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믐, 또는 당신이 세계를 기억하는 방식 - 제20회 문학동네작가상 수상작
장강명 지음 / 문학동네 / 2015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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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느껴지는 답답함 속에서 많은 생각을 했다.
여전히 사회의 이슈가 되는 왕따 문제, 피해자와 가해자, 분노와 증오, 그리고 용서.
항상 용서라는 것에 대해 가늠해 보려고 하지만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은 두리뭉술한 조각일 뿐이다. 누군가를 용서하기도 전에 먼저 분노를 하고 그것을 표출해서 상대방을 상처 입히는 방향으로 생각은 맹렬하게 소용돌이친다.

여기에 교도소에서 출소한 한 남자가 있다. 그는 한 때 왕따 피해자였으나 단 한 번의 실수로 피해자에서 가해자로 변모하고 사람을 죽였다는 죄의 낙인이 찍힌다. 과거에 남자가 죽인 동급생의 어머니는 죄의 올가미가 되어 그의 뒤를 쫓는다. 그녀는 그가 살인자라고 폭로해 하는 일마다 방해를 하고 겉으로는 남자를 자신의 두번째 아들로 생각한다며 그의 정신을 서서히 좀먹어 간다. 그녀는 자신의 아들이 왕따 가해자라는 것은 사실이 아니라고 필사적으로 주장을 한다.
남자는 그녀가 하는 행동에 조금의 의의도 가지지 않고 그저 죄인처럼 끌려 다닐 뿐.

이 소설이 속죄와 용서에 관한 글이냐고 한다면…… 글쎄, 그건 잘 모르겠다.
너무 억울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기는 하지만 그가 도통 억울해하는 것 같지 않으니까 눈물이 날 것처럼 슬퍼졌다.
그는 자신이 없는 세상에서 살아갈 사람들을 위한 선의의 거짓말이라 생각했던 것 같다. 하지만, 그의 용서 또는 속죄가, 그가 세상을 기억하는 방식이, 쓸쓸하고 안타까웠다.

어머니라는 사람은, 자신의 아들이 저질렀던 죄를 정면으로 응시하지 못한다. 아무리 진실을 들려줘도 그게 아니라…… 하는 변명밖에는 하지 않는다.
부모들은 왜 항상 자신의 아이들에 관해서라면 모든 것을 다 안다고 자신하는 걸까. 조금만 주의를 기울이면 그렇지 않다는 것을 알 수 있는데도.
결국 그녀는 용서를 구할 수 있는 마지막 보루를 끝까지 저버리고 끝내 자신이 바라는 사실만을 마주한다. 어떤 면에서는 그것 자체가 그녀에게 행하는 일종의 벌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지옥이 있다면, 용서하지 못한 죄로 영원히 지옥불에 달구어지기를.

가끔씩 뉴스에서 피해자와 가해자가 뒤바뀌는 것을 보고는 한다. 그럴 때면 누구에게로 증오의 화살을 돌려야하는지조차 불분명해진다. 그렇게 되기 전에 미연에 방지할 수는 없었던 걸까. 꼭 비극이 벌어진 뒤에야 사람들은 관심을 가진다.
어린아이들은 점차 자라면서 빠른 속도로 무관심을 배운다. 어쩌면 그게 현명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러나 누구도 관심을 주지 않는 뒤쪽에서는 새로운 피해자와 가해자가 생기기 마련이다.

나는 여전히 제대로 된 용서를 할 줄도 모르고 복수하는 것이 내 마음을 더 편하게 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한다. 언젠가는 나도 이 남자처럼 용서에 대한 진정한 의미를 알게 되는 날이 올지도 모르겠다.

지금까지 내가 해온 모든 거짓말들은
다 잊더라도
이 말만은 기억해줬으면 해.
널 만나서 정말 기뻤어.
너와의 시간은 내 인생
최고의 순간들이었어.
난 그걸 절대로 후회하지 않아.
고마워.
진심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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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동주
안소영 지음 / 창비 / 2015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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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에는 소설이 아니라 시인 윤동주의 발자취를 따라가는 에세이 정도로 알았다. 소설이라는 걸 알았을 때는 이미 구매를 하고 난 뒤였다.
이 책을 읽고 정말 놀랐던 것이, 작가가 자료조사를 철저히 했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맨 마지막에 참고 도서를 보면 어찌나 방대한지. 나도 모르게 고개가 숙여졌다.

윤동주, 그 이름 석 자를 되뇌면 왜 이렇게 마음이 찌르르 하고 울리는지 모르겠다.
괜히 눈물이 날 것만 같고 왠지 모를 그리움이 물씬 풍기고. 삭막한 시대를 살다간 청년 윤동주에 대한 안타까움 때문일까 그의 시들이 담아낸 애잔함 때문일까.

윤동주 선생님의 시를 읽다 보면 그런 생각이 들고는 했다.
이 시인은, 뭐가 그리 죄스러워 자신의 발걸음마저, 시를 쓰는 것마저 부끄러워야 했던 걸까. 그 마음이 이해가 될 듯하며 되지 않는 모호함이 느껴지는 시인이었다.

어느 나라의 식민지에서 문학의 암흑기를 살다가 짧은 생애를 마무리한 시인. 마음 속 울분을 고고한 필체로 담담하게 써내려가던 시인. 절필을 할망정 일본에게는 고개 숙이지 않겠다고 다짐하던 고결한 시인, 윤동주.

사실 내가 존경하는 시인 중에 한 분인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많은 것을 알지는 못했다. 그가 어떻게 죽음을 맞이했는지는 대략적으로 알지만 그의 전반적인 생애와 그의 벚들, 그가 했던 무수한 고민과 사색들.
작가님은 그런 나에게 생생한 윤동주 선생님을 보여주었다. 마치 바로 옆에서 살아 숨 쉬는 것처럼 그를 느끼게 만들어 주었다.

책을 읽으면서 참 많이도 울었다 싶다. 별 거 아닌 장면에도 툭 툭 눈물이 터져 나오는 것은 그가 안타깝게 생을 맞이하리라는 것을 미리 알고 있기 때문이었을까. 그가 태어나면서부터 바라던 꿈을 미처 보지 못하고, 바로 눈앞에서 이른 삶을 정리하게 된다는 걸.
그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못내 안타까워, 조금만 더 버티지……. 하는 아픈 속삭임이 새어나왔다.

그 시대를 살아갔던 우리 지성인들은, 조상님들은, 그리고 독립군들은 어찌나 서글프고 아름다운지.

내가 이광수, 김동인, 이인직, 서정주 등을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그들을 증오 어린 눈으로 바라보면서 그들의 작품을 갈가리 난도질하고 싶다고 생각하는 이유가.
나는 어떤 이유에서건 과거의 잘못을 문학작품을 통해 용서 받을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가 쓴 작품이 훌륭해서 그를 용서해 주어야 한다고는 보지 않는다. 심지어는 그 작품들마저 용서할 수 없다고 생각하니까.
그렇다고 목숨을 걸어가며 일본에 반대하는 작품을 쓰라고는 하지 않는다. 다만, 내가 그 시대의 작가였다면 차라리 글을 쓰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 더러운 글을 쓰느니, 절필을 하고 말지.

작가님은 그러기를 바라지 않았겠지만, 결국 마지막에 가서는 책을 붙들고 맹렬한 저주를 퍼붓고 있는 내가 있었다.
내가 사랑하는 시인의 마지막이 너무 억울해서, 한참은 울었던 것 같다.

윤동주 선생님의 심장을 할퀴고 지나갔을 바람이, 내 심장에 남아 자국을 남긴다.
먹먹하게.

동주는 결심했다.
잘못된 전쟁을 지지하고 동포들의 고달픈 삶을
외면하는 것이 ​문학의 길이라면,
가지 않으리라.
감투와 명성을 탐하고 궤변으로 자신의 행동을
미화하는 자들이 문인이라면,
되지 않으리라.
하나의 시어를 찾기 위해 수없이 버리고 취하는
연마의 과정이 저렇게 쓰이는 것이라면
더 이상 쓰지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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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더 스토리콜렉터 17
마리사 마이어 지음, 김지현 옮김 / 북로드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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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 살다 이렇게 짜증나는 주인공은 처음이다.
거의 마지막까지 읽고 도저히 읽을 수가 없어서 덮은 책.
이 시리즈 자체를 두 번 다시는 사서 보지 않을 듯하다.
남자 주인공이고 여자 주인공이고 정이 가지를 않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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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방인 열린책들 세계문학 172
알베르 카뮈 지음, 김예령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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패트릭 모디아노 「어두운 상점들의 거리」의 첫 문장, ˝나는 아무것도 아니다.˝
조지 오웰 「1984」의 첫 문장, ˝화창하지만 쌀쌀한 4월의 어느 날이었고, 시계는 13시를 치고 있었다.˝
두 개 다 내가 특별히 마음에 들어 하는 문장이다. 그리고 카뮈의 「이방인」에 나오는 첫 문장 또한.

˝오늘 엄마가 죽었다. 아니 어쩌면 어제.˝

내 마음을 순식간에 강타하는 그런 문장을 발견하면 나도 모르게 시선을 빼앗겨 몇 분이나 입 속으로 곱씹어 본다. 그 울림이 내 가슴 깊숙하게 새겨질 때까지. 오늘 엄마가 죽었다는 문장 보다는 그 뒤에 나오는, 어쩌면 어제 죽었을 지도 모르겠다는 그 말이 왜 이렇게 내 마음을 울린 걸까. 그 순간, 지독하게 무심하고 매사에 무덤덤한 그가 나를 강하게 사로잡았다.

이 소설이, 슬프지는 않지만 슬픈 이유가 그것이 아닐까 생각한다.
심장을 강하게 울리는 느낌은 없으나 문을 두드리듯 수면에 돌멩이를 떨어뜨리듯 내내 조심스러운 일렁임을 얹어주었다.

요양원에 있던 어머니가 죽었다. 뫼르소는 장례를 치르기 위해 그곳으로 향하고 슬퍼하는 많은 사람들 틈에서 그는 그저 피곤하고 자고 싶다는 생각만 한다. 아무렇지 않게 사람들과 대화를 하고 커피를 마시고 담배를 권한다. 사람들이 어머니의 나이를 물어도 제대로 대답하지도 못한다. 사람들은 그런 그를 이상한 눈으로 바라보지만 뫼르소는 그저 피곤할 뿐이었다. 단지 그 뿐.
장례가 끝나고 집으로 돌아와서도 그는 슬픔조차 느끼지 못하는 사람처럼 내내 무덤덤하다. 연인인 마리와의 관계도 주변 사람들과도, 마치 그저 머물다 가는 사람인 듯 겉돌기만 한다.
그는 포주 일을 하는 친구와 해변으로 놀러갔다가 우연히 누군가를 죽이게 된다. 그 일로 재판에 휘말리게 되고 단지 사람을 죽인 것이 문제이던 그에게 사람들은,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무덤덤했다는 것에 대해 죄를 묻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담담한 어조로 이끌어가는 탓일까 상당히 차분한 기분으로 읽어 내려간 책이었다. 그런 것과는 별개로 어딘가 냉담하다 못해 현실과 괴리감마저 느껴지는 주인공에게 좀처럼 공감을 하지 못했다. 그러다가 줄곧, 자신의 재판에서마저 침착함을 유지하던 그가 한순간 내지르는 폭발과도 같은 감정에, 그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었다. 그가 어머니의 죽음에서 그토록 냉담했던 이유, 자신의 재판을 침착하게 받아들였던 이유.

뫼르소는 사람들이 자신을 이상하게 생각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태도를 바꾸지는 않는다. 그는 그저 자기 자신이기를 원하며 재판의 결과를 받아들인다.

그다지 길게 이어온 인생은 아니지만, 자신의 신념이나 고집을 바꾸지 않고 산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가 하는 것은 알고 있다. 상황에 따라, 혹은 욕심에 따라 사람은 끝없이 변하며 결국에는 중심을 잃고 부유하기 마련이다.
뫼르소가 한 짓이 좋다, 나쁘다 평하는 것은 절대 아니다. 다만 그 선택의 결과를 알고 있으면서도 나의 생각을 고집하기란 결코 쉽지 않은 일임이 분명하다.

가끔씩 외면하고 싶은 현실을 보게 되면, 문득 뫼르소가 떠오를 것 같다. 담담하고 침착한 어조로 올곧게 진실만을 말하던 그가.

우리가 다시 옷을 입었을 때,
마리는 내가 검은 넥타이를 맨 것을 보고
크게 놀랐다.
그러더니 내게 상중이냐고 물었다.
나는 엄마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마리가 언제부터 상을 당한 것인지
알고 싶어 했기 때문에
나는 <어제부터>라고 대답했다.
그녀는 살짝 뒤로 물러섰지만,
더 이상 그에 대해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나는 마리에게 그건 내 탓이 아니라고 말하려다 그만두었다.
같은 말을 이미 사장에게도 하지 않았나.
그 말엔 아무 뜻도 없었다.
그리고 어쨌든,
사람들은 언제나 약간씩은 잘못을 저지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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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크로메가스.캉디드 혹은 낙관주의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50
볼테르 지음, 이병애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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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은 참 얇은데 제목과 저자 이름만 봤을 때는 어쩐지 어려운 책이라는 생각이 들어 선뜻 손을 대기가 힘들었다. 그래서 막상 마음을 먹고 첫 장을 펼쳤을 때 너무나 쉬운 문체와 내용에 오히려 놀라고 말았다.
이 얇은 책 안에는 미크로메가스,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라는 두 개의 짧은 이야기가 들어 있다.
미크로메가스는 SF, 캉디드는 여로형 소설의 형태를 띠고 있는데 두 이야기 다, 쉽게 읽히는 내용 안에 인간에 대한 깊은 철학과 비판이 있다는 것이 마음에 들었다.

미크로메가스는 우주 곳곳을 여행 다니는 어떤 외계인에 대한 내용이다. 그는 인간은 미세한 생물로 보일 정도로 아주 커다란 몸을 가지고 있다. 그런 그가 여기저기 여행 다니다가 지구에 당도하게 된다. 그는 지구에는 생물이 살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다가 바다를 헤엄치는 커다란 고래를 보고 저것이 지구의 주인이라고 짐작을 한다. 그리고 현미경으로 봐야만 확인을 할 수 있는 인간들을 발견하고는 그들이 생각과 영혼을 가지고 있지 않은 미물이라 여긴다.

문득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리들도 말을 하지 못하는 동물들을 보고 저들은 그저 본능적이며 영혼이 없을 거라 지레 짐작을 하고는 한다. 인간은 대화와 생각을 할 수 있는 생물이기에 다른 어떤 것들보다 뛰어나며 위대한 존재일 것이라고.
우리가 하는 생각을 거인들이 하는 것을 보니 인간인 나의 입장에서는 참 우습게 생각이 되었다. 어쩌면 이렇게도 닮았는지. 생각을 하는 생물이란 다 그런 걸까.

캉디드 혹은 낙관주의는 주인공인 캉디드가 사랑하는 연인에게 키스를 했다는 죄목으로 몰매를 맞고 쫓겨나는 장면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그 때부터 캉디드의 고난이 시작된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하지만 만약 쫓겨나지 않았더라면 그 자리에서 살해당했겠지.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 볼 결단을 내리기도 전에.
이야기 내내 현재는 최선을 향해 서서히 나아가고 있는 중이다. 라는 말이 나오는데 문득 그 말이 맞는 것도 같다는 생각 든다.

우리는 어떤 일이 생기면 그 일이 생기지 않았더라면 좋았을 것에 대해 무심결에 생각하고는 한다. 하지만 반대로 그 일이 생겼기 때문에 피할 수 있었던 나쁜 일도 더러 존재한다.
비록 우리 스스로가 보기에 현재란 고난과 역경의 연속일지 몰라도 넓게 본다면 우리의 운명은 우리를 더 나은 곳으로 안내하고 있는 중인지도 모른다.

캉디드는 좋은 일과 안 좋은 일을 번갈아 경험하게 되는데 그러면서도 스승님이 가르쳐 주신 현재는 최선을 향해 나아가는 중이라는 낙관주의 원칙을 고수한다. 가끔 바람에 휩쓸려 가는 낙엽처럼 흔들릴 때도 있지만 그래도 그 생각을 끝까지 고수하는 점이 참 멋있는 사람이라고 느꼈다.
부정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것은 오히려 쉽다. 그냥 자신을 놔 버리면 되는 거다. 그런데 안 좋은 일을 겪으면서도 긍정적으로 생각하기란 왜 이리도 어려운지.
사실은 소리 내어 신을 저주하고 나 자신을 저주하고 나를 그렇게 만든 이 세상 모든 것들을 저주하고 싶어질 때가 한두 번이 아니다. 그런데 캉디드는 간혹 절망은 할지언정 그것에서 또 다른 희망을 발견하고는 한다.

마지막에는 결국 그 생각이 통했는지 어쨌는지는 모르겠지만, 어느 순간 나 또한 현재는 최선을 향해 나아가는 중이라는 생각에 동의를 하고 말았다.

일견 동화 같기도 하고 그 안에 담겨 있는 의미야 어쨌든 유쾌하게 읽히는 소설이라는 점을 제외하고라도 이 책이 마음에 드는 또 하나는 짧게 이어지는 구조라는 점이다. 간결하고 빠른 문체와 더불어 커다란 제목 안에 작은 제목들이 짧은 간격을 두고 이어진다.
볼테르의 소설은 처음 읽어보는데 그 방식의 소설을 좋아해서 개인적으로 마음에 들었다.

"정말이군요."
캉디드가 말했다.
"이 일에는 무언가 악마적인 것이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중에 붉게 빛나는 무언가가
배 가까이로 헤엄쳐오는 모습이 그의 눈에 들어왔다.
사람들은 그게 무엇인지 보려고
구명정을 타고 나갔다.
그것은 캉디드가 잃어버린 양 한 마리였다.
캉디드는 엘도라도의 커다란 다이아몬드를 가득 실은
양 백 마리를 잃은 슬픔보다
그 양 한 마리를 찾은 기쁨이 더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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