학자 박선주 선생의 발굴 이야기와 발굴된 뼈의 주인의 입장에서 각색한 이야기가 번갈아가며 서술된다. 아산 설화산 이야기를 주로 다루며 전개되는데, 발굴의 이야기는 곧 한국 역사를 들추는 것과 같았다. 숨어있는 이야기, 고통과 슬픔에 대한 이야기를 복구시키고 그들을 기리는 작업이다.

 

"인민군이 물러가고 부역 혐의자와 그 가족을 대상으로 한 보복이 시작되었다. 9월 29일 밤부터 10월 초까지가 1차 시기라면, 10월 중순부터 12워 초까지가 2차 시기였다. 그리고 이듬해 1.4 후퇴 때가 마지막 3차였다. 1.4 후퇴 때는 특히 가족 단위의 처형이 많았다. 이때엔 아산 둔표면을 지나던 피난민 300여 명이 미군 폭격으로 비명횡사하는 일도 있었다."

 

한국전쟁의 역사를 간단히 보면 1950년 6월 25일 북한의 남침을 시작으로 경상도까지 수세에 몰린 국군과 UN 군이 인천상륙작전과 함께 다시 북한을 밀고 압록강과 두만강까지 올라갔지만 중공군의 개입으로 후퇴하게 된다. 이 후퇴를 1.4 후퇴라고 부르고 있다. 그러니까 북한군, 즉 인민군이 한반도를 한번 휩쓸고 다시 UN과 국군이 휩쓸었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시 남한이 영토를 찾았을 때 부역 혐의, 즉 인민군에게 도움을 준 사람들을 처벌하기 시작했다. 대부분은 총살이었다.

 

"9월 인천상륙작전 이후 인민군이 떠나고, 기세등등하던 좌익들과 핵심 부역자들은 북한으로 올라갔다. 보도연맹 학살이라는 파도를 운 좋게 피한 아산에 더 큰 쓰나미가 밀려왔다. 부역 혐의 딱지를 붙이 인간 사냥이 시작됐다. 두 손이 묶인 사람들이 트럭에 실려서 성재산으로, 설화산으로, 탕정지서 뒷산으로 올라갔다. 그 안에는 여성도, 젖먹이도 있었다." (121p)

 

인민군에 협력한 사람을 경찰이나 자위대들이 체포하거나 구금한 후 구타하거나 처형했다. 그러나 특정한 기준과 원칙 없이 소문으로만 실적을 올리기 위해서 거짓으로 잡아들이기도 했다. 인민군이 점령했을 때 고향에 남아 일을 계속하던 사람도 처형 대상이었다. 인민군에게 밥만 줘도, 그저 집에 들어오게 해줘도 죽이던 시절에 가족에게도 환영받지 못했다. 자신을 제외한 가족들이 몰살당하는 것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아이들도 예외는 아니었다. 일가족을 몰살했다. 관련 기사에서도 밝혀지지만 땅속엔 여성과 아이들의 시신이 많았다.

 

 설화산에 젊은 어머니와 아이들의 울부짖는 소리

 [학살된 사람들, 남겨진 사람들⑩ ] “충남 아산시 배방읍(설화산)폐광 유해발굴장으로” - 단디뉴스


어린 홍세화는 아버지에게 묻는다.

"왜 그때 동네 아이들까지 싹 다 죽였을까요?"

아버지는 구원舊怨과 텃세와 이권을 이야기했다. 오랫동안 묵혀왔던 사적 감정, 가문끼리의 기싸움 그리고 가구 수에 비해 좁은 땅. 숨기고 있던 알력이 이데올로기에 대립과 전쟁이라는 기회를 틈타 순식간에 타올랐다고 했다. 단순한 복수가 아니었다. 상대 집안 씨를 말려야 했다. 그래야 그 집과 땅을 통째로 차지할 수 있었으니까.

222p

동서양을 막론하고 혼란의 시기에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는 시도는 어디에나 존재했다. 서양에서는 아산과 같은 모습이 근대의 마녀사냥과 다르지 않았다. 타인의 재산을 가져가기 위해서 없는 죄를 만들어내고 타인의 씨를 말리는 것. 당시 권력을 쥐고 있던 이들에게 부역해 인간의 잔혹한 면을 여김 없이 드러내는 자들의 모습.

 

이들의 이야기를 드러내는 데는 박선주 교수의 영향이 컸다. 박선주는 어릴 적 합기도를 좋아해 청와대 경호실장까지 되지만 버클리대 유학을 가게 되고 하월 교수 아래서 체질인류학을 공부한다. 뼈에 관심을 갖게 되고 의대 수업을 들으며 직접 뼈를 구하러 다니기까지 했다. 그렇게 동물을 포함한 인간의 뼈까지 다양한 뼈에 대해 공부를 하게 된다. 2000년 한국전쟁 50년을 맞아 유해발굴 산업에 참여하게 되면서 강제징용 민간인 희생자, 국군 전사자 발굴, 한국전쟁 민간인 희생자 발굴을 이어나간다. 대전 골령골 단양군 곡계굴 서울 강북구 우이동 낙동강 전선지역 고양시 금정 등등 안 가본 곳이 없다. 그는 발굴 현장에서 뼈를 통해 수많은 피해자의 사연, 고통의 흔적과 마주했다.

 

현재 발굴과 관련한 법 제정이 미비한 현실이다. 피해자의 가족도 나이가 들거나 세상을 떠났다. 시민 발굴단이 활발하게 참여하기도 어려워졌고, 뼈를 발견하면 누구의 것인지 모르기 때문에 먼저 발굴을 해야 하지만, 국군 수사와 민간 수사와 협력하지 못하는 현실이다. 아직도 유가족에게 돌아가지 못한 사람들이 있음을, 영문도 모른 채 죽어야 했던 수많은 사람들이 아직 땅속에 묻혀있음을, 인간의 탐욕과 잔혹함은 언제나 존재함을, 그들의 이야기를 드러내 그들의 존엄을 되찾을 수 있음을 '발굴'이라는 행위를 통해 보여준다.

 

당시 부역은 어떤 행위가 협력한 것인지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이 법률적으로 제시되지 않았다. 이승만은 긴급명령을 내린다."단 한 번의 재판만으로 증거 설명도 생략한 채 부역 혐의자에게 사형 또는 중형을 내릴 수 있어서 적극 활용되었다."(360p) "긴급명령 제9호 비상시 향토방위령은 우익 청년단체를 중심으로 구성된 마을 단위의 자위대가 인민군과 공비, "기타 이에 협력하는 자"를 체포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전시 민간단체에게 '체포' 권한을 부여한 것이다. 자위대나 치안대가 임의적으로 '즉결처형' 형식으로 대량 학살할 수 있었던 건 향토방위령을 제멋대로 활용했기 때문이다." (361p)

 

아산의 모습을 보면 국가 권력, 국가 폭력을 어떻게 다뤄야 하는지 생각하게 한다. 학살을 옹호하는 이들은 어쩔 수 없었다거나 북한을 편이었음을 색출한 것이라 말하지만, 그렇게 보수에서 좋아하는 법과 원칙은 어디로 갔을까 물을 수밖에 없다. 만약 전시에 사람을 마구 대할뿐더러 목숨까지 결정하는 자격을 갖고 있다면, 그저 의심만으로 사람을 잡아 죽일 수 있다면, 언제 어느 때라도 합리적이라 여기면 사람의 목숨을 하찮게 여길 수 있다는 말 아닌가. 군과 경찰의 지시와 집행으로 민간이 학살이 이루어진다면 누가 이 국가를 믿겠는가. 아직도 땅속에는 수많은 억울한 이야기들이 묻혀있고, 어딘가로 흘러가 영영 찾을 수 없게 되기도 했다. 전쟁은 인간의 잔혹성을 드러낸다. 인간 사이의 불신을 만들어내고, 살육의 쾌락을 느끼게 만들어 인간 정신을 오염시킨다. 양심 없는 자들의 무대가 되게 만든다.

 

이 책의 출간이 한국전쟁과 폭력 연구자들의 분발을 촉구하고 대중들의 관심을 환기할 수 있기를, 공공역사와 평화사의 관점에서 쓴 한국전쟁이 이야기를 대표하는 책이 되길 바란다. 마지막으로 겨울의 이야기를 마치며 봄을 기다리는 저자의 바람이 이루어지길 간절히 소망한다.

368p


한겨레출판에게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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