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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객모독 ㅣ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06
페터 한트케 지음, 윤용호 옮김 / 민음사 / 2012년 11월
평점 :
화자는 극이 시작되기 전 '배우를 위한 규칙들'을 언급한다.
그 규칙엔 롤링 스톤즈의 노래를 듣는 것, 비틀스 영화를 자세히 관찰하는 것이 있다.
이것은 시대를 파괴할 작품이 시작된다는 선언이다.
여기서는 연극이 무엇인지를 다루지는 않습니다. 여기서는 여러분의 기대가 충족되지 않을 것입니다. 여러분의 호기심은 만족스럽게 채워지지 않을 것입니다. 어떠한 불꽃도 우리로부터 여러분에게 전달되지는 않을 것입니다. 긴장 때문에 그럴 여유도 없을 것입니다. 이 널빤지 무대가 바로 세상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이 널빤지는 세상에 속합니다. 이 널빤지는 우리가 그 위에 서는 것을 도와줍니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의 세계입니다. 여러분은 더 이상 울타리 밖 구경꾼들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주제입니다. 여러분은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우리 언어의 중심입니다. 22p
우리는 여러분에게 아무것도 말하지 않습니다. 어떠한 대화도 시작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대화하지 않습니다. 25p
극이 시작되고, 배우의 가차없는 독백이 쏟아진다.
이것은 대화가 아니다. 그저 언어가 쏟아지는 극이다. 관객과 소통하지 않는다. 심지어 모욕적인 말들을 쏟아낸다. 대화의 실패가 아닌, 고의적인 대화의 단절이다. 언어 전달은 시작부터 단절을 향해 있다. 관객을 배려하는 듯하지만 어디까지나 배우의 전달만이 존재하는 상황이다. 이것은 무슨 의미일까? 아니, 처음부터 극이라는 것에 의미가 있었을까?
화자는 관객과 배우의 관계에 대해서 언급한다. "여러분은 의미가 없습니다" (21p), "여러분이 주제입니다, 여러분은 스포트라이트를 받고 있습니다. 여러분이 우리 언어의 중심입니다."(22p), "여러분은 우리 언어극의 객체입니다. 그러나 여러분은 또한 주체입니다"(30p)라고 말하며 수동성과 능동성 사이에서 줄타기를 한다. 흥미로운 점은 여러분은 그 무엇이면서 그 무엇도 아니라는 것이 극장이라는 '수동적 형태'에서 전달된다는 것이다. 또한 '당신의 권리'와 '능력'을 말해주지만 그것을 수동적으로 앉아 듣고 있다는 형식은 주체성이 경험되지 않고 그저 수동적으로 전달되는 모순을 보여준다.
수동성에서만 그치지 않는다. '수동성'에 이어지는 관객의 '무능력'에 대해서도 언급한다. "여러분은 어떤 형태도 볼 수 없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암시도 볼 수 없습니다." (22p)에서 볼 수 있듯 "~할 수 없습니다"라는, '무능력'의 주문이 이어진다. 공간도 소음도 빛도 보고 듣지 못한다. 기대의 충족도 이루어지지 않는다. 관객들은 무언가를 기대하며 극장에 왔고, 객석에 앉았지만 그 기대는 충족되지 않는다. 더 나아가 "~할 것이라며" 관객의 존재까지 화자가 설정하고 있다. 행동한다고, 존재한다고 말하기 때문에 존재하거나 행동하는 것인가? 그리고 '존재한다'라고 말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실존주의적인 논의로 이어진다.
자 그렇다면, 이 극은 무엇을 위한 것일까? 어떤 의미가 있을까?
여러분은 언어의 희극을 즐기는 것입니다. 25p
화자는 그저 언어의 희극을 즐기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언어 자체가 어떤 희극성을 갖는지 생각해 보라는 말이다. 더불어 비극이 아닌 '희극'이라는 표현에서 이 언어의 특징을 긍정적으로 바라보라는 의미로 해석할 할 수 있다.
화자의 말에선 크게 두 가지 특징이 나타난다. 첫째로, 언어의 무의미의 대잔치가 벌어진다는 점이다. 둘째로, 상반된 가치의 충돌이 이뤄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 말들은 단순히 '개소리'로 치부돼야 할 것인가? 이는 '언어'의 불완전성과 무의식, 변증법적 사고를 나타내는 의도된 발화다. 이 불안함, 개소리적 특징은 한트케 작품의 특징이며 의도적인 것이다.
여러분은 이미 나름대로 생각했을 겁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무엇을 거부하는지 아셨을 겁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반복하고 있다는 것도 아셨을 겁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항변하고 있다는 것도 아셨을 겁니다. 여러분은 이 작품이 연극에 대한 토론이라는 것도 아셨을 겁니다. 여러분은 이 작품의 변증법적 구조도 아셨을 겁니다. 여러분은 확고한 반항 정신도 아셨을 겁니다. 여러분은 작품 의도에 대해서도 분명하게 인식하셨을 겁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무엇보다도 거부한다는 것을 아셨을 겁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반복한다는 것을 아셨을 겁니다. 여러분은 아셨을 겁니다. 여러분은 꿰뚫어 보셨을 겁니다. 여러분은 아직 아무런 생각도 하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여러분은 이 작품의 변증법적 구조를 아직 꿰뚫어 보지 못했을 수도 있습니다. 이제 여러분은 알아차립니다. 여러분의 생각은 너무 느립니다. 이제야 여러분은 우리 속셈을 아셨습니다. 31p
먼저 상반된 변증법적 구조에 대해서는 많은 독자들이 이해 했을 것이다. 모순과 대립의 발화가 계속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떤 합으로 나아가야 할까? 그러니까, 이 대립적 구도에서 어디로 나아가야 하냐는 의문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저 관객과 배우의 관계에 대해서, 수동-능동의 틀을 갖고 노는 재미에서 멈춰야 할까?
배우는 관객의 생각이 너무 느리다 말한다. 말이 먼저 오고 사고는 그 뒤에 혹은, 의미보다 언어가 먼저 나타난다는 것이다. 반복되는 메시지인, 언어의 무차별성과 의미 전달의 붕괴다. "여러분은 존재 가치가 없습니다."(32p)라며 과한 모독을 하는데, 이는 깊은 비판이라기보다 존재에 대해 다시 생각하라는 주문이다. '가벼운 형식'을 빌려서 말하고 있다.
"시간은 여러분의 순간에 따라 측정됩니다."(33p), "시간은 이미 지나가고 있습니다. 시간은 반복되지 않습니다."(34p), "우리는 시간의 흐름에 대해 말합니다. 우리는 가장하지 않습니다." (35p) 여러분은 무엇인가가 됩니다. (...) 여러분은 관객입니다. (...) 여러분은 참여할 수 있습니다. (37p)
시간은 반복되지 않지만 관객의 순간에 따라 측정되며, 극 속에서 관객은 무엇인가가 된다 말한다. 앞서 관객의 수동성을 강조했지만, 관객이 무엇인가를 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열어놓는다. 극장은, 특히 배우가 말하고 있는 공간은 결코 세계가 아니며 질서도 없다. 그러나 배우는 살아 움직이기도 한다. 무한한 생명을 지니는 원천이다. 그러니까 결국 배우에게서 무언가가 시작된다는 의미다. 무대는 생명이 없는 공간이기도 하지만, 배우로부터 가능성이 피어난다.
화자는 예술을 감상하는 것은 앉아있는 사람에게 더 어울리며, 모두가 똑같아져 몰입해 시간과 자신 스스로도 잊게 되는 순간이 존재한다고 말하고 있다. 그 이후엔 다음과 같이 말한다. "서있는 상태에서 여러분은 야유하는 사람의 역할을 더 잘할 수 있었을 겁니다."(39p) 주체와 생각하는 주체의 구분이 이루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야유는, 부정적 발화는 뒤에서 언급하듯 진실포착의 가능성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러분과 함께 연기했던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의 세계는 이곳에서 항상 뒤따라오는 세계였습니다."(49p) 그러나 관객과 배우는 함께 연극 되지 않는다. 언어는 먼저 앞서 나가고, 뒤틀린다.
그런데, 앉아서 예술을 감상하며 몰입해 똑같아지는 경험을 하는 관객들은 그저 수동적으로, 부정적으로 바라봐야 할까? 일체감, 통일감은 수동성의 부정적 의미만을 갖는가? 나는 그렇지 않다고 본다. 화자는 시간을 초월한 몰입의 세계에서 일체감을 경험하고 나와 개인으로 서야 할 필요를 말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또한 관객이 두 시간대에 존재할 수 있다고 말한다.(40p) 연극이 현실을 바꿀 수 있는 가능성을 말하는 것이다.
"겉보기에는 별 의미가 없었던 많은 연극들에는 사실은 숨은 의미가 있었습니다. (...) 대화나 몸짓, 소도구 사이엔 항상 어떤 저의가 있었고, 그것은 여러분에게 뭔가 의미를 표현하려고 애썼습니다. 항상 연극들은 어떤 애매한 의미나 불확실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었습니다."(49p) "우리는 오직 말만 하고 시간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는 여러분에게 아무것도 생생하게 묘사할 수 없고 또 아무것도 보여줄 수가 없습니다."(53p)
시간 속에서 전해지는 언어로는, 언어의 '모습'으로는 어떤 진실을 보여줄 수 있다. 상연할 수 없는 배우는 그저 말만 할 수 있다. 현실을 보여주지 못하는 언어는 죽어있을 뿐이라는 의미다. "우리는 자신을 세상에서 떼어낼 수 없습니다." (54p) 하지만 그렇다. 우리는 현실과 엮여있다. 더 아나가 연극은 세상과 떨어질 수 없다는 의미다. 현실을 바꾸는 촉매제가 되어야 함을 암시한다. 혹은 배우는 애초에 시간을 벗어나지 못했기에, 유일하게 두 시간에 걸칠 수 있는 관객이 한계를 극복할 수 있음을, 변화는 관객에게 달려있음을 암시한다. 언어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관객은 의미를 찾아야 한다. 능동과 수동의 상태와 통일감과 몰입의 세계를 직접 겪으며 나아가야 한다. 단지 앉아서 죽어있는 연극을 보는 수동적인 통일감이 아니라. 연극을 보고 난 뒤 관객은 생각을 하고 움직이게 '될 것이다.' 연극에 몰두한 통일체였다가 흩어지는 개인이 된다.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
여러분은 곧 움직이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여러 생각을 하게 될 것입니다. 여러분은 손뼉을 쳐야겠다고 생각할 것입니다.... 여러분은 점차 현실 세계로 돌아올 것입니다. ... 그리되면 여러분은 더 이상 연극에 몰두했던 통일체가 아닙니다... 여러분은 한 장소에서 여러 다른 장소들로 흩어질 겁니다. 56p
자 이제 한트케의 삶과 시대를 말해주는, 옮긴이 윤용호의 도움을 조금 받아보자.
<관객모독>이 1966년에 완성되어 초연되었다는 것을 생각해 보자. 당대는 서구에서 변화의 물결이 일던 시기다.
"현실을 있는 그대로 쓰자"는 운동으로, 당대의 인기를 얻었던 47그룹을 오히려 서술 불능자라고 비판하며 논란에 올랐던 페터 한트케의 <관객모독>은 그의 젊음, 주장의 새로움, 비판의 논란과 함께 인기를 얻었을 것이다. 많은 이들이 생각했듯 <관객모독>을 무대에 직접 올려 성공할 거라 예측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한편으론 <관객모독>의 흥행에서 현대사회의 모순을 볼 수 있다. 인간은 현실을 잊으며 비판에 들어가길 시도한다. 비판은 결국 부르주아의 산물이자 그 태도적 표현일 수밖에 없는 그 한계임을 생각해 보자. 관객은 이런 구도에서 한 번 더 모독 혹은 모욕을 받으며 스스로를 비판의 무대 한 가운데에 세운다. 그렇기에 이 개소리(?)의 향연으로 이루어진 작품이 발표되었을 때는 상당한 돌풍을 일으켰을 것이며, 이 양식이 현대 시와 같은 작품에도 상당한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고려할 때 그의 작품은 나름대로 가치를 갖지 않을까. 어쨌든 한 세계를 부수고 나오지 않았는가.
"한트케가 젊은 날 심취했던" 형식주의와 구조주의의 영향과 소쉬르의 언어학 이론에 기반을 두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이 작품은 소쉬르의 주요 주장, 문자나 음성을 말하는 기표와 그것이 가리키고 있는 의미 내용인 기의의 관계를 생각할 수밖에 없다. 이 둘의 관계는 필연적이지 않고 자의적인데, 그렇다면 단어는 의미를 확실하게 표현할 수 없는 한계를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기표는 기표 간 차이에 의해서 의미가 도출되었다는 것을 생각할 때 배우와 관객의 관계에 관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우리는 아무것도 묘사하지 않으며, 우리는 우리 자신일 뿐입니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연기해 본 적이 없습니다." (53p)라는 말은 기표의 특징, 진실과 진리를 내포하지 않은 단어를 말하는 것으로 이해할 수 있으며 "우리는 저절로 움직이는 소도구들이 아닙니다. (...) 우리는 우리입니다. 우리는 작가의 대변자입니다. (...) 우리 의견이 작가의 의견과 일치할 필요는 없습니다."(24p)라는 말은 언어는 짐짓 의미와 연결성을 갖고 있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갈등 속에 있지만, 언어의 자의적 특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볼 수 있다.
사건이나 개인의 이야기를 구체적으로 서술해서 어떤 상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오로지 단어와 문장만으로 작품을 구성했다는 것이다. 이것을 한트케는 언어극이라 부른다. 한트케가 거부한 기존의 연극은 구체적으로 현실을 서술하며, 언어극과 대비된다. 사실극, 또는 동독에서 브레히트가 노동자들을 계몽하기 위한 공연 기법으로 주장했던 서사극을 그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76p
화자는 언어로만 표현한다. 언어의 한계를 말하고 있지만, 동시에 사회와 연결된 언어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다. 화자의 말들은 리듬감을 느끼게 하며 쉽게 의미를 놓치게 하고, 사람의 혼을 빼놓기도 한다. 현대사회가 무의미의 축제로서 일정한 리듬을 통해 정신을 빼놓지만, 그것 자체를 즐거움으로 느끼는 사회가 아니던가. 흘러가는 언어와 그럴듯한 언어, 표현할 뿐 의미를 갖거나 포착하지 못하는 사회와 마주해있다. 이것이 희극이자 비극일 것이다.
"여러분은 의미가 없습니다. 여러분에겐 말이 건네졌습니다. 여러분에겐 말이 건네질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말이 건네지지 않는다면, 여러분은 지루해질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리에게 공기 같은 존재하는 아닙니다. 여러분은 그곳에 있다는 것만으로도 우리에게 아주 중요합니다. 우리는 바로 여러분이 있기 때문에 말하는 것입니다."(28p) 언어는 의미 전달에 실패하고 그 자체로 의미가 없을지도 모르지만, 말이 건네야만 하는 인간 세상의 모순을 동시에 말하고 있다. 존재하고 있기에 말하고 있다.
그렇다면 언어는 무엇을 할 수 있는가. 한트케 식으로 말하면 먼저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당신은 들 숨 날숨을 쉬고 있습니다. 당신은 눈을 3초마다 꿈뻑거립니다. 당신은 생각하는 걸 생각합니다. 당신은 당신의 행동들을 하나하나 생각할 것입니다." 짜증이 나기 시작한다. 숨 쉬는 것을, 눈을 감는 것을 의식하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처럼 무의식적인 것을 의식하게 해주는 것, 간혹 무의식이나 진실을 발견할 수 있는 것, 그것이 의미가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닐까? "우리가 여러분에게 말하기 때문에 여러분은 자신을 의식할 수 있습니다." (42p)
좀 더 넓게 봐서<관객모독>의 전체 틀을 언어 체계에 빗댈 수 있다. 관객은 발화자고 배우는 단어다. 혹은 작가가 발화자고 배우가 단어라는 틀로 생각해 보자. 관객들은 기대하며 연극을 보러 오지만 기대가 충족되지 않는다. 미시적인 측면과 거시적인 측면 모두에서 바라본다면, 극의 전개와 소쉬르의 주장이 공명한다. 화자는 당당하게 기대가 충족되지 않을 것이라 선언하는데, 이는 언어의 한계를 알면서도 사용할 수밖에 없는 상황을 드러내기도 한다. 화자의 발언 중 무능력, 기대의 불충족의 특징에서는 정신분석 이론이 엿보인다. 작품의 변증법적 구도는 현실을 개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는 연극의 역할을 내비치고, 양가적인 심리적 감정을 인식하게 하며, 그것들을 그대로 내뱉음(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으로써 치유될 수 있다거나 진실을 포착할 수 있다는 함의를 갖기도 한다.
너희들은 뛰어난 연기자들이다. 멍청하게 서서 구경하는 꼴통들아, 조국도 없는 불쌍한 작자들아, 사이비 혁명가들아, 찌꺼기 같은 작자들아, 자기 나라를 헐뜯는 작자들아, 내면세 계로 이민 간 작자들아, 패배주의자들아, 수정주의자들아, 보복주의자들아, 군국주의자들아, 평화주의자들아, 파시스트들아, 주지주의자들아, 허무주의자들아, 개인주의자들아, 집단주의자들아, 정치적인 미성년자들아, 훼방꾼들아, 인기나 노리는 작자들아, 반민주주의자들아, 자학이나 일삼는 작자들아, 박수나 구걸하는 작자들아, 대홍수 이전에나 있었을 괴물 같은 작자들아, 돈에 팔려 박수나 치는 작자들아, 파벌이나 일삼는 작자들아, 천민들아, 돼지처럼 탐욕스러운 작자들아, 노랑이들아, 극빈자들아, 불평분자들아, 아첨꾼들아, 지적(HnB9)인 프롤레타리아들아, 허풍쟁이들아, 아무것도 아닌 작자들아, 쓸모없는 작자들아. 61-62p
극 말미에 욕설과 칭찬, 금기의 단어가 쏟아진다. 욕의 이미지, 자극, 파괴, 부정, 갈등들이 쏟아진다. 무수한 경계들과 모순들, 무의식을 무수히 내뱉는다. 정확히 표현할 수 있을 때까지. 정확히 모욕할 수 있을 때까지. 혹은 그저 모욕하고 싶은 마음이 해소될 때까지. 모든 대상들이 부정적으로 표현되지만, 책을 읽는 독자 혹은 관객은 이 단어들 중 어떤 하나에 속할 것이다. 동시에 이 모든 것들은 인간 안에 있는 발화의 욕망으로, 독자 혹은 관객들을 겨냥하고 있다. '너'의 이야기가 아니면서도 '너'의 이야기임을 말하는듯하다. 이 작품은 머릿말이라고 선언하고 있다. 인간 행위의 시작은 언어와 함께하기 때문이다. 이 모든 부정성과 어긋남(단어와 뜻의)은 당신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여러분들은 환영받았다. 모독이 환영이 되는 순간이다.
여러분은 여기서 환영받으셨습니다. 감사합니다. 안녕히 가십시오. 63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