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객모독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06
페터 한트케 지음, 윤용호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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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자는 극이 시작되기 전 '배우를 위한 규칙들'을 언급한다.

그 규칙엔 롤링 스톤즈의 노래를 듣는 것, 비틀스 영화를 자세히 관찰하는 것이 있다.

이것은 시대를 파괴할 작품이 시작된다는 선언이다.


여기서는 연극이 무엇인지를 다루지는 않습니다. 여기서는 여러분의 기대가 충족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호기심은 만족스럽게 채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어떠한 불꽃도 우리로부터 여러분에게 전달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긴장 때문에 그럴 여유도 없을 것입니다. 이 널빤지 무대가 바로 세상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이 널빤지는 세상에 속합니다. 이 널빤지는 우리가 그 위에 서는 것을 도와줍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의 세계입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울타리 밖 구경꾼들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주제입니다. 여러분은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우리 언어의 중심입니다. 22p


우리는 여러분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않습니다. 어떠한 대화도 시작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대화하지 않습니다. 25p


극이 시작되고, 배우의 가차없는 독백이 쏟아진다.

이것은 대화가 아니다. 그저 언어가 쏟아지는 극이다. 관객과 소통하지 않는다. 심지어 모욕적인 말들을 쏟아낸다. 대화의 실패가 아닌, 고의적인 대화의 단절이다. 언어 전달은 시작부터 단절을 향해 있다. 관객을 배려하는 듯하지만 어디까지나 배우의 전달만이 존재하는 상황이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아니, 처음부터 극이라는 것에 의미가 있었을까?


화자는 관객과 배우의 관계에 대해서 언급한다"여러분은 의미가 없습니다" (21p), "여러분이 주제입니다, 여러분은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우리 언어의 중심입니다."(22p), "여러분은 우리 언어극의 객체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또한 주체입니다"(30p)라고 말하며 수동성과 능동성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다. 흥미로운 점은 여러분은 그 무엇이면서 그 무엇도 아니라는 것이 극장이라는 '수동적 형태'에서 전달된다는 것이다. 또한 '당신의 권리'와 '능력'을 말해주지만 그것을 수동적으로 앉아 듣고 있다는 형식은 주체성이 경험되지 않고 그저 수동적으로 전달되는 모순을 보여준다.


수동성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수동성'에 이어지는 관객의 '무능력'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여러분은 어떤 형태도 볼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암시도 볼 수 없습니다." (22p)에서 볼 수 있듯 "~할 수 없습니다"라는, '무능력'의 주문이 이어진다. 공간도 소음도 빛도 보고 듣지 못한다. 기대의 충족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관객들은 무언가를 기대하며 극장에 왔고, 객석에 앉았지만 그 기대는 충족되지 않는다. 더 나아가 "~할 것이라며" 관객의 존재까지 화자가 설정하고 있다. 행동한다고, 존재한다고 말하기 때문에 존재하거나 행동하는 것인가? 그리고 '존재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실존주의적인 논의로 이어진다.


자 그렇다면, 이 극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여러분은 언어의 희극을 즐기는 것입니다. 25p


화자는 그저 언어의 희극을 즐기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언어 자체가 어떤 희극성을 갖는지 생각해 보라는 말이다. 더불어 비극이 아닌 '희극'이라는 표현에서 이 언어의 특징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라는 의미로 해석할 할 수 있다.

화자의 말에선 크게 두 가지 특징이 나타난다. 첫째로, 언어의 무의미의 대잔치가 벌어진다는 점이다. 둘째로, 상반된 가치의 충돌이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말들은 단순히 '개소리'로 치부돼야 할 것인가? 이는 '언어'의 불완전성과 무의식, 변증법적 사고를 나타내는 의도된 발화다. 이 불안함, 개소리적 특징은 한트케 작품의 특징이며 의도적인 것이다.


여러분은 이미 나름대로 생각했을 겁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무엇을 거부하는지 아셨을 겁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반복하고 있다는 것도 아셨을 겁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항변하고 있다는 것도 아셨을 겁니다. 여러분은 이 작품이 연극에 대한 토론이라는 것도 아셨을 겁니다. 여러분은 이 작품의 변증법적 구조도 아셨을 겁니다. 여러분은 확고한 반항 정신도 아셨을 겁니다. 여러분은 작품 의도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인식하셨을 겁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무엇보다도 거부한다는 것을 아셨을 겁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반복한다는 것을 아셨을 겁니다. 여러분은 아셨을 겁니다. 여러분은 꿰뚫어 보셨을 겁니다. 여러분은 아직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작품의 변증법적 구조를 아직 꿰뚫어 보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알아차립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너무 느립니다. 이제야 여러분은 우리 속셈을 아셨습니다. 31p


먼저 상반된  변증법적 구조에 대해서는 많은 독자들이 이해 했을 것이다. 모순과 대립의 발화가 계속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합으로 나아가야 할까? 그러니까, 이 대립적 구도에서 어디로 나아가야 하냐는 의문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저 관객과 배우의 관계에 대해서, 수동-능동의 틀을 갖고 노는 재미에서 멈춰야 할까? 


배우는 관객의 생각이 너무 느리다 말한다. 말이 먼저 오고 사고는 그 뒤에 혹은, 의미보다 언어가 먼저 나타난다는 것이다. 반복되는 메시지인, 언어의 무차별성과 의미 전달의 붕괴다. "여러분은 존재 가치가 없습니다."(32p)라며 과한 모독을 하는데, 이는 깊은 비판이라기보다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하라는 주문이다. '가벼운 형식'을 빌려서 말하고 있다.


"시간은 여러분의 순간에 따라 측정됩니다."(33p), "시간은 이미 지나가고 있습니다. 시간은 반복되지 않습니다."(34p), "우리는 시간의 흐름에 대해 말합니다. 우리는 가장하지 않습니다." (35p) 여러분은 무엇인가가 됩니다. (...) 여러분은 관객입니다. (...) 여러분은 참여할 수 있습니다. (37p)


시간은 반복되지 않지만 관객의 순간에 따라 측정되며, 극 속에서 관객은 무엇인가가 된다 말한다. 앞서 관객의 수동성을 강조했지만, 관객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극장은, 특히 배우가 말하고 있는 공간은 결코 세계가 아니며 질서도 없다. 그러나 배우는 살아 움직이기도 한다. 무한한 생명을 지니는 원천이다. 그러니까 결국 배우에게서 무언가가 시작된다는 의미다. 무대는 생명이 없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배우로부터 가능성이 피어난다.


화자는 예술을 감상하는 것은 앉아있는 사람에게 더 어울리며, 모두가 똑같아져 몰입해 시간과 자신 스스로도 잊게 되는 순간이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 이후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서있는 상태에서 여러분은 야유하는 사람의 역할을 더 잘할 수 있었을 겁니다."(39p) 주체와 생각하는 주체의 구분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야유는, 부정적 발화는 뒤에서 언급하듯 진실포착의 가능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분과 함께 연기했던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의 세계는 이곳에서 항상 뒤따라오는 세계였습니다."(49p) 그러나 관객과 배우는 함께 연극 되지 않는다. 언어는 먼저 앞서 나가고, 뒤틀린다. 


그런데, 앉아서 예술을 감상하며 몰입해 똑같아지는 경험을 하는 관객들은 그저 수동적으로, 부정적으로 바라봐야 할까? 일체감, 통일감은 수동성의 부정적 의미만을 갖는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화자는 시간을 초월한 몰입의 세계에서 일체감을 경험하고 나와 개인으로 서야 할 필요를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관객이 두 시간대에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한다.(40p) 연극이 현실을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다.


"겉보기에는 별 의미가 없었던 많은 연극들에는 사실은 숨은 의미가 있었습니다. (...) 대화나 몸짓, 소도구 사이엔 항상 어떤 저의가 있었고, 그것은 여러분에게 뭔가 의미를 표현하려고 애썼습니다. 항상 연극들은 어떤 애매한 의미나 불확실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습니다."(49p) "우리는 오직 말만 하고 시간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여러분에게 아무것도 생생하게 묘사할 수 없고 또 아무것도 보여줄 수가 없습니다."(53p)


시간 속에서 전해지는 언어로는, 언어의 '모습'으로는 어떤 진실을 보여줄 수 있다. 상연할 수 없는 배우는 그저 말만 할 수 있다. 현실을 보여주지 못하는 언어는 죽어있을 뿐이라는 의미다. "우리는 자신을 세상에서 떼어낼 수 없습니다." (54p) 하지만 그렇다. 우리는 현실과 엮여있다. 더 아나가 연극은 세상과 떨어질 수 없다는 의미다. 현실을 바꾸는 촉매제가 되어야 함을 암시한다. 혹은 배우는 애초에 시간을 벗어나지 못했기에, 유일하게 두 시간에 걸칠 수 있는 관객이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음을, 변화는 관객에게 달려있음을 암시한다. 언어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관객은 의미를 찾아야 한다. 능동과 수동의 상태와 통일감과 몰입의 세계를 직접 겪으며 나아가야 한다. 단지 앉아서 죽어있는 연극을 보는 수동적인 통일감이 아니라. 연극을 보고 난 뒤 관객은 생각을 하고 움직이게 '될 것이다.' 연극에 몰두한 통일체였다가 흩어지는 개인이 된다.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


여러분은 곧 움직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손뼉을 쳐야겠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점차 현실 세계로 돌아올 것입니다. ... 그리되면 여러분은 더 이상 연극에 몰두했던 통일체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한 장소에서 여러 다른 장소들로 흩어질 겁니다. 56p


자 이제 한트케의 삶과 시대를 말해주는, 옮긴이 윤용호의 도움을 조금 받아보자.

<관객모독>이 1966년에 완성되어 초연되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당대는 서구에서 변화의 물결이 일던 시기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쓰자"는 운동으로, 당대의 인기를 얻었던 47그룹을 오히려 서술 불능자라고 비판하며 논란에 올랐던 페터 한트케의 <관객모독>은 그의 젊음, 주장의 새로움, 비판의 논란과 함께 인기를 얻었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생각했듯 <관객모독>을 무대에 직접 올려 성공할 거라 예측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한편으론 <관객모독>의 흥행에서 현대사회의 모순을 볼 수 있다. 인간은 현실을 잊으며 비판에 들어가길 시도한다. 비판은 결국 부르주아의 산물이자 그 태도적 표현일 수밖에 없는 그 한계임을 생각해 보자. 관객은 이런 구도에서 한 번 더 모독 혹은 모욕을 받으며 스스로를 비판의 무대 한 가운데에 세운다. 그렇기에 이 개소리(?)의 향연으로 이루어진 작품이 발표되었을 때는 상당한 돌풍을 일으켰을 것이며, 이 양식이 현대 시와 같은 작품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고려할 때 그의 작품은 나름대로 가치를 갖지 않을까. 어쨌든 한 세계를 부수고 나오지 않았는가.


"한트케가 젊은 날 심취했던" 형식주의와 구조주의의 영향과 소쉬르의 언어학 이론에 기반을 두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 작품은 소쉬르의 주요 주장, 문자나 음성을 말하는 기표와 그것이 가리키고 있는 의미 내용인 기의의 관계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 둘의 관계는 필연적이지 않고 자의적인데, 그렇다면 단어는 의미를 확실하게 표현할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기표는 기표 간 차이에 의해서 의미가 도출되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배우와 관객의 관계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아무것도 묘사하지 않으며, 우리는 우리 자신일 뿐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연기해 본 적이 없습니다." (53p)라는 말은 기표의 특징, 진실과 진리를 내포하지 않은 단어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우리는 저절로 움직이는 소도구들이 아닙니다. (...) 우리는 우리입니다. 우리는 작가의 대변자입니다. (...) 우리 의견이 작가의 의견과 일치할 필요는 없습니다."(24p)라는 말은 언어는 짐짓 의미와 연결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갈등 속에 있지만, 언어의 자의적 특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사건이나 개인의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서술해서 어떤 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단어와 문장만으로 작품을 구성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한트케는 언어극이라 부른다. 한트케가 거부한 기존의 연극은 구체적으로 현실을 서술하며, 언어극과 대비된다. 사실극, 또는 동독에서 브레히트가 노동자들을 계몽하기 위한 공연 기법으로 주장했던 서사극을 그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76p



우리는 오직 언어로만 표현합니다. 41p


 화자는 언어로만 표현한다. 언어의 한계를 말하고 있지만, 동시에 사회와 연결된 언어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화자의 말들은 리듬감을 느끼게 하며 쉽게 의미를 놓치게 하고, 사람의 혼을 빼놓기도 한다. 현대사회가 무의미의 축제로서 일정한 리듬을 통해 정신을 빼놓지만, 그것 자체를 즐거움으로 느끼는 사회가 아니던가. 흘러가는 언어와 그럴듯한 언어, 표현할 뿐 의미를 갖거나 포착하지 못하는 사회와 마주해있다. 이것이 희극이자 비극일 것이다.


"여러분은 의미가 없습니다. 여러분에겐 말이 건네졌습니다. 여러분에겐 말이 건네질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말이 건네지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지루해질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리에게 공기 같은 존재하는 아닙니다. 여러분은 그곳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는 바로 여러분이 있기 때문에 말하는 것입니다."(28p) 언어는 의미 전달에 실패하고 그 자체로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말이 건네야만 하는 인간 세상의 모순을 동시에 말하고 있다. 존재하고 있기에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언어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한트케 식으로 말하면 먼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당신은 들 숨 날숨을 쉬고 있습니다. 당신은 눈을 3초마다 꿈뻑거립니다. 당신은 생각하는 걸 생각합니다. 당신은 당신의 행동들을 하나하나 생각할 것입니다."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숨 쉬는 것을, 눈을 감는 것을 의식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처럼 무의식적인 것을 의식하게 해주는 것, 간혹 무의식이나 진실을 발견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의미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여러분에게 말하기 때문에 여러분은 자신을 의식할 수 있습니다." (42p)


좀 더 넓게 봐서<관객모독>의 전체 틀을 언어 체계에 빗댈 수 있다. 관객은 발화자고 배우는 단어다. 혹은 작가가 발화자고 배우가 단어라는 틀로 생각해 보자. 관객들은 기대하며 연극을 보러 오지만 기대가 충족되지 않는다. 미시적인 측면과 거시적인 측면 모두에서 바라본다면, 극의 전개와 소쉬르의 주장이 공명한다. 화자는 당당하게 기대가 충족되지 않을 것이라 선언하는데, 이는 언어의 한계를 알면서도 사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드러내기도 한다. 화자의 발언 중 무능력, 기대의 불충족의 특징에서는 정신분석 이론이 엿보인다. 작품의 변증법적 구도는 현실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 연극의 역할을 내비치고, 양가적인 심리적 감정을 인식하게 하며, 그것들을 그대로 내뱉음(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으로써 치유될 수 있다거나 진실을 포착할 수 있다는 함의를 갖기도 한다. 


너희들은 뛰어난 연기자들이다. 멍청하게 서서 구경하는 꼴통들아, 조국도 없는 불쌍한 작자들아, 사이비 혁명가들아, 찌꺼기 같은 작자들아, 자기 나라를 헐뜯는 작자들아, 내면세 계로 이민 간 작자들아, 패배주의자들아, 수정주의자들아, 보복주의자들아, 군국주의자들아, 평화주의자들아, 파시스트들아, 주지주의자들아, 허무주의자들아, 개인주의자들아, 집단주의자들아, 정치적인 미성년자들아, 훼방꾼들아, 인기나 노리는 작자들아, 반민주주의자들아, 자학이나 일삼는 작자들아, 박수나 구걸하는 작자들아, 대홍수 이전에나 있었을 괴물 같은 작자들아, 돈에 팔려 박수나 치는 작자들아, 파벌이나 일삼는 작자들아, 천민들아, 돼지처럼 탐욕스러운 작자들아, 노랑이들아, 극빈자들아, 불평분자들아, 아첨꾼들아, 지적(HnB9)인 프롤레타리아들아, 허풍쟁이들아, 아무것도 아닌 작자들아, 쓸모없는 작자들아. 61-62p


극 말미에 욕설과 칭찬, 금기의 단어가 쏟아진다. 욕의 이미지, 자극, 파괴, 부정, 갈등들이 쏟아진다. 무수한 경계들과 모순들, 무의식을 무수히 내뱉는다. 정확히 표현할 수 있을 때까지. 정확히 모욕할 수 있을 때까지. 혹은 그저 모욕하고 싶은 마음이 해소될 때까지. 모든 대상들이 부정적으로 표현되지만, 책을 읽는 독자 혹은 관객은 이 단어들 중 어떤 하나에 속할 것이다. 동시에 이 모든 것들은 인간 안에 있는 발화의 욕망으로, 독자 혹은 관객들을 겨냥하고 있다. '너'의 이야기가 아니면서도 '너'의 이야기임을 말하는듯하다. 이 작품은 머릿말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인간 행위의 시작은 언어와 함께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부정성과 어긋남(단어와 뜻의)은 당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환영받았다. 모독이 환영이 되는 순간이다.

여러분은 여기서 환영받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63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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압축 소멸 사회 - 압축 성장 대한민국은 왜 복합 위기의 길로 들어섰나
이관후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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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출생, 고령화, 연금 고갈, 제조업 쇠락, 극단적 정치 갈등... 우리나라의 현실을 이야기하다 보면 부정적인 상황을 쏟아내며 이내 절망적인 미래를 그린다. 우리는 이 난관을 헤쳐나갈 수 있을까. 정치학자 이관후는 우리나라의 발전과 현재 상황을 정리하며 우리나라가 스스로 소멸하길 선택했다고 말한다. 사람이 많이 모인 수도권은 오히려 출생률이 낮고, 직업적으로 안정적인 세종마저 출생률이 감소했기 때문에 더더욱 그렇다.

경쟁, 그리고 경쟁. 우리나라가 경쟁 사회인 것은 누구나 다 알 것이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단순한 경쟁 사회보다 조금 다른 특징을 갖고 있다. 저자는 통계를 이용해 경쟁에서 이긴 10% 조차 경쟁이 지속되기를 원하지 않는다는 것에 주목한다. 승자 패자 모두가 만족하지 못하는 상황인데, 우리는 어쩔 수 없다는 인식 속에서 우왕좌왕하며 계속해서 과도한 경쟁을 하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특히 정부가 수십조원을 투자하고 있는 저출생 대책에 대해 비판한다. 저자는 저출생 자체를 문제를 삼아 해결을 모색하는 것이 잘못되었다 말한다. 출산이 아니라 지금 여기 사는 청년을 행복하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정치의 소멸은 다음 세 가지 중 하나일 것입니다. 누구도 국가의 미래에 대한 비전을 갖고 있지 않은 경우, 경쟁해야 할 정당들 사이에서 문제 해결의 비전이나 방식에서 별 차이가 없는 경우, 그리고 정치적 주체들이 권력 투쟁이만 매몰되어 제대로 된 정책 경쟁이나 협력이 일어나지 않는 경우 말입니다. 78p


2부의 제목 절망을 부추기는 사회, 위기를 방치하는 정치에서 알 수 있듯, 저자는 우리 정치와 사회가 문제 해결이 아닌, 절망을 부추기고 위기를 방치하는 모습을 비판한다. 저자는 우리나라 사법적인 특징을 가해자를 악마화하는데 그치며, 근본적인 문제는 들여다보지 않는 것이라 말한다. 그 예시로 영아 살해의 모든 책임을 개인에게 돌리고 형벌을 강화하는 방법을 선택하는 것을 들고 있다. 게다가 현재의 법무부와 여당은 엄벌주의적 입장을 갖고 있기에 우리는 진정한 해결을 추구하는 자세를 갖고 있지 않음을, 특히 여성들의 문제에 대해 귀를 막고 있는 사회를 비판한다. 저자는 설문 자료를 통해 모두가 여성이 일하기를 원하고 육아 때문에 그것이 힘들다는 점도 알고 있지만 많은 부모 세대와 남성은 이 부담을 고스란히 여성이 지길 원하고 있는 모습을 보여주는데, 이는 사람들의 인식의 한계이며 개혁해야 할 대상이기도 하지만 정부가 제도적인 노력을 통해 이런 관념을 변화하는 것 또한 중요함을 보여준다.

지방의 위기, 지방 소멸의 위기다. 우리는 지방이 점점 소멸한다는 뉴스를 접하지만, 지방에 사는 사람이 아니라면 와닿지 않는다. 2024년 수도권에만 2,600만 명 이상이 거주한다. 그러니까 한국 국민 절반 정도는 지방 소멸에 둔감할 가능성이 높다는 의미다. 저자는 지방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한다. "지방에 좋은 일자리가 없는 것은 기업이 없기 때문입니다.", "지방 대학의 경쟁력이 약하다면 그것은 그 대학 구성원들이 책임이 아니라 그 대학이 그냥 지방에 있어서겠지요." (96p) 지방에 있는 것이 죄가 되는 세상이다. 그렇다고 우리는 지방 소멸 문제를 해결하려고 어떤 노력을 하고 있을까?

대체로 '지역 특성화'를 통해 지역을 활성화시키려고 하는데, 저자는 막대한 예산을 들여서 지방을 특별하게 만드는 것보다 의료나 복지 같은 필수 요소를 충족시키는 것을 더욱 중요시한다. 한편으로는 비난받고 있는 잼버리나 가덕도 신공항 문제 같은 지방 사업에 대해 조금 자세히 살펴볼 필요가 있음을 말한다. 수도권 사람들은 그저 잘못된 정책이라고 비난하지만 개발은 지방 사람들에게 매우 중요한 문제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수도권에 몰려있는 상황에서 지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지방 사람들에겐 지역 산업 하나하나가 희망의 빛으로 여겨질 수 있다. 물론 그만큼 방향이 잘못될 수도 있지만 말이다. 지방은 어느새 수도권에 착취되는 모습으로 변했다. 특히 전력은 지방에서 생산하고 대부분의 전력은 수도권에서 소비한다. 폐기물, 소각장 각종 처리장 또한 지방으로 외주화된 현실이다. 이에 대한 해결책으로 내년부터 전기차등요금제를 실시할 것인데, 어떤 현실적 효과가 나는지도 지켜봐야 할 것이다.

저자는 현재 정당들이 민주주의의 룰을 어기는 현실을 꼬집는다. 정당 민주주의는 사라졌고, 출생률만 아니라 정치 또한 사라지고 있음을 말한다. 현재는 특정한 정치인을 중심으로 정치 세력이 형성되는 팬덤 정치가 특징임을 말하는데, 사실 이런 팬덤 정치의 모습은 과거부터 자연스러운 것이기도 하지만, 계파가 순전히 권력 획득을 위한 패거리 집단이 되었음을 비판한다. 저자는 해결을 모색하며 조금 쉬워 보이는 말로 '언론과 시민들이 계파정치에 대한 판단을 제대로 해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지만, 정말로 언론과 시민의 의식이 더 나은 사회를 만드는 것이 사실이기도 하다.

저자는 정부가 법치주의를 오독하고 오용하고 있음을 비판하며 현 정부의 특징으로 '검사+관료체제'와 '사법 관료 포퓰리즘 기술'을 말한다. 공무원들은 상부에서 시킨 일을 하면 책임을 뒤집어쓰기 일쑤고, 검열을 하고 보수적인 태도를 보이기 때문에 공무원들은 그저 하는척하는 수밖에 없고 적극적 행정을 하지 않는다. 지금은 민주적 통치의 시대이지만 '반국가 세력'의 단어를 쓰면서 사법 관료 포퓰리즘 기술은 효과적으로 발휘할 수 없다. 저자는 현재 우리나라를 포함해 전 세계가 '기후'와 같은 비교적 새로운 의제들을 중요시하고 있는 시기이며 유럽은 빠르게 변화하고 있는데, 검찰로 가득한 우리나라가 잘 대응할 수 있을지 걱정한다.


한 가지 실마리는 윤석열 정부가 앞선 두 번의 보수 정부와 달리 박정희 신화를 폐기했다는 것입니다. 이명박, 박근혜 정부에서 보수의 복고적 비전은 박정희였습니다. 그런데 이 정부는 박정희를 버리고 보수의 상징으로 이승만을 앞세웠습니다. 그것은 사실 이 정부의 여러 정책 기조와 잘 맞아떨어집니다 194p


나는 저자의 분석에 공감했다. 윤석열 정부는 철이 지나도 한참 지난, 박정희도 아니라 이승만의 비전을 따르고 있다는 것이다. 그것도 2020년대에. 이미 무덤에 묻힌 반공주의를 꺼내들며 경제적 개발도 아닌, 그저 '자유'만 외치고 있는데, 이는 정치적 자유주의가 아니라, 시장적 자유주의만을 의미하는 것으로 보인다. 그래서 경제를 포기하면서까지 이념적 갈등에 불을 지피는 것이다. 한편으로 보면 윤석열 대통령 스스로 보이는 모습도 이승만이랑 비슷하다. 돌발적인 행동을 하면서 한미 동맹의 가치를 오히려 훼손하고 절대 왕권의 욕심을 부리는 모습 말이다. 정부는 반공적 두려움을 자극하지만 북한이 침략해 우리나라가 망하는 게 빠를까, 우리 스스로가 소멸해 망하는 게 빠를까.



자유는 중요합니다. 그러나 이 정부에서 보여 주는 '자유'의 가치는 자유주의라고 말하기에도 많이 부족한 수준입니다. 취임식에서 언급한 사회적 자유, 공정으로서의 자유는 온데간데없고, 1950년대 냉전 시기의 반공 자유주의만 남았습니다. 198p


진보의 정치적 모색을 위해 몰락한 정의당과 그 대안으로 뽑힌 조국혁신당의 사례를 돌아본다. 저자는"그러나 그것이 이전과는 달리 처음부터 충분히 정치적이어야 하고, 대중적이어야 하며, 현실의 문제에 대해 당위가 아니라 해답을 제시할 수 이어야 한다는 것."이라며 진보정당을 비판하는데, 어느 정도는 동감한다. 진보적인 정당일수록 의제를 더욱 확실하게 제시하며 더욱 날카롭게 나아가야 한다. 그래서 더더욱 공부하는 것이 필요하다. 단순히 정체성 정치를 내세우며 독불장군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 아니라.


이 재앙을 막을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은 '정치'에 있습니다. 저는 정치란 정치 경제 사회적 문제에 직면한 공동체에서 갈등의 표출이 폭력적인 수준으로 격화되는 것을 막고, 최대한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사람들을 설득하고 합의를 이끌어 내어 원만하게 문제를 해결하는 하나의 방식이라고 생각합니다. 단순히 좋게좋게 넘어가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문제를 해결하는 것입니다. 문제를 방지하고 해결할 비전과 대안을 잘 이끌어 내는 것이 정치의 역할입니다. 더 많은 사람들이 동의하고 협력할수록 문제가 해결될 가능성도 높습니다. 이런 정치가 잘 이루어지려면 좋은 제도가 있어야 하고, 그 제도들을 잘 운영할 줄 아는 정치인과 시민들이 필요합니다. 그렇지 못하면 사회는 문제를 해결하지도, 대비하지도 못하게 됩니다. 운이 나쁘면 파멸을 막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16p


저는 희망도 거기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한 사회가 소멸할 것인가 아니면 버텨 낼 것인가, 그래서 자신의 이야기를 지속할 수 있을 것인가의 여부는, 그들이 어떤 세계를 창조해 내려고 하는가의 의지에 달려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 의지는 서로에 대한 믿음과 사랑에서 나옵니다. 우리가 소멸을 목전에 둔 지금, 인류의 문명사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써 보겠다고 마음먹는다면, 그렇게 할 만큼 서로를 사랑하고 의지하고 믿는다면 저는 이 소멸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렇지 않다고 이 공동체에 그럴 만한 가치가 없다고 생각한다면, 우리는 어떤 시도도 해 볼 수 없을 것입니다. 253p


한겨레 출판에게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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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식 동남아 - 24가지 요리로 배우는 동남아시아의 역사와 문화
현시내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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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남아 음식 하면 떠오르는 것이 무엇일까. 아마도 쌀국수나 분짜, 짜조, 똠얌꿍, 나시고렝, 팟타이 정도일 것이다. 동남아시아의 음식은 우리나라에 스며들어 한국 현지화되어 있을 만큼 세계로 뻗어갔다. 동남아 연구교수인 현시내가 소개하는 동남아시아의 음식을 들여다보면 해당 지역의 역사가 보이는데, 역동적인 역사만큼 정말로 다양한 음식들이 만들어졌다. 모든 음식들은 역사적 상황의 산물이기에 음식을 보는 것은 곧 그 나라의 역사, 문화를 보는 것과 같다.

책에서 소개된 가장 흥미로운 음식은 렛펫이라는 발효한 찻잎이다. 렛펫은 법원에서 결정에 따르겠다는 뜻으로 먹거나, 상견례 때 신랑이 신부 집에 가져가 결혼식이 결정되면 나누어 먹거나, 마을 행사에서 먹는 등 미얀마 사회의 상생과 공존을 상징한다. 렛펫은 음료로 마시기도 하고 음식 재료로도 쓰이는 음식이라는 특징을 갖고 있다. 음식이 곧 사회의 중요한 문화적 상징이 될 수 있음을 느낄 수 있다.

동남아시아 음식의 특징은 다양한 인구 구조와 문화가 합쳐져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인도네시아 샐러드 가도가도, 페낭의 생선이 들어간 국수인 아쌈 락사의 경우가 그렇다. 여러 문화를 가로지르며 지역적인 재료를 통해 좋은 특징을 합치니, 맛이 없을 수가 없다.(아쌈 락사는 스트리트 푸트 파이터 2라는 프로그램에서 백종원이 아주 맛있게 먹었다) 또 다른 동남아시아 음식의 특징은 새콤달콤한 맛이 많다는 것이다. 지역에서 쉽게 얻을 수 있는 코코넛 밀크, 고추, 고수와 같은 재료들로 만드는 음식들은 미각적 상상을 자극한다.

음식은 시대적 상황에 따라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마치 우리나라의 부대찌개와 홍어처럼. 또 서양의 양배추 수프처럼. 라오스에는 손쉽게 먹을 수 있는 숩 너마이가 있다. 이런 음식들을 보면 사람 사는 모습이 대게 비슷하다는 생각이 든다. 음식은 지역과 역사를 반영하는 문화로 해당 지역의 특산물과 문화가 무엇인지 알 수 있다. 채소를 소스에 비비는 것은 우리나라의 겉절이랑 비슷하고. 미얀마의 모힝가는 우리나라의 잔치국수 같은 음식이다. 사이공에서는 노동자를 위해  가격이 저렴한 부서진 쌀인 "떰'으로 밥을 지어 각종 재료와 피시 소스로 간을 해서 먹었다. 알갱이가 작아서 소화가 잘되고 가격이 저렴해서 국민 음식이 되었다. 이것이 우리가 알고 있는 "껌떰"이다.

우리가 나름 잘 알고 있는 태국의 볶음면인 팟타이는 국가가 주도해 유명해진 음식이다.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피분 송크람은 문화 명령을 내려 근대 민족 국가를 만드는 데 집중하는 과정에서 볶음면인 팟타이를 활용했다. 특히 태평양 전쟁 이후 쌀 부족 문제로 인해 면 소비를 장려하며 팟타이는 태국인의 정체성이 되었다. 당대 문학작품에는 국수를 질려 하는 주인공의 모습도 나올 정도다.

동남아 음식은 인도보다 중국의 영향을 더 크게 받았다고 할 수 있는데, 특히 정치 경제를 포함해 음식문화도 화교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그러나 동남아시아인들은 화교 자본의 영향이 커지는 것에 대해 저항하기도 하며 자신들의 정체성을 지켜나갔다. 이런 사회 역사적 배경을 잘 보여준 것이 '인도미'다. 수하르토가 인도미를 생산하는 살림그룹을 전폭적으로 지원해 한때는 gdp의 10%를 차지할 정도의 규모로 성장했다. 지금은 인도미의 라면시장 점유율이 떨어졌지만 지금도 상당한 수준이다.


이처럼 음식은 정치 경제적인 것이기도 하지만, 민족주의적으로 국가 간 정치적 메시지로 이용되기도 한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수비수인 리오 퍼디난드가 싱가포르에서 나시고렝 사진을 트위터에 올리면서 로컬 음식을 먹는다고 했는데, 인도네시아 사람들이 나시고렝은 자신들의 것이라고 반발한다. 이렇게 나시고렝 논쟁이 시작된 것이다. 사실 나시고렝은 볶음밥으로서 동남아시아, 그리고 중국이 어느 정도 공유하는 맛이지만 나시고렝의 인기가 많기 때문에 논쟁이 심화되었다. '음식 민족주의'문제다. "아이러니하게도 음식 문화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경험하는 배타적 민족주의나 다문화주의의 중심에 있다." 말레이시아로부터 독립한 싱가포르는 문화전쟁, 특히 음식 전쟁을 시작했다. 하지만 저자는 하이난의 음식인 치킨라이스를 말레이시아와 싱가포르가 자신들의 음식이라고 주장하고 있는 상황을 비판한다. 동남아 전체적으로 공유하고 있던 음식문화를 한 국가가 독점할 수 있는 것일까?


동남아시아 음식은 중국 혹은 인도에 영향을 받았다고 할 수 있는데, 그렇다고 중국과 인도의 아류라고 볼 순 없다. 동남아시아의 방식대로 조리법을 바꿨으며 그 가짓수만 수십 개가 넘기 때문이다. 특히 인도와 동남아시아의 관계는 종교적인 영향이 있었는데, 이를 잘 보여주는 것이 홀리바질이다. 인도의 힌두교가 태국 불교에 영향을 주면서 바질의 종류 중 하나인 홀리 바질이 인도에서 동남아시아로 유입된다. 홀리 바질은 힌두교의 삼대 주신인 비슈누의 아내였던 락슈미 여신을 상징해 신성하게 여겨진다. 태국에서는 이 홀리바질을 이용해 볶음밥인 팟 끄라파오를 만들어 먹는다. 일본 빙수 카키고오이로부터 시작된 필리핀의 할루할로를 보면 각양각색으로 음식을 재해석하고 만들어내는 모습을 볼 수 있다.


미얀마의 경우엔 영국의 인도 식민 지배 시절 인도를 통해 미얀마를 간접 통치하는 과정에서 인도인들이 미얀마로 들어오게 되는데, 불교적 영향과 더불어 미얀마 볶음밥(터민쬬)에 들어가는 강황이 전파된다. 또 많은 인도인이 넘어가 인도의 쁠라따가 유입되는데 미얀마에선 그 형식이 바뀌어 현지화가 된다. 그러나 이렇게 맛있는 미얀마 음식의 확산은 군부에 의해 문화적으로 차단된다.


한 나라, 혹은 한 공동체의 음식은 그들이 속한 사회, 경제, 정치, 문화, 환경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다. 음식 문화는 해당 공동체의 정체성을 보여주는 아주 중요한 상징이다. 그렇기에 음식과 사람, 그들이 속한 환경을 이해하는 것은 어떤 음식의 기원과 종주국을 가려내는 일보다 중요하다. 미얀마가 군부 독재와 내전으로 무고한 희생을 치르지 않았다면, 경제 위기로 나라 전체가 휘청거리지 않았다면, 미얀마 음식에 대한 우리의 이해는 지금과 달랐을 것이다. 226p


개인적으로 베트남 쌀국수 가게에서 반쎄오를 먹어본 적이 있다. 크레페 만두에 채소를 곁들여 먹는 느낌이었기에 식사 메뉴인 줄 알았는데, 디저트류에 속하는 것 같다. 반쎄오는 베트남 중부식과 남부식이 있는데, 우리가 흔히 먹는 얇은 크레페 같은 반쎄오는 남부식이라고 말한다. 중부식은 조금 더 두껍고 팬케이크 같다고 한다.

반미 샌드위치는 우리가 이미 잘 먹고 있다. 나는 엔제리너스에서 먹어봤는데  오리지널 불고기가 가장 맛있었다.(광고 아님) 책을 통해 다양한 음식을 들여다볼 수 있었는데, 리뷰를 쓰면서 군침이 돌아서 고생했다. 동남아 음식을 아는 것이 곧 동남아 역사를 아는 것이고, 동남아 역사를 아는 것이 곧 동남아 음식을 아는 것이다. 어느 나라나 그렇지 않겠는가. 문화란 특정 개인이나 집단이 단독으로 소유할 수는 없는 것이다. 문화의 부분부분이 섞여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가고 또 새롭게 즐길 수 있길 바란다. 내일 점심으로 동남아 음식 어떨까. 저는 고수 빼고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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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지털 시대의 페미니즘 - 딥페이크 성범죄부터 온라인 담론 투쟁까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새로운 언어들
한국여성학회 기획, 허윤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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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페미야?"


여성 관련 도서, 특히 페미니즘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서적이나 글을 읽으면 따라오는 말이다. 굳이 책을 읽지 않더라도 여성 인권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 하는 말이다. 즉, 너 페미냐는 말은 "너 그런 이상하고, 나쁜 사상에 빠져든 애였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어느 순간 '페미니스트'라는 말의 의미는 비논리적으로, 때론 폭력성을 동반해 여성만을 내세우는 사람이라는 낙인이 되었다.


나같이 남자인 경우 페미니즘 서적을 읽으면 더욱 이상하게 본다. 나는 사회현상에 관심이 많았고, 현실과 근본적 원인을 명확히 보고, 그 사이로 들어가고 싶었기에 대학을 다닐 때 <82년생 김지영>과 같은 논란의 도서부터 페미니즘 관련 서적을 읽기 시작했다. 물론 페미니즘이 주요 관심사는 아니지만, 사회학 공부를 하거나 정치, 사회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세권 이상은 읽어야 하지 않나 생각하는 편이다. 이후에도 언급하겠지만 페미니즘이라는 주제는 혼자서만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경제 정치 등을 넘나들고 그 근본적 원인 또한 정치, 특히 경제적 문제와 분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먼저 왜 이렇게 페미니즘이 악마화되었는가 생각해 본다. 책에서는 더 자세히 언급된다. 2010년대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가 불타오른 후 여성 인권에 대한 시선은 나아졌는가?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합의가 되었는가? 물어본다면 대답은 '전혀 아니요'다. 책에서도 언급하듯 지금은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가 굉장히 극단화되며 남초 커뮤니티에서는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82년생 김지영, 강남역 살인사건, 혜화역 시위, 넥슨 여성 성우 교체, GS25 포스터 논란, 동덕여대 공학 전환 논란까지. 양 극단의 주장들이 오고 간다.


나는 먼저 우리가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가자고 말하고 싶다. 여성차별이 존재하는가? 그렇다. 이준석을 필두로 그를 옹호하는 일부 20-30대 남성들은 구시대의 여성차별은 인지하지만 현재의 20-30대 여성들은 오히려 혜택을 받고 있는 집단들로 묘사한다. 나는 아래에서 언급할 윤지선의 논문과 같은 어설픈 페미니즘 논의를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최근 벌어지는, 또 담론이 된 이준석식 백래쉬는 정말로 엉터리라고 생각한다. 왜냐, 여성차별은 하나의 문화, 경제적 흐름으로 어느 순간에 사라지지 않으며 각종 제도와 법, 사회 전반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우리가 논의해야 할 것은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지, 여성차별 자체가 없다며, 여자들은 오히려 이득을 본다며 무시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 현상은 책에서도 언급하듯 경제, 사회 체제가 변하면서 생긴 인식이다. '젠더 논쟁' 뒤에 있는 것들을 봐야 한다는 말이다. 페미니즘 담론이 무조건 20-30대 남성 범죄자화 해서 인격적 공격을 쏟아붓는 것이 아니다. 다음과 같은 말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대남' 현상이라는 시사용어의 범주에는 '페미니즘'과 '젠더 갈등'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실제로 이는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불안의 시대를 살아가는 20대 남성들의 분노이고, 그걸 이용하려는 정치권의 각종 '작전'이며, '이대남'을 핑계 삼아 페미니즘과 젊은 여성들에 대해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을 쏟아내는 40~50대의 내면화된 여성 혐오로 규정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더 큰 문제는 대통령 후보의 입을 통해 공식적으로 남초 집단의 여성 혐오 논리가 정당성을 얻었고, 이를 계기로 '정치세력화'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47p

나는 보수적이라 생각한다. 진보라는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너가자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벌어진 동덕여대 사태를 이야기하자면, 나는 동덕여대가 학교 자체(이사장이 아닌)의 입장에서 공학으로 전환하는 수순을 밟아야 하지 않나 생각하는 편이다. 여성차별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총학에서 주장하는 여대에 난입한 남성들의 범죄는 공학으로 전환한다 할지라도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하며, 학령인구 감소를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여대를 계속해서 지켜야 한다는 주장도 존중한다. 차라리 개방 없는 소멸을 선택할 것이라는 그들의 말도 존중한다. 그러나 학교의 주인은 학생이 포함되어 있지만 학생만의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민주적으로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어떻게 투쟁할 것인가에 대한 상상력이지 락커칠부터 시작한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아니다. 학교 측의 비민주적 행태에 분노하지만, 총학의 민주적 공론장의 형성 부족과 비통제의 모습은 그 책임감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게 만든다.


개인적으로 페미니즘 담론에 관심 있었을 때 벌어진 한 사건이 있었다. 유튜버 보겸이 인사말로 쓰는 '보이루'라는 단어의 어원에 대한 논란이었다. 논란이 된 논문에서 윤지선은 틀린 말로 서술했지만 사과하거나 수정하지 않았고 그 파장은 더욱 커졌다. 나는 페미니즘의 취지에 동감하며 응원을 보냈지만 이 사건을 통해 우리나라 철학계의 무비판적 현실과 공론의 한계를 보았고, 이 사건으로 페미니즘 이론, 논의에 대한 시선이 부정적으로 형성되는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래서 이 사건 이후에 페미니즘 관련한 글을 굉장히 비판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나아가려면 날카로워야 한다. (이 문제의식은 페미니즘 학계 내부에서도 제기되었고, 김미현의 글에 그 모습이 나타난다.)


내 기준이 얼마나 대단한가 하겠냐마는 <디지털 시대의 페미니즘>은 최근 페미니즘 학계에서는 페미니즘 운동의 흐름과 고민을 담으며 최근 담론을 설명한, '잘' 쓰인 페미니즘 도서라고 생각한다. 더불어 기술 발전에 따른 범죄, 특히 여성 대상 범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이는 단순히 여성학 관련 도서가 아니라 기술발전에 따른 윤리와 법, 범죄 변화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가령 최근에도 성행하고 있는 딥페이크 범죄와 사회적으로 크게 논란이 되었던 N번방 사건 같은 것들을 다루는데, 충분히 공론화되어야 할 이야기들이다.


아무튼, 왜 이렇게 서문이 길어졌을까? 이것은 나의 변명이기도 하다. 페미니즘을 말할 땐 주저리주저리 말을 늘여야 할 만큼 인식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말하고 싶었다. 들여다봐야 한다고.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고. 그리고 근본적인 문제를 찾아야 한다고. 그저 머리의 스위치를 누르고 무시하려는 게 아니라 정말로 뭔가 해결하고픈 의지가 있다면. 이 책은 최근 논의되는 페미니즘 담론들에 대한 여러 학자, 작가들의 글을 모은 것이다. 나는 말하고 싶었기에 이 책을 소개하길 선택했다. 이 책을 통해 누군가는 현실을 알아가고, 누군가는 자신만의 이론과 무기를 만들어가길 바란다.


디지털 기술의 발전으로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기 편해지고, 의견도 실시간으로 주고받으며 다양한 상상력을 펼칠 수 있었기에 사회단체나 시위는 기술발전을 통한 민주적 의견 표출에 긍정적인 전망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 전망과 다르게 많은 사회문제들이 잇따랐다. 커뮤니티의 의견 또한 그 기술의 영향을 받아 양극화되는 결과를 맞았고 반발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지금, 페미니즘 논의에 관해 다시 생각할 필요가 생겼다. <디지털 시대의 페미니즘>에서는 페미니즘 운동을 되돌아보며 현재 상황의 문제점을 짚어보고 방향성을 제시한다.


손희정의 글은 우리 사회의 페미니즘 논의를 톺아보며, 문제 원인에 대해 시야를 넓게 보길 권한다. 성차별이라는 망령은 제도적으로 제거된 것 같아도 계속해서 떠돌아다니고 있고 이는 우리 무의식에 들어와 있음을 의미한다. 그는 최근 N번방 사건을 다룬 넷플릭스의 <사이버 지옥>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피해자'를 강조하지 않고 표현하기 위해 고민한 흔적을 보여주는데, 나는 신이다 같은 창작물이 가해자 중심, 가해자의 쾌락에 집중하고 있는 현실에서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이런 사회에서 남성성의 사회를 좀 더 넓게 바라보길 강조한다. 멕시코 사회를 관찰하며 자본주의의 문제를 고발한 사야크 발렌시아의 <고어 자본주의>를 빗대어, 현대 디지털세계에서 통용되는 특성인 '디지털 고어 남성성'을 이야기한다. "각종 성범죄를 비롯하여 사이버스페이스를 거점으로 벌어지고 있는 범죄의 전시와 함께 열린 시장은 '디지털 고어 자본주의'로" 명명한 것이다. 한국 고어 남성성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 디지털을 거점으로 (2) 폭력을 정당화하면서 시민권을 자본 축적의 자원으로 삼고 (3) 전 지구적 가부장 체제의 남성성의 위계 안에서 '알파 메일'에 다다르지 못하는 '베타 메일'로서 주변화된 남성성을 극복 혹은 전유하기 위해 (4) 여성을 비롯한 다양한 소수자를 대상화함으로써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삼는 것이다. 가장 중요하게는 (5) 이런 양상이 산업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가부장 체제에 자리 잡고 있는 남성성의 신화, 또 남성의 쓸모를 제한하는 신자유주의 체계는 남성의 수치심을 불러일으키고 각종 편협한 이해와 범죄를 불러일으킬 뿐이었기에 남성 스스로에게도 좋지 않았다. 당신의 분노는 정말로 여성이 당신을 무시한 것에서 비롯되었을까??

"여자들이 나를 무시했다"라는 말은 확연하게 수치심을 내면화하고 있는데, 이는 가부장 체제에 자리 잡고 있는 남성성의 신화 때문이다. 폭력성을 표출하는 것이 남성다움이자 본능이라고 가르치고, 남성 존재를 경제력으로만 판단하는 사회의 한계인 것이다. 그런 와중 우리 시대의 가부장 체제는 남자들이 안정적인 수입을 통해 소위 '남자구실'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소멸시키고 있다. 남성들은 이런 상황에서 지속적인 모멸을 경험한다. 더불어서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돈조차 이미지가 되어버린 금융 자본주의 시대에 자본이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노동력과 신경 에너지를 착취하는 현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런 세계에서의 삶의 많은 부분이 비물질화되고 불확실해진다. (...) 이런 가부장제의 고질적인 폭력을 자화하고 상품화한 것이 바로 고어 남성성이다. 그리고 사이버 레커 시장은 고어 남성성이 극명하게 전시되는 장이다.? 37p

이 글을 두 번, 세 번 곱씹으며 읽어보자, <디지털 시대의 페미니즘>을 관통하는 문제의식이기 때문이다.


실제 커뮤니티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연구 주제다. 메르스 갤러리에서 파생되어 남성과 여성의 사회적 위치를 바꾼 소설'이갈리아의 딸들'의 이름을 차용해 만든 커뮤니티 '메갈리아'는 남성들이 기존에 여성들을 비하하거나 묘사할 때 쓰는 비속어와 은어들을 역으로 남성을 대상으로 쓰면서 '미러링'을 시도했다. 그러나 메갈의 남성에 대한 미러링과 같은 행동은 남성을 되돌아보게 하는 그들의 의도가 효과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되려 감정적 분노를 일으켰다. 개인적으론 그것이 커뮤니티 속에서 자극성을 동반했고 근본적 해결 방식이 아닌 감정적 반발을 불러일으키는 방식이기에 장기적 효과가 없다는 점에서 더욱 거세게 반발을 일으켰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생긴 메갈에 대한 부정적 감정 때문에 메갈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만으로 남성 유저들은 게임 업계나 남성 중심 세계에서 메갈 여성의 퇴출을 요구했고, 게임업계는 기존의 불만보다 이들의 불만을 적극 반영했다. 남성 유저들은 정의가 이루어졌다고 환호했다. 이는 그들이 응분했던 감정의 표출, 그 희망을 드러낸 것뿐이었다. 그러나 게임 회사는 공정한 결과를 내리는 주체가 아니라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으로서 정치적으로 부합하는 결정을 내릴 수 없다. 불공정한 판 자체를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 소비자의 주장과 요구를 더 중요하게 여기고 이에 부응하고자 하는 문화시장의 유구한 성차별"이 드러난 것뿐이었다.


게임의 특징인 단순한 즐거움이 작동한 것이도 하지만 '메갈 색출'은 하나의 즐거움, 일시적 쾌감과 게임계에서의 권력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사건의 연장선상이었다. 이후에 계속되는 메갈 색출, 손가락 상징 찾기는 진실한 문제 해결에 관심은 없고, 몇 개나 걸리나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이 정말로 '평등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면, 여성 캐릭터의 성적 묘사나 성차별적 게임 은어에도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는 그저 '메갈 사냥'의 즐거움이었다. 이런 흐름에서 그들이 대상이 될 때는 매우 혐오하는 '가짜 짤방'이 여성을 대상으로 퍼져도 사실을 의심하기보단 공감하는 해괴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 해괴한 모습은 렉카 유튜버들이 많은 여성들을 죽음에 내몰게 한 사건들로 매우 잘 나타난다. 그리고 책임지는 이는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어떻게 해답을 찾아야 할까. 우리의 논의가 단순한 분노를 넘어서 더욱 풍부해져야 함은 딥페이크와 관련한 범죄를 논의할 때 드러난다. "기술 매개 성폭력의 '실질적 피해와 그 의미"를 주제로 글을 쓴 김애라는 기술을 따라가지 못하는 현행법의 한계를 비판하고 기술 매개 성폭력 사건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논의한다. 현행법상 기술 매개 성폭력은 '음란성' 기준에 준해 판별함에 따라 성폭력이 아니라 모욕이나 명예훼손 등으로 범주화되어 젠더기반 성폭력의 의미와 그 효과가 쉽게 간과된다. 오프라인으로 실질적 피해가 없으면 해결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불법 촬영과 스토킹 같은 범죄는 그 증거가 쉽게 드러나지 않으며 더불어 드러나지 않는 피해자의 불안, 고통 같은 피해까지 양산한다.


 법만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서두에서 언급했듯, 성차별은 기술발전과 계속해서 교묘하고도 나란히 발전했다. AI에 녹아있는 성차별은, 동성애자 혐오 발언, 성차별 발언으로 논란이 된 AI 채팅 서비스 '이루다'에서 잘 나타났다. 결국 인공지능으로 대표되는 기술은 인간의 편향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창작물로서, 기술발전의 '객관성'을 찬양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고, 사회구조를 바꿔야 하는 것이다.


능력주의는 이상적인 개인과 표준적인 노동자를 남성으로 상정한 노동시장 구조를 경제적으로 비가시화한 채 여성을 개인으로 호명하는(작동) 한편, 여성의 능력을 개인이 아니라 여성 집단의 특징으로 정형화하는(오작동) 이중적인 체계이다. 돌봄을 둘러싼 여성과 남성의 불균등 지위를 활용하고 또한 재생산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오)작동 체계는 성차별과 공모한다. 270p


김보명의 글에선 안티 페미니즘과 백래시의 국내외 사례를 소개하는데, 안티 페미니즘의 흐름은 사회적 불만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 이들이 '만만한' 페미니즘에 불만을 쏟아내는 현상이기도 했다. 해외 여성들 또한 페미니즘을 반대하는 세력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국내의 오세라비같은 경우다. 그러나 이준석이나 그 추종자들이 드러내는 것만큼의 세대 갈등과 여성의 혜택은 없었다. 진정 젠더 갈등으로 보이는 것들의 이면에는 무엇이 있는가. 그리고 그가 연막작전을 펼치면서 얻는 정치적 이득과 그가 지키고 있는 근본적 가치가 무엇인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어느새 젠더 정치는 분노의 정치학이 되었다.


1990년대 이후 보수 우파의 안티 페미니즘 담론은 또한 페미니즘과 성평등을 여성들의 불행이나 고통의 원인으로 비난하는 대중 미디어의 안티 페미니즘 담론과 여성 해방의 도래를 앞당겨 축하하면서 페미니즘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포스트 페미니즘의 문법으로 나타났다. (...) 그러나 페미니스트 저널리스트 수전 팔루디가 짚어내듯, 이러한 진단과 주장은 실제로 노동시장에서 지속되는 성별 임금 격차와 성적 괴롭힘, 여성에게 전가되는 돌봄 노동의 부담, 재생산 권리의 제약, 대중문화 광고 속 여성 혐오 등과 같은 성차별적 사회 구조로 인해 초래되는 여성들의 부담이나 고통을 간과하고, 이를 오히려 여성운동 성평등의 성공에 따른 문제로 왜곡하며 대중의 분노를 성차별이 아닌 페미니즘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292p


김주희의 글에선 '신자유주의의 인적 자본론'을 언급하며 성차별의 피해자였던 여성이 미래 가치에 대한 기대를 포함하는 '자산으로서의 몸'을 가진 여성으로 상정되면서 스스로 '돈이 되지 않는 몸을 가진 존재'로 여기며 가치를 잃어가는 20-30대 남성들의 질투를 받고 있으며, 이는 퐁퐁남이나 설거지론과 같은 유희적 밈 혹은 자신들만의 이론을 만들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는 남성 신체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사고와 현대 경제 사상과도 연관되어 있는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공정성만을 강조하는 것은 해결 방법이 아니다.


?이처럼 집권 정부가 공정 사회를 신경증적으로 반복하며 지지를 호소하는 상황에서 불공정한 무임승차자로 여성과 기성세대가 지목되었다. 기실 금융과두 정치세력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이어졌어야 했겠지만, 일베적 공론장과 만나면서 불공정한 상상의 적은 자신들 보유하지 못한 '자산으로서의 몸'을 가진 여성으로 상정된다. 자신이야말로 서민을 대의한다는 정치공학적 판단에서 등장한 공정 담론은 대중들이 투자 가능한 자본을 계산하고 투자 불가능성이 곧 경제적 실패로 상상되는 금융화의 그늘을 통과하며 자산으로서의 몸을 소유한 여성을 남성과 구별하고 차별화하는 결과로 귀결된 것이다. 327p

자, 이쯤 되면 우리는 무엇이 문제인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굉장히 머리 아프고 복잡하지 않은가? 그렇기에 눈 한 번 감고 여성들이 외치는 목소리를 무시하면 그만이라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편향성을 유도하는 현대 알고리듬과 함께. 그러나 나아가려면 생각해야 한다. 현대의 많은 저술과 학술들이 상황 분석을 넘어서서 그 근본적 원인에 대해 더욱 비판 의식을 높이고 있다. 과거의 성차별이라고 단순히 형용할 수 없는 유령들이 떠돌고 있다. 그리고 스스로 남성들을 옥죈 그 유령들 때문에 남성들은 피해자로 등장하고 있다. 자신이 피해자라고 느낀다면, 이 체제를 정확히 바라보고 극복하고자 목소리를 보태야 하지 않을까?


각 장의 논의들은 적정 수준에서 논의하며 전문가 수준의 글로 들어가진 않는다. 그러나 각 주제별로 뻗어나가며 학자들이 어떤 연구를 하고 있는지, 이후에 어떤 방식으로 연구할 수 있는지 관심을 갖게 한다. 사회구조가 성차별을 동시에 이끌어가며 발전했다. 페미니즘의 의식을 심어 구조를 바꿀 것인지, 구조를 먼저 바꾸어 인식의 전환을 이끌어 나갈 것인지, 또 실질적으로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우리는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소수자를 우대하는 적극적 조치에 신중함이 필요함을 말하는 엄혜진의 글이나 AI의 성차별 문제를 해결하는 기술적 논의를 하는 이지은과 임소연의 글은 이론뿐만 아니라 현실에 맞서서 더욱 고민해야 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들의 글은 그렇게 열심히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음을 보여준다. 더불어 한국의 저출생과 성평등을 논의하는 신경아의 글에서는 페미니즘 문제 해결이 곧 사회 문제 해결임을 나타낸다.


페미니즘과 관련한 문제는 페미니즘 자체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다. 현대 사회는 너무나도 다양한 문제들이 얽혀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진보적 운동은 연대와 협력을 중요시해야 한다.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과 문제 해결은 우리의 숨겨진 의식을 되찾음과 동시에, 다른 사회 문제들도 해결하는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렇기에 페미니즘의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그려 볼 수 있지만, 한편으론 그 책임감을 느끼고 나아갈 땐 좀 더 정확하고 날카로움을 가져야 한다. 상상력이 더욱 필요할 때이다.


한겨레출판에게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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킬러 문항 킬러 킬러
이기호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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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11월 14일은 수능이었다. 학생들은 저마다 탈출의 종을 쳤다.

(몇몇은 그러지 못했겠지만)

학교는 사회다. 사람이 사는 공간이기 때문이다. 12년을 갇혀 지내고 가정에서보다 더 많은 시간을 보내는 공간이기 때문에 그 지독함은 말로 다 설명할 길이 없다. 일반적인 학생들은 공부하고 수능을 봐서 졸업하는 모습으로 그려지지만, 학교는 사람 사는 곳인 만큼 다양한 장면들로 이루어져 있다. 더불어 한국은 교육에 엄청나게 공을 들이는 사회다. 학교라는 사회와 교육이라는 열망이 겹쳐 우리 사회는 여러 모습을 만들어내고, 그 면면들이 <킬러 문항 킬러 킬러>에 나타난다. 이 소설집은 14명의 소설가가 한국의 교육이라는 주제로 쓴 글들을 묶은 것으로, 부담 없이 읽을 수 있다. 소설이라곤 하지만 대체로 사실에 기반했는데, 부모가 집중력을 위한 약을 구해 아이에게 강요하거나 자퇴를 고민하는 과정, 학교폭력에 노출된 학생의 이야기들이 현실적으로 그려지며 다양한 삶의 모습과 감정들에 집중할 수 있다.

각 소설들은 적은 분량으로 재치를 불러일으킨다. 아마도 이 소설에 대해 길게 이야기할 필요가 없는 것은, 우리 모두가 인지하는 문제들이 드러남과 동시에 많은 이들이 겪었을 현실이고, 지금도 어디선가 존재할 학생들의 모습이기 때문이다. 알면서도 어쩔 수 없다는 이유 하나로 계속되는 이 현실에 여러 씁쓸한 감정이 교차한다.

자신의 아이가 곧 대화 소재이자 부모의 존재 이유가 되는 현실에서 아이의 교육은 온 가족의 관심사가 된다. 그러나 그 거대한 염려만큼 실현되지 못하는 현실은 더 큰 불안을 가져오고, 아이에게 더 많은 부담을 가져온다. 아이의 영어수업에서 아이가 동성과 짝꿍을 맺었다는 소식에 교사에게 따져 묻다가 아이가 스스로 선택한 것이라는 말에 당황하는 부모의 이야기는 부모의 욕심으로 인한 교육에서 자신의 가치관과 일치하길 바라는 모습, 또 부모의 욕심과 어긋나는 현실의 모습을 재치있게 보여준다. 이런 면에선 결국 아이 그 자체를 위한 것이 아닌, 부모의 욕심, 욕망을 위한 것이 교육의 현 모습임이 드러난다. 그러한 부모의 욕심은 공부에 대한 부담을 버티지 못해 달아나버린 아이들의 이야기로 이어진다.

요즘에도 어린아이의 의대 입시반을 준비한다는 부모들이 있다. 물론 그 부모들의 교육의 권리는 어느 정도 보장받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아이가 잘 하는 것, 전체적으로 아이의 행복함을 위한 길보다 부모의 최종병기를 키워 보내는 욕망이 보이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면서 어쩔 수 없다며, 일정 정도 이상으로 아이에게 부담을 주는 교육체계를 그만큼 사회가 녹록지 않다며 강요한다. 그리고 그것을 사랑이라고 둔갑시킨다. 우리는 아이들이 현실을 알지 못한다며 다그치는 걸까 아니면 솔직한 마음을 숨기고 사는 걸까. "너는 나의 가치관, 생각대로 의사나 변호사가 돼서 돈을 많이 벌어서 자랑스러운 나의 상징이 되었으면 좋겠어"라는 마음. 학생이 수능을 위한 일종의 기계, 최종병기가 되어야 함은 명문대생 언니가 성적이 좋지 않은 동생을 다그치며 말하는 장면에서 잘 나타난다. "시에 자기 느낌을 가지면 안 된다, 그게 대한민국 국어 교육의 핵심이라고! 대체 몇 번을 말해줘야 하니?" (59p)

학교폭력을 당해 전학을 갔던 규는 말한다.

"대학을 꼭 가야 해? 대학 가지 않고도 우리, 충분히 행복할 수 있어"( 137p)

물론 '현실적'인 관점에서 볼 때 대학을 가지 않는 것은 불안한 일이다. 그러나 여기서 사람이 먼저 있는 것일까 사회가 먼저 있는 것일까. 우리가 문제를 인식할 때 근본적인 것부터 시작해야 할 때가 있다. 그러나 오직 수능만을 길로 만드는 사회에서는 모두가 눈이 어두워진다. 이 체계에서 몇 년간을 수능 준비해온(길을 갈고닦고 화려한 기술들을 연마한) 이들을 위한 길을 깔아주고 제대로 된 준비도 되지 않은 채, 원하는 게 뭐지도 모른 채 대학에 가게 된다. 작가 염기원은 어떻게 현명하게 문제들을 헤쳐나갈까를 고민하는 사회가 아닌, 서로 끌어내리기를 원하는 사회를 비판한다. 그리고 그렇게 주장하는 아버지를 끝까지 설득할 수 없음을 아는 아이의 마음을 드러낸다.

수능이라는 탈출의 종을 친 아이들이 다시 자신을 찾아갈 수 있는 여정을 떠나길 바란다. 킬러 문항, 이해가 아닌 '탈락시키기 위한' 문항이 존재하는 이 킬러들의 세계엔 연대와 성장이라는 가치가 없다. 우리는 탈출을 희망으로 여기며 과거의 상황을 잊어버린다. 그리고 남은 이들에게 그 현실이 대물림 된다. 그렇기에 우리가 더 나은 세상을 바란다면, 조금이라도 그 희망을 갖고 있다면 과거의 불만들을 승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기억하며, 간직하며 살아야 한다.


한겨레출판에게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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