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지털 시대의 페미니즘 - 딥페이크 성범죄부터 온라인 담론 투쟁까지, 더 나은 미래를 위한 새로운 언어들
한국여성학회 기획, 허윤 외 지음 / 한겨레출판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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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 페미야?"


여성 관련 도서, 특히 페미니즘이라는 단어가 들어간 서적이나 글을 읽으면 따라오는 말이다. 굳이 책을 읽지 않더라도 여성 인권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면 하는 말이다. 즉, 너 페미냐는 말은 "너 그런 이상하고, 나쁜 사상에 빠져든 애였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어느 순간 '페미니스트'라는 말의 의미는 비논리적으로, 때론 폭력성을 동반해 여성만을 내세우는 사람이라는 낙인이 되었다.


나같이 남자인 경우 페미니즘 서적을 읽으면 더욱 이상하게 본다. 나는 사회현상에 관심이 많았고, 현실과 근본적 원인을 명확히 보고, 그 사이로 들어가고 싶었기에 대학을 다닐 때 <82년생 김지영>과 같은 논란의 도서부터 페미니즘 관련 서적을 읽기 시작했다. 물론 페미니즘이 주요 관심사는 아니지만, 사회학 공부를 하거나 정치, 사회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적어도 세권 이상은 읽어야 하지 않나 생각하는 편이다. 이후에도 언급하겠지만 페미니즘이라는 주제는 혼자서만 나아가는 것이 아니라 경제 정치 등을 넘나들고 그 근본적 원인 또한 정치, 특히 경제적 문제와 분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먼저 왜 이렇게 페미니즘이 악마화되었는가 생각해 본다. 책에서는 더 자세히 언급된다. 2010년대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가 불타오른 후 여성 인권에 대한 시선은 나아졌는가? 사회적으로 어느 정도 합의가 되었는가? 물어본다면 대답은 '전혀 아니요'다. 책에서도 언급하듯 지금은 페미니즘에 대한 논의가 굉장히 극단화되며 남초 커뮤니티에서는 조롱의 대상이 되었다. 82년생 김지영, 강남역 살인사건, 혜화역 시위, 넥슨 여성 성우 교체, GS25 포스터 논란, 동덕여대 공학 전환 논란까지. 양 극단의 주장들이 오고 간다.


나는 먼저 우리가 인정할 것은 인정하고 가자고 말하고 싶다. 여성차별이 존재하는가? 그렇다. 이준석을 필두로 그를 옹호하는 일부 20-30대 남성들은 구시대의 여성차별은 인지하지만 현재의 20-30대 여성들은 오히려 혜택을 받고 있는 집단들로 묘사한다. 나는 아래에서 언급할 윤지선의 논문과 같은 어설픈 페미니즘 논의를 부정적으로 바라본다, 그러나 최근 벌어지는, 또 담론이 된 이준석식 백래쉬는 정말로 엉터리라고 생각한다. 왜냐, 여성차별은 하나의 문화, 경제적 흐름으로 어느 순간에 사라지지 않으며 각종 제도와 법, 사회 전반에 남아있기 때문이다. 더불어 우리가 논의해야 할 것은 어떻게 문제를 해결할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고찰이지, 여성차별 자체가 없다며, 여자들은 오히려 이득을 본다며 무시할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더불어 이 현상은 책에서도 언급하듯 경제, 사회 체제가 변하면서 생긴 인식이다. '젠더 논쟁' 뒤에 있는 것들을 봐야 한다는 말이다. 페미니즘 담론이 무조건 20-30대 남성 범죄자화 해서 인격적 공격을 쏟아붓는 것이 아니다. 다음과 같은 말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대남' 현상이라는 시사용어의 범주에는 '페미니즘'과 '젠더 갈등'이 포함되어 있었지만, 실제로 이는 신자유주의가 초래한 불안의 시대를 살아가는 20대 남성들의 분노이고, 그걸 이용하려는 정치권의 각종 '작전'이며, '이대남'을 핑계 삼아 페미니즘과 젊은 여성들에 대해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을 쏟아내는 40~50대의 내면화된 여성 혐오로 규정하는 것이 더 타당하다. 더 큰 문제는 대통령 후보의 입을 통해 공식적으로 남초 집단의 여성 혐오 논리가 정당성을 얻었고, 이를 계기로 '정치세력화'하게 되었다는 점이다. 47p

나는 보수적이라 생각한다. 진보라는 돌다리도 두드리고 건너가자는 생각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최근 벌어진 동덕여대 사태를 이야기하자면, 나는 동덕여대가 학교 자체(이사장이 아닌)의 입장에서 공학으로 전환하는 수순을 밟아야 하지 않나 생각하는 편이다. 여성차별이 없다는 의미가 아니라 총학에서 주장하는 여대에 난입한 남성들의 범죄는 공학으로 전환한다 할지라도 해결할 수 있는 문제라고 생각하며, 학령인구 감소를 고려해야 하기 때문이다. 물론 여대를 계속해서 지켜야 한다는 주장도 존중한다. 차라리 개방 없는 소멸을 선택할 것이라는 그들의 말도 존중한다. 그러나 학교의 주인은 학생이 포함되어 있지만 학생만의 것은 아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민주적으로 어떻게 설득할 것인가, 어떻게 투쟁할 것인가에 대한 상상력이지 락커칠부터 시작한 우왕좌왕하는 모습이 아니다. 학교 측의 비민주적 행태에 분노하지만, 총학의 민주적 공론장의 형성 부족과 비통제의 모습은 그 책임감에 대해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게 만든다.


개인적으로 페미니즘 담론에 관심 있었을 때 벌어진 한 사건이 있었다. 유튜버 보겸이 인사말로 쓰는 '보이루'라는 단어의 어원에 대한 논란이었다. 논란이 된 논문에서 윤지선은 틀린 말로 서술했지만 사과하거나 수정하지 않았고 그 파장은 더욱 커졌다. 나는 페미니즘의 취지에 동감하며 응원을 보냈지만 이 사건을 통해 우리나라 철학계의 무비판적 현실과 공론의 한계를 보았고, 이 사건으로 페미니즘 이론, 논의에 대한 시선이 부정적으로 형성되는 것에 대해 안타까움을 느꼈다. 그래서 이 사건 이후에 페미니즘 관련한 글을 굉장히 비판적으로 보기 시작했다. 나아가려면 날카로워야 한다. (이 문제의식은 페미니즘 학계 내부에서도 제기되었고, 김미현의 글에 그 모습이 나타난다.)


내 기준이 얼마나 대단한가 하겠냐마는 <디지털 시대의 페미니즘>은 최근 페미니즘 학계에서는 페미니즘 운동의 흐름과 고민을 담으며 최근 담론을 설명한, '잘' 쓰인 페미니즘 도서라고 생각한다. 더불어 기술 발전에 따른 범죄, 특히 여성 대상 범죄에 대해서 이야기하는데, 이는 단순히 여성학 관련 도서가 아니라 기술발전에 따른 윤리와 법, 범죄 변화에 대한 이야기이기도 하다. 가령 최근에도 성행하고 있는 딥페이크 범죄와 사회적으로 크게 논란이 되었던 N번방 사건 같은 것들을 다루는데, 충분히 공론화되어야 할 이야기들이다.


아무튼, 왜 이렇게 서문이 길어졌을까? 이것은 나의 변명이기도 하다. 페미니즘을 말할 땐 주저리주저리 말을 늘여야 할 만큼 인식이 좋지 않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나는 말하고 싶었다. 들여다봐야 한다고. 이야기를 들어야 한다고. 그리고 근본적인 문제를 찾아야 한다고. 그저 머리의 스위치를 누르고 무시하려는 게 아니라 정말로 뭔가 해결하고픈 의지가 있다면. 이 책은 최근 논의되는 페미니즘 담론들에 대한 여러 학자, 작가들의 글을 모은 것이다. 나는 말하고 싶었기에 이 책을 소개하길 선택했다. 이 책을 통해 누군가는 현실을 알아가고, 누군가는 자신만의 이론과 무기를 만들어가길 바란다.


디지털 기술의 발전으로 사람과 사람이 연결되기 편해지고, 의견도 실시간으로 주고받으며 다양한 상상력을 펼칠 수 있었기에 사회단체나 시위는 기술발전을 통한 민주적 의견 표출에 긍정적인 전망을 드러냈다. 그러나 그 전망과 다르게 많은 사회문제들이 잇따랐다. 커뮤니티의 의견 또한 그 기술의 영향을 받아 양극화되는 결과를 맞았고 반발 또한 만만치 않았다. 그리고 지금, 페미니즘 논의에 관해 다시 생각할 필요가 생겼다. <디지털 시대의 페미니즘>에서는 페미니즘 운동을 되돌아보며 현재 상황의 문제점을 짚어보고 방향성을 제시한다.


손희정의 글은 우리 사회의 페미니즘 논의를 톺아보며, 문제 원인에 대해 시야를 넓게 보길 권한다. 성차별이라는 망령은 제도적으로 제거된 것 같아도 계속해서 떠돌아다니고 있고 이는 우리 무의식에 들어와 있음을 의미한다. 그는 최근 N번방 사건을 다룬 넷플릭스의 <사이버 지옥>에서 새로운 방식으로 '피해자'를 강조하지 않고 표현하기 위해 고민한 흔적을 보여주는데, 나는 신이다 같은 창작물이 가해자 중심, 가해자의 쾌락에 집중하고 있는 현실에서 돋보이는 작품이었다.


이런 사회에서 남성성의 사회를 좀 더 넓게 바라보길 강조한다. 멕시코 사회를 관찰하며 자본주의의 문제를 고발한 사야크 발렌시아의 <고어 자본주의>를 빗대어, 현대 디지털세계에서 통용되는 특성인 '디지털 고어 남성성'을 이야기한다. "각종 성범죄를 비롯하여 사이버스페이스를 거점으로 벌어지고 있는 범죄의 전시와 함께 열린 시장은 '디지털 고어 자본주의'로" 명명한 것이다. 한국 고어 남성성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설명한다. "(1) 디지털을 거점으로 (2) 폭력을 정당화하면서 시민권을 자본 축적의 자원으로 삼고 (3) 전 지구적 가부장 체제의 남성성의 위계 안에서 '알파 메일'에 다다르지 못하는 '베타 메일'로서 주변화된 남성성을 극복 혹은 전유하기 위해 (4) 여성을 비롯한 다양한 소수자를 대상화함으로써 목적이 아닌 수단으로 삼는 것이다. 가장 중요하게는 (5) 이런 양상이 산업화되고 있다는 점이다." 가부장 체제에 자리 잡고 있는 남성성의 신화, 또 남성의 쓸모를 제한하는 신자유주의 체계는 남성의 수치심을 불러일으키고 각종 편협한 이해와 범죄를 불러일으킬 뿐이었기에 남성 스스로에게도 좋지 않았다. 당신의 분노는 정말로 여성이 당신을 무시한 것에서 비롯되었을까??

"여자들이 나를 무시했다"라는 말은 확연하게 수치심을 내면화하고 있는데, 이는 가부장 체제에 자리 잡고 있는 남성성의 신화 때문이다. 폭력성을 표출하는 것이 남성다움이자 본능이라고 가르치고, 남성 존재를 경제력으로만 판단하는 사회의 한계인 것이다. 그런 와중 우리 시대의 가부장 체제는 남자들이 안정적인 수입을 통해 소위 '남자구실'을 할 수 있는 가능성을 소멸시키고 있다. 남성들은 이런 상황에서 지속적인 모멸을 경험한다. 더불어서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모호해지고 돈조차 이미지가 되어버린 금융 자본주의 시대에 자본이 디지털 플랫폼을 통해 노동력과 신경 에너지를 착취하는 현실에 주목해야 한다. 이런 세계에서의 삶의 많은 부분이 비물질화되고 불확실해진다. (...) 이런 가부장제의 고질적인 폭력을 자화하고 상품화한 것이 바로 고어 남성성이다. 그리고 사이버 레커 시장은 고어 남성성이 극명하게 전시되는 장이다.? 37p

이 글을 두 번, 세 번 곱씹으며 읽어보자, <디지털 시대의 페미니즘>을 관통하는 문제의식이기 때문이다.


실제 커뮤니티에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도 연구 주제다. 메르스 갤러리에서 파생되어 남성과 여성의 사회적 위치를 바꾼 소설'이갈리아의 딸들'의 이름을 차용해 만든 커뮤니티 '메갈리아'는 남성들이 기존에 여성들을 비하하거나 묘사할 때 쓰는 비속어와 은어들을 역으로 남성을 대상으로 쓰면서 '미러링'을 시도했다. 그러나 메갈의 남성에 대한 미러링과 같은 행동은 남성을 되돌아보게 하는 그들의 의도가 효과적으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되려 감정적 분노를 일으켰다. 개인적으론 그것이 커뮤니티 속에서 자극성을 동반했고 근본적 해결 방식이 아닌 감정적 반발을 불러일으키는 방식이기에 장기적 효과가 없다는 점에서 더욱 거세게 반발을 일으켰다는 생각이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생긴 메갈에 대한 부정적 감정 때문에 메갈에 연루되었다는 혐의만으로 남성 유저들은 게임 업계나 남성 중심 세계에서 메갈 여성의 퇴출을 요구했고, 게임업계는 기존의 불만보다 이들의 불만을 적극 반영했다. 남성 유저들은 정의가 이루어졌다고 환호했다. 이는 그들이 응분했던 감정의 표출, 그 희망을 드러낸 것뿐이었다. 그러나 게임 회사는 공정한 결과를 내리는 주체가 아니라 이익을 추구하는 기업으로서 정치적으로 부합하는 결정을 내릴 수 없다. 불공정한 판 자체를 수정하는 것이 아니라, "남성 소비자의 주장과 요구를 더 중요하게 여기고 이에 부응하고자 하는 문화시장의 유구한 성차별"이 드러난 것뿐이었다.


게임의 특징인 단순한 즐거움이 작동한 것이도 하지만 '메갈 색출'은 하나의 즐거움, 일시적 쾌감과 게임계에서의 권력을 다시 한번 확인하는 사건의 연장선상이었다. 이후에 계속되는 메갈 색출, 손가락 상징 찾기는 진실한 문제 해결에 관심은 없고, 몇 개나 걸리나 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들이 정말로 '평등한'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다면, 여성 캐릭터의 성적 묘사나 성차별적 게임 은어에도 관심을 가졌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행위는 그저 '메갈 사냥'의 즐거움이었다. 이런 흐름에서 그들이 대상이 될 때는 매우 혐오하는 '가짜 짤방'이 여성을 대상으로 퍼져도 사실을 의심하기보단 공감하는 해괴한 모습으로 나타났다. 이 해괴한 모습은 렉카 유튜버들이 많은 여성들을 죽음에 내몰게 한 사건들로 매우 잘 나타난다. 그리고 책임지는 이는 없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런 문제의식을 가지고 어떻게 해답을 찾아야 할까. 우리의 논의가 단순한 분노를 넘어서 더욱 풍부해져야 함은 딥페이크와 관련한 범죄를 논의할 때 드러난다. "기술 매개 성폭력의 '실질적 피해와 그 의미"를 주제로 글을 쓴 김애라는 기술을 따라가지 못하는 현행법의 한계를 비판하고 기술 매개 성폭력 사건을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를 논의한다. 현행법상 기술 매개 성폭력은 '음란성' 기준에 준해 판별함에 따라 성폭력이 아니라 모욕이나 명예훼손 등으로 범주화되어 젠더기반 성폭력의 의미와 그 효과가 쉽게 간과된다. 오프라인으로 실질적 피해가 없으면 해결하기 어려운 것이다. 그러나 불법 촬영과 스토킹 같은 범죄는 그 증거가 쉽게 드러나지 않으며 더불어 드러나지 않는 피해자의 불안, 고통 같은 피해까지 양산한다.


 법만 따라가지 못하는 것이 아니다. 서두에서 언급했듯, 성차별은 기술발전과 계속해서 교묘하고도 나란히 발전했다. AI에 녹아있는 성차별은, 동성애자 혐오 발언, 성차별 발언으로 논란이 된 AI 채팅 서비스 '이루다'에서 잘 나타났다. 결국 인공지능으로 대표되는 기술은 인간의 편향이 들어갈 수밖에 없는 창작물로서, 기술발전의 '객관성'을 찬양해야 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고, 사회구조를 바꿔야 하는 것이다.


능력주의는 이상적인 개인과 표준적인 노동자를 남성으로 상정한 노동시장 구조를 경제적으로 비가시화한 채 여성을 개인으로 호명하는(작동) 한편, 여성의 능력을 개인이 아니라 여성 집단의 특징으로 정형화하는(오작동) 이중적인 체계이다. 돌봄을 둘러싼 여성과 남성의 불균등 지위를 활용하고 또한 재생산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오)작동 체계는 성차별과 공모한다. 270p


김보명의 글에선 안티 페미니즘과 백래시의 국내외 사례를 소개하는데, 안티 페미니즘의 흐름은 사회적 불만을 제대로 포착하지 못한 이들이 '만만한' 페미니즘에 불만을 쏟아내는 현상이기도 했다. 해외 여성들 또한 페미니즘을 반대하는 세력으로 나타나기도 했다. 국내의 오세라비같은 경우다. 그러나 이준석이나 그 추종자들이 드러내는 것만큼의 세대 갈등과 여성의 혜택은 없었다. 진정 젠더 갈등으로 보이는 것들의 이면에는 무엇이 있는가. 그리고 그가 연막작전을 펼치면서 얻는 정치적 이득과 그가 지키고 있는 근본적 가치가 무엇인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어느새 젠더 정치는 분노의 정치학이 되었다.


1990년대 이후 보수 우파의 안티 페미니즘 담론은 또한 페미니즘과 성평등을 여성들의 불행이나 고통의 원인으로 비난하는 대중 미디어의 안티 페미니즘 담론과 여성 해방의 도래를 앞당겨 축하하면서 페미니즘의 필요성을 부정하는 포스트 페미니즘의 문법으로 나타났다. (...) 그러나 페미니스트 저널리스트 수전 팔루디가 짚어내듯, 이러한 진단과 주장은 실제로 노동시장에서 지속되는 성별 임금 격차와 성적 괴롭힘, 여성에게 전가되는 돌봄 노동의 부담, 재생산 권리의 제약, 대중문화 광고 속 여성 혐오 등과 같은 성차별적 사회 구조로 인해 초래되는 여성들의 부담이나 고통을 간과하고, 이를 오히려 여성운동 성평등의 성공에 따른 문제로 왜곡하며 대중의 분노를 성차별이 아닌 페미니즘으로 향하게 만들었다.? 292p


김주희의 글에선 '신자유주의의 인적 자본론'을 언급하며 성차별의 피해자였던 여성이 미래 가치에 대한 기대를 포함하는 '자산으로서의 몸'을 가진 여성으로 상정되면서 스스로 '돈이 되지 않는 몸을 가진 존재'로 여기며 가치를 잃어가는 20-30대 남성들의 질투를 받고 있으며, 이는 퐁퐁남이나 설거지론과 같은 유희적 밈 혹은 자신들만의 이론을 만들어 가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이는 남성 신체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사고와 현대 경제 사상과도 연관되어 있는 일이다. 이런 상황에서 공정성만을 강조하는 것은 해결 방법이 아니다.


?이처럼 집권 정부가 공정 사회를 신경증적으로 반복하며 지지를 호소하는 상황에서 불공정한 무임승차자로 여성과 기성세대가 지목되었다. 기실 금융과두 정치세력에 대한 문제의식으로 이어졌어야 했겠지만, 일베적 공론장과 만나면서 불공정한 상상의 적은 자신들 보유하지 못한 '자산으로서의 몸'을 가진 여성으로 상정된다. 자신이야말로 서민을 대의한다는 정치공학적 판단에서 등장한 공정 담론은 대중들이 투자 가능한 자본을 계산하고 투자 불가능성이 곧 경제적 실패로 상상되는 금융화의 그늘을 통과하며 자산으로서의 몸을 소유한 여성을 남성과 구별하고 차별화하는 결과로 귀결된 것이다. 327p

자, 이쯤 되면 우리는 무엇이 문제인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굉장히 머리 아프고 복잡하지 않은가? 그렇기에 눈 한 번 감고 여성들이 외치는 목소리를 무시하면 그만이라는 유혹에 빠지기 쉽다. 편향성을 유도하는 현대 알고리듬과 함께. 그러나 나아가려면 생각해야 한다. 현대의 많은 저술과 학술들이 상황 분석을 넘어서서 그 근본적 원인에 대해 더욱 비판 의식을 높이고 있다. 과거의 성차별이라고 단순히 형용할 수 없는 유령들이 떠돌고 있다. 그리고 스스로 남성들을 옥죈 그 유령들 때문에 남성들은 피해자로 등장하고 있다. 자신이 피해자라고 느낀다면, 이 체제를 정확히 바라보고 극복하고자 목소리를 보태야 하지 않을까?


각 장의 논의들은 적정 수준에서 논의하며 전문가 수준의 글로 들어가진 않는다. 그러나 각 주제별로 뻗어나가며 학자들이 어떤 연구를 하고 있는지, 이후에 어떤 방식으로 연구할 수 있는지 관심을 갖게 한다. 사회구조가 성차별을 동시에 이끌어가며 발전했다. 페미니즘의 의식을 심어 구조를 바꿀 것인지, 구조를 먼저 바꾸어 인식의 전환을 이끌어 나갈 것인지, 또 실질적으로 어떻게 대처할 것인지 우리는 더 많은 논의가 필요하다. 소수자를 우대하는 적극적 조치에 신중함이 필요함을 말하는 엄혜진의 글이나 AI의 성차별 문제를 해결하는 기술적 논의를 하는 이지은과 임소연의 글은 이론뿐만 아니라 현실에 맞서서 더욱 고민해야 함을 보여준다. 그리고 이들의 글은 그렇게 열심히 고민하고 있는 사람들이 있음을 보여준다. 더불어 한국의 저출생과 성평등을 논의하는 신경아의 글에서는 페미니즘 문제 해결이 곧 사회 문제 해결임을 나타낸다.


페미니즘과 관련한 문제는 페미니즘 자체만으로 해결할 수 없는 일이다. 현대 사회는 너무나도 다양한 문제들이 얽혀있기 때문이다. 그렇기에 진보적 운동은 연대와 협력을 중요시해야 한다. 페미니즘에 대한 관심과 문제 해결은 우리의 숨겨진 의식을 되찾음과 동시에, 다른 사회 문제들도 해결하는 길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렇기에 페미니즘의 가능성을 긍정적으로 그려 볼 수 있지만, 한편으론 그 책임감을 느끼고 나아갈 땐 좀 더 정확하고 날카로움을 가져야 한다. 상상력이 더욱 필요할 때이다.


한겨레출판에게 도서를 제공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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