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낯선 골목길을 걷는 디자이너
정재완 지음 / 안그라픽스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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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확하고 아름다운 당신의 산책

북디자인 수업을 틈틈히 듣고 있다. 수업을 들으니 책을 더욱 귀하게 여기고 정확히 사랑하는 기분이 든다. 어떤 책이 아름답다 여겨질 때 그 책의 어디가 어떻게 아름다운지, 그러니까 어떤 폰트에 어떤 내지를 썼고, 인쇄에 쓰인 잉크의 색감과 레이아웃은 어떠며, 표지와 후가공은 어떻게 들어갔는지 등을 감상할 수 있게 되어 기쁘다. 무엇보다 책의 물성과 아름다움에 감동하는 요즈음.

물론 디자인이 아름다움만을 추구하지는 않는다. 책은 내용을 전달하는 하나의 장치로서 활용되고, 나는 책을 소품으로 여기지 않는다. 그보다는 살아 있는 것, 생동하는 힘을 가진 것으로 느낀다. 내가 좋은 책이 많은 공간에서 쉬이 얼어붙고 긴장하며 울 것 같은 기분을 느끼는 이유는 아마 거기에 있을 테다. 어떤 책들은 너무도 살아 있고, 나는 여전히 독자로서 책에 담긴 내용과 밀접하게 만나기를 원한다. 그렇기에 도리어, 책의 내용을 온전히 이해하고 책의 만듦새에 그것을 반영하는 디자인이 좋다. 그건 정확성의 문제니까.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정확하며 아름다운 디자인을 지녔다. 내용과 책의 만듦새가 맞아 떨어져 반짝거리는 듯한 책이다. 이 책의 작가는 출판사 ‘사월의눈’에서 사진책을 맡고 있는 정재완 디자이너이다. 그는 대구에서 머무르며 골목골목을 산책하고, 거기에서 발견된 사유를 풀어나간다. 거리를 채운 간판의 폰트와 산책자의 태도 등 생활인의 시각이 돋보이는 주제들부터 제로웨이스트와 고쳐쓰기, 비거니즘, 재개발같은 굵직한 주제에 이르기까지, 디자이너답게 밝은 눈을 유지하며 말을 잇는 점이 좋았다. 그를 따라 걷는 기분, 함께 산책하는 기분을 느끼게 하는 책은 흔치 않다.

전부 읽은 후에는 사람에 따라 길거리에서 발견하는 것이 다르겠구나, 같은 길이라도 걷는 사람에 따라 우리 모두가 다른 산책을 하겠구나, 그런 생각 또한 함께 들었다. 나는 오늘 오가는 길에서 부처님 오신 날을 기념하는 색색 연등들을 보고 기도를 했고, 아끼는 가게들과 사장님들을 다시 만났고, 유난히 환하게 피어 있는 가로수 풀꽃들을 여러 송이 보았다. 오늘은 일요일. 집앞 세탁소에서 기르는 강아지인 금동이를 못 봐 아쉬웠다. 이상. 그나저나 내가 안그라픽스의 책들처럼 고운 무엇을 만들 날이 올까? 그랬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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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틈없이 자연스럽게 - 좋아서 찍는 내 사진의 즐거움과 불안, 욕망
황의진 지음 / 반비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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찍을-찍힐 자유, 내 사진을 '고르는' 자유

마지막으로 떠난 여행에서 나는 줄곧 카메라를 쥐고 있었다. 풍경과 분위기와 낯선 질감들을 담고 싶어 내내 마음이 바빴다. 한참 사진을 찍다가 집중해 동행인들을 놓치는 일이 많았다. 그래서 내 사진을 찍을 여유는 별로 없었는데, 새삼 그 사실을 깨닫고는 그들을 뒤따르며 이런 생각을 했었다. 나는 이제 내가 어떻게 보이는지보다 내가 어떻게 보는지가 더 중요해졌구나, 하는.

그럼에도 여행이 아닌 현실의 어떤 때에는 셀카... 를 찍는다. 꽤 자주 찍는 것 같다. 내가 너무 많이 찍는 걸까? 오늘은 별로 예쁘진 않은데? 설마 내가 나르시스트? 같은 생각이 여전히 든다만은.... 그래도 뭐, 좀 찍는다고 닳는 얼굴도 아니잖아? 라는 생각이 이기는 요즈음이다. 이 책을 읽던 기간 내내, 내가 생각보다 더 자주 카메라 앱을 실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적으로 깨닫게 되었다. 잠금화면을 오른쪽으로 가볍게 스와이프하는 동작은, 무의식 중에 숨쉬듯 일어난다.

한국 사회에서 여성으로 사는 건, 솔직히 표현하자면, 좀 짜치는 일이다. 나의 외모가 어떻게 보이고 평가되는지를 내면화하지 않을 수 없기 때문에 그렇다. 각종 외모 강박과 식이 장애, 운동 중독, 알코올 중독을 두루 경험했고, 이제는 이런 문제에 있어서만은 성불할 때 됐다 싶은데도, 아직도 이런 생각을 한다니. 가끔은 나 스스로가 구질구질해 갖다 버리고 싶은 마음이 든다. 그런 내게 셀카 찍기란.... 산뜻하게 말할 수도 있겠지만 쉬이 그럴 수는 없는 일이다. 어떤 사진은 타인에게 공유할 수 있지만 어떤 것은 그럴 수 없고, 내가 좀 좋아 보였으면 좋겠고, 여전히 나는...... 이 말이 진짜 짜치는데, 예쁘고 싶다.

이 책과 함께하는 기간 동안 내 사진을 찍는 일은 조금 다르게 인식되었다. 이 복잡한 마음에 대해서 조금 더 말해 볼 가치가 있다는 확인을 받은 것 같아 기뻤다. 특히, 책에서 작가가 언급한 ‘내 사진’의 정의는 꽤나 흥미로웠다. 내가 찍건, 내가 찍지 않건 상관없이 ‘내 사진’이 될 수 있다는 명명. 그것은 그 자체로 자유로운 선언처럼 여겨졌다. 나만이 내 사진이 될 수 있는 것과 그렇지 아니한 것을 허용하고 선택할 수 있다. 오로지 나만이 그것을.

사진의 폭력성과 자유로움은 함께 존재한다. 그리고 내게 이런 복잡한 생각을 하게 만드는, 이 사진이라는 것이, 나는 아직도 재미있다. 아직도 재미가... 있다. 이 여러 생각들이 나쁘기만 한 생각은 아니고, 오히려 이 일이 아주 즐겁고, 나는 여전히 그것과 다양한 방식으로 관계 맺고 싶다.



황의진의 『빈틈없이 자연스럽게』, 이 아름다운 책은 출판사 반비에서 제공받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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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기가 좋으면 아무래도 좋으니까 - 향과 사랑에 빠진 조향사가 들려주는 향의 세계
정명찬 지음 / 크루 / 202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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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토록 향기로운 이야기


향기로운 것을 찾아 헤매이던 어린 때엔 문구점이 내 세상의 전부였다. 거기서 나는 이것저것, 예쁜 것이라면 주저 않고 샀지만, 그중에서도 특히 향기나는 미피 형광펜이나 고체 향수처럼 향기가 나는 것들을 제법 모았다. 지금도 기억날 만큼 아꼈던 것은 프리지아향의 고체향수다. 그건 피부에 바르는 작고 납작한 향수였는데, 초록색 플라스틱 병 위에 하얀 프리지아 다발이 그려져 있었다. 나는 그게 너무 좋은 나머지 아끼고 아끼느라 실제로 바른 적은 별로 없었고, 그냥 주머니에 그걸 넣고 다니면서, 언제고 체온으로 뜨듯해진 그것을 꺼내어 만져 보곤 했다. 가끔은 뚜껑을 열어 내 코에만 맡아질 만큼 슬쩍 향을 맡고는, 혼자 좋아했던 기억이 난다. 그걸 맡는 순간만큼은 꼭 다른 곳에 가는 기분이었다.


지금은 어른 비스무레한 것이 되었고, 예전에 비하면 더 비싼 향수를 살 수 있는 나이다. 이십 대 초반에는 향수를 꽤나 모았다. 여행 다닐 때마다 한 병씩 사 모으며, 이건 그때 그곳에서 샀던 것, 이건 어떤 사람과 맡았던 것, 하며 기억했던 것이 떠오른다. 지금은 새 향수를 많이 모으지는 않지만 여러 병 썼을 만큼 아끼는 향수가 생겼고, 계절이나 기분에 따라 다른 향수를 찾고, 사람들이 ‘네 향’이라고 불러 주는 어떤 향을 갖게 되기도 했다. 그러나 여전히, 맡아 본 적 없는 향수를 만나면 발걸음이 멈춘다. 여전히 어떤 향을 찾고 있다는 기분이 든다. 나를 다른 곳에 다다르게 해 줄 것만 같은 매혹적인 향을.


이 책은 향기로 가득 차 있다. 여러 향조들의 이름과 실제 유명 향수 브랜드들의 이름이 여기저기서 튀어나오기도 하지만, 그런 이유만은 아니다. 작가가 향을 다룰 줄 아는 사람이라는 태가 역력히 나는 글이어서 그렇다. 이 작가는 엄청나게 감각적인 이야기들을 자연스럽고 능숙하게 꺼내온다. 감각에 의존해야 말할 수 있다고 알았던 것들이 작가의 입에서 술술 흘러 나온다. 어떤 느낌이냐 하면, 향은 만질 수도 움킬 수도 없는 것인데, 나는 그전까지 꼭 그런 줄 알았는데, 작가가 그 실체가 없어 보이는 ‘향’이라는 것을 내 앞에 데리고 와 앉혀 놓고 이야기를 꺼내는 것 같다. 이 향이 그래서, 어떤 향이냐면요...... 하면서.


작가가 이렇게 쓸 수 있는 이유는 글솜씨가 좋아서만은 아니다. 그가 세계를 감각하는 방식 때문이다. 그래서 이 책과의 독서는 친절하고 달콤한 시간이었다.


이 책의 챕터 중에는 <아는 만큼 맡는다> 라는 부분이 있다. 매일 후각을 사용하며 살아가는 우리는, 과연 향기에 대해 얼마만큼 알고 있을까? 무언가를 알아가고 익히는 일이 내가 아는 세계의 해상도를 높이는 일이라면, 향기에 대해 알아가는 일이 우리가 감각에 대해 더욱 잘 말할 수 있도록 도와주지 않을까?



정명찬의 『향기가 좋으면 아무래도 좋으니까』, 이 아름다운 책과 퍼퓸 스프레이는 출판사 크루 @ksibooks와 이토록 @yitorok_fragrance 에서 제공받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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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험을 향해 달리다 - 기억과 대면한 기록들
세라 폴리 지음, 이재경 옮김 / 위즈덤하우스 / 202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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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라 폴리, 위험을 향해 달리다
위즈덤하우스
#논픽션 #상처 #용기 #캐나다 #그레이스 #🚶‍♀️


인간인 것을 축하해

요즈음의 나는 상대를 웃기고 싶다는 생각이 자주 든다. 가볍고 덜 중요한 이야기들을 해 주고 싶다는 생각, 저 사람을 편안하게 해 주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어릴 때는 제법 진지한 아이였기에, 나는 요즈음 사람들과 허튼 소리와 웃음, 잡담 같은 것을 나눌 수도 있었다는 사실을 인생에서 처음 깨달은 사람처럼 살고 있다. 내가 상대를 재미있게 해 줄 수 있을 때가 간혹 있고, 상대가 이 순간을 즐거워하고 있다는 기분이 들 때마다, 나는 아주 기쁘다. 개그의 기쁨을 알아가는 중이랄까?
그러나 가끔은, 엄청난 딴청을 피우고 있는 것만 같은 기분을 느낀다. 내 무릎은 주욱 찢어져 피가 철철 흐르고 있는데, 그 상처를 없는 척 감추고 사람들을 웃기려 드는 것 같은 그런 기분. 나는 상처에게 조용히 하라며 상처를 틀어막고, 그리하여 실없고 초라해진 나의 상처는, 영영 이해받지 못할 것 같은 기분을 느낀다.

어떤 이야기는 무겁지만 어떤 이야기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해 왔다. 어떤 이야기는 중요하지만 어떤 이야기는 그렇지 않다고.
그러나 세라 폴리에게는 그런 구분이 무의미해 보인다. 이 작가는 가벼워 보이는 이야기로 시작하지만, 결국 스스로에게 가장 중요한 상처 위로 나를 데리고 가고, 절대 딴청을 피우지 못하게 만든다. 이 작가의 실력을 눈치챈 이후로는 페이지 넘기기가 무서워졌다. 뼈가 욱신대고 힘이 들어서, 나는 이 책을 보드라운 이불 속에서 읽어야만 했다. 읽다가 쉬어야 하는 순간들이 있었기 때문이다. 숨을 고르고 잠깐 책을 덮는 시간이 너무도 필요한 책이어서.

읽으며 많이 울었다. 그러나 내가 여전히 어떤 책을 읽고, 이런 고통에 감화될 수 있다는 사실이 기쁘다.
내가 고통받을 수 있고, 위로하고 싶어지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확인 받는 기분이 들었다.

당신이 당신 인생의 중요한 상처를 알면서도 목도하지 않고 있다면, 자꾸만 딴청을 피우고 있는 기분을 느끼는 인간이라면, 이 책은 하나의 방법을 제안할 것이다. 이 책은 그 위험의 한가운데로 달려가고, 그래서 그것을 다시 보게 도와줄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이런 경험을 통해 우리 스스로의 상처를 드러낼 수 있게 되는지도 모른다. 타인을 즐겁게 하면서도, 타인의 앞에 나의 상처를 꺼내놓을 수 있게 되는지도.

많은 사람들이 세라 폴리의 용기를 전해받을 수 있었으면 좋겠다.



세라 폴리의 <위험을 향해 달리다>, 이 아름다운 책은 출판사 위즈덤하우스에서 제공받았습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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