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들의 엄격함 - 보르헤스, 하이젠베르크, 칸트 그리고 실재의 궁극적 본질
윌리엄 에긴턴 지음, 김한영 옮김 / 까치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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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세상을 인식한다는게 어떤 의미일까?

우리는 세상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을까?

우리는 보통 무엇인가를 받아들이면 객관적 실재를 인식한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고<천사들의 엄격함>의 저자 윌리엄 에긴턴이 말한다. 그는 보르헤스, 하이젠베르크, 칸트의 주장을 통해 우리가 세상을 바라볼 때 저지르는 실수들을 문학, 과학, 철학의 관점을 통해 설명한다. 인간이 세상을 인식할 때의 한계를 설명하는 것이다. 이 세 명의 인물은 인간의 편견을 뒤집어 문제를 해결했다.


먼저 핵심을 말하자, 우리는 무엇인가를 받아들일 때 인간의 거름망을 거친다. 칸트식으로 표현하면 외부의 자극을 받아들이면, 시간과 공간이라는 형식을 부여하여 형성된 직관을 오성이 정리한다. 그리고 이성이 이를 다룬다. 자, 그렇다면 실재는 그자체로, 그러니까 모든 것인 실재가 그대로 인간에게 와닿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틀을 거쳐 변형된다는 말씀이다. 그런데 이 '틀'은(특히 시공간이 실재한다 여기는 틀) 항상 옳은 것일까? 진리의 도구일까?


우리는 우리만의 도구, 나쁘게 말하면 편견을 가지고 세상을 받아들인다. 이것은 우리가 지식을 어떻게 생산해 나가느냐의 문제에서 도드라진다. 그것이 보어와 하이젠베르크, 아인슈타인이 벌인 양자역학 논쟁과 칸트의 객관적 지식에 대한 연구에서 나타난다.

지식은 사람이 만든 것이고 우리가 실재를 이해하는 방식이지만, 실재의 궁극적 성질은 그에 대한 우리의 관념과 일치하지 않을 수도 있다.

27p

먼저 보르헤스의 이야기를 통해 인간의 습성을 살펴보자.


젊은 시절 사랑을 하며 갈등을 겪고 이별 후 고통의 시간을 보낸 보르헤스는 언어의 근본적 한계를 초월 수 있는 사랑과 존재는 없다는 생각을 한다. 뒤이어 그는 애인 노라 랑헤를 잃은 후 제논의 역설에 사로잡혔는데, 제논의 역설은 아킬레우스가 거북이를 따라가는데, 거북이와의 거리를 계속해서 쪼개서 따라가는 것으로 사고하면 결국 추월하지 못하는 역설이 생긴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흐르는 것, 연속성을 거부한 것이다. 


많은 학자들이 나름대로 해결하려 했지만 보르헤스는 그것을 해결이 아닌 해석이라 하며 '이 문제를 상상하는 것 자체'가 문제라고 말한다. 제논의 역설에 나오는 경주 방식을 상상해서 문제로 만든 것이 바로 인간이며 이들은 비현실적인 시간과 공간의 지속성 때문에 존재한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인간은 시공간을 쪼갤 때 멋대로 연속성을 부과한다는 점을 지적한 것이다. "보르헤스는 아킬레우스와 거북이가 거주하는 시공간상의 실재가 견고하고 연속적이라는 우리의 가정 때문에 제논의 역설이 발생한다는 점을 보여주었다."(150p) 보르헤스는 시간과 공간, 인과 관계의 가장 기본적인 가정들을 재검토하기 시작한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소설에서 시공간상 연속적으로 존재한다는 신념을 잃어버리는, 지식과 세계의 단절을 경험하는 인물들을 창작한다.


그는 인간이 꿈을 꿔왔다고 말한다.(이는 우리는 환각을 경험한다는 말로 나타난다.) "우리는 세계가 공간상으로 고정되어 있고 불가사의하며 눈에 보이고 어디에나 존재하고 신강상으로 영속적이라고 꿈꿔왔다."고. 그러나 이것이 헛것이라는 균열 또한 허용했다고 말하며 칸트를 암시한다.



앞서 말했듯, 인간의 문제점은 이것이다. 우리가 왜 실재가 우리의 관찰 및 측정과 독립해서 객관적으로 존재한다고 느끼냐는 것이다. 


저자는 칸트가 <순수이성비판> <판단력비판> 등을 써가면서 변화한 사고를 보여준다. 칸트는 지적 세계와 감각할 수 이는 세계를 별개의 영역으로 두었지만, 두 주장의 극단적인 근거를 거부하면서도 둘을 연결시키려 했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모순들이 생겨났다. 더불어 과연 객관적 지식이 가능할까?를 연구하다 우리가 세계를 이해하는 틀을 발견하게 되고, 이 틀을 비판하게 된다.

칸트는 인간이 어떻게 세계를 알게 되는가를 설명하려는 모든 시도에 공통된 하나의 기본적인 가정을 제거하기로 결심했다. 그것은 우리가 이해하고자 하는 것이 세계 그 자체라는 가정이었다. 그는 이제, 실제로 우리가 이해하고자 하는 것은 세계에 대한 우리의 그림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다면 우리가 객관적인 세계를 이야기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우리의 자연스러운 경향도 비판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그리고 인간이 스스로 창조한 우상에 복종하던 관행을 마침내 몰락시킬 새로운 "비판의 시대"가 탄생할 것이다. 후세는 여기에 계몽주의라는 이름을 붙였다.

163p

의식은 우리에게 필요하고 우리가 당연한 것으로 생각하는 통합성에 불과하며, 이 통합성으로부터 내가 지각한 것들을 스스로 정돈하고 판별할 때 잣대가 되는 시간선이 생겨난다. 이와 마찬가지로 총체적인 공간, 즉 우주는 물체를 서로 구별하고 정돈하는 데에 필요한 관념일 뿐이다. 

165p

인간의 사고에서 당연하게 여기는 시간과 공간을 관념으로 치부하는 굉장히 혁신적인 생각이다.


양자역학에서는 전자들의 움직임이 문제가 된다. 뉴턴의 법칙에서는 "물체의 위치와 운동량, 그리고 그 물체에 가해지는 힘들을 완벽하게 알면 미래에 일어날 모든 위치와 운동량을 완벽하게 알 수 있"었지만 전자의 위치와 운동량은 하나를 확실히 알면 하나를 모르는 방향으로 나아갔다. 이는 불확정성이라는 문제로, 입자의 위치나 운동량을 알 수 있지만, 둘 다 알 수는 없다는 의미다. 보어나 슈뢰딩거는 고전물리학의 방식을 사용해 설명하려했다. 하이젠베르크는 그런 사고를 반대했다. 그는 입자들이 측정될 때까지 실제로 확정된 경로를 가지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이 과정에서 그 유명한 이중슬롯과 슈뢰딩거의 고양이 문제가 나온다. 아인슈타인은 이 불확정성의 원리를 포함해 확률론적인 양자역학의 해석을 신뢰하지 않았다. 그러나 하이젠베르크의 접근방식을 거부한 아인슈타인도 기존의 고전물리학을 뒤집는 추론방법을 사용했던 것이다.

아인슈타인의 경우에, 모든 사람이 시간과 공간에 대해서 알고 있다고 생각하던 것, 즉 시간과 공간이 관찰자의 구체적인 특성과는 무관한 절대적인 배경이라는 것을 무시하기로 결심했을 때, 상대성 이론을 가능하게 한 혁명적 통찰이 떠올랐다. 하이젠베르크가 그와 비슷한 추론을 사용했을지 모른다는 점에도 불구하고 아인슈타인은 이 젊은이의 비유를 단박에 거절했다.

230p


관찰되기 전까지 모른다. "후에 불확적성 원리라고 알려지게 된 이 원리는 현재 순간에 대한 완전한 지식은 단지 규정하기 어려운 것이 아니라 사실상 불가능하다는 점을 필연적, 수학적으로 정확하게 입증했다." (20p) 어떤 관찰이든 그것은 그 대상과 최소한의 거리를 유지한다. 오로지 현재 순간에 빠지면 무엇도 관찰할 수 없다는 의미다.

아킬레우스가 거북이를 따라잡지 못하거나 지켜보고 있으면 양자 냄비가 끓지 않는 경우처럼 위와 같은 결과가 역설적으로 보이는 까닭은 간단하다. 우리가 실재에 대한 기대ㅡ실재는 단일하고 지속적이고 안정적이라는 기대ㅡ를, 시공간상 다른 점들을 연결하는 것일 뿐인 관찰에 투사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뒤 실재가 우리의 기대와 다르게 행동하면 놀란다. 한 관찰이 다른 관찰을 변화시키는 것처럼 보일 때 우리가 놀라는 이유는 그관찰들이 이루어지는 동안 실재는 통합성을 유지한다고 우리가 자연스럽게 가정하기 때문이다.

잘 곱씹어보자. 거꾸로 보라는 소리다. 우리가 역설이라고 부르는 것들은 오히려 인간의 연속성을 부여하는 특성 때문에 벌어지는 일이지, 문제될 것이 없는 것이다. 관찰한다는 것은 시공간상 다른 점들을 연결하는 것 뿐인데, 여기에 실재가 연속적일 거라는 기대를 하니 놀랄 수 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연속적이라는 개념을 대상의 속성으로 여겨버린다.

우리의 관찰은 지금의 흐릿함, 시공간의 연속체를 항상 수반하고 요청한다. 하지만 그런 뒤 우리는 그 연속체를 관찰의 수단이 아니라 우리가 관찰하는 대상의 속성으로 돌리고, 그 결과에 놀란다.

256p

관찰은 시공간상의 사건들을 연결 짓기 때문에 지식의 근본적인 한계를 피하지 못한다. 우리가 마음을 펼쳐 모든 것을 감싸안을 때 우리는 불가피하게 포괄할 수 있는 것의 한계, 즉 관찰 그 자체에 내재된 한계에 부딪힌다. (...) 우리가 우주에 부여하는 그 모든 실재성에도 불구하고, 그 우주는 인간의 구성물이다.

257p

결국 실재성에 다가가지 못하는 인간은 실재를 가정하며 환각에 빠져있을 뿐이다.

그러나 저자는 우리 인간의 이런 인식적 한계를 단지 부정적으로 바라보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의 지식에 근본적인 제한이 있다는 사실은 약점이 아니라 오히려 우리가 과학적 방법이라고 부르는 것에 힘을 싣는다. 과학은 우리 지식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잘 작동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과학이 잘 작동하는 것은 우리가 눈앞의 이론을 기꺼이 시험하고, 우리가 바라거나 보기를 기대하는 것과 일치하든 일치하지 않든 간에 그 결과를 기꺼이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관찰과 실험이 이론을 계속 뒷받침 하는 한에서만 그 이론이 지속될 수 있음을 의미한다. 과학은 세계에 대한 새로운 설명을 언제든 내놓을 수 있다. 어떤 지식도 도그마가 될 수 없다. 하지만 모든 과학자가 원칙상 이 사실을 받아들이기는 해도 우리 주위에는 무의식적인 편향이 넘쳐난다. 일례로 로벨리가 형이상학적 편견이라고 명명한 것이 있다. 실재가 바깥에, 우리와의 상호작용과 독립해서 존재하며, 그 존재 방식이 지구 위에서 우리가 경험하는 인간의 삶 과 일치한다는 믿음이다. 공간상 펼쳐져 있고 시간상 연속적이라고 말이다. 그리고 이 믿음, 세계가 우리의 예상과 일치하기를 바라는 이 욕구는 대단히 강해서 그것을 뒷받침하기만 하면 어떤 구성 개념도 무모 하지 않다고 본다.

371-372p

그렇다고 우리가 세계를 보는 방식을 제거한다거나, 관찰자 자체를 지워버릴 수는 없는 일이다. 시공간적인 가정들을 고려하며, 다른 이해 방법을 찾아보도록 노력하는 것이 필요함을 말하고 있다. 우리가 무엇을 알고자 100% 어떤 한 지점에 도착하면 되려 알 수 없어지는 모순에 봉착한다. 위의 이야기들이 그것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어떤 관찰에서든 관찰자와 그의 이론, 그가 세계를 보는 방식, 직관의 필수 형식은 관찰의 핵심 자리에 있으며, 그 자리에서 그것들을 제거한다는 것은 절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에게 최선의 방책은 그것들의 영향을 고려하는 것, 그리고 우리의 경험이 가능한 모든 경험의 한계에 도달했을 때, 우리가 시공간적인 경험에 적합한 가정을 계속 유지하면 길을 잃게 된다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우주론 학자들이 우주의 끝, 그리고 창조의 맨 처음 순간으로 관심을 돌렸을 떄 발견한 진실이다.

252p

우리가 입자라고 부르는 덧없는 것들에서부터 인간이라고 알려진 거대한 입자 덩어리에 이르기까지 시간 속에 놓인 모든 실체의 본성은 항상, 그리고 오로지 관계로서만 존재한다고 이해하라고 말한다.


저자는 물리학과 논리학의 법칙에서 인간의 관계까지 그 지평을 넓힌다.

우리는 저 너머의 진실을 알 자격이 있을까? 아니, 그것에 집착해야 할까?

어쩌면 우리가 알고있다는 건, 관계를 맺고있다는 의미일 것이며

지식과 도덕적 옳고 그름도 관계에 따라 달라질 수 있음을 의미할 것이다.


저자는 인간의 사고 틀, "형이상학적 편견"을 한 번 더 강조하며 글을 마친다.

어떤 결과를 볼 때 우리는 바깥에서, 즉 공간상 어디에나 존재하고 시간상 영속적인 세계에서 원인을 구한다. 우리가 아는 한에서 세계는 그렇게 존재해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렇게 알고 있지만, 그것은 틀린 생각이다. 거기에는 실제로 엄정함이 있다. 하지만 우 리가 그 엄정함을 만든 체스 장인임을 깨닫기 위해서는 천사들을 놓아 주어야 한다. 실은 그것이 가장 어려운 일일지 모른다.

375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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