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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인문학을 묻다 - 인간과 세상을 통찰하기 위한 청춘들의 유쾌한 질문
백두현.백하은.이영창 외 지음 / 휴앤스토리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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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춘 인문학을 묻다-인간과 세상을 통찰하기 위한 청춘들의 유쾌한 질문

 

지은이: 백두현·백하은·이영창·정민주·김순영·박이담·홍준호 

초판 1쇄 발행: 2017.09.04, 

휴앤스토리 출판사,

242페이지

 

 

최근 인문학이라는 말이 참 여기저기 많이 등장한다. 인간에 대한 이해와 각각의 분야를 접목시켜 새로운 시선으로 바라보겠다는 접근 방식은 좋지만, 글쎄다 싶을 때가 많다. 뭐 하나 확실하지 않고 두루뭉술하게 엮어놓았다는 기분이 들어서다. 나 역시 본 전공이 국어국문학이고 복수 전공으로 신문방송학을 전공하긴 했지만 인문학도 사회학도 완전히 깊이 있게 전공했다는 생각은 잘 들지 않았고 여러 책들을 읽어보긴 했어도 인문학의 저변에서 자꾸만 맴도는 기분은 지워지지 않았다. 나라는 사람에 대한 이해도 쉽지 않았기에 인간에 대한 이해는 아직 멀었다고 생각했던 것이 더 정확할는지도 모르겠다. 되려 어렸을 때의 나는 이것을 좋아하고, 저것은 어렵지만 궁금하고, 그건 하기 싫었다. 이렇듯 분명하게 나라는 사람의 취향이나 판단에 솔직한 이 시기를 지나, 한 살 한 살 나이들어갈수록 나에 대해 잘 안다고 말하기 어려워졌다. 다른 사람의 생각에 민감하게 반응하는 성격도 성격이겠지만, 주변의 시선이나 부모님의 기대 등에 나를 재단하는 것이 버릇되고 나니 이제는 정말 나 자신을 솔직하게 바라보는 방법을 잊어가는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나도 잘 알지 못하는데, 어떻게 인문학을 공부할 수 있을까. 내 협소한 시선에서 인문학 서적을 본들 무슨 도움이 될까. 이런 생각들 때문에 인문학은 내게 어렵고도 두려운 학문이다. 어디서부터 손을 대야할지도 모르겠고, 자세히 알고나면 그를 알고 난 나에게 다시금 (지금보다는) 좀 더 나은 인간이 되어야 한다고 재차 재단'당할' 것 같은 생각이 들어서다.

 

그렇지만 궁금하고 알고 싶은 생각이 계속 들어, 이 책을 펼쳤다. <청춘 인문학을 묻다>에서는 인문학의 사전적 정의를 책 말머리에 가장 먼저 보여준다. '인간의 사상 및 문화를 대상으로 하는 학문 영역'이 그것이다. 어떤 시대든 인간은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늘 고민해왔고, 각 분야를 놓고 '왜?' 그리고 '어떻게?' 라는 질문에서 늘 자유롭지 못했다. 나 역시 그러한 보통의 인간이어서 그 질문을 수없이 던지곤 했지만 쉽사리 정리되지 않았었다. 그랬기에 누구나 이름만 들으면 안다는 고전 몇 가지부터 시작하여 최근 쓰여진 인문학 서적을 읽어보았는데, 각 유명인사들의 '왜'라는 질문과 '어떻게'라는 (주관적) 방법을 나열해 놓았다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다만 그들의 사유하는 방법을 엿보았다는 기분이 들었고 몇 가지는 나에게 직접 적용해보기도 했는데, 그는 단지 그 사람이었기 때문에 잘 적용된 것이기도 했고 혹은 아, 정말 이렇게 하니 명쾌하다는 생각이 든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이번 책, <청춘 인문학을 읽다> 역시 어떻게 구성되어 있을지 읽기 전부터 궁금했었는데, 이 책을 소개하자면 각 분야의 인사들에게 질문하고 그에 대한 답변으로 짜여 있다. 쉽게 말하자면 여러 인사들의 인터뷰를 딴 내용을 엮어 만든 책인데, 그 분야는 다음과 같다. 인문운동(이남곡), 국문학(마광수), 한문학(김언종), 정치평화학(이재봉), 법학(류권홍), 신학(김기석), 원불교학(박맹수), 동양철학(김학권), 서양철학(주광순), 물리학(장회익), 경제·정책학(박재완), 문화인류학(이정덕), 건축학(이재훈) 등이다. 전체적으로 그들의 생각은 명쾌하지만 아무래도 저마다의 관점을 엮어놓은 책이다보니 나에게는 와닿는 부분과 그렇지 않은 부분이 섞여있었다는 느낌. 말머리에서도 그에 대해 염려(?)해서인지 미리 밝혀놓음을 볼 수 있었다.

 

말머리에서
책은 각 인문학 분야에 대한 20대들의 질문, 그리고 각 분야 교수님들의 답변들로 구성되어 있다. 교수님들이 그 학문의 대표성을 띄는 것이 아닌 개인적인 의견을 낸 것임을 밝힌다. 인문학에 호기심이 생겼지만, 어디서 어떻게 접근해야 할지 모르는 독자들이 있으리라 생각한다. (우리가 그랬던 것처럼) 그런 고민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여기서 책을 멈추지 마라.
20대의, 20대에 의한, 20대를 위한 인문학 여행, 여러분과 함께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런 부분에 유념하며 책을 한 장씩 넘기면서 인상적이었던 것은 바로 '일'에 대한 내 요즘의 고민과 맞닿은 내용들이었다. 최근 나는 일을 하면서 즐겁게 일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지 않고 쉼이 필요하다고 느낄 때가 많았다. 즐거움보다는 의무감과 부담이 쌓이고 있다는 마음에 힘이 들었다. 그런데 "사람은 왜 일을 하나요?"의 답변으로 적혀 있던 몇 줄이, 눈에 띄었다. "노동은 신성한 것이 아니다. 노동이 즐거우려면 상품으로서 경쟁을 강요당하는 것으로부터 적어도 '자기 실현의 노동'으로 되어야 한다. 자기 실현 과정으로 되기 위한 조건은 '자발성', '전념', '즐거움'이 보장되는 것이다. "
맞다. 이 일을 시작했을 때와 달라진 건 나뿐이다. 처음 시작했던 나는 왜 즐거웠고, 지금의 나는 왜 그렇지 않은가? 그건 내가 일을 사랑하는 마음에 변화가 있어서는 아니었을까? 책에서는 다시금 '사랑'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사랑은 그 출발과 목표가 '받아들임'이에요. 내가 원하는 방향으로 끌고 가는 것은 집착이지 사랑이 아니에요. '받아들임'의 시작은 그 대상이 우선 자기 자신이에요. 자신에게 주어진 환경이나 조건을 받아들이는 것이지요. 상하나 우열에서 벗어나 자기의 지닌 맛을 그대로 받아들인다면, 그 과정에서 불평등한 수직 사회에서의 왜곡되어온 관념에서 해방된다면, 자신을 사랑할 수 있게 될 것이에요.

 

돌이켜보면 나는 나의 꿈을 실현한다는 생각에서 점점 벗어나 쳇바퀴 돌 듯 되풀이 되는 일상을 그냥 처리해가고 있던 내 기계적인 태도 때문에 힘이 들었던 거다. 남이 생각한 나대로 끼워 맞추며 살아왔던 날들... 의무감에 떠밀려 힘들었던 날들... 상대방이든 나든, 누군가가 원하는 방향대로 무작정 끌고 나가는 것이 사랑이 아니라 집착이듯, 나에게 주어진 환경과 조건을 받아들이고 그 안에서 내가 할 수 있는 것을 찾고, 좀 더 나아질 수 있는 방법을 찾고, 힘이 들고 어려운 것이 있다면 그를 잘 조율해 나가야 했던 거다. 다른 이가 원하는 대로 나를 무작정 끌고 나가는 것은 건강하지 않은 방법이었다. 나의 마음을 잘 들여다보고 도닥여 주며 다잡아 나가는 편이 나를 사랑하며 일하는 방법이자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건강하게 일하는 방법임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어찌보면 당연하고 간단한 말이다. 그러나 혼자 곰곰이 생각해보고 나를 돌아볼 여유가 없었던 요즘의 내게는 울림 있는 말이었다. "많이 힘들었지? 힘들면 좀 내려놔도 괜찮아. 잘 하지 않아도 괜찮아." 나 자신에게 수천번 되뇌었지만 나에 대한 합리화 아니냐며 와닿지 않았던 날들. 이렇듯 지쳐있던 내게 해 준 누군가의 이 말이 큰 사랑과 존중으로 다가왔던 지난 날의 기억이 새삼 떠올랐다. 그리고 책에 쓰인 이 글자 몇 줄이 어깨를 도닥이며 건네는 응원의 한 마디 같다고 생각했다.

 

유학에서 말하는 '삶의 의미' 중
인간은 인, 의, 예, 지 등의 품성을 지니고 있어, 저마다 이것을 심화시키고 완성해야 하는 임무가 주어져 있다. 결국 유학에서 보는 삶이란 인, 의, 예, 지를 최대한 잘 발현하며 살아가는 모습일 것인데, 결국 이걸 다 합치면 '인' 하나로 귀결된다. 너와 나 사이에서 최선을 다하는 게 인이라고.
모든 인간 관계에서 최선을 다하라는 말을 부연하면, 교수로서 열심히 수업하는 게 인이고, 학생은 열심히 배우는 게 인인 것이다. 즉 각자 주어진 위치에서 최선을 다하는 것. 이는 명분을 다하자는 말이기도 하다. (유학의 핵심 내용인 명분주의) 아버지, 임금, 어머니, 자식 다 명칭이 있는데 그것이 명(名)이고, 아버지가 할 일, 임금이 할 일, 어머니가 그리고 자식이 할 일에 대한 것이 바로 분(分)이다. 이는 다시 말하면 저마다의 할 일을 다 하라는 것.

 

이 구절이 참 인상적이었다. 나의 명(名)대로 본분을 다 해나가는 것이 당연하지만 또 얼마나 힘든 일인가, 라고 생각하기에 그렇다. 각 사람이 자신의 직분을 다하고 세상에 나가 나의 온 힘을 다하여 세상이 좋아지는 데 힘쓴다면 그야말로 유학이 말하는 이상적 세계일 것이지만, 그렇게 명확하게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보고 힘쓸 수 있는 이가 이 바쁜 세상에 얼마나 될까. 그래서 책을 읽는 습관을 들이는 것은 참 중요한 일 같다. 나를 들여다보지 못해 갈팡질팡하고 마음 어려워하던 내가 이 책을 읽으며 위로받은 감정이 들었듯 갈증을 느끼는 무언가가 있다면 책을 읽으며 저자와 대화해보는 것이다. 인터뷰하는 교수님들이 20대에게 강조하고자 하는 바 중 가장 많은 것이 바로 독서였다. 학창 시절에는 좋은 성적을 받고, 시험에 통과하기 위한 목적이 강했던 독서였다면 이제 20대 중반에서 후반으로 넘어가기 시작하는 이 즈음에서는 나를 좀 더 자세히 들여다보기 위한 독서가 필요한 시점 아닐까. 독서의 필요성은 아주 어릴 때부터 수없이 들어왔지만, 힘들 때 나 자신을 들여다보는 방법이라 생각하니 무언가 독서해야 하는 이유에 좀 더 납득되는 기분이 들었다.

 

철학에 관하여
가고자 하는, 갖고자 하는 가치나 신념이 얼마나 바람직하고 얼마나 의미가 있는지, 또 옳은 것인가를 판단하기 위해서는, 이런저런 생각들을 많이 접해봐야 해요. 그래서 비교적 합리적이고 타당하다고 판단되는 생각을 받아서 정리하고, 나름대로 의식 속에 쟁여놓고 이것을 근거해서 살아가는 것이죠.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올바르고 가치 있는 참된 삶을 살기 위해서, 철학을 공부하는 것은 필수 입니다. 즉 나의 삶을 참되고 바르고 가치 있고 의미 있게 살아갈 수 있게 하는 가장 중요한 기능과 역할을 하는 것이 철학이에요.

 

책에서는 '나'라는 사람이 단독으로 존재한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실은 우리는 전체와 결부되어 있는, 쉽게 말하면 관계하고 있는 결합체 속에서의 개인이라고 하는 설명이 많이 드러나있다. 철학 부분을 읽을 때 역시 이웃의 삶은 이웃의 삶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라 나의 삶과도 직결되어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라고도 했었고. 작은 불꽃이 크게 번져 어떠한 결과를 낳았는지 보았던 최근의 경험을 돌이키면, 실은 나의 아주 작은 결심, 계획, 실천들이 아주 중요한 것일지 모른다는 생각이 스쳐지나간다. 나라는 개인이 실은 참 중요한 사람이었다고, 힘내라고 전하는 메시지가 들리는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열심히 일하고, 즐겁게 일하고, 잘 살아가려면 나를 어떻게 다잡아나가야 할까 하는 고민에 이 책을 집어들었지만, 나 자신이 잘 서 있어 누군가가 또 좋은 영향을 받고, 그 다음의 누군가가 또 좋은 영향을 받는... 선순환이 일어날 수 있다는 기대감이 이 순간 물씬 인다. <청춘 인문학을 묻다>는 청춘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해보았을 고민을 인문학이라는 트렌드에 묶어 제시했지만, (나와 같은) 읽는 누군가로 하여금 위안이 되고 용기를 주는, 뭐 그렇게 크게까지 나가지 않고 쓰는 이에게 배움이 되고 듣는 이에게 인문학의 궁금증을 불러 일으켰다면 그것만으로도 좋은 것이 아닐까 싶다. 자기 앞의 생에 똑같은 경로란 존재하지 않을 것이고, 비슷할지언정 똑같은 삶은 없을테니 나에게 위로를 준 이 책이 누군가에게도 즐겁게 읽히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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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리의 심장
김하서 지음 / 자음과모음 / 2017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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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하서, <줄리의 심장>, 자음과 모음, 274page, 초판1쇄 발행일: 2017년 8월 25일, 정가: 13,000원

 

  인간은 저마다의 행복과 불행에 잠식당한 존재라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저마다 행복의 맛을 어느 정도 알고 있기 때문에 그러하다. 다시 풀어 말하면.. 사람이든, 물건이든 그 어느 '존재'로 인해 행복을 느꼈다면, 그것이 부재했을 때의 공포 혹은 상실감을 느낄 자신의 모습을 먼저 상상해버리기 때문이다. 우리는 얼마나 가진 것을 잃기 싫어하며 두려워하는가. 평화롭고 안온한 일상에 금이 가는 무언가를 마주했을 때 우리는 전율한다. 나의 행복을 앗아가지 마세요. 나를 내버려두세요. 그냥 이렇게 살도록 말이에요.

 

  작가 김하서의 <줄리의 심장>은 사람의 자그마한 불안을 계속해서 건드려 그 불안에 결국에는 잠식당하고야 마는 인물들을 보여준다. 각 단편은 짧은 스토리 안에 저마다 다른 성별과 연령의 주인공들이 느끼는 불안과 공포, 혼란의 감정들을 다루고 있는데 그 어떤 스토리 하나 아! 끝이 났구나, 하고 명확하게 맺음하는 스토리가 없다. 열린 결말 같지만 그 끝맛은 달달하지도 않고, 쓰거나 짜지조차 않은, 텁텁하고 더는 맛볼 생각조차 들지 않는 어떤 것이다. 체념하게 하는 맛이라고 해야할까. 더 가보았자 뭔가 더 나아질 것 같지 않다는 생각이 강하게 드는 미래라도 결국엔 가고 말아야 하는 걸까. 끝을 아는데도.

 

 

앨리스의 도시 (12p)
순간 여자와 처음으로 눈이 마주쳤다. 그는 본능적으로 무언가 깨달았고 심장은 얼어붙은 듯 잠시 박동을 멈추었다. 여자의 눈동자가 이상했다. 보통 살아 있는 사람들의 눈동자에서 무언가 중요한 하나가 사라진 섬뜩한 눈동자였다. 분명히 여자의 눈은 그를 향해 있었지만 여자는 동시에 그를 보고 있지 않았다. 열려 있지만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는 혹은, 다른 것을 보고 있는 듯한 여자의 동공은 탁하고 소름끼쳤다. / 무언가 잘못되고 있다는 느낌이 등 뒤로 엄습했지만 그것이 구체적으로 무엇인지 알지 못했다. 그는 당황스러웠지만 아무 일도 아니라고 주문을 걸듯 태연하게 손으로 이마를 쓸었다. 손바닥에 축축한 땀이 배어 나왔다.

 

 

버드 (39p)
딸아이는 RS 바이러스에 감염되었다.
그는 그것이 무엇의 약자인지 어떤 종류의 바이러스 균인지 아무 정보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아이의 치료를 담당하고 있는 중년의 여의사는 의사들 특유의 차갑고 거만한 얼굴로 아무 설명도 해주지 않았다. 좀 두고 보자. 이제 균이 아래로 퍼지면서 폐가 나빠질 것이다. 앞으로 더 나빠질지도 모른다. 신생아 패혈증과 감염 파트의 전문의인 그녀는 마스크를 쓴 채 대충 그런 말들을 늘어놓고 지체할 시간이 없다는 듯 황급히 자리를 떠났다. 두고 보자. 제길, 의사라는 작자들은 언제나 똑같이 할 말이 그것뿐이지. 언제까지 두고 보자는 건가. 숨이 끊어지는 순간까지? 그는 알 수 없는 적대감에 휩싸여 자기도 모르게 주먹 쥔 손을 부르르 떨었다. 억울하고 부당하다는 생각에 그의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었다. 그는 무기력하게 몸을 떠는 것 말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다.

 

 

  그녀가 그리는 각 단편 속 감정들은 너무나도 생생하다. 누구나 한 번쯤 느꼈을 당황스러움, 초조함, 안타까움, 그리고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 속에서 자신이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알았을 때의 무력감과 무기력한 자신에 대한 분노, 크게 잘못한 것이 없음을 아는데도 미워하지 않으면 견딜 수 없음에 나오는 상대에 대한 미움까지 세세한 감정들을 책 속에 그려넣었다. 그리고 장면 장면 하나가 눈 앞에 그려진 듯 생생해서 읽다보면 손에 축축이 땀이 배어나오는 것 같다. 아, 저 상황을 끊고 단호하게 갔으면 좋겠다. 아, 저 이는 아무 것도 할 수 없는 자신을 미워하는구나. 안타깝다. 그에게로 가서 등을 두드려주고 싶다. 위로는 되지 않겠지만.. 하는 감정의 편린들이 얽히고 설킨다. 그 다음 단편, 다음 단편으로 갈 수록 불안은 더 쉽고 빠르게 엄습하고 감정은 요동친다.

 

 

유령 버니 (101p)
그는 뼛속까지 파고드는 냉기와 혼자라는 외로움에 몸을 떨며 그 새벽 전화를 걸 누군가를 떠올렸지만 아무도 떠오르지 않았다. 그제야 깨달았다. 자신은 유령도 곁에 없는 드넓은 우주에 영원히 혼자 버려졌다는 것을. 그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필사적으로 아내의 휴대폰 번호를 찾아 눌렀다. 귓속을 파고든 것은 지금 거신 번호는 없는 번호라는 차가운 기계음뿐이었다. 건너편의 콘크리트 건물에서 소름 끼치는 바람 소리가 들려왔다. 사방을 둘러봐도 보이는 것은 짙은 어둠뿐이었고 그도 어둠 속에 갇혀 더는 보이지 않았다. 그는 어둠 속에 완벽히 고립되었다. 그 모든 것들에서 벗어나 어둠 자체가 되는 것, 그것은 그가 그토록 열망하던 일이었지만 조금도 기쁘지 않았다.

 

 

줄리의 심장 (106-109p, 부분 인용)
라연이 침입자처럼 고요한 풍경을 찢고 훌쩍이며 걸어나왔다. 나는 딸아이의 헝클어진 머리칼을 보며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몰라 멍하니 있었다. 다음 순간 짜증이 났고 마음이 조급해졌다. 울음소리에 라희마저 깨어나 평화로운 아침이 유리창처럼 깨져 버릴까봐 신경이 곤두섰다. ... 그날 아침 햇살은 여전히 찬란했지만 평온한 일상은 박살이 났다. 서재의 문이 활짝 열린 채 첫째 라연이 어깨를 떨며 비명을 지르듯 울다가 딸꾹질을 했다. ... 라연은 연극이라도 하듯 인형처럼 힘없이 주저앉더니 눈동자가 완전히 돌아간 채 하얀 거품을 게워냈다. 연극이 아니란 걸 알면서도 멍청한 관객처럼 물끄러미 아이를 내려다보았다. 경기를 일으키는 다섯 살짜리에게서 그 이상의 무얼 기대한 걸까. ...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라연을 버려 둔 채 라희를 안은 것도 잊고 나쁜 유혹에 이끌리듯 털 뭉치에게 다가갔다. 하얀 털과 대비되는 붉은 가슴이 적나라하게 활짝 열려 있었다. 참았던 신음이 잇새로 흘러나왔다. 내 눈은 화려하고 잔혹한 풍경을 뇌리에 각인 시켰다.

 

 

  뼛속을 파고드는 외로움을 어떻게 저렇게 생생히 표현했을까. 간절히 이 외로움에서 벗어나기 위해 이혼한 전처의 핸드폰을 누르고, 그 이후 들려온 안내 음성에서 더 지독하게 외로워지는 남자의 뒷 모습과 그를 삼킨 어둠이 너무나도 극명하게 살아난다. 찐득한 슬픔과 소름끼치는 적막이 생경하다. 단편 <줄리의 심장> 역시 한 순간 사진처럼 찍혀 눈으로 박혀 드는 그 장면 장면들을 캐치해내는데, 자신의 몸을 제어하지 못하고 어딘가로 떨어질 때, 가령 깊은 물 속에 빠져 잠겨들 때 머릿속을 스쳐지나가는 주마등처럼 기억 하나하나가 눈을 통해 머릿속으로 박히는 장면은 가히 인상적이다. 이성적으로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들이 연달아 반복될 때 인간이 느끼는 당혹감에 대한 차분한 표현 표현들이 가만히 읽혀 들어올 때 읽고 있는 나 역시 당황스러워지는 느낌이었다.

 

 

디스코의 나날 (249p)
제발, 나를 내려줘! 율은 악을 쓰듯 소리친다. 그러나 아무 대답이 없다. 그녀는 눈을 질끈 감고 악몽에서 깨어나려고 이를 꽉 깨문다. 그리고 깨닫는다. 이 지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악착같이 잡고 있는 두 손을 놓아버리면 그만이다.

 

 

  단편 <파인애플 도둑> 마지막에서 반짝, 빛나듯 했던 주인공의 감정 외엔 책의 끝머리까지 아무도 행복하지 못한 채 어둠 깊은 곳으로 침잠해 들어가는 기분을 지울 수 없었던 이 책, <줄리의 심장>을 통해 주인공 각자의 복잡다단한 심사 속에서 유영하는 '불안'의 여러 얼굴들을 직면할 수 있었다. 각 개인이 느끼는 행복의 실마리는 어느 정도 비슷하다고 느껴왔지만 불안 역시 그러할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아 왔었는데... 아주 사소하고 하찮은, 혹은 치졸해서 입으로 꺼내기조차 그러한 아주 작은 불안의 감정들까지 꺼내 펼쳐보여서 그런지 장면 장면에 이입하면서도 왠지 모를 공감이 되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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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움받을 용기 (반양장) - 자유롭고 행복한 삶을 위한 아들러의 가르침 미움받을 용기 1
기시미 이치로 외 지음, 전경아 옮김, 김정운 감수 / 인플루엔셜(주) / 2014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사람이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하는 것은 굉장히 당연한 일이지만 그 상처를 감내하고 성장할 때 얼마나 많은 것이 보이는지를 이 책을 통해 좀 더 객관적으로 생각할 수 있게 되었다. 동시에 그 객관성은 내게는 무척 부족한 것이었다는 걸, 그리고 생각보다 나는 다른 사람의 시선에 의존하는 인간이었음을 다시 한 번 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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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나 카레니나 세트 - 전3권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지음, 박형규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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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으로 우선 읽고, 영화로 한 번쯤 더 보고 싶을 책. 깊이있는 문장이 인상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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