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복수
안드레아스 그루버 지음, 송경은 옮김 / 단숨 / 2017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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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의 복수, 안드레아스 그루버 지음, 송경은 옮김, 자음과모음 출판사, 초판 1쇄 발행일: 2017년 9월 18일, 523page.

 

추리 소설에는 전지적 독자 시점-다시 말해 독자들에게 범인이 누구인지 먼저 공개한 상태-에서 재미있게 책을 읽을 수 있도록 이끄는 힘이 있다. 개인적으로 시시각각 벌어지는 치밀한 스토리에 빠져들게 하는 힘은 바로 작가의 '필력'에 있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분야의 책도 그렇지만 특히 추리소설을 읽을 때면 자극적 소재와 상황 설정 때문인지는 몰라도 작가의 글을 이끌어가는 힘이 더 도드라지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 안드레아스 그루버의 소설은 이번 기회를 통해 처음 접해보았는데, 다음 편을 연이어 읽고 싶을 만큼 그 스토리에 빠져들었다. 심장을 옥죄는 듯한 느낌을 받았던 가장 기억에 남는 작품으로 기시 유스케의 소설, <검은 집>이 있는데 그 새벽 내내 소설의 여운으로 소름이 끼쳐 잠을 이루지 못했던 것이 아직까지 생생하다. 이 책이 그 때의 기억을 건드린 것을 보면 아무래도 스토리에 푹 빠져 긴장한 상태로 읽은 모양이다. 그만큼 몰두하게 만드는 책, 작가의 필력 뿜뿜한 이 책 <가을의 복수>에 대해 좀 더 자세하게 다뤄 본다.

 

사건은 독일 라이프치히의 어느 강물에서 열아홉 살 '나탈리 주코바'의 시신이 발견되면서, 주인공인 '발터 풀라스키' 형사가 그 현장을 보존하고 증거 자료를 수집하기 위해 사건 현장으로 출동하면서 본격적으로 두드러진다. 그가 파악한 시체의 특징은 첫 번째, 관절 마디마디가 모두 부러져 마치 마리오네트의 인형과 같은 것. 두 번째, 온 몸의 피가 모두 빠져나간 상태인 것.

나탈리의 어머니, '미카엘라 주코바'는 동생인 '다나'와 함께 집을 떠나 전화 통화로만 근근이 연락하던 첫째 나탈리가 싸늘한 주검이 되어서야 만나게 된다. 딸이 살해된 이유를 경찰에게 묻지만, 돈을 벌기 위해 매춘을 하다 마약 중독으로 죽었을 뿐이라는 경찰의 설명은 아무래도 석연치 않다. 현장 출동팀 수사관인 풀라스키 형사를 만난 미카엘라는 그에게 둘째딸 다나를 찾아달라고 요청하지만, 천식 발작이 심해져 범죄수사국에서 조기 은퇴하고 아내 없이 외동딸을 키우는 풀라스키 형사였기에 적극적으로 그녀를 도우려 하지 않는다. 하지만 딸이 죽게 된 이유가 무엇인지 알아내기 위해 그리고 행방이 묘연한 둘째딸 다나를 찾기 위해 재혼한 남편이 모아놓은 돈과 권총을 훔쳐 달아나고, 마약중독자 소굴로 들어가는 미카엘라의 위험천만한 모습을 본 풀라스키 형사는 걱정스러운 마음에 그녀와 함께 용의자의 행적을 밟아나가기 시작한다. (죽은 아내를 떠올리게 하는 미카엘라의 모습이 풀라스키 형사를 더욱 그렇게 만들었을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두 가지 짚고 넘어가고 싶은 부분이 있다. 발터 풀라스키 형사가 소설의 주인공으로서 사건을 추리해나가는 과정에 있어 미카엘라의 단독 행동이 방해가 된다는 점이다. 돈과 총기를 가지고 달아난 미카엘라를 신고한 남편 '티모' 때문에 경찰에 잡힐까 풀라스키를 버려둔 채 그의 차를 훔쳐 달아나기도 하고, 단서라고 생각되는 인물을 찾기 위해 맹목적으로 그를 쫓아 사라져버리기도 해 풀라스키의 분노를 사는 그녀. 그러나 큰 그림을 보면 되려 그녀의 고집이 실마리가 되어 다음 단서를 찾게도 하고, 풀라스키 형사와의 협응력도 점차 좋아져 결국에는 범인을 잡는데 일조하는 인물이 되는 희한한 구성.
두 번째는 두 사람이 함께 단서를 찾음과 동시에 용의자의 시선을 조명한다는 점이다. 용의자는 암에 걸린 의사로, 본인의 상태가 호전되기 힘든 상태라는 것을 알고 있다. 똑똑하고 이성적인 사람이지만 생명을 마음대로 조절하지 못하는 인간이기에 '신비주의'를 탐하는 그. 

 

 

p.371~372
람베르크는 책장을 따라가다가 2절판 책 몇 권을 빼서 풀라스키 앞에 있는 책상 위에 내려놓으며 즉흥적으로 읊어댔다. "전갈은 앞 몸통에 집게발이 있고 꼬리처럼 생긴 꽁무니에 독침이 있는 동물이다. 전갈은 대부분 숨어 있다가 밤이 되면 기어 나와 활동하는 야행성이며 육식을 한다. 점성학적 관점에서 볼 때 전갈은 삶과 죽음, 그리고 생성의 비밀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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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니까... 3년 전에는 출생, 2년 전에 탈피, 1년 전은 아직 모르는 상태이고, 올해는 부활인 셈이네요." 풀라스키가 순서대로 요약했다. "그렇다면 살인범은 그와 같은 탈바꿈에 완전히 사로잡혀 있겠군." 람베르크는 생각에 잠겨 신화학 사전을 들춰보았다. "기독교 신앙과는 무관한 것 같은데." 그가 중얼거렸다. "아시아 문화권과도 거리가 먼 것 같고, 이교나 주술 쪽일 듯 싶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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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레이스터 크롤리(20세기 초반 유럽을 떨게 만들었던 마법사로 끊임없이 배덕적인 마술 의식을 행함으로써 '세계 최대의 악인', '타락 마왕' 등의 악명이 붙었다)에게 전갈은 죽음과 흡혈 행위, 그리고 부활을 상징한다."

 

 

p.402
그는 천장에 달린 조명 스위치를 켰다. 두 팔을 뻗고 몸에 네온등을 쏘였다. 빛에 닿으니 따끔따끔했다. 인광 물질이 충전되는 느낌이 들었다. 빛이 저장되어 빛을 발하기 시작했다. 기막히게 될 것이다. 그는 인지했다. 느꼈다. 사실 의과대 학생이었을 때는 빛이 나는 문신을 믿지 못했지만 실제로는 항상 있어왔던 일이다. 학문이 한계에 다다르고 비참하게 실패하면 인간은 신비주의를 향한다.

신비주의는 답을 주니까. 적어도 그에게는 그랬다. 그래서 그는 이 길을 갔다!

그의 어머니는 그에게 대장암을 물려주었고 그의 유전자에 기생충 같은 종양을 심어주었다.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녀는 깨끗하지 못한 전갈이었으니까. 독침으로 그를 오염시킨, 동구권에서 온 탕녀였다. 그래서 그는 이민자의 피를 뽑았다.
그가 누군가 다른 사람에게 이런 얘기를 하면 아무도 모순에 담긴 독창성을 알아차리지 못할 것이다. 답은 아주 간단하다. 자기 어머니와 아주 흡사한 외국 매춘부들의 피가 필요했다. 동종 요법의 원칙에 맞는 방법이니까. 해마다 그의 몸에 문신으로 저장되는 독은 치료제를 함유하고 있다. 그는 다시 태어날 것이다. 더 강해질 것이다. 완전히 건강한 몸으로 말이다. 그런 다음 남미로 떠날 것이다. 그곳은 바로 위대한 붉은색 전갈 '캐리비안 블루'의 고향이었다.

 

 

 

범인인 콘스탄틴은 전갈이 되고자 한다. 암에 걸린 지금의 상황에서 벗어나 부활하는 전갈이 되어 남미로 떠나는 것만이 그의 목적이다. 그의 살해 동기는 바로 '부활'이다. 그래서 그는 독일 라이프치히, 체코 프라하, 독일 파사우 등을 거치며 사라져도 쉽게 눈에 띄지 않을 전갈자리의 매춘 여성들을 찾아 살인을 저지른다. 빛을 받으면 그를 흡수해 어둠 속에서 빛을 뿜어내는 유광 물질과 함께 여성들에게서 뽑아낸 혈액 앰플을 섞어 온 몸 구석구석에 전갈 문신을 넣는 그. 부활과 삶에 대한 의지로 살인을 저지르고, 그녀들에게서 채취한 혈액으로 문신을 새기는 그 모습에 오소소 소름이 돋음과 동시에, 이처럼 입체적인 인물을 구상해낸 작가의 상상력과 그를 표현해 내는 필력이 독자를 소설에 빨아들이는 힘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와 같이 첫째딸의 억울한 죽음을 밝히고 둘째딸을 찾기 위한 미카엘라의 집념이 결국엔 답을 찾는 실마리를 연달아 발견하게 한다는 구성 덕분에 미카엘라라는 인물에 대한 짜증이 끝으로 갈수록 온데간데 없어진다는 점이 왠지 재미있게 느껴졌고, 단서를 찾는 두 사람(미카엘라와 풀라스키)의 시선과 범인(콘스탄틴)의 시선을 교차하며 보여준다는 점이 큰 그림을 본 작가의 '신의 한 수'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다.

 

 

 

 

이 둘의 콤비만으로 이야기가 재미있게 풀려나갈 수도 있겠지만 아무래도 긴 스토리에 두 인물의 시각으로만 풀어나가다 보면 지루해질 수 있다. 그 부분을 위해 작가는 하나의 스토리를 덧붙여 냈다. 그 스토리의 주인공은 변호사 '에블린 마이어스'. 똑똑하고 자신감이 넘치며, 사랑하는 연인이자 사립 탐정인  '파트릭'과 함께 수년간 같이 일해온 그녀가 범인인 '로베르트 콘스탄틴'의 변호를 맡게 된 것이다.

그녀의 등장으로 긴장감이 더해진 것은 사실이지만 스토리를 풀어내는 데 있어 조금은 실망스러운 부분이 있었다. 첫 번째, 범인인 콘스탄틴의 변호를 맡게 된 이유가 단지 검사장인 '오스트로프스키'가 자신이 의뢰인을 변호하거나 거절할 권한을 마음대로 정하는 태도에 호승심을 느꼈기 때문이라는 것. 두 번째, 남자친구인 '파트릭'과의 감정적인 대립에 대한 묘사가 길어져 파트릭이 알아낸 범인의 중요한 단서가 파트릭의 죽음과 맞물려 답답한 형태로 풀려나갔던 것. 세 번째, 미카엘라의 도움으로 범인의 집에서 풀려나 끝 부분이 허탈하게 마무리 된 것. 개인적으로 이 세 가지가 읽는 내내 마음을 답답하게 하는 부분이었다고 털어놓음과 동시에, 다른 독자들에게는 이 요소들이 어떻게 느껴졌을지 궁금하기도 하다.

 

 

 

p.390~391
발걸음을 서두르면서 걷다 보니 다른 화면이 보였다. 현재 세계 인구수였다. 70억이 넘었다. 마지막 숫자가 초 단위로 올라갔다. 불현듯 미카엘라는 자신이 보잘것없는 미약한 존재라는 생각이 들었다. 딸아이와 카를라, 슬라빅 두 사람도 이렇게 엄청난 숫자에 미미하게 변화를 주었을 뿐이다. 규모로 본다면 두 사람의 생명은 중요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태어나고 죽고 태어나고 죽고... 세상은 회전목마처럼 계속 돌아간다. 아무일도 없었다는 듯이.

 

 

 

생명은 소중한 것이다. 그 아무리 많은 생명이 태어나고, 또 많은 생명이 진다 한들, 각각의 생은 태어나면서 주변의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미치고 또 그들의 마음 사이에 자리잡는다. 딸을 잃고 허무함을 느끼는 미카엘라의 심정과 그와 반대로 초 단위로 올라가는 세계 인구수의 대조가 두드러지게 표현된 이 장면이 내게는 무척 인상적이었다. 안드레아스 그루버의 전작 <여름의 복수>도 함께 읽어보고 싶다는 생각을 문득하면서, 감정을 마구 쏟아내지도, 호소하지도 않지만 깊은 슬픔이 느껴지는 인용문으로 글을 마무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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