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노바 - Genova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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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영화제에서 시간이 안 맞아 못 보고는 내심 개봉하길 기대했는데

소문도 없이(어쩜 내 귀가 먼 것인지도) 상영하고 있었다. 것두 가까운 극장에서.

 

콜린 퍼스는 뭘 해도 멋지지만,

아빠로서도 멋졌다. 그의 딸들로 예쁜 아이들이 캐스팅된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이다.

 

엄마가 자신 때문에 죽었다고 생각한 막내 딸은

(사실 인과관계만 보자면 맞다. 그 사고는 꼬마가 운전하는 엄마의 눈을 가린 탓에 일어난 것이므로)

밤마다 악몽을 꾸고 오줌을 지린다.

마침 제노바대학 강의를 제안받은 아빠는 그곳에서 잠시 머물자고 결정하고

제노바로 옮겨서도 가족들은 뭐 여전히 그대로다.

아빠는 애들에 메여있고 데이트조차 눈치보이고, 꼬마는 여전히 악몽 꾸고 오줌싸고

큰 딸은 그런 가족 분위기가 답답하고 자신의 아픔은 드러내지도 못하고.

그래도 환경이 바뀌면서 아이들은 새로운 환경에 적응하고,

엄마에게 받던 피아노 수업을 제노바에서 다른 이에게 다시 시작하고,

그렇게 시간이 지나 서로에게서 벗어나 서로의 시간을 갖던 때

꼬마가 사라진다.

서로 약속시간을 지키지 못했던 아빠와 큰 딸은 미친듯이 꼬마를 찾아헤메고

짠 듯 복잡한 도로 한복판에서 꼬마를 발견했을 때, 놀랐던 감정을 담아 격하게 포옹하는 순간.

바로 그 때다. 상처가 치유되는 순간.

가족 상실로 인한 아픔은 가족의 사랑으로 치유해야 한다는 뻔한 이야기일수도 있지만

옳지만 고루하고 답답할 수 있는 이야기를 부담스럽지 않게, 지나치게 옳게 전하지 않아서 좋았다.

그냥 담담하게 보여줘서.

 

상처, 지독한 고통을 넘어서기 위해 늘 상처에 직면해야만 하는 것은 아니다.

때론 그냥 시간을 보내기만 해도, 그냥 덤덤하게 일상을 살아내기만 해도 나을 수 있다.

지독히 이데올로기적이긴 하지만 가족의 사랑이 있다면

그리고 나는 그 가족 이데올로기의 '수혜자'니까.

굳이 가족간의 사랑이 아니더라도, 그 어떤 사랑 혹은 사랑의 기억 또는 공유만 있다면.

 

짧고 따뜻하고 좋다.

제노바를 환상적으로 보여주지 않아서, 이야기처럼 풍경도 그냥 담담해서

더 제노바에 가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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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주 - Paju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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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시네마 2관, 330석이 조금 안 되는 객석을 채운 건 열명이나 됐을까 말까

아무리 평일 낮이라고는 하지만, <질투는 나의 힘> 때와는 너무도 다른 반응이 생경했다.

물론 그때도 처음엔 그랬다지만...

개봉 3주차라고는 하지만 집 근처 극장에서는 찾을 수 없었고

CGV에선 처음부터 찾을 수 없었다.

<해피플라이트>나 <룸바>, <제노바>처럼 작지만 예쁜 외화를 상영하는 전용관을 갖고 있는

(압구정) CGV에서, 그런 멀티플렉스들이 아예 이 영화를 외면했다는 게 참...

이건 분명 나의 해석과잉 혹은 피해의식 또는 고착된 분노인지도 모르겠지만

<파주>가 고전하는 것이 이 정권과 전혀 상관없지는 않을 거라는 의심을 떨칠 수 없었다.

박찬옥 감독의 영화를 기다려온 사람이 적지 않다고 믿고 있는 나로선..

그러고보면 <질투는 나의 힘>도 상영 마지막날 중앙시네마에서 보긴 했다.

그땐 아직 중앙시네마가 인디영화 위주로 편성하기 전. 그래도 그때도 작지만 큰 영화들을 많이 예뻐라 해주었다.

 

영화는, 시종일관 깔리는 안개만큼이나 답답했다.

안개가 많은 동네는 다 그런가?

그래도 안성에서 그 시절 우리는 더러 신났고 때때로 행복했는데.

물론 머무는 동안은 늪 같다는 생각이 지배적이었지만.

아님 개발 머시깽이 때문인가?

나에게 파주는 아빠가 한동안 혼자 지내셔야 했던 곳이고,

그때 파주 아빠방에선 MBC보다, KBS보다 북한방송이 훨씬 선명하게 잘 나왔고

여름이면 수해가 자주 생기는 곳이었고

가끔 부모님이 그때 파주에 땅을 샀어야 한다고 말씀하시는 곳일 뿐.

동화경묘공원의 찬 바람과 자동차극장의 잘못된 주파수와 해이리 초가을 햇살의 따뜻한 위로, 그리고 두부가게.

그뿐 아무 것도 아니다.

영화를 본 후에도 달라지는 것은 없다. 여전히 그 외 아무 것도 아닐 게다.

다만 동네 이름을 무겁게 기억하게 되겠지. 용산처럼.

 

"난 꼭 진실을 알아야겠어요."

"진실이야. 모두 다 진실이야."

그렇게 우직하게 진실을 만들어가고 외면하지 않는 사람이 있다는 게,

사실과 진실은 꼭 같지 않은 건데 그래서 더 오해하기 쉽고 때론 나쁜 결과가 빚어진다는 게

아팠다. 날카로운 칼에 벤 듯 아픈 줄도 모르게 슥, 어딘가 베어진 후 뒤늦게 느끼는 아픔 같았다.

영화가 끝난 후 뒷좌석에서 누군가 나직하게 박수를 쳤다.

몇 안 되는 사람들은 천천히 빠져나갔고

엔딩 크레딧을 다 보고, 음악을 다 듣고 일어서자 아저씨가 청소를 하려고 입구에서 기다리고 계셨다.

내가 먹은 과자 봉지를 주워갖고 나온 게 참 다행이란 생각이 들었다.

감독이, 그리고 영화사가 참 용감하다고 생각했다.

 

이제 짬을 내어 <굿모닝 프레지던트>를 보러가야겠다.

좀 웃는 영화가 필요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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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가니 - 공지영 장편소설
공지영 지음 / 창비 / 200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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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지는 이렇게나 예쁘고 산뜻한 데 말이야.
그 속에 담긴 이야기는 정말이지...
원래 소설이나 영화를 보기 전에 컨셉 정도는 알고 시작해도 줄거리는 일부러 모른 채 읽으려고, 보려고 하지만
아마 미리 줄거리를 알았다면 이 소설, 보내달라 하지도 않고 읽지도 않았을 게다.
너무 힘든 이야기니까. 

서유진 그렇다치고,
연두, 유리, 민수 그리고 다른 아이들 그렇다치고,
서유진이 보낸 이메일에 의하면 그들은 잘 지낸다고 하니까,
얼굴에서 웃음이 배어나오기 시작했고, 저녁밥을 먹게 되니 키도 쑥쑥 자라고 있다고 했으니까
아직 끝나지 않은 싸움에 계속 상처받고 일상이 고달퍼도
그들은 이미 작게나마 이긴 기억 혹은 경험이 있고 함께 있으니까, 홀더(홀로 더불어)에서 살고 있으니까 그들은 괜찮다치고,

강인호 어쩔꺼나?
'자본이 소화시키지 못하고 자본에 패배한 것도 모자라'
아내와 딸을 위해 스스로 선택한 것이었다고는 아지만 '야만에까지 패배당한' 그 기억을 고스란히 안고 있는 그는 어쩌나?
그 무게를 고스란히 지니고 살아가는 그를 보면서 아내는 아마 평생 고마워할 지 모르지.
아님 자기 덕분에 다시 일상에 안착할 수 있었으니 고마워하랄지도 모르지(그런 캐릭터 같지는 않지만 적어도 농담으로라도).
딸 새미는 과정 중에 무슨 일이 있었든 자기를 유복하게 키워준 아빠에게 언젠가 고마워하겠지.
하지만 소시민적임을 넘어서 패배당한, 도망친 기억을 고스란히 안고 살아갈
그의 외로움과 절망 아닌 절망, 그리고 소외감은 어쩔꺼나?
홀로이지도 못하고 더불어 함께이지도 못한 그에게 서유진이 편지로 전한 그네들의 고마움과 행복 기원이 과연 액면 그대로 가닿을까?
아마도... 그는 또 담배만 태우겠지. 

언젠가 하이닉스 이전 반대때문에 이천에서 방귀깨나 뀐다는 사람들이 저마다 나서서 삭발하고
물대포 쏘거나 말거나 상경투쟁하고 할 때마다
슬그머니 빠져주신, 그리하여 이 가정을 안전하게 지키고 우리를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게 해주신 아빠에게 진심으로 감사드린다.
그러므로 강인호의 선택이 틀렸다거나 고귀한 것을 지키지 못했다고 퉁박을 줄 수는 없지만,
그의 딸과 아내를 안전하게 품기로 한 것도 참으로 어렵고 힘든 선택이었겠지만
그리하여 그는 훌륭한 아빠로 기억되겠지만
그렇게 햇살이 화창한 날조차 와이셔츠 무리에서 안개를 떠올리는 그는 어쩌냔 말이다.

 




>

도가니
 

오랜 경험을 가진 그로서는 늘 하는 생각이었지만 나쁜 놈들이 아니라 어리석은 놈들이 수갑을 찬다. 맹수는 다리를 다친 사슴 한마리를 잡을 때도 결코 방심하지 않는 법이다.    p. 149

진실이 가지는 유일한 단점은 그것이 몹시 게으르다는 것이다. 진실은 언제나 자신만이 진실이라는 교만 때문에 날것 그대로의 몸뚱이를 내놓고 어떤 치장도 설득도 하려 하지 않으니까 말이다. 그래서 진실은 가끔 생뚱맞고 대개 비논리적이며 자주 불편하다. 진실 아닌 것들이 부단히 노력하며 모순된 점을 가리고 분을 바르며 부지런을 떠는 동안 진실은 그저 누워서 감이 입에 떨어지기만을 기다리고 있는지도 모른다. 이 세상 도처에서 진실이라는 것이 외면당하는 데도 실은 그만한 이유가 있다면 있는 것이다.
"생각해봐. 선생들 다 있는데, 애들 보는 눈이 있는데 어떻게 그럴수가 있었겠어. 아무리 말이야. 그리고 교직자잖아. 그냥 좀 집적거린 거겠지. 사춘기 아이들이니까 그걸 예민하게 받아들인 거고 말이야. 에잇! 사람들이 말이야. 그래도 그렇지 어린것들한테......"
누군가 말하면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였고 이강석 형제가 그렇고 그런 못난 남자들 중의 일부일 뿐이라고 얼른 판결을 내리고 싶어했다. 그러면 도시를 뒤흔든 사나운 소동은 햇살에 안개가 걷히듯 사라지면서 바다 쪽으로부터 부드러운 바람이 산들산들 밀려오는 것도 같았다. 사람들의 표정은 다시 온화해졌고 햇살은 다시 때뜻해진 것만 같아서, 다가오는 아이들의 대학입시와 김장과 물가와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두런거리며 할 수 있었다.   pp. 165-166 

서유진은 오래도록 그런 생각을 했다.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게 뭐지? 하고 누군가 물으면 그녀는 대답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건 거짓말이었다. 거짓말. 누군가 거짓말을 하면 세상이라는 호수에 검은 잉크가 떨어져내린 것처럼 그 주변이 물들어버린다. 그것이 다시 본래의 맑음을 찾을 때까지 그 거짓말의 만 배쯤 순결한 에너지가 필요한 것이다.
가진 자가 가진 것을 뺴앗길까 두려워하는 에너지는, 가지지 못한 자가 그것을 빼앗고 싶어하는 에너지의 두 배라고 한다. 가진 자는 가진 것의 쾌락과 가지지 못한 것의 공포를 둘 다 알고 있기 때문이다. 가진 자들이 가진 것을 빼앗기지 않으려는 거짓말의 합창은 그러니까 엄청난 양의 에너지를 포함하고 있어서 맑은 하늘에 천둥과 번개를 부를 정도의 힘을 충분히 가진 것이었다.
이 일련의 사태는 서유진에게 세상을 다르게 보는 법을 가르쳐주었다. 자신의 흠집을 가리기 위해 남에게 가하는 폭력은 무차별적이고 잔인했다. 원칙, 도덕, 양심의 소리 같은 것은 이 무진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쓰레기통에서 분리수거되어 변칙, 이득, 그렇고 그런 세상의 이치 등으로 재활용되고 있는 것 같았다.    pp. 246-247

사람들이 나보고 어떻게 그럴 수 있느냐고 묻기에 내가 대답했죠. 안개도 오래 겪다보면 앞이 보입니다. 이 세상은 늘 투명하고 맑아야한다고 생각하는 인간들에게 안개는 장벽이겠지만, 원래 세상이 안개 꼈다고 생각하면 다른 날들이 횡재인 거죠. 그러고 가만히 보면 안개 안 낀 날이 더 많잖아요?   ...
이렇게 차를 몰아도 법규 위반하는 놈들은 잘 잡아내죠. 지킬 거 다 지켜가면서 지키지 않는 놈들 잡기는 불가능한 일이고........
... 어쨌든 그래서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에 대해 너무 이상한 믿음을 가진 거 아니에요? 다윗과 골리앗의 싸움이 유명한 이유는 그게 천지창조 이래 한번 일어난 일이라서 그런 거라고는 생각 안 해요?   ...
그렇다면 당신은 무진시민 모두와 싸워야 할 거요. 사방에서 거짓말을 하면서 서로서로를 눈감아주고 있어요. 시의원과 건설업자의 처남이, 운전면허시험장 직원과 병원장 사모님이, 룸쌀롱 마담과 경찰서장이, 밤무대 무명 가수와 외로운 사모님이, 유부녀와 목사가, 교수와 교재 출판업자가, 시교육청과 입시학원 원장이 서로를 봐준다며 눈을 감고 거짓말을 해대죠. 그들이 원하는 것은 정직도 정의도 아무 것도 아니에요. 어쩌면 그들은 더 많은 재물은 가끔 포기할 수 있어요. 그들이 진정 원하는 것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 거예요. 한번만 눈감아주면 다들 행복한데, 한두 명만 양보하면-그들은 이걸 양보라고 부르죠-세상이 다 조용한데, 그런데 당신은 지금 그들을 흔들고 있어요. 그들이 가장 싫어하는 변화를 하자고 덤빈단 말이지요.    pp. 253-255

세상 같은 거 바꾸고 싶은 마음, 아버지 돌아가시면서 다 접었어요. 난 그들이 나를 바꾸지 못하게 하려고 싸우는 거예요   p. 257

가끔 그런 일이 있다. 해일이 바다 밑바닥을 뒤집어놓듯이. 존재 자체를 뒤집어내는 그런 일. 잊은 줄만 알았던 과거가 혼령처럼 불려나와 아무리 술을 마시고 취해 엎어져 있어도, 마음속에서 누군가가 집요한 질문을 던진다. 지나온 자리마다 붉은 상처가 선연하고 돌보지 않은 상처들은 이제 악취를 풍기고 있다.  p. 258

알면서도 매번 스스로 속는 것이 인생일까. 언제나 공포는 상상할 때 더 크다는 것을 말이다.   p. 269
 
홀로는 쓸쓸하고 더불어 있어도 외로운 사람들, 군중. 그래서 끝끝내 홀로이지도 더불어 함께이지도 못할 사람들.    p. 2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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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11월 3주

찬바람이 불면...  

불쑥 더 외롭고, 그보다 더 큰 문제는 또 한 살 나이가 든다는 것. 

사실 나 하나만 생각하면 그리 많은 나이도 아니건만, 퇴직 앞둔 부모님을 떠올리면 

어서 결혼해서 떡두꺼비 같은 손주 쑴풍 낳아 안겨드리는 것이 효도이련만... 

결혼은 커녕 연애도 못하는 딸에, 결혼하고 임신만 하면 필시 '노산' 산모가 될 딸래미 걱정하시는 부모님 마음 모르는 바 아니건만 

그러실수록 나는 더 우울해지고 도망가고 싶고... 그럴 땐 그저 웃어야지요. 

    

자수성가해 어려움을 아는, 혹은 가진 자리에서 출발해 '가지지 못함'을 상상조차 할 수 없어 더욱 많이 갖고 움켜쥐려고만 하는 정치인들 말고, 이런 정치인들이 있다는 상상만으로도 즐거울 게다.  

로또를 사는 대통령이라니, 당선 돼 놓고 아까워하는 대통령이라니 그 소시민적 모습만으로도 충분하다. 장동건 같은 외모, 뭘 더 바랄까? 여성대통령, 정치에 성별이 중요한 건 아니지만 나오는 것만으로도 진일보라고 생각한다.  

게다가 장진 아니던가.  

장외 웃음 하나 더. 이 영화, 조선일보 쪽 펀드의 투자를 받았다고 한다. 역시 장진은 대단하다.

 

   

호불호가 극명하게 갈리는 영화다. 모든 짐작할 수 있는 것, 설마 이러겠어 했던 것들 다 나온단다. 혼자 보면 돈 아깝지만 서넛이 몰려가 코멘터리 날리며 보다 보면 원없이 웃을 수 있단다.  

 그냥 영화보다도, 영화를 빙자해 그간 소원했던 지인들과 만담 혹은 농담을 주거니 받거니 목적없이도 즐거운 그런 시간을 갖고 싶은 게지.

 그간 소원했던 것이 마음마저 소원했던 탓은 아니니, 아니 또 그럼 어떠랴. 소득도 없는 수다와 농담, 그리고 웃음이면 그 모든 것 다 풀려버리지 않나?  

이래서 연말엔 수다와 농담이 필요하다. 뿌듯한 한 해를 반추하지는 못할 지언정, 최소한 웃으며 마무리할 수는 있을 테니까.

 

  

위의 두 영화와 나란히 놓기 미안한 영화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이 영화가 참 웃겼다. 나와 그녀는 시종일관 키득대며 웃었다. 최근 봤던 스페인 영화(<너의 한마디>, 유럽영화제 개봉작)과는 달리 비주얼도 대사도 훌륭했다. 특히 백미는 마테오로 돌아가기 전의 해리가 디에고의 조수를 자처하며 둘이 판타지 섹시 무비를 구상할 때다. 그런 시나리오가 영화화된다면 나는 꼭!! 볼 테다.  

비주얼! 본 영화에 비하면 저 강렬한 포스터는 새 발의 피의 적혈구 하나만큼도 안 된다.   

특히 영화 속 영화 <여인과 가방들>의 세트와 극중 상황은 최고다. 토마토 하나, 토마토 껍질 위 물방울 한 방울, 도마와 칼 조차 모두 인화 표구해 벽에 걸어두고 싶을만큼 훌륭했다. 만져질 듯 선명했고, 전작보다 훨씬 명료했다. 대사들도 마찬가지. 거장은 역시 한 가지만 잘 하는 게 아니다. 마지막 대사. 거장은 배우의 입을 빌어 이렇게 말한다. "완성한다는 게 중요한 거야"  

<그녀에게>와 <브로큰 임브레이스> 사이,  <나쁜 교육>을 꼭 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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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 개의 찬란한 태양
할레드 호세이니 지음, 왕은철 옮김 / 현대문학 / 2007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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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피엔딩, 부르카를 입은 어미들의 방식

 

 

  누구나 해피엔딩을 기대하지만 사람들의 해피엔딩은 저마다 다르다. ‘왕자님과 공주님은 그 후로도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답니다.’라는 식의 엔딩은 현실에서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잘 알면서도 마리암과 라일라가 도망치려 했을 때, 그들이 무사히 아프가니스탄을 벗어나기를 얼마나 바랐는지 모른다. 고국을 등지고 난민이 된다고 해서 모진 삶에서 벗어난다는 보장도 없는데, 난민의 설움과 고국을 향한 그리움, 뿌리 내리지 못하고 끝끝내 부평초처럼 떠돌 삶 역시 맵고 쓰기는 마찬가지일텐데 ‘그 후로도’의 이야기는 그냥 모른 척 하고 싶었다. 다만 지금껏 말없이 수긍해야 했던 폭력과 불합리한 삶에서 무사하게 벗어나기만을 바랐다. 늘어지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잔잔하게 진행되는 이야기 속 그녀들의 삶이 문체와는 달리 너무도 신산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피와 뼈를 만들어 준 어미의 사랑을 따순 손길로 느끼지 못한 그녀들이 어미로서 자식들 앞에서 당당하고, 자식들에게 웃을 수 있는 삶을 주고자 용기를 냈을 때 가슴을 졸일 수밖에 없었다. 라일라가 한참을 고른 끝에 마침내 말을 건 한 사내를 선하디 선한 인상으로 그리는 동안 심장은 제멋대로 뛰었다. 마침내 버스 앞까지 당도한 그네들. 이제 버스에 타기만 하면 된다. 부르릉, 시동이 걸리고 출발하기만 하면 눈으로 읽는 것조차 맘 편하지 않았던 고단한 삶은 끝나는 것이었다. 적어도 아프가니스탄에서의 고단한 삶은. 책의 두께로 보아 아직 남아있는 이야기가 한참 더 많으니 아마도 탈출에 실패하겠지만, 그럴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드는 것조차 경계하며 숨을 들이켰다. 하지만 그녀들이 믿었던 사내는 뼛속까지도 아프가니스탄 남성이었던 건지, 남달리 준법정신이 투철했던 건지 그녀들의 돈만 챙긴 채 마리암 일행을 경찰에 넘긴다. 그때의 배신감이란…. 사내가 아니라 작가에 대한 배신감이었다. ‘뭔 이야기가 이래? 책값이 아깝다.’라고 말하는 한이 있더라도 당의정처럼 달콤하고 매끈한 결말이길 바랐다. 본문을 읽기 전 뒷표지의 추천사를 먼저 읽었으니까, 히드로 공항에서 손등으로 눈물을 훔치며 책장을 넘겼다는 이진숙 기자의 글을 이미 읽었으니까 그런 결말일리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내심 나른하리만치 편안한 엔딩이길 바라고 또 바랐다. 그게 외롭게, 아프게, 서럽게 버티며 살아 온 마리암과 라일라에 대한 예의일 것만 같았다.

  늘 그렇지만 바람은 바람일 뿐이었다. 그녀들은 결국 돌아와 라시드에게 또 다시 흠씬 두들겨 맞은 뒤 여인도 아내도 아닌 삶을 살아갔다. 때로 하녀처럼 때로 창녀처럼, 하루에 절반쯤은 마음에 없는 일을 하며 보냈을 그녀들은 말로에 달콤한 보상은 없었다. 남편을 죽인 마리암은 살인자의 이름으로 사형을 당해야 했고, 라일라는 이제 막 하라미(사생아)에서 벗어난 딸과 낯선 사내의 품에서 하라미로 자라야 할 아들을 데리고 아프가니스탄을 떠나야 했다. 그러나 그들의 진짜 이야기는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보상이 없다고 여겼던 것은 유쾌하지 않은 그들의 삶을 들여다보는 것이 결코 유쾌하지 않았던 한 독자의 성급한 바람이었던 모양이다.

  ‘월하향’이라는 어여쁜 이름을 가졌지만 결코 향기로웠다 할 수 없는 마리암의 삶은 감옥에 들어간 후 그 진가를 발휘한다. 살인자, 더욱이 남편을 죽였으니 여인이라는 이유만으로 푸대자루같은 부르카를 뒤집어쓰는 등 온갖 부당감을 감수하는 것이 합법적인 아프가니스탄 여인으로서는 대역죄를 지은 셈이다. 게다가 아들처럼, 손자처럼 아꼈던 잘마이의 아비를 빼앗은 셈이니 이쯤이면 패륜도 정말 악질의 패륜을 저지른 것 아니던가. 살려두어도 잘마이에게 아비를 빼앗았다는 것만으로 평생 스스로를 벌하며 살 마리암이지만 국가는 ‘적법하지 않게 시작된 삶에’ 제대로 법을 적용한다. 곧 사형에 처해 질 마리암은 여성 죄수들만 모인 감옥에서는 영웅이었다. 음식조차 제공되지 않는 감옥, 스스로 면회를 사절한 마리암은 굶는 것이 마땅했지만 수많은 죄수들은 앞 다투어 그녀에게 음식을 바쳤다. 누가 시키지 않아도 그녀를 따르고, 자진해서 그녀에게 음식을 주었다. 나누어 준 것이 아니라 기꺼이 헌납하는 듯한 분위기였다. 감옥 안을 천지(天地)로 알고 웃음을 뿌리며 자라나는 아이들을 감옥 안에서 낳고 기르며 생을 이어가야 하는 한 많은 여인들에게 감히 남편의 부당한 폭력에 맞선 마리암은 영웅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후처를 딸처럼 귀하게 여기고 서로 아껴준 것도 부족해 후처와 그녀의 아이들을 도망시키기까지 하지 않았는가. 누구도 반기지 않았던 하라미로 태어나 하찮은 목숨을 부지하다 자녀에게는 평생 ‘친구이자 벗이자 보호자’가 될 어머니가 되어 세상을 떠난 마리암은 어머니의 지위에 걸맞는 모습으로 죽는다. 이름만큼이나 대단한 향을 카불에 남기고 떠난 셈이다. 원한 것도 아니고, 선택한 것도 아닌데 단지 여성으로 태어났다는 이유만으로 차별이 합법이 되는 아프가니스탄에서 마리암이라는 이름은 기실 사치였는지도 모른다. 우리 할머니들에게 귀분(貴芬)이나 지덕(智德)이니 하는 이름이 삶과 아주 멀었던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마리암은 떠난 후에야 비로소 짙은 향기를 내뿜는 꽃이었다. 아버지 잘릴로부터, 라일라로부터 떠나는 순간부터. 단 한사람, 어머니 나나를 제외한다면 말이다.

  마리암으로부터 버림받았다며 목을 멘 나나의 절망은 마리암을 거쳐 라일라와 그녀의 아이들을 통해 생의 보람으로 환생한다. 유일한 핏줄이자 가족인 딸에게 “등신 같은 하라미 년아.”라며 모욕을 주기 일쑤였던 나나는 사실 모진 어미는 아니었는지도 모른다. 늘 이용당했고, 버려졌다며 한을 품고 살던 나나에게 삶에 한껏 희망을 품고 있는 딸 마리암은 존재 자체로 버겁고 안쓰러웠을 것이다. 그 희망이 유일한 생의 이유인 마리암을 자신으로부터 떼어낼 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두려워 외로움으로 나부끼는 딸의 마음을 한 번도 다독여주지 못했을 것이다. 딸에게 모욕과 회한과 미안함으로 남은 나나의 절망은 마리암을 거쳐 라일라에게 전해지며 다시금 희망으로 바뀐다. 라일라가 마리암을 보호하기 위해 라시드의 매질을 마리암 대신 몸으로 받은 후부터, 어색한 대화의 물꼬가 오후의 즐거운 티타임으로 이어지면서부터 ‘함께’ 한다는 것이 피를 타고 흐른 ‘절망’을 몰아낸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충분한 사랑을 받았던 라일라의 경험 때문이었으리라. 아비로부터, 친구이자 연인이었던 타리크로부터 한껏 사랑받으며 자란 라일라의 진심이 잠재됐던 마리암의 속내를 건드린 것이다. 자신이 아비에게 버림받은 하라미라는 것을 확인하게 만들었던 어린 날의 들뜬 희망이 아니라 사랑받고, 사랑하고, 가족의 이름으로 서로를 보호할 수 있다는 진실된 희망을 부추긴 것이다.

  물론 충분히 사랑받았던 라일라의 경험을 되살린 것은 마리암이었다. 폭격이 끊이지 않는 도시 카불을 떠나 드디어 연인 타리크가 있는 곳으로 갈 수 있다는 기쁨이 사지가 찢기고 부모네마저 잃은 절망으로 바뀐 순간, 그 순간에도 생의 끈을 놓치지 않은 미약한 생명을 위해 거짓으로 결혼을 받아들여야 했던 서글픔, 그렇게 한 여자를 아내의 자리에서 하녀의 위치로 끌어내려야 했던 미안함으로 가득했던 라일라는 마리암의 투박한 보호에서 믿음을 보았고, 그 믿음이 희망을 잉태한 것이었다. 그렇게 태어난 희망은 마지자와 잘마이와 함께 자라고, 성장하며 완전한 가족을 지향한다. 중요한 것은 “생명”이라는 것일 뿐, 자신(마리암)이 혹은 자신의 아이(마지자)가 하라미라는 것은 사실상 이 어미들에게는 의미가 없다. 남들의 시선은 다만 시선일 뿐었다. 게다가 그녀들은 타인의 시선으로부터 완전히 차단된 부르카로 온 몸을 감싸고 있지 않은가. 물론 그녀들의 시선도 제한되기는 하지만.

  어떤 어미는 절망으로 아이를 버리지만(마리암의 어미 나나, 라일라의 어미 파리바, 라일라조차 한때) 어떤 어미는 절망 속에서 자랄 아이들에게 희망을 불어 넣는다. 자신을 외면했던 어미의 절망 깊은 곳에는 사랑이 전제됐었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다. 다만 그 어미들은 스스로를 믿을 수 없어 그리했던 것뿐. 그래서 그녀들은 모성마저 꺾어버렸던 모진 삶, 그조차 넘어서 다시 희망을 품었던 모양이다.

하지만 그들이 꾸린 가정은 어미들의 사랑은 차고 넘치지만 아비가 없는 가족이었다. 잘마이에게는 부족함이 없었지만, 마지자에게도 아마 크게 나쁘지는 않았겠지만 마리암과 라일라는 ‘아이들에게 온화하고 자상한 아버지가 있었으면’ 하고 바랐는지도 모를 일이다. 어린 날 마리암이 목요일마다 기다렸던 잘릴처럼, 어린 날 라일라의 교육에 유난히 신경을 쓰던 바비처럼. 마리암의 희생을 딛고 라일라는 온전한, 완전한 가정 꾸리기를 시도한다. 물론 쉽지는 않았지만, 잘마이가 타리크를 아빠로 받아들이면서 그들은 그 누구도 하라미가 아닌 완전한 가정을 갖게 된다.

  흔히 사랑을 이야기할 때 각자를 반쪽짜리에 비유한다. 반쪽뿐인 스스로의 불완전함을 보완하기 위해 자신을 완전하게 해 줄 반쪽을 찾는 과정에 사랑을 빗대곤 한다. 하지만 정작 중요한 것은 찾는 것이 아니라 받아들이는 것이다. 완전한 반쪽은 나와 아귀가 딱 맞아야하는데, 그러려면 내가 움푹 패인 곳은 뾰족하게 튀어나와야 하고 내가 튀어나온 곳은 패여야 한다. 그런 반쪽들이 하나가 되려면 어지간히도 아플 것이다. 서로 다른 상대의 모습을 받아들인 채 아귀가 맞도록 끼워 맞춰야 하니 말이다. 받아들이는 그 과정이 쉬울 리 없다. 어색하고 불편하고 알면서도 아프게 했던 마리암과 라일라 사이도, 잘마이와 타리크 사이도 완전한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기 위한 진통이었던 셈이다. 그렇게 서로를 받아들이며 그들은 완전한 가족이 될 수 있었다.

  완전한 사랑 혹은 완전한 가족이라는 데 핏줄은 의미 없었다. 우리네나 그네들이나 핏줄을 중시하기는 마찬가진데, 그 기준으로 보자면 그네들이 꾸린 가정은 콩가루 집안과 다를 바 없었다. 남편의 후처를 딸이라 부르는 마리암, 혐오하는 남편의 씨앗인 아이를 사랑할 수 없을까봐 낙태할 맘을 품었던 어미 라일라, 라일라가 몰래 품고 온 다른 사내의 아이인 마지자, 라일라가 한때 낳고 싶지 않아했던 아이인 잘마이, 아내들에게는 노동이든 성이든 착취만 해대는 남편 라시드. 혹은, 라일라과 타리크의 핏줄이지만 라시드의 딸로 자란 아지자, 라시드를 쏙 빼닮고 유난히 그를 따랐던 아들 잘마이, 그리고 라일라를 엄마라고 부르는 수많은 고아원 아이들. 라일라와 타리크의 온전한 핏줄은 이제 막 라일라의 뱃속에서 태동을 하는 작은 핏덩이 하나일 뿐이다. 하지만 마리암과 라일라가, 라일라와 타리크가 이룬 가정은 어느 가정보다 완전하고 견고하며 크다. 자신이 낳은 아이들과, 아마도 마음으로 낳았을 아이들(고아)을 보살피는 ‘엄마’ 라일라와 그녀를 엄마라고 부르는 수많은 아이들, 그런 라일라의 엄마로 남은 마리암, 아이들이 머물 든든한 울타리를 만들어주기 위해 열심히 일해서 돈을 대는 아빠 타리크. 카불이 빛나는 도시라면 그것은 마음과 마음으로 이어져 새롭지만 완전한 형태의 가족이 되고 가정을 이룰 수 있었던 그들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오랜 전쟁과 빗발치던 폭격으로 찬란했던 유물은 파괴되고, 폭력과 앙금으로 뒤덮인 채 폐허가 된 도시 카불에서 완전한 가족이 뿌린 희망의 씨앗은 매일매일 천개의 찬란한 태양으로 떠오른다. 그러므로 이 소설은 해피엔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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